우련한 그리움도 매개에 의해 뚜렷해 질 때가 있다. 그 매개가 우리의 삶과 이웃한 것이라면 더욱 선명해진다. 지난 일을 돌이킴에 대중가요만한 매개도 찾기 힘들다. 삶의 희로애락을 노소빈천 없이 녹여주기 때문이다.

나에게도 「금박댕기」란 남다른 곡조가 있다. 돌아가신 어머니가 자주 부르던 노래다. 그 노래만 들으면 어머니 생각이 난다. 또 어머니를 기억할 때면 우선하여 떠오르는 것이 그 노래다. 더욱이 ‘목동이 부러 주는 피리 소리는/청춘을 적어 보는 일기책이다/수양버들 휘늘어진 맑은 우물에/두레박 끈을 풀어 별을 건지자’ 라는 3절 가사는, 그 어느 유명 시인의 시구(詩句)보다도 내 마음에 맴돈다.

이 노래를 듣고 부르며 어머니를 늘 만났다. 묘소를 찾거나 기일(忌日)이 아니더라도, 계절과 주야를 아랑곳 않고 어머니를 만나게 한 매개가 「금박댕기」다. 하여 이 노래는 나의 추억 여행에 가장 친근한 매개다.

해방 이후 우리 사회는 희망만큼이나 굴곡이 심했다. 분단의 아픔과 좌우의 갈등, 통일에 대한 상념이 아우라지 물길처럼 뒤섞인 공간이었다. 우리의 사유(思惟)가 파고드는 곳이라면 어느 곳, 어느 분야건 그 소용돌이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대중가요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나는 가끔 우리의 대중가요 속에서 현대사의 아픔을 곱씹는다. 그 골곡의 가요사(歌謠史) 속에 떠오르는 인물이 김건(金健, 1912-?)이다. 본명은 김창기(金昌基)로, 해방 이후 김초향(金草鄕)이란 예명으로 노래 가사를 쓰기도 했다.

그는 일본으로 건너가 연극을 공부하고 귀국 후 여러 편의 대본을 집필한다. 때로는 배우로도 활동하며 「국기 아래서 나는 죽으리」(1939년 개봉)라는 영화에 출연해 주인공 이원하의 역을 맡기도 했다. 이 영화는 노골적 친일영화다. 「국기 아래서 나는 죽으리(國旗の下に我死なん)」는, 말 그대로 ‘일장기 아래 목숨 바치겠다’는 의미다. 중일전쟁 당시 전쟁 분위기를 조성하고 근로와 저축으로 국가(일본제국)에 충성을 다할 것을 선전하는 내용이다.

이후에도 김건은 '신체제에 부응한 일제의 문화정책 수행'을 적극 주장하는가 하면, 조선연극문화협회 성지참배단(聖地參拜團)의 일원으로 일본을 방문하기도 했다. 또한 1943년 10월에 개최된 제2회 연극경연대회에서는 「신곡제(新穀祭)」라는 출품작을 통해 식량 증산과 공군 지원병을 적극 선전하기도 한다. 그 행적으로 2009년 친일인명사전에 올랐다.

헷갈리는 것은 해방 이후 그의 행보다. 좌익 계열의 조선연극동맹을 거점으로 「꽃과 3·1운동」, 「눈물의 38선」, 「한강물은 흐른다」 등을 발표하며 시대의 굴곡을 고발하는데 앞장섰다. 1948년 1월에는 한독당 상무위원으로 피선되어 정치적 이력도 드러낸다.

김초향이라는 예명으로 발표한 5편의 노랫말은 더욱 주목을 끈다. 「해 같은 내 마음」, 「흘겨본 삼팔선」, 「여수야화」, 「망향의 사나이」, 「달도 하나 해도 하나」라는 노래 가사다. 하나 같이 시대의 아픔을 담은 내용이다. 1949년 가수 남인수가 발표한 음반에 모두 실려 전한다.

「해 같은 내 마음」은 독립군의 의기를 다진 노래다. 1940년대 만주 독립군들의 애환과 그들의 비장함이 노랫말 속에 담겨 있다. 그 3절 가사에 ‘내 나라를 위하고 내 동포를 위해서 가는 앞길에…(중략)…뜨거운 젊은 피를 태양에 힘껏 뿌려서 한 백년 빛내 보리라’는 다짐에서 확인된다. 본디 남인수가 불렀으나, 김건이 6·25 당시 납북되자 극작가 유호가 개사하여 1987년 조용필이 「사나이 결심」로도 리메이크해 부르기도 했다.

「흘겨본 삼팔선」은 ‘이북도 우리나라요 이남도 내 땅인데/파수(把守)란 웬 말이냐 꼴을 베는 아해야’라는 가사에서 보듯, 분단을 꼬집은 내용이다. 또한 좌익 계열 시민들의 봉기와 연관된 여·순사건을 다룬 노랫말도 있다. 「여수야화」가 그것이다. 그 3절 가사에 ‘왜놈이 물러갈 땐 조용하드니/오늘에 식구끼리 싸움은 왜 하나요/의견이 안 맞으면 따지고 살지/우리 집 태운 사람 얼굴 좀 보자’는 탄식이 마음 아프다.

망국의 시대, 상해 등으로 떠돌던 사나이가 해방 조국을 바라보며 탄식과 의기를 다지는 노래가 「망향의 사나이」다. ‘아! 그러나 고향집 삼천리 눈물 젖어 맺혀 있네/남북으로 서로 갈려진 우리 부모형제/그렇다 모든 것은 우리의 조국/청춘아 일어나거라 부디 싸워 나가자/나도 썩은 피나마 조국을 위해서 뿌려 보리라.’ 그 노래 2절과 3절 사이에 끼인 육성대사(肉聲臺詞) 내용이다. 분단의 한탄과 통일의 결기가 강하게 묻어난다.

김건이 그 해결책인 양 작사한 노랫말도 있다. 「달도 하나 해도 하나」다. 남인수의 음성으로 가끔씩 흘러나오는 그 노래의 1절 가사를 보자.

달도 하나 해도 하나 사랑도 하나
이 나라에 바친 마음 그도 하나이련만
하물며 조국이야 둘이 있을까보냐
모두야 우리들은 단군의 자손

그렇다. 둘이면 통일이 아니다. 하나면 분단이 없다. 조국은 둘이 될 수 없으며 그것은 우리의 사랑과 마음의 의지와 맞닿는다. 그 의지의 접착제가 단군이다. ‘우리는 한 핏줄 단군의 자손’이라는 구호가 정답이다. 몰론 그것은 생물학적 외침이 아니다. 긴 역사를 공유해 온 집단구성원들의 인식(perception) 또는 관념(idea)의 응집으로, 역사가 우리에게 준 축복이다.

다시 헷갈린다. 친일의 행적 속에 이름을 올린 김건이다. 해방 후 시대적 아픔을 남달리 고민했던 인물도 김건이다. 그것이 진정한 회개인지 변신인지는 알 길이 없다. 그가 남긴 자열서(自列書)나 반성문도 찾을 수 없다.

세상이 요동치면 인간성도 뒤죽박죽이 된다. 정의고 나발이고 가늠하기 힘들뿐더러, 애국과 매국의 경계 역시 분별하기 힘들다. 그저 허언과 식언, 변명과 강변(强辯) 이외에는 회자되는 말들도 거의 없다. 말 그대로 회색지대의 현상이다.

망국과 복국(復國)을 경험한 우리 과거사야말로 그러한 인식의 혼돈이 뚜렷이 교차하는 경계구역이다. 엊그제까지의 연민했던 인물이 어느 날 갑자기 증오의 대상으로 낙인 되는 경우가 있다. 벌써 죽어야할 사람이 어느 날 애국자로 되살아남도 종종 겪는 일이다.

믿었던 인간이 등을 돌리면 마음이 쓰리다. 믿고 싶은 인간이 위선의 가면으로 감춰져 있다면 더욱 분통이 터질 것이다. 범인(凡人)의 개과천선은 군자의 위선과 변절보다 천만 배 값지다. 6·25 당시 납북된 김건의 행적은 알려지지 않았다. 부디 북에서라도 개과천선한 그의 행적이 남아있기를 바란다.   

 

김동환 국학연구소 연구위원

1957년 서울에서 출생했다.

대학에서 행정사를 전공하였고, 한신대학교 강사,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 겸임교수 등을 역임했으며, 현재 (사)국학연구소 연구원으로 재직 중이다.

주요저술로는 『단조사고』(편역, 2006), 『교계의 민족운동』(공저, 2008), 『한국혼』(편저, 2009), 『국학이란 무엇인가』(2011), 『실천적 민족주의 역사가 장도빈』(2013) 외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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