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영태 / 출판기획자 겸 역사교양서 저술가

 

올해 2020년은 광복(또는 해방) 75주년이자 6.25전쟁(한국전쟁) 발발 70주년이 되는 해이다. 우리에겐 해방이 곧 분단이었으니 분단 75주년이기도 하다. 왜 우리는 3/4세기 동안이나 분단된 상태로 살아야 했던가? 왜 우리는 해방과 함께 분단이라는 있을 수 없는 상황을 맞아야 했던가? 우리는 왜 해방 3년 만에 두 개의 정부가 수립되고 마침내 5년 만에 전쟁이라는 참화를 겪어야 했던가? 이러한 물음에 대한 답은 해방 전후사에 들어 있다. 해방 75주년, 한국전쟁 70주년의 해에 해방 전후 역사를 다시 돌아보는 이유다. 이 연재는 매주 월요일에 게재된다. / 필자 주


조선공산당의 정치노선 ‘8월테제’ 발표

박헌영 중심의 조선공산당 재건위원회는 급조된 장안파공산당을 사실상 와해시키고 자파중심의 당조직을 재건하였다. 박헌영이 이끄는 재건파그룹은 전국적 범위에서 공산주의운동 전체의 대표성을 획득하지는 못했지만, 조직적 역량, 비전향과 투쟁경력, 8월테제라는 운동방침의 제시, 박헌영의 권위 등 여러 면에서 다른 그룹에 비해 강점을 갖고 있었다.(주1) 이런 강점을 바탕으로 해방 후 조선공산당 재건 과정에서 주도권을 확보, 공산당 중앙과 상당지역을 장악하였다. 박헌영은 조선공산당의 재건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혁명론과 정치노선을 제시하였는데 바로 ‘8월테제’이다.

조선공산당의 재건 소식을 알리는 해방일보
조선공산당의 재건 소식을 알리는 해방일보

8월테제는 8월 20일 조선공산당 재건준비위원회(조공재건위)를 출범시키면서 ‘잠정적 정치노선’(「일반 정치노선에 대한 결정」)으로 처음 발표되었고, 이후 수정과 보완을 거쳐 9월 25일 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 명의의 ‘정치노선에 대한 결정’(「현정세와 우리의 임무」)으로 공식 채택되었다. ‘8월테제’는 8월 19일 박헌영이 작성해 8월 20일 처음 발표되고, 9월 25일 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 결정으로 채택되었으며 9월 28일 발표(인쇄)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따라서 우리가 일반적으로 접하는 8월테제로 알려진 「현정세와 우리의 임무」는 엄밀하게 말하면 ‘9월테제’인 셈이다. 8월 19일 박헌영에 의해 작성되어 8월 20일 조공재건위의 잠정적 정치노선으로 채택되는 과정에서 토론과 수정이 있었을 것이고, 이후 당의 재건을 둘러싸고 많은 일들이 벌어졌으며 국내외 정세가 요동치면서 그러한 정치적 상황 변화를 반영하여 일부 내용이 수정, 보완되어 9월 25일 조공중앙위원회의 공식문건으로 채택되었던 것이다. 8월 20일에 발표된 문건과 9월 25일의 문건 사이에는 국제정세인식(특히 미국에 대한 인식), 토지개혁(토지 국유화), 민족부르주아지에 대한 비판(특히 김성수) 강도, 장안파에 대한 비판 등에서 차이를 보이고 있다고 한다.(주2)

「현정세와 우리의 임무」-8월테제(1945.9.25.,, 조선공산당중앙위원회)
「현정세와 우리의 임무」-8월테제(1945.9.25.,, 조선공산당중앙위원회)

조선공산당의 정치노선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8월테제’를 살펴보아야 한다. ‘8월테제’는 8월 20일 처음 발표되고 9월 25일 중앙위원회 명의로 채택, 발표되기까지 일정한 수정과 보완을 거쳤다. 해방 후 하루가 다르게 바뀌는 정세 변화에 박헌영의 공산당이 어떻게 대응, 반응하였는지 살펴볼 수 있다는 점에서 첫 발표 문건과 중앙위원회의 문건 차이점을 살펴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특히 국제정세 부분이 8월 20일 문건에서는 소련 중심으로 작성되고 자세한 내용을 담고 있지 않았으며, 토지문제에서 9월 25일 중앙위원회 문건에서 ‘국영화’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차이가 결정적인 것은 아니므로 여기서는 9월 25일 채택, 발표된 ‘8월테제’를 중심으로 일부 변화 과정에 대해 살펴보는 것으로 정리하고자 한다.

「현정세와 우리의 임무」라는 제목으로 발표한 8월테제의 주요 목차는 다음과 같다.

1. 현정세
2. 조선 혁명의 현단계
3. 조선 공산주의운동의 현상과 그 결점
4. 우리의 당면임무
1) 대중운동을 전개할 것
(ㄱ) 노동자의 투쟁을 지도하며 조직할 것
(ㄴ) 농민운동을 전개할 것
(ㄷ) 청년운동을 일으킬 것
(ㄹ) 부녀운동을 일으킬 것
(ㅁ) 문화단체
(ㅂ) 소비조합운동
(ㅅ) 실업자운동
2) 조직사업
3) 옳은 정치노선을 위한 양면 전선투쟁을 전개할 것
4) 프롤레타리아트의 헤게모니를 위한 투쟁
5) 민족통일전선의 결성으로 수립된 ‘인민정권’을 향한 투쟁을 전국적으로 전개할 것
5. 혁명이 높은 계단으로 전환하는 문제
(주3)

8월테제와 조선공산당의 정치노선에 대한 비판

8월테제는 조선공산당의 정치노선을 규정하고 있는 가장 중요한 문건이다. 8월테제는 해방 후 박헌영의 재건파공산당이 바라본 정세관과 혁명론, 조직노선, 혁명전략, 정권문제 등이 포괄적으로 담겨 있기에 조선공산당의 활동을 평가하는 데서 중요하다. 조선공산당이 8월테제를 채택한 것은 공산주의자(사회주의자)들이 자본주의 체제를 넘어서 새로운 사회로의 이행을 구체화하기 위한 출발점을 마련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8월테제는 한국에서 사회주의 혁명으로 가는 프로그램의 첫걸음을 구체적으로 제시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제시가 얼마나 정확한 것이었는가에 대해서는 의견이 갈리고 있다.

8월테제에 대해서는 김남식의 비교적 체계적인 비판이 있고(주4) 김남식의 평가를 반박하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김남식의 평가에 비판적인 연구자들은 대체로 민중적 관점에서 해방 정국의 민중운동을 복원하고, 이를 바탕으로 남한공산주의운동의 정통성을 조선공산당‧남로당으로 설정하고 이를 중심으로 해방 후 공산주의운동을 파악하였다.(주5) 연구자들 가운데는 8월테제가 한계와 문제점을 갖고 있지만 장안파에 비해 “상대적으로 사실을 정확히 파악했으며 당권을 장악한 ‘옳은 정치노선’으로 인정되었다”고 보는 입장을 견지하는 연구자들이 적지 않다.(주6) 심지연은 재건파나 장안파 모두 “러시아혁명을 모델로 조선혁명을 위한 이론을 제시했으나 역사적 경험과 시대적 상황의 차이로 올바른 노선을 정립하는데 실패했다”고 보면서도 8월테제가 “세계사적 시각에서 현실문제에 접근하고 사회경제적인 방법으로 문제해결을 시도한 것은 커다란 의의를 지녔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했다.(주7)

김남식은 ‘남로당’에 대한 실증적 연구와 체계적 비판을 통해 한국 현대사 연구의 지평을 열었다. 빈소에 놓인 그의 저서들(사진=통일뉴스)
김남식은 ‘남로당’에 대한 실증적 연구와 체계적 비판을 통해 한국 현대사 연구의 지평을 열었다. 빈소에 놓인 그의 저서들(사진=통일뉴스)

또한 해방 후 정치사회운동을 분석하면서 공산주의운동을 크게 민족운동의 틀 속에서 평가하는 민족적 관점에서는 조선공산당의 8월테제를 극좌적 노선으로 평가하는 견해도 있다. 미소가 분할 점령한 상황에서 현실 가능한 대안 또는 이상적 모델을 중도파 노선으로 파악하는 강만길, 도진순의 경우는 ‘극좌파 공산당’의 편협하고 비타협적인 태도가 역시 타협성과 포용력을 갖지 못했던 극우세력의 입장을 정당화시켜주었다고 평가했다.(주8) 서중석은 8월테제가 12월테제와 마찬가지로 부르주아지와 지주를 타도대상으로 설정하였고, 민족국가 건설에 필요한 민족통일전선에 부정적이었으며, 스탈린주의적 사회건설을 절대시하여 민족국가 건설을 방해했다고 평가했다.(주9)

여기서는 김남식의 비판을 중심으로 그에 대한 반론을 함께 살펴보도록 하자.

김남식은 마르크스-레닌주의의 관점에 비추어 볼 때 “1) 소련과 기타 미‧영‧중(국민당 정부)에 대한 올바른 견해의 결여, 2) 일제하의 민족부르조아지에 대한 편견, 3) 정치체제의 선택에서 양극론 주장, 4) 혁명의 성격규정에서 마르크스-레닌주의의 교조적 도입, 5) 정권문제에 대한 과업 제시 미흡, 6) 혁명의 ‘대상’ 규정 결여와 ‘동력’ 규정에서의 편파성, 7) 콤그룹에 대한 과대평가, 8) 통일전선 형성에 대한 과업제시 미흡” 등 몇 가지 점에서 부족한 부분이 있다고 지적하였다.(주10)

김남식은 8월테제가 안고 있는 결함은 결국 조선공산당이 활동 과정에서 좌경적인 오류를 범하게 하여 당이 불법화되고 붕괴되는 원인으로 작용했다고 평가했다. 무엇보다도 박헌영을 비롯한 콤그룹세력은 다른 파벌세력에 대해 포용력을 잃고 협해하고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였는데, 그러한 태도는 장안파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1946년 2월 통일전선조직체인 ‘민주주의민족전선’(민전) 결성에서도 나타났다고 보았다. 통일전선조직이었던 민전은 당면과제였던 자주독립국가 건설을 위해서 일제하 항일 독립투쟁을 벌였던 모든 세력과의 통일전선이 필요했으나 그렇게 하지 못했다. 공산당이 주도한 민전은 김구 등 충칭임시정부 계열과 국내 민족주의 우파세력들을 완전히 제외하고 인민당과 독립동맹계열(신민당) 등 좌파 민족주의, 해외공산주의 세력과 제휴하는데 그쳤다는 것이다. 이 같은 편협성으로 인한 과오는 공산당을 대중적 전위정당으로 확대, 개편하기 위한 3당합당을 통한 남조선노동당(남로당)의 결성 과정에서 더욱 심하게 표출되었다고 평가했다. 공산당과 인민당, 신민당의 3당합당은 시대 흐름으로 볼 때 당연한 요구였고, 이를 위해서는 당내의 민주적 토론과 합의, 설득 과정이 필요했다. 그러나 당중앙을 장악한 박헌영의 간부파(중앙파)는 반간부파(대회파)의 요구를 힘으로 제압하는 독선적 태도를 보였을 뿐만 아니라 인민당과 신민당에 대해서도 합당에 찬성하는 세력만을 포섭하는 방식으로 밀어붙임으로써 결과적으로 세 당 모두 심각한 분열 현상을 초래케했다는 것이다.(주11)

이러한 비판에 대해 이미숙은 부르주아민주주의혁명론의 문제, 조선공산당의 대미인식과 투쟁노선의 문제, 조선공산당의 분파‧파벌성 문제 등을 중심으로 반론을 제기하였다.

먼저, 김남식은 1) 박헌영이 제시한 부르조아민주주의혁명론은 레닌의 2단계혁명론에 바탕을 둔 것이지만 그 근거를 밝히지 않았다는 점, 2) 토지국유화를 내건 것은 토지소유의 개혁까지 목적으로 하는 급진적 오류라는 점, 3) 부르조아민주주의혁명에서 민족부르조아지를 배제한 것은 오류라고 지적했다. 또한 김남식은 당시의 사회경제적 상황에서는 부르조아민주주의혁명 보다는 반제반봉건혁명(인민민주주의혁명)이 더 적합한 개념이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비판에 대해 이미숙은 박헌영이 8월테제에서 사용한 ‘부르조아민주주의혁명’ 개념은 내용적으로는 인민민주주의혁명을 의미했다고 말하고 있다.(주12)

다음으로 김남식은 조선공산당의 국제정세인식, 특히 대미인식에 대해 “미‧영‧중국을 진보적 민주주의국가로 규정하고 해방의 은인으로 규정한 것은 조공의 정세인식의 오류이다. 이것은 남한 내 공산주의운동의 실패로까지 귀결된다”고 비판하면서 대미유화적 태도가 제국주의에 대한 무지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했다. 이에 대해 이미숙은 조선공산당이 미국에 대해 정확히 인식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남한에 진주한 미국과 불필요한 마찰을 피하고 전술적 협조관계를 유지하면서 자체역량을 강화하는 데 주력했다고 보았다. 또한 김남식은 초기 온건노선을 표방해 합법노선을 전개하다가 1946년 7월 이후 ‘신전술’을 채택, 강경노선으로 선회하여 극한투쟁으로 치닫는 것에 대해서도 일관성을 결여했을 뿐만 아니라 우익기회주의에서 좌익모험주의, 폭동주의로 치달은 것은 잘못되었다고 비판했다. 이에 대해서는 미소공위가 결렬되고 미군정의 좌익에 대한 탄압이 강화되자 온건노선에서 합법‧비합법투쟁, 무력투쟁으로 변화한 것은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보았다.(주13)

이와 관련해 김무용은 일반적으로 사회주의세력의 이행전략은 무장봉기노선이지만 해방 후 박헌영의 재건파는 처음으로 평화혁명론을 제기하고 반자본주의 이행전략으로 공식화했는데, 이는 국제정세인식에서 소련이 세계정세에서 차지하는 역할 관계를 바탕에 둔 것으로 보았다. 그것은 2차 세계대전 후 미국과 경쟁하면서 세계정세를 주도하고 있는 소련의 힘에 대한 낙관적 인식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고, 조선공산당의 평화혁명론, 즉 평화적인 이행전략은 대미협조전술로 구체화되었다는 것이다.(주14) 또한 신전술에 대해서는 평화혁명론에 따른 협조전술이 대중운동 영역에서 합법성을 고수하면서 현실과 괴리되었고 조선공산당 중앙이 미군정의 공세로 무기력화된 현실을 타개하기 위한 대안으로 채택되었다고 보았다. 신전술은 기존 협조전술에서 분리되고 있던 당과 대중운동을 다시 결합시켜 좌파운동의 정체성을 회복하는 계기를 마련하였으나, 미군정의 탄압으로 당중앙과 지도부가 수배, 도피 등으로 지도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면서 대중운동이 당의 지도를 떠나서 폭발하는 형태로 분출되었다고 평가했다.(주15) 대표적으로 1946년 10월의 인민항쟁과 1948년 10월의 여순항쟁의 경우, 당의 지도력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상태에서 대중의 불만이 자발적 봉기의 형태로 표출되면서 당이 그 뒤를 쫓아가는 형국으로 전개되었던 것이다.

조선공산당의 정권 인식과 조선인민공화국

공산주의 혁명이론에서 정권 문제는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당이 혁명의 참모부로서 혁명 이념과 노선을 제시하고 혁명을 지도하는 역할을 한다면, 혁명 노선과 이념을 현실에서 구현하는 것은 정권이다. 따라서 혁명에 성공하기 위해서는 대중을 조직, 선동, 동원하여 정권을 장악해야 한다.

해방 후 공산주의자들이 활동을 전개하면서 가장 일차적인 실천 목표로 삼은 것은 정권을 세우고 장악하는 일이었다. 해방 후 가장 먼저 공산당을 만든 장안파는 창당 초기 강령과 정치노선을 명백하게 제시하지 않았다. 그들은 「조선의 독립과 공산주의의 긴급임무」라는 문건에서 “조선에 있어서 혁명은 부르조아 민주주의혁명으로부터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혁명에로 단계적, 서열적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두 개의 혁명이 동시에 수행되면서 특히 전자가 후자의 일부분으로서 그 중에 포함된 형태에서 전개되어 나가야 할 제 조건을 갖추고 있다”고 해 2중 혁명론을 전개했다. 또한 장안파는 ‘인민의 정권’을 수립하자고 주장했지만 그 성격을 구체적으로 제시하지는 못했다.(주16)

조선인민공화국 출범(매일신보)
조선인민공화국 출범(매일신보)

반면에 재건파는 8월테제에서 “금일 조선은 부르조아 민주주의혁명의 단계를 걸어가고 있나니, 민족적 완전독립과 토지문제의 혁명적 해결이 가장 중요하고 중심되는 과업으로 서 있다. 즉, 다시 말하면 일본의 세력을 완전히 조선으로부터 구축하는 동시에 모든 외래자본에 의한 세력권 결정과 식민지화 정책을 절대 반대하고 근로인민의 이익을 옹호하는 혁명적 민주주의정권을 내세우는 문제와 토지문제의 해결이다.”라고 했다. 이를 위해 노동계급이 영도하는 노동동맹을 강화하고, 토지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8월테제는 ‘우리의 당면임무’ 가운데서 정권투쟁에 대해 언급하면서 “기본적으로 민주주의적 여러 가지 요구를 철저히 실천할 수 있는 인민정부를 수립하여야 한다”고 전제한 뒤, “‘인민정부’에는 노동자 농민이 중심이 되고 또한 도시 소시민과 인테리겐챠의 대표와 기타 모든 진보적 요소는 정견과 신교와 계급과 단체 여하를 막론하고 모두 참가하여야 하나는 곧 민족통일전선을 형성해야 한다”고 정권의 성격을 설명했다. 이어 “인민정부는 일반근로인민의 이익을 대표하는 기관”으로 “노동자 농민의 민주주의적 독재정권으로 발전”해야 한다고 했다.(주17)

조선공산당의 정권에 대한 인식은 더 이상의 구체적인 이론 전개를 내놓지 않았지만, 통일전선에 의한 전 민족적인 세력이 참여하는 ‘인민정권의 수립’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조선공산당은 인민정권 수립을 위한 독자적인 활동을 전개하지 않고 여운형이 중심이 된 건국준비위원회(건준)에 참여, 이를 변화, 발전시키는 방향에서 진행하였다. 건준 결성 초기부터 공산주의자들이 참여하게 된 것은 여운형‧건국동맹과 공산주의자들이 이념적으로 친화성, 일제시기부터 밀접하게 결합되어 활동한 경험 등이 주요했지만, 소련의 서울 진주 소식도 크게 작용했다. 해방 직후 소련군의 경성에 들어오게 될 것이란 소식은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고, 따라서 건준 참여세력들은 소련이 한반도 전체를 점령할 것으로 판단했다. 여운형과 건준 참여세력들은 공산주의계열을 적극 참여시켜 소련군의 남한 진주에 대응하는 국가건설을 준비하고자 했고, 공산주의자들도 이에 호응했던 것이다.(주18)

여운형과 공산주의세력의 연대는 건준 내부에서 안재홍 등 민족주의 우파세력과의 갈등으로 이어졌다. 이런 가운데 중앙과 지방에서 공산당이 재건되고 공산주의세력이 본격적으로 조직화되기 시작하면서 건준 내에서 좌우 분화도 본격화되었다. 8월 22일 안재홍은 건준의 조직개편 과정에서 외부에서 민족주의세력을 대거 영입해, 강화되고 있는 좌파의 영향력에 제동을 걸려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또한 8월 18일 여운형이 테러를 당해 가평에 내려가 요양중이었으므로 좌우의 균형을 잡아주는 조정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공산당의 영향력이 강화되는 가운데 8월 28일에 발표된 건준 선언문은 “본 준비위원회는 우리 민족을 진정한 민주주의적 정권으로 재조직하기 위한 새국가건설의 준비기관인 동시에, 모든 ‘진보적 민주주의’적 제세력을 집결하기 위하여 각계각층에 완전히 개방된 통일기관이요, 결코 혼잡된 협동기관은 아니다”라고 했다. 여기에 나타난 ‘진보적 민주주의’라는 표현은 재건파공산당이 8월 20일 테제에서 처음 사용한 것으로써 공산주의자들의 국가구상의 방향을 나타내는 개념이었다. 이는 추상적인 표현이기는 하지만, 사실상 재건파 조공세력이 건준을 기반으로 ‘진보적 민주주의 국가 건설’을 추진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주19)

8월 말에는 건준 내부에서 좌우 갈등이 깊어지면서 국가건설 방향에 대한 이념적 갈등이 표면화되었다. 이런 가운데 부위원장 안재홍이 가평에서 요양 중이던 위원장 여운형을 만나 우익을 강화해 조직의 균형을 잡기 위한 설득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8월 31일 여운형, 안재홍 등 건준 지도부는 총사직하였고 9월 4일 조직이 개편되었다. 이 개편에서 안재홍의 입지가 크게 줄어들자 안재홍은 건준을 떠났고, 공산주의자들(재건파와 장안파)이 건준 조직의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이렇게 되면서 초기 좌우합작의 통일전선조직으로 출발한 건준의 위상이 사실상 붕괴되어 좌파세력의 연합체처럼 되어 버리고 말았다. 이러한 바탕 위에서 9월 6일 조선인민공화국(인공)이 조직, 선포되었던 것이다.

인공은 여운형의 건준과 박헌영의 조공의 합작품

인공은 해방 직후 개별적 수준에서 진행되던 새로운 국가권력에 대한 개입이 조선공산당의 재건과 함께 체계적 조직적 형태를 띠게 된 결과였다. 공산당이 재건되면서 공산주의자들의 국가건설은 처음부터 당이 주도하는 국가형성, 즉 ‘당-국가’체제를 지향하는 형태로 출발했던 것이다. 조선공산당의 국가건설에 대한 전망은 조선인민공화국(인공)을 조직하는 과정에서 구체화되었다.(주20)

인공을 수립하는 과정에는 공산주의자들, 특히 박헌영이 깊숙이 개입하였다. 박헌영은 1945년 9월 8일 계동에서 개최된 ‘열성자대회’에서 “최근 여러 동무들과 접촉하지 못한 것은 내가 인민공화국을 만들어 내느라고 여가가 없었다”고 한 데서도 알 수 있다.(주21) 그러나 박헌영이 일방적으로 독주해서 만들어낸 것은 아니었다. 여운형도 인공 수립에 동의하였고 적극적으로 관여하였다. 9월 4일 허헌이 입원한 경성의전 병실에서 여운형, 박헌영, 허헌, 정백 등이 모여 인공 선포와 참여 인물 등에 대해 논의하였다.(주22) 또한 여운형은 9월 6일 전국인민대표자대회 개회사를 통해 ‘비상한 시기에 연합국의 진주에 대비하여 인민총의의 결집체’로서 인공이 수립되었다고 강조했다.(주23) 여운형은 인공 수립과 관련하여 북한에서의 “소군의 조치를 당연히 연합국의 공동방침으로 해석”하여 남한에서 “미군 역시 조선인민에게 맡길 줄로 예상”했다고 말했다. 이 같은 판단은 조선공산당 재건파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여운형은 일제시기부터 혁명단체와 혁명가들이 중심이 되어 과도정권을 수립하려는 구상을 하고 있었는데 이러한 정권구상은 인공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결국 인공 수립은 조선공산당 재건파와 여운형의 정부수립 구상이 결합된 결과라고 할 수 있었다.(주24)

여운형과 박헌영. 조선인민공화국은 여운형과 박헌영의 합작품이었으나 이후 정치적 주도권이 여운형에서 박헌영으로 넘어갔다.
여운형과 박헌영. 조선인민공화국은 여운형과 박헌영의 합작품이었으나 이후 정치적 주도권이 여운형에서 박헌영으로 넘어갔다.

인공 중앙위원회는 여러 차례 회의를 거쳐 9월 14일 시정방침과 선언, 정강, 그리고 행정부서와 각료를 발표하였다. 선언문에서 인공의 탄생 경위를 설명한 다음, 기본방향으로 “인민대중의 기본적 요구에 응하여 일본 제국주의 잔존 세력을 완전히 구축하는 동시에 우리의 자주 독립을 방해하는 외래세력과 반민주주의적 반동적 모든 세력에 대한 철저한 투쟁을 통하여 완전한 독립국가를 건설하여 진정한 민주주의 사회의 실현”을 이루며, “주민 생활 향상과 정치적 자유를 보장, 세계평화에 기여한다”고 하였다. 27개 조항으로 이루어진 시정방침에서는 일제와 민족 반역자의 토지와 광산, 철도, 항만, 공장 등 중요산업 시설을 국유화하고, 18세 이상의 남녀에게 선거‧피선거권 부여, 8시간 노동제 실시, 생활 필수품 배급제 실시, 단일누진제 실시 등을 제시하였다. 정강은 1) 완전 자주 독립국가를 건설하며 2) 일제와 봉건잔재세력을 일소하고 3) 노동자, 농민의 생활을 향상시키며 4) 세계국가와의 제휴를 강화한다는 등의 내용을 담고 있었다.(주25)

해방 후 군중 시위 모습(사진=인터넷 자료)

행정부서 및 내각구성에서는 주석 이승만, 부주석 여운형, 국무총리 허헌, 내무부장 김구(임시대리 허헌), 외교부장 김규식(임시대리 여운형), 재정부장 조만식, 군사부장 김원봉(임시대리 김세용), 경제부장 하필원, 농림부장 강기덕, 보건부장 이만규, 교통부장 홍남표, 보안부장 최용달, 사법부장 김병로(임시대리 허헌), 문교부장 김성수(임시대리 이만규), 선전부장 이관술, 체신부장 신익희(임시대리 이강국), 노동부장 이주상, 서기장 이강국, 법제국장 최익한, 기획부장 정백 등이었다. 부장들만 임시정부(김구, 김규식, 이승만, 김원봉, 신익희)에 상당수가 할애되었고, 국내의 우익인사(김성수, 조만식, 김병로, 강기덕)도 다수 포함되었으며, 여운형계(이만규), 장안파(최익한, 정백), 허헌계 및 재건파(김용달, 이관술, 하필원, 홍남표, 이주상, 이강국) 등이 망라되었다.(주26) 내각 구성은 임정계열과 명망인사들을 전면에 배치했으나 계파별로는 조공 재건파가 다수를 차지하고 핵심부서를 장악하고 있었다. 재건파는 전체적으로 6부의 부장직과 11부의 수석대리직을 차지하였다.(주27)

조선공산당(재건파)은 인공을 통일전선적 조직이었던 건준이 발전하여 형성된 통일전선 정부(인민정부)라고 보았다. 그러나 통일전선 조직인 건준이 인공으로 전환되었다는 조공의 주장은 많은 한계를 갖고 있었다. 건준 내부에서 인공으로의 전환이 공식적으로 논의되거나 합의되지도 않은 상태에서 박헌영의 재건파가 음모적 방식으로 추진한 결과였던 것이다. 이정식은 인공의 성립을 박헌영계 공산당에 의한 ‘궁중혁명’으로 평가했다. 박헌영은 인공 설립을 통해 건준에 집결되었던 정치적 주도권을 여운형과 그의 주변에 모였던 서울청년회파 내지는 장안파로부터 빼앗아 자신의 주도 아래 공산혁명을 추진하기 위한 도구로 삼으려 했다는 것이다.(주28)

이정식의 주장은 박헌영의 공산혁명 음모론이라는 반공적 사고에서 바라보는 것으로 전적으로 받아들이기는 어려운 부분이 있다. 하지만 인공 수립 과정을 통해 정치적 주도권이 여운형에서 박헌영으로 넘어가는 계기가 만들어진 것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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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1) 김무용, 해방 후 조선공산당의 노선과 국가건설 운동, 고려대 박사학위논문, 2005, 16쪽

2) 김무용, 위의 논문, 17〜18쪽

3) 김남식‧심지연 편저, 『박헌영 노선비판』, 세계, 1986, 179〜195쪽

4) 김남식, “박헌영과 8월테제”, 『해방전후사의 인식』2, 104〜142쪽, 김남식, 『남로당 연구』, 돌베개, 1984, 19〜26쪽; 김남식‧심지연 편저, 『박헌영 노선비판』, 세계, 1986, 25〜60쪽 참조

5) 이미숙, “박헌영‧남로당에 대한 비판을 비판한다”, 역사비평, 1989년 5월호; 민중운동사연구회, 『해방 후 한국변혁운동사』, 녹진, 1990; 김무용, 「조선공산당과 대중운동」/ 김득중, 「남조선노동당과 대중운동」, 『한국공산주의운동연구 현황과 전망』 아세아문화사, 1997 참조

6) 김무용, 위의 논문, 16〜55쪽

7) 심지연, 『조선혁명론연구-해방정국논쟁사』, 실천문학사, 1987, 41〜43쪽; 김무용, 위의 논문, 7쪽

8) 강만길 외, 「좌우합작운동의 경위와 그 성격」, 『한국민족주의론 Ⅱ』, 창작과비평사. 1983; 도진순, 『한국민족주의와 남북관계』, 서울대출판부, 1997 참조.

9) 서중석,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 역사비평사, 1991 참조.

10) 김남식‧심지연 편저, 『박헌영 노선비판』, 세계, 1986, 54쪽; 김남식, “박헌영과 8월테제”, 『해방전후사의 인식』2, 136쪽

11) 김남식‧심지연 편저, 『박헌영 노선비판』, 세계, 1986, 54〜60쪽; 김남식, “박헌영과 8월테제”, 『해방전후사의 인식』2, 136〜142쪽

12) 이미숙, “박헌영‧남로당에 대한 비판을 비판한다”, 역사비평, 1989년 5월호, 263〜264쪽

13) 이미숙, 위의 글, 264〜267쪽

14) 김무용, 위의 논문, 29〜30쪽

15) 김무용, 위의 논문, 187〜260쪽

16) 김남식, 『남로당 연구』, 돌베개, 1984, 193쪽

17) 김남식, 위의 책, 193〜194쪽

18) 김무용, 위의 논문, 61쪽

19) 김무용, 위의 논문, 62〜63쪽

20) 김무용, 위의 논문, 64쪽

21) 심지연, 『조선혁명론연구-해방정국논쟁사』, 실천문학사, 1987, 154쪽

22) 김남식, 위의 책, 46쪽

23) 김무용, 위의 논문, 65쪽

24) 김무용, 위의 논문, 65쪽

25) 김남식, 위의 책, 48쪽

26) 이정식, “여운형과 김규식의 좌우합작”, 『현대사를 어떻게 볼 것인가』, 동아일보사, 1987, 99〜100쪽

27) 이정식, 위의 글, 100〜101쪽; 김무용, 위의 논문, 67쪽

28) 이정식, 위의 글, 81쪽

 

 

임영태 필자 약력

출판기획자, 저술가. 청년시절 민주화․사회운동에 관계했으며, 한국 근현대사와 세계사, 인문․사회 관련 대중서의 기획․집필에 힘쓰고 있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에서 공식 보고서 발간을 총괄했으며, 지금은 평화박물관의 ‘반헌법행위자 열전편찬위원회’ 조사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저서로는 『한국에서의 학살-한국현대사, 기억과의 투쟁』, 『새로 쓴 한국현대사-해방부터 촛불항쟁까지 35장면』(공저), 『솔직하고 발칙한 한국 현대사』(공저), 『스토리 세계사 1~10』, 『두 개의 한국 현대사』, 『산골대통령, 한국을 지배하다』, 『국민을 위한 권력은 없다』, 『대한민국사 1945~2008』, 『대한민국50년사』, 『북한50년사』, 『거꾸로 읽는 한국사』(공저), 『거꾸로 읽는 통일이야기』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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