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영태 / 출판기획자 겸 역사교양서 저술가

 

올해 2020년은 광복(또는 해방) 75주년이자 6.25전쟁(한국전쟁) 발발 70주년이 되는 해이다. 우리에겐 해방이 곧 분단이었으니 분단 75주년이기도 하다. 왜 우리는 3/4세기 동안이나 분단된 상태로 살아야 했던가? 왜 우리는 해방과 함께 분단이라는 있을 수 없는 상황을 맞아야 했던가? 우리는 왜 해방 3년 만에 두 개의 정부가 수립되고 마침내 5년 만에 전쟁이라는 참화를 겪어야 했던가? 이러한 물음에 대한 답은 해방 전후사에 들어 있다. 해방 75주년, 한국전쟁 70주년의 해에 해방 전후 역사를 다시 돌아보는 이유다. 이 연재는 매주 월요일에 게재된다. / 필자 주

 

이승만의 조기 귀국을 도운 맥아더의 굿펠로우

해방 전 이승만의 국내 기반은 매우 취약했다. 1938년 이승만의 추종자였던 신흥우, 윤치영 등이 주도한 흥업구락부 사건이 드러나면서 이승만의 국내 조직 기반은 와해되었다. 1912년 조선을 떠난 후 국내에 돌아오지 않았던 이승만은 대중들에게는 잊힌 존재였다. 그가 일제 말기 지식인을 중심으로 좌파인물들에게까지 알려지게 된 것은 1940년대의 단파 방송 사건이었다. 이승만은 미국이 일본과 전쟁을 시작하자 과거 소극적이었던 반일 활동을 전환했고, 미국과의 협력관계를 통해 조선인들을 대일전에 동원하기 위한 방안들을 찾았다. 이승만은 1930년대 중반 이후 관계가 끊어졌던 대한민국임시정부와의 관계를 회복하고 구미외교위원부 위원장으로 복귀하였으며, 미국이 개국한 <미국의 소리>(VOA: Voice of America)에 출연해 반일 활동에 나설 것을 촉구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1942년 경성방송국에 근무하던 한국인 직원들을 통해서 미국의 소리 방송 내용이 국내의 지식인들에게 알려졌고, 이 과정에서 여운형, 허헌 등의 좌파인사들에게도 그 내용이 전해지면서 이승만에 대한 기대가 부풀려졌다.(주1)

변은진의 연구에 의하면 일제 말기 국내 민족운동가 중 해방 후 가장 적합한 지도자로 지목된 것은 여운형이었고, 민중들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준 인물은 김일성이었다. 일제 말기 충칭의 임시정부는 지식인들에게나 알려졌을 뿐 민중들에게는 망명정객들의 활동 내용이 전달되지 않는 희미한 존재였고, 이승만은 기독교계를 중심으로 한 추종자를 제외하고 민중에게는 완전히 잊힌 존재였다.(주2) 그러나 단파방송 사건은 잊혔던 이승만이란 존재를 일깨우는 계기가 되었고, 나아가 해방 후 ‘이승만 신화’가 형성되는 배경이 되었다.(주3)

해방 후에는 인공이 이승만을 주석으로 추대함으로써 그 ‘신화’가 현실로 되게 하는데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그러나 이승만의 부상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일본 점령 미군 사령관이었던 맥아더와 하지의 미군정이었다. 맥아더와 그의 통제 아래 있던 하지는 이승만의 조기 귀국을 지원함으로써 이승만이 우익진영의 최고 지도자로 부각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주었다.

이승만은 태평양 전쟁 종전을 눈앞에 둔 8월 8일 백악관에 귀국 청원 편지를 낸 것을 시작으로 귀국 로비에 전력을 기울였다. 이승만이 귀국하기 위해서는 국무부 여권 발급, 군관할지역인 태평양 전구에 들어가기 위해 주한미군사령부와 그 상급조직인 태평양지구 미육군사령부 및 전쟁부의 허가, 군사지역 여행을 위해 군용 사용기 허가 등이 요구되었다. 이승만은 이를 위해 국무부와 전쟁부, 그리고 맥아더를 통해 로비 활동을 벌였다. 이승만은 8월에만 적어도 5차례 이상 전쟁부, 국무부, 백악관 등에 직접 요청을 했고, 굿펠로우(Preston M. Goodfellow) 등 자신과 친분이 있는 미국인을 동원한 간접 로비도 벌였다.(주4)

이승만의 귀국에 결정적인 도움을 준 것은 역시 맥아더였다. 이승만은 맥아더의 고문이자 필리핀의 실력자였던 로물로(Carlos P. Romulo)를 통해서 맥아더와 연결되었다. 프란체스카에 의하면 워싱턴에 살 때 이승만 일가는 로물로와 이웃에 살면서 매우 가깝게 지냈다고 하는데,(주5) 이승만은 이러한 간접적인 인연을 활용해 1945년 7월부터 여러 차례 맥아더에게 전문을 보내 반소‧반공적 입장을 강조하는 한편, 로물로와의 친분을 언급하며 조기 귀국을 청원했던 것이다.(주6)

경무대로 이승만을 방문해 기념 촬영한 굿펠로우. 이승만의 로비스트이자 정치고문이었던 굿펠로우는 ‘광산 스캔들’로 한국을 떠나야 했다.
경무대로 이승만을 방문해 기념 촬영한 굿펠로우. 이승만의 로비스트이자 정치고문이었던 굿펠로우는 ‘광산 스캔들’로 한국을 떠나야 했다.

 

이승만의 중요한 정치고문이자 로비스트였던 로버트 T. 올리버. 그는 이승만의 전기 을 집필하기도 했다.
이승만의 중요한 정치고문이자 로비스트였던 로버트 T. 올리버. 그는 이승만의 전기 을 집필하기도 했다.

1945년 7월 27일 맥아더에게 편지를 보냈다. 아시아 우선주의와 함께 대소봉쇄 정책을 신봉했던 맥아더는 7월 30일 이승만의 ‘숭고한 반소‧반공 정신’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며 답전을 보냈다. 이승만은 이후 8월 27일자와 9월 29일자 전문에서 더욱 강경하고 격렬한 반소 입장을 표명했다. 이승만은 8월 27일자 편지에서 자신의 확고한 반소‧반공 입장과 더불어 한반도에 대한 영향력을 과장하면서 조기 귀국을 청원했으며, 맥아더는 이승만의 철저한 반소‧반공 태도에 호응했다. 맥아더는 9월 29일경 국무부가 요청한 다른 재미 한인의 입국 신청은 허가하지 않으면서 이승만의 입국만 허가했다. 이에 대해 국무부는 이승만에 대한 미국의 지지라는 인상을 줄까 우려했다.(주7)

맥아더의 승인이 결정적이었지만 윌리암스(J. Jerome Williams)와 굿펠로우 등 이승만의 주요한 인맥들의 로비 또한 중요했다. 특히 OSS(전략사무국) 부국장이었던 굿펠로우는 이승만의 여권 발급이 늦어지자 국무부를 방문해 이승만이 다른 재미 한인들과 동격 취급을 받는 것에 항의하는 등 “국무부 관리들이 볼 때도 지나친 측면이 있을 정도로 열성적”으로 활동했다. 이승만 스스로도 자신의 귀국에 굿펠로우와 맥아더의 도움이 컸다고 말할 정도로 중요한 역할을 했다. 굿펠로우는 1941년 여름 정보참모부(G-2)에서 처음 만난 이래 이승만의 가장 중요한 정보원이자 정치고문으로 활동했으며, 1945년 12월 OSS 부책임자를 끝으로 대령으로 전역한 뒤 이승만의 추천으로 1946년 초 하지의 정치고문으로 남한에 부임했다. 굿펠로우는 이승만을 위해 민주의원 공작 등을 담당했으며 1946년 말까지 이승만이 미국의 여론 동향을 파악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굿펠로우는 1946년 5월 ‘광산 스캔들’(주8)로 미국에 송환되었으나 한국전쟁에 이르기까지 이승만의 중요한 로비스트 역할을 했다.(주9)

이승만‧맥아더‧하지의 동경 회합과 귀국 후 행보

이승만은 우여곡절 끝에 미 국무부와 합동참모본부의 승인을 얻었다. 10월 4일 오후 9시 워싱턴을 출발해 샌프란시스코로 갔고, 5일 샌프란시스코를 떠나 하와이로 갔다. 워싱턴에서 하와이까지는 민간 비행기를 이용했다. 하와이에 도착한 이승만은 군용기로 바꿔 타고 퀘젤린과 괌을 거쳐 10월 10일 일본 도쿄 인근 카나가와 현의 아스키 미군 비행장에 도착했다. 이승만은 10월 12일 오전 11시 도쿄에 들어가 10월 16일 오전까지 머물렀는데, 이때의 행적이 매우 중요하다.

이승만은 도쿄에서 맥아더와 하지, 그리고 동경주재 정치고문 애치슨(George Atcheson Jr.) 등과 긴밀한 회합을 가졌고, 이때 남한의 정치 현안과 관련하여 중요한 논의를 했기 때문이다. 이승만은 임시정부 미주위원회 위원장이라는 직함을 갖고 있었지만 미국은 임시정부를 인정하지 않고 임시정부 요인들도 모두 개인자격으로 귀국하도록 결정한 상태였다. 그런 상황에서 개인 이승만을 맥아더가 세 차례나 만나고 주한미군정 사령관 하지를 도쿄로 급히 불러들여 이승만과 만나 현안을 긴밀히 논의하게 했다는 것은 지극히 이례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주10)

맥아더와 이승만. 필리핀의 로물로를 통해 맥아더와 연결된 이승만은 해방 후 그의 도움으로 조기 귀국해 정국의 주도권을 쥘 수 있었다. 아시아 중시주의자였던 맥아더와 이승만은 강경한 반소‧반공정책에서 호흡이 잘 맞았다.
맥아더와 이승만. 필리핀의 로물로를 통해 맥아더와 연결된 이승만은 해방 후 그의 도움으로 조기 귀국해 정국의 주도권을 쥘 수 있었다. 아시아 중시주의자였던 맥아더와 이승만은 강경한 반소‧반공정책에서 호흡이 잘 맞았다.

이승만은 10월 13일과 14일, 15일 세 차례에 걸쳐 맥아더와 하지를 만났다.

하지는 맥아더의 호출에 따라 10월 12일 급히 도쿄로 날아가 맥아더와 함께 이승만을 만난 것이다. 그럼에도 하지는 이승만을 만난 사실을 숨겼고, 1945년 11월 2일 24군 참모회의에서 “이승만의 서울 도착에 깜짝 놀랐다”고 거짓말까지 했다. 도대체 하지는 도쿄에서 이승만을 만나 무슨 이야기를 주고받았기에 회동 사실까지 감추며 거짓말 쇼까지 했던 것일까?

이 문제에 대해 알아보기 위해 먼저 이승만이 도쿄에 머물 동안의 일정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10월 4일 이승만 워싱턴 출발, 샌프란시스코행
10월 5일 샌프란시스코 출발(하와이 도착, 군용기 환승, 퀴첼린 괌 경유)
10월 10일 이승만 카나가와현 아쓰키 비행장 도착
10월 12일 이승만 11시 도쿄 입성, 하지 도쿄행
10월 13일 하지-애치슨 회담, 이승만 맥아더 사령부 방문〈이승만-맥아더-하지 회담)
10월 14일 이승만-맥아더-하지 회담(혹은 애치슨 포함 4자 회담)
10월 15일 이승만-맥아더-하지 회담, 하지 귀경, 애치슨의 「전한국국민행정부」 계획안
10월 16일 이승만 김포비행장 도착, 하지의 「임시 한국정부」 수립 비망록, 베닝호프 미국행
(주11)

일정에서 알 수 있듯이 맥아더-하지-이승만의 3자 회동이 세 차례나 있었고, 그 중 적어도 한번은 맥아더의 정치고문 애치슨을 포함한 4자 회합이 있었다. 그렇다면 이처럼 당시 동아시아와 남한의 정세를 좌우할 수 있는 미국의 핵심인물들이 이승만과 만나서 무슨 논의를 했던 것일까?

이 회합과 관련한 회의록이나 정리된 기록은 존재하지 않아서 정확한 확인은 어려운 상태다. 하지는 이승만을 만나지 않았다고 거짓말을 했으나 이승만은 1945년 10월 21일 편지에서 “하지 장군이 나를 만나러 동경에 왔다”면서 “하지와 나는 우리가 서울에 도착한 후까지 나의 도착을 공표하지 않기로 합의했다”고 말해 만난 사실을 시인했다.

이들의 만남에 대해 브루스 커밍스는 “솔직히 말해서, 하지, 맥아더, 굿펠로우 및 이승만은 국무성의 정책에 반대하여 음모를 꾸민 것이었다”면서 “그들은 단순히 민족주의자나 봉쇄론자로서가 아니라 공산주의자와 거래하는데 있어서와 해방 혹은 수복에 있어서의 새 전략을 지니고 돌아온 것이었다”라고 했다.(주12) 정병준은 “커밍스의 주장처럼 이 회동에서는 하지·맥아더·이승만이 이미 확립된 국무부의 국제주의적 정책(신탁통치안)에 반하는 계획을 작성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라고 보았는데, 하지가 10월 13일 맥아더의 정치고문인 애치슨을 만났을 때 ‘전(全)한국국민집행부(National Korean People Executive)’ 혹은 ‘정무위원회(Governing Commitee)’같은 미군정 주도하에 이승만‧임정세력을 중심으로 하는 자문통치기구를 세울 구상을 논의했다는 것이다.(주13)

미군정의 임시정부 활용과 과도정부 구상

종전 전후 미국 루즈벨트 행정부의 한반도 정책은 신탁통치안이 기본이었다. 국무부를 중심으로 한 국제주의자들은 소련 등 국제연합 승전국들과 협조하여 한반도에서 신탁통치를 통해 통일적인 한국 정부를 수립한다는 계획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전쟁 종결을 앞둔 시기부터 군부를 중심으로 소련과의 협조에 회의적인 시각이 대두하기 시작했고, 이들은 전후 공격적인 대소봉쇄 및 반공 정책을 추진해야 한다는 입장을 나타냈다. 태평양지역 최고사령관으로 일본 점령군을 지휘하고 있던 맥아더와 남한 점령군 사령관이었던 하지는 이같은 반소‧반공 정책을 추진하는 군부의 입장을 대변하고 있었고, 미국의 공식입장인 대소협력을 통한 신탁통치안이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맥아더-하지-이승만이 도쿄에서 만나 미 국무성의 대소협력 노선인 신탁통치안을 무력화하기 위한 방안을 논의하였던 것이다.

남한 점령군 사령관 하지와 이승만(사진=국사편찬위원회). 맥아더의 호출에 따라 도쿄에서 이승만을 처음 만난 이래 하지는 이승만의 절대적인 지지자였고 후원자, 정치기반이었다. 1946년 말 미국 방문 때 이승만이 하지를 공산주의자로 몰아치는 배신행위를 감행하면서 두 사람은 결정적으로 관계가 악화되었다.
남한 점령군 사령관 하지와 이승만(사진=국사편찬위원회). 맥아더의 호출에 따라 도쿄에서 이승만을 처음 만난 이래 하지는 이승만의 절대적인 지지자였고 후원자, 정치기반이었다. 1946년 말 미국 방문 때 이승만이 하지를 공산주의자로 몰아치는 배신행위를 감행하면서 두 사람은 결정적으로 관계가 악화되었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주목할 것은 1945년 10월부터 일본의 맥아더 사령부와 미군정이 한국(남한) 정계를 통합하여 미군정 자문기관과 임시한국행정부 즉 과도정부를 수립하려고 했다는 점이다. 남한 점령군 사령관 하지는 9월 중순부터 좌익이 주도하는 남한 정세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정통성이 있다고 생각되는 이승만이나 김구‧김규식 등 임시정부 지도자를 활용할 필요가 있다고 보았다. 1945년 10월 중순 도쿄 회동에서 맥아더 사령관의 정치고문 애치슨은 하지 사령관의 생각을 지지하였고, 미군정은 이를 바탕으로 임시정부 요인들의 개별적 활용을 넘어서 보다 적극적인 조치를 구상하게 되었다. 그것은 맥아서 사령부와 미군정이 간헐적으로 제기하였던 남한의 정계통합을 통한 ‘자문기구’와 ‘과도정부’ 수립 계획이었다. 애치슨의 구상을 바탕으로 하지와 그의 정치고문 랭던은 더욱 발전된 경로를 제시하였는데, 1945년 11월 5일자 전문에서 “고문회의를 확대하여 통합고문회의(Coalition Advisory Council) 구성 → 군정 감독하에 고문회의 주도로 과도적 한국행정부(AIB Korean Administration) 설치 → 총선거로 국민정부(Popular Government) 수립”의 경로를 제시하였던 것이다.(주14)

하지, 맥아더, 이승만. 세 사람은 이승만이 귀국할 때 도쿄에서 만나 국무부의 대소협력을 바탕으로 한 ‘신탁통치안’을 대체할 방안을 논의하였다.
하지, 맥아더, 이승만. 세 사람은 이승만이 귀국할 때 도쿄에서 만나 국무부의 대소협력을 바탕으로 한 ‘신탁통치안’을 대체할 방안을 논의하였다.

그런데 미군정의 이 정책에 대한 해석을 두고는 연구자들 사이에 상당한 견해 차이를 보이고 있다. 커밍스는 맥아더 사령부와 미군정이 일찍부터 남한에 반소‧반공 장벽을 쌓으려 했고,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이용한 랭던(William R. Langdon)의 ‘정무위원회(Governing Commitee)’ 구상은 사실상 남한의 단독정부를 향한 단정안의 원형이라고 보았다. 서중석도 정무위원회 계획을 남한 단정 수립을 위한 것으로 파악했다. 도진순은 이러한 정책은 미국 주도의 남한 정계 개편과 과도정부 수립 방안으로 미소 합의를 완전히 배제한 것은 아니지만 기본적으로 미국 독자의 남한정부 수립 추진이었다고 보았다. 반면 박태균은 미군정의 ‘행정위원회’ 계획은 미군정의 자문위원회가 실패로 돌아가면서 좌익과 소련에 대항할 수 있는 정치세력을 육성, 우익 중심으로 남한 정계를 개현하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정용욱은 랭던의 정무위원회 구상이 국무부의 신탁통치안을 대체하기 위해 작성되었고, 남한 정계통합을 전제로 하여 한국정부를 대표할 정치집단을 구성하고 육성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했다. 그는 정무위원회 계획이 남한만을 확보하려는 소극적인 입장이 아니라 이북으로 권한을 확장하려는 공세적 시도였으며, 미국무성과 소련을 압박하는 저돌성을 갖고 있다고 보았다. 김지민은 정무위원회 구상이 반탁과 단정과 관련된 것이라기보다는 어떤 형태로든 한국정부 수립에 미국의 영향력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분석했다.(주15)

그런데 많은 연구자들이 미군정의 ‘과도정부’ 또는 ‘정무위원회’ 구상과 이승만이 귀국 후 추진한 정당통합운동의 관련성에 주목하였다.

이승만을 정치지도자로 부각시킨 요인들

해방 직전 이승만은 한국민들에게 잊혀진 존재였지만, 해방 직후 신화적 인물로 부상했다. 이승만이 부상하게 된 것은 자신의 노력이 컸지만, 맥아더와 하지의 미군정의 적극적인 후원과 신화화 작업이 큰 역할을 하였다. 맥아더는 하지를 도쿄로 불러 이승만과 만나게 했고, 하지에게 이승만을 조선의 ‘영웅’으로 환영하라고 권고했다. 이승만은 맥아더가 제공한 전용기 바탄(Bataan)호를 타고 귀국했으며 이승만과 모두 5차례 이상 회동하며 이승만의 권위를 높여주었다. 미군정 사령관 하지 또한 이승만을 정중히 대우했다. 하지는 자신이 숙소로 사용하고 있던 조선호텔의 침실‧개별식당‧회의실 등을 갖춘 스위트룸을 이승만에게 제공했다. 이승만에게 전속부관을 붙여주고 경호진까지 배치했다. 하지는 이승만의 귀국 다음날인 10월 17일 신문기자들을 배석시킨 가운데 이승만을 진정한 애국자로 묘사하며 찬사를 보냈다. 10월 20일에 개최된 연합군 환영회에서 하지는 이승만을 “조선 사람의 위대한 지도자”로 소개했다. 하지는 이승만을 열렬히 환영했으며 이후 이승만의 전면적인 정치적 지지 기반이 되었다. 이승만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1946년 5월 좌우합작 개시 이래 하지가 중도파를 지지하고 용공적인 정책을 구사하면서 이승만과 결별했다고 주장하지만 사실이 아니다. 하지가 이승만과 결별한 것은 1946년 말〜47년 초 이승만이 방미 과정에서 하지를 공산주의자로 몰아치며 공격했을 때였다. 그 이전까지 하지는 이승만의 절대적인 지지자이자 후원자 역할을 했다.(주16)

1945년 10월 20일 미군정청 앞에서 열린 ‘서울시민 연합군 환영대회’에서 이승만이 연설하고 있다. 남한 점령군 사령관 하지는 ‘이승만 신화’를 만드는데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1945년 10월 20일 미군정청 앞에서 열린 ‘서울시민 연합군 환영대회’에서 이승만이 연설하고 있다. 남한 점령군 사령관 하지는 ‘이승만 신화’를 만드는데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우익진영과 한국민주당의 강력한 지지와 추대도 이승만의 부상에서 중요했다. 이미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국내에는 흥업구락부를 비롯하여 기독교세력, 학교와 언론계 등에 이승만의 지지세력이 형성되어 있었다. 우익진영의 큰 지분을 차지하고 있던 동아일보계열도 이승만과 강력한 유대가 형성되어 있었다. 해방 후 동아일보계열의 핵심이었던 송진우는 반인공세력의 결집체였던 한민당을 결성, 주도하면서 좌우합작을 거부하고 임정 추대를 주장하였다. 그러나 송진우를 비롯한 한민당과 충칭 임시정부는 경험과 노선에서 차이가 분명했다. 귀국 후 이승만은 송진우와 협력관계를 구축하였고, 정세 판단과 향후 진로에서 많은 부분 일치하였다. 두사람은 ‘인공 타도’를 위해 임정 정통론을 적극 내세우되 임정이 귀국하여 정국이 정리되면 임정을 해체하고 새로이 독립정부를 수립해야 한다는 데 합의했다.(주17) 이승만과 송진우는 미군정이 후원한 독립촉성중앙협의회에 대해서도 이해관계가 합치해 정치적 운명을 함께 하게 되었다. 우익진영 인사로서 송진우와 더불어 중요한 역할을 했던 국민당 당수 안재홍 또한 이승만을 지지하였다. 해방 직후 우익진영은 조직적으로 충칭임시정부 추대를 내세웠지만 개인적으로는 이승만을 선호하고 있었다. 한민당을 비롯한 우익진영의 중요인물들은 대부분 일제시기부터 이승만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었다. 더욱이 이승만은 임시정부의 김구보다 40여일이나 앞서 귀국, 정계 구도를 재편하기 위한 시도를 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임정을 여기에 편입시키려 하였다.(주18)

김성수와 이승만. 이승만의 정치지도자 부상에는 한민당의 지원이 큰 역할을 했다.
김성수와 이승만. 이승만의 정치지도자 부상에는 한민당의 지원이 큰 역할을 했다.

마지막으로 ‘이승만 신화’에 불을 붙인 것은 좌익의 지지와 추대였다. 9월 6일 미군의 진주 소식에 접한 좌익세력은 인민공화국을 급조하고, 9월 14일에는 그 인공 내각을 조각하면서 주석으로 이승만을 주석으로 추대하였다. 인공의 추대는 이승만을 좌우익을 망라한 최고 지도자로 부각시켰고, 나아가 일반 국민들에게 이승만을 전국적 차원에서 ‘대통령’급 지도자로 인식하게 만드는 역할을 했다. 이승만은 귀국 후 인공과 대화를 하는 척하며 한동안 태도를 보류하다가 11월 7일에야 인공 주석 취임을 거부했는데 그 사이 자신이 국내외 정치지도자 중 최고라는 선전 효과를 충분이 거두었다. 특히 지방에서는 인민위원회가 1945년 말까지 행정 기능을 수행하며 정권 역할을 했는데 대중들은 자신들의 ‘공화국’이 수립되었다고 확신하였다. 인공이 이처럼 폭발적인 영향력을 발휘하고 상황에서 이승만을 정부 수반으로 추대한 것은 대중들에게 그의 권위를 절대적으로 높여주는 효과를 발휘했다.(주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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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1) 자세한 내용은 ‘임영태의 해방전후사 이야기(15)’ 통일뉴스 2020.8.10.

2) 변은진, 『파시즘적 근대체험과 조선민중의 현실인식』, 도서출판 선인, 2013, 453〜486쪽

3) 정병준, 『우남 이승만 연구』, 역사비평사, 2013, 399〜401쪽

4) 정병준, 위의 책, 428쪽

5) 중앙일보 1983.8.13.

6) 이상호, 이승만과 맥아더 그리고 대한민국 정부수립, 정신문화연구 31(3), 2008.9., 107〜108쪽

7) 정병준, 위의 책, 428〜430쪽

8) 1946년 3월 11일자 서울신문을 비롯한 국내 여러 신문에서 이승만이 사뮤엘 돌베어(Samuel H. Dolbear)라는 미국인을 한국의 광산 고문으로 임명하고, 한국 광업권에 대한 광범한 권리를 양여한다는 약속 하에 미화 100만 달러를 받기로 약속했다는 내용이 보도되었다. 이 일로 이승만은 3월 18일 민주의원 의장직에서 사퇴해야 했다. 이 스캔들의 주요 인물이었던 돌베어는 조선 최대의 금광인 운산금광을 경영하던 동양광업개발(OCMC)의 대리인으로 1939년 운산금광의 독점권이 만료되었을 때 채굴권을 일본광산회사에 매각하는 계약을 채결한 인물이었다. 매각 대금 817만 4000달러 중 227만 달러만 받은 상태에서 전쟁이 터져 590만 달러 넘게 미수금이 남게 된 것이다. 이 돈을 돌려받기 위해 이승만에게 접근한 돌베어는 ‘광산 고문’이란 명목으로 돈을 주고 광산 이권을 샀다는 것이다. 이 스캔들은 미주에서 이승만과 대립해온 한길수가 터트렸다.(정병준, 위의 책, 537〜543쪽; 김기협, “대한민국 ‘돈귀신의 아버지’ 이승만-해방일기 1946년 3월 15일”, 프레시안 2011.3.15.)

9) 정병준, 위의 책, 432쪽

10) 정병준, 위의 책, 441쪽; 도진순, 『한국민족주의와 남북관계』, 서울대출판부, 1997, 44〜45쪽

11) 정병준, 위의 책, 443〜444쪽

12) 브루스 커밍스/ 김자동 옮김, 『한국전쟁의 기원』, 일월서각, 1986, 249쪽

13) 정병준, 앞의 책, 444쪽

14) 정용욱, 1942〜47년 미국의 대한정책과 과도정부형태 구상, 서울대 박사학위논문, 1996, 73〜84쪽

15) 윤덕영, 주한 미군정의 초기 과도정부 구상과 송진우‧한국민주당의 대응, 한국사연구 154, 2011.9., 192〜193쪽; 브루스 커밍스/ 김자동 옮김, 『한국전쟁의 기원』, 일월서각, 1986, 238〜254쪽; 서중석,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해방 후 민족국가 건설운동과 통일전선-』, 역사비평사, 1991, 274〜275쪽; 도진순, 『한국민족주의와 남북관계』, 서울대출판부, 1997, 37〜51쪽; 박태균, 1945〜1946년 미군정의 정치세력 재편계획과 남한 정치구도의 변화, 한국사연구 74, 1991, 127〜134쪽; 정용욱, 『해방 전후 미국의 대한정책』, 서울대출판부, 2003, 137〜146쪽; 김지민, 해방 전후 랭던의 한국문제 인식과 미국의 정부수립정책, 한국사연구 119, 2002 참조.

16) 정병준, 위의 책, 456〜459쪽

17) 손세일, 『이승만과 김구』, 일조각, 1970, 201쪽

18) 정병준, 위의 책, 459〜463쪽

19) 정병준, 위의 책, 463〜466쪽

 

임영태 필자 약력

출판기획자, 저술가. 청년시절 민주화․사회운동에 관계했으며, 한국 근현대사와 세계사, 인문․사회 관련 대중서의 기획․집필에 힘쓰고 있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에서 공식 보고서 발간을 총괄했으며, 지금은 평화박물관의 ‘반헌법행위자 열전편찬위원회’ 조사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저서로는 『한국에서의 학살-한국현대사, 기억과의 투쟁』, 『새로 쓴 한국현대사-해방부터 촛불항쟁까지 35장면』(공저), 『솔직하고 발칙한 한국 현대사』(공저), 『스토리 세계사 1~10』, 『두 개의 한국 현대사』, 『산골대통령, 한국을 지배하다』, 『국민을 위한 권력은 없다』, 『대한민국사 1945~2008』, 『대한민국50년사』, 『북한50년사』, 『거꾸로 읽는 한국사』(공저), 『거꾸로 읽는 통일이야기』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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