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단주의는 동북아 3국의 중요한 특성 중의 하나다. 나름의 유구한 역사성과 유사한 역사적 경험을 그 주요 원인으로 꼽는다. 또한 내세우는 정치체제도 민주공화정이라는 형식적 공통점이 있다. 물론 이 배경에도 서구의 개인주의나 다원주의적 성격과는 다른 집단주의·공동체주의적인 성향이 두드러진다.

중국이 정치적 공산주의와 경제적 자본주의가 양립한 국가라면 일본은 정치적 민주주의의 토대 위에 경제적 자본주의를 운용하는 국가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공산당과 자민당의 1당 독재라는 측면에서는 너무도 유사하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헌법이 당치(黨治)의 아래에 있느냐 위에 있느냐의 차이일 것이다.

중국이 기회가 있을 때마다 내뱉는 ‘의법치국(依法治國)’이라는 외침이, 그들만의 외교적·형식적 수사(修辭)라는 점은 이미 감지하는 바다. 일본 역시 반세기 넘도록 자민당 정치권력의 독점적 지배이라는 의견에 이론을 제기할 사람 없을 것이다. 차이가 있다면 중국이 통치적 1당의 권위로 독재를 누리는 집단이라면, 일본은 자발적(민주적) 1당이라는 명분으로 정치권력을 독점하고 있다.

그 사상적 배경에도 관심이 쏠린다. 3국의 공통점으로 가장 많이 언급되는 것이 유교주의다. 그러나 이 부분은 쉽게 수긍할 수가 없다. 일단 한국은 차치해 두자. 중국이야 그 종주국으로서 당연하다 할 수 있으나, 일본의 집단주의는 탈유교주의로부터 본격화되기 때문이다. 막부시대 이후 일본은 형식적 불교국가로 옮겨오면서 새로운 정치이데올로기로 대체되었다. 그 본질이 신도(神道)를 기반으로 한 일본정신, 곧 국학(國學)이다. 그 역사적 경험의 정점에 메이지유신이 있다.

메이지유신과 함께 신도는 천황의 권위를 유지하기 위한 국가 종교가 되고, 신사는 정부의 관할 하에 놓이게 된다. 천황이 곧 국가라는 전체주의적 국체론(國體論)이 자리를 잡고, 그 이후의 일본 집단주의는 이 정신에서 벗어난 적이 없다. 침략과 패망, 맥아더의 평화헌법, 한국전쟁, 자민당(自民黨) 결성 등의 내외적 부침 속에서도 일본의 집단주의는 흔들리지 않았다. 따라서 그들의 민주주의 역시 집단주의의 중심에 있는 천황의 시혜적 정치질서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만신적(萬神的) 신도와 절제된 종교들이 혼효(混淆)된 국가, 국화의 향기로움과 칼의 섬찟함이 공존하는 나라, 극단적 불합리와 초과학적 법칙성이 양립하는 사회, 그것이 일본이다. 어떤 이들은 일본의 상호 무관심적 삶의 자세를 초개인주의적 성향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들의 개인주의 분출 역시 집단주의 고로(高爐) 속에서 융해되지 않을 수 없는 구조가 일본이다. 특히 일본 정치의 집단주의는 기형적 민주주의의 대표적 몰골로 회자되고 있다.

근자에 들어 일본 정치인들의 집단주의적 움직임이 다시 주목을 끌었다. 일본 자민당 의원들이 그들 정부에 더욱 강력한 ‘역사 전쟁’을 요구한 것이다. 아베가 호언장담하던 ‘북방 영토(쿠릴열도의 일본명)’의 반환도 물 건너가고, 베를린 소녀상 문제와 센카쿠 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釣魚島)의 일본명] 분쟁 등, 그들의 심기대로 풀리지 않는 상황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그들이 선포한 ‘역사 전쟁’에 무엇보다 촉각을 세워야 할 집단은 우리다. 중국과 러시아야 ‘섬 따먹기’ 외교 논쟁이라지만 우리에게는 역사의 존망이 좌우되는 사안이기 때문이다. 일본이 외쳐대는 ‘독도는 일본 영토’라는 주장 속의 ‘독도’가 단순 암초덩어리의 섬이 아니라는 데 있다.

‘센카쿠 열도’와 ‘쿠릴 열도’에 대한 영토 주장이 지시적(指示的) 의미 그대로라면, ‘독도’는 ‘한반도’의 대유적(代喩的) 표현임을 놓쳐서는 안 된다. 그 속에는 군사적·지정학적 중요성을 넘어서 한반도의 연고권 주장이 그대로 내포되어 있다.

일본이 한반도의 연고권을 주장한 시기는 꽤나 오래되었다. 천 사백여 년 전 임진왜란까지 올라간다. 당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명나라에 내민 카드가 조선분할론이다. 그 배경이 되는 역사인식이 ‘한사군 한반도 북부 위치설(漢四郡韓半島北部位置說)’과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附說)’이다. 고대 한반도의 북부와 남부를 중국과 일본이 경영했다는 억설에 기반을 둔 논리다.

일본에 있어 20세기 조선의 병탄은 바로 그 연고지의 완전 회복과 지배의 완성을 의미했다. 그리고 충실한 황국신민을 만든다며 우리의 과거사에 대한 미련을 하나하나 지우기에 급급했다. 일제 관학에 의해 만들어진 식민주의역사학이 그 주요 도구였다. 패망과 함께 쫓겨난 일본에 있어 그 때 그 기억은 무엇일까. 찾아야 할 시간이며 돌아가야 할 공간이다. 따라서 그들에게 해방 이후의 한반도의 시간은 황국의 시간이 멈춰선 휴지기(休止期)일 뿐이다.

그러므로 일본이 외치는 ‘역사 전쟁’의 제 1순위는 한반도 연고권 확보다. 그들이 과거사를 부정하고 독도문제 등을 반복적으로 언급하는 이유도 간단하다. 열강들의 이해가 치열한 동북아의 정치 상황과 떼내어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역학 관계 속에서 한반도 연고권의 공소시효를 유지해 가겠다는 일본의 치밀한 복심이 깔려있다.

문제는 일본이 내세우는 ‘역사 전쟁’의 본질에 대해 우리 사회가 너무 둔감하다는 데 있다. 이것은 역사인식의 부재와 직결되는 문제다. 올바른 역사인식이 붕괴된 집단에서는 미래는커녕 현실마저 장담하기 힘들다. 국망(國亡)의 문턱에 다다르면 그 집단의 모든 사상(事象)은 함몰된다. 학설이나 이념, 종교나 지역을 넘어 우리 모두 변명하고 고민해야 하는 이유다.

일본은 우리에게만은 늘 칼의 섬찟함으로 대하려 했다. 누르면 고개 숙이고 때리면 무릎 꿇는 집단이 조선인들이라 매도해 왔다. 이이제이(以夷制夷)의 통치에 가장 잘 순치되는 집단이 조선인이라는 호도도 빼놓지 않았다. 이것이 바로 식민주의역사학, 식민주의교육의 본질이다.

우리의 오늘을 살피면 대체로 흐림이다. 심판(審判, judge)마저 사라진 정치판은 진흙판의 개싸움인 양 어지럽기만 하다. 짝패정치에 길들여진 민심들은 동굴의 우상으로 갇혀 산 지 꽤 되었다. 분단된 나라에서 지역마저도 동강난 분위기니, 도대체 출구가 보이지 않는다.

일본 우익들의 ‘역사전쟁론’이 다시 서남풍을 타고 먹구름으로 밀려온다. 마비된 한반도를 후벼 파는 신경통이 도지는 듯하다. 관절 주무르며 “비는 오면 안 되는데 비는 오면 안 되는데” 뇌까려 보지만, 구름 걷힘의 예보는 언제 쯤 들려 올 것인지.

 

김동환 국학연구소 연구위원

1957년 서울에서 출생했다.

대학에서 행정사를 전공하였고, 한신대학교 강사,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 겸임교수 등을 역임했으며, 현재 (사)국학연구소 연구원으로 재직 중이다.

주요저술로는 『단조사고』(편역, 2006), 『교계의 민족운동』(공저, 2008), 『한국혼』(편저, 2009), 『국학이란 무엇인가』(2011), 『실천적 민족주의 역사가 장도빈』(2013) 외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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