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영태 / 출판기획자 겸 역사교양서 저술가

 

올해 2020년은 광복(또는 해방) 75주년이자 6.25전쟁(한국전쟁) 발발 70주년이 되는 해이다. 우리에겐 해방이 곧 분단이었으니 분단 75주년이기도 하다. 왜 우리는 3/4세기 동안이나 분단된 상태로 살아야 했던가? 왜 우리는 해방과 함께 분단이라는 있을 수 없는 상황을 맞아야 했던가? 우리는 왜 해방 3년 만에 두 개의 정부가 수립되고 마침내 5년 만에 전쟁이라는 참화를 겪어야 했던가? 이러한 물음에 대한 답은 해방 전후사에 들어 있다. 해방 75주년, 한국전쟁 70주년의 해에 해방 전후 역사를 다시 돌아보는 이유다. 이 연재는 매주 월요일에 게재된다. / 필자 주

 

소련군사령부 산하 민정기관 설치와 그 역할

38이남에 진주한 미군사령부는 미군정청을 설치하여 직접 통치했지만, 38이북에 진주한 소련군 사령부는 군정청과 같은 국가권력기구를 설치하지 않았다.(주1) 소련군 역시 미군처럼 이북의 정치상황에 대해 주도적인 영향력을 행사한 것은 맞지만 정치권력, 국가권력이라고 할 만한 기구를 설치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를 어떻게 불러야 할지 고민이 되지 않을 수 없다. 많은 경우, 그냥 ‘소군정’이라고 부르고 있지만 이는 정확한 표현이 아니다. 우리가 앞에서 봤던 남한의 미군정과 같은 성격의 소군정은 없었기 때문이다.

열흘 남짓 되는 짧지만 상당히 치열한 전투를 치르고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은 우선 각 시·도·군 단위에 경무사령부를 설치하였다. 경무사령부는 이들 지역의 질서 유지와 통제 업무를 수행하였고, 각지에서 조직되고 있던 인민위원회 등 인민자치기관과 관계를 맺었다. 경무사령부는 인민위원회와 협력하는 한편, 그에 대한 통제적 지도를 수행하는 기능을 담당했다. 동북항일연군 출신 항일유격대가 귀국하면서 이들이 각 지역 경무사령부 부사령관을 맡았다. 각부 차장은 소련군 출신 조선인과 소련군과 함께 입북한 고려인 2,3세들이 맡았다. 위수사령부는 도‧시‧군 인민위원회와 조선공산당 도‧시‧군당 등 당‧정 및 사법‧경찰에 대한 지휘, 감독권을 가지고 있었다. 위수사령부의 임무 중에는 일본군의 재산과 무기를 파악하고 보전하는 일도 포함되었다.(주2)

소련군의 평양 입성을 지켜보는 시민들.
소련군의 평양 입성을 지켜보는 시민들.

중앙차원의 소련군 ‘지도기관’으로는 10월 3일 제25군사령부 산하에 조직된 ‘소련민정기관’이 있었다. 소련군 진주 초기 정치기관들의 일부 보고에 ‘군정’이란 용어가 일부 사용되었으나 이후에는 ‘민정’으로 바뀌었다. 약 50명의 장교들로 구성된 ‘소련민정기관’을 지휘한 로마넨코 소장은 민정담당 부사령관이었다. 민정기관에는 행정·정치부, 산업부, 재정부, 상업·조달부, 농림부, 통신부, 교통부, 보건부, 사법·검찰부, 보안·검열부 등 모두 10개 부서가 설치되었고, 11월 각 지역 인민위원회의 협의체로 북조선 중앙행정기관 역할을 담당했던 북조선 행정10국에 대한 지도적 기능을 수행하였다. 소련은 “일제에 의해 파괴된 경제를 복구하고 정상적인 생활 기반을 조성하며 조선 인민 자신의 국가권력 수립에 방조하는 문제 등을 담당하는” 것이 민정기관의 역할이라고 규정하였다.(주3)

소련 극동군 총사령관 알렉산드르 바실리옙스키 원수.
소련 극동군 총사령관 알렉산드르 바실리옙스키 원수.
소련 연해주 집단군사령관 메레츠코프 원수.
소련 연해주 집단군사령관 메레츠코프 원수.

 

 

 

 

 

 

 

 

소련군의 민정업무는 한반도 정치상황이 변화하고 북한의 행정‧경제 기구의 규모와 사업이 확대되면서 늘어났고, 그에 따라 기구의 조직규모와 체계도 확장되었다. 소련군 산하 민정기관은 1947년 5월 제25군 군사위원 레베데프가 이끄는 주북조선소련민정국으로 조직과 부서가 확대, 개편되었다. 소련군의 민정 활동은 연해주군관구 군사회의 위원인 T. F. 스티코프 상장의 지휘 아래 이루어졌는데, 그 계통은 “스티코프(연해주군관구 군사회의)→제25군사령부/소련민정→경무사령부‘로 이어졌다.(주4) (<그림1> 참고)

출처: 기광서, 소련의 대한반도-북한정책 관련 기구 및 인물 분석, 현대북한연구 창간호(1988), 113쪽
출처: 기광서, 소련의 대한반도-북한정책 관련 기구 및 인물 분석, 현대북한연구 창간호(1988), 113쪽

소련군이 38선 이남의 미군과 달리 직접적인 군정통치를 하지 않고 인민위원회 등을 간접적으로 지도, 통제하는 방식을 택한 것은 좌익이 주도하는 상황에서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었다.(주5) 또한 이는 소련의 애초 목적이 이북에 사회주의 정권을 수립하는 것이 아니라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수립하는 것이었던 점과도 무관하지 않았다. 소련은 사회주의자만이 아니라 민족주의자들까지 포함한 연립정부를 구상하였고, 그에 따라 조만식 등 민족주의자들과 국내의 공산주의자들이 연합해 조직한 권력기관을 인정, 개편하고 이를 지원해주는 방식을 택했던 것이다.(주6)

소련의 이 같은 입장은 신탁통치를 바라보는 데서도 드러났다. 소련은 신탁통치를 조선사람들에게 자치권을 부여하고 열강이 뒤에서 지원해주는 것으로 파악해 굳이 ‘후견제’라고 표현했다. 반면, 미국은 조선인들이 자치능력이 없기 때문에 일정기간 강대국이 연합해 주권을 유보한 상태에서 통치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미국은 애초 20, 30년을 염두에 두었으나 신탁통치 기간이 짧으면 짧을수록 좋다고 주장했던 소련과 타협해 5년으로 정했다.(주7) 소련은 신탁통치와 관련해서도 좌우가 합작한 형태로 임시정부를 구성하여 자치권을 확보하고 이를 강대국들이 지원하는 형태를 염두에 두었다. 소련은 한반도의 정치세력 관계를 감안할 때 공산당과 좌익이 주도권을 쥘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고 있었다.

소련의 이 같은 ‘간접적 통치’ 방식은 북한에서 임시인민위원회가 조직되어 활동하는 1946년 2월 이후에는 더욱 명확해진다. 토지개혁 법령을 비롯한 각종 법령과 시책은 모두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명의로 발표되었다. 더욱이 1년 후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 도‧시‧군 인민위원회 선거를 통해 ‘북조선인민위원회’로 재조직되면서 이 기관의 주권적 기능, 독자성이 더욱 강화되었다. 북조선인민위원회는 사실상의 ‘정부’, ‘국가권력’의 기능을 수행하였다. 이를 두고 혹자는 이는 형식이고 실질적인 통제는 ‘소련군사령부/민정기관’에서 수행했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이는 부분적 측면을 침소봉대한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북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북한 정권이 공식 수립되기 전까지 주요 정책의 최종적인 결정에는 크레믈린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했던 것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북한의 권력기구가 자율성이 없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소련의 정치적 지도를 현지에서 대변하고 있던 스티코프와 북한의 최고지도자였던 김일성은 상호 협의 과정을 통해 최종적인 정책을 조율했는데, 그들 사이는 일방적인 지시와 수용 관계가 아니었다.(주8) 상호 협력하고 논의해서 결정하는 관계였고, 그런 점에서는 이남의 미군정통치와는 명백히 달랐다.

해방 후 3년 동안 남한에서 미군정을 통해 직접 통치를 했던 미국은 아직도 대한민국에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2만 명 이상의 군대를 직접 주둔시키고 있는 것을 바탕으로 군사주권(전시작전지휘권)을 장악하고 있으며, 정치‧경제적으로도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반면 해방 후 북한지역에서 군대가 진주한 것을 바탕으로 배후에서 간접통치 방식을 취했던 소련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대한 영향력이 급격이 축소되었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1960년대부터는 소련의 입김이나 압력이 거의 먹혀들지 않는 나라가 되었다. 이러한 차이가 해방정국 3년 동안 있었던 통치방식의 차이로부터만 기인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이 또한 전혀 무관하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북한 점령 소련군 사령부의 중요 인물들

북한을 점령한 소련 제25군은 간접적 방식이지만 북한의 정치 상황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소련의 대북한 정책이 어떻게 입안되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다. 다만, 해방 직후 소련군의 전투서열은 소련군 최고총사령관 스탈린→총참모장 안토노프→극동군 총사령관 바실리옙스키→연해주 집단군사령관 메레츠코프→25군사령관 치스차코프로 이어졌다.(주9) 군사와 관련된 내용은 이 계통을 통해 이뤄졌지만 공산주의 국가에서는 공산당의 정치사상적 지도가 가장 중요하다.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내에서 한반도 문제와 관련된 정책을 다룬 부서로는 정치국, 서기국, 그리고 서기국 산하의 대외정책부와 선전선동국이 있었다. 또한 소련 외무성과 무력성(국방부)이 한반도 정책과 관련된 문제를 다루었다.

1946년 말 소련 외무성의 한반도 문제 담당부서는 중국과 몽고 담당부서인 제1극동부로 이전되었는데 이 부서의 책임자는 둔킨이었다. 그는 북한의 헌법안 작성 등 주요 사안에 깊숙이 관여하였고 소련정부의 방침을 북한 주둔 25군사령부에 지시하는 통로 역할을 맡기도 했다. 또한 제1극동부는 주 북한 소련 민정기관과 25군 산하 정치고문기관으로부터 각종 정보보고와 자문 요청, 정책 건의 등을 수용하고 정리하는 역할을 맡았다. 서울에는 외무성의 지휘를 받는 총영사관이 1946년 여름 미국측과의 갈등으로 폐쇄될 때까지 남한의 제반 정세와 미군의 정책에 대한 소련측 정보 수집의 중요한 통로로 기능했다. 특히 각종 정세보고, 조선 지도자들과의 연계 및 교류를 맡았던 부영사 샤브신은 1939년부터 주 서울 소련 영사관에 근무했는데 스티코프가 “조선에 대해 그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을 알지 못한다”고 할 정도로 최고의 ‘조선통’이었다. 북한 주둔 25군사령부 산하에는 일본문제 전문가인 발라사노프가 이끄는 조선문제 정치고문기관이 설치되었다. 이 기관은 조직 편제상 25군사령부 소속이었지만 실제로는 외무성의 직접적인 지휘를 받았다.(주10)

무력성(국방부)은 현지 군에 대한 군령과 군무를 관장했는데, 스탈린 자신이 무력성 장관을 겸임했고 차관인 불가닌은 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후보위원으로 있으면서 대북한 정책 결정에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군의 정책집행과 관련된 문제는 무력성 산하 총참모부가 관장했다. 군의 최고 정치기관인 총정치국은 극동군 총사령부, 연해주 군관구 정치기관의 보고를 토대로 독자적인 정책 판단과 계획을 입안하였다. 총정치국은 조직상으로는 무력성 산하로 편제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당 중앙위원회 부서로 활동했다. 총정치국의 보고와 정책 건의는 외무성과 무력성의 장‧차관, 당 중앙위원회에 전달되었다. 총정치국 내의 지휘 계통은 총정치국장을 정점으로 7국→7국 동방부로 이어졌다. 1946년 초 소련군 총정치국장이 된 쉬킨 상장은 대일 전쟁 직전 중앙아시아 치타에 본부를 둔 극동군 총사령부에서 군사회의 위원 겸 정치국장으로 임명되어 한반도 문제에 관여하기 시작했다. 총정치국 7국장은 부르체프 소장, 부국장은 사포쥬니코프 소장이었다. 이들은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 소련 대표단의 ‘훈령’ 초안을 외무성 제2극동부장 게네랄로프와 공동으로 작성하는 등 한반도 문제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7국장 부르체프는 연해주 군관구 군사회의 위원 스티코프의 초안을 참조해 1946년 3월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에 따라 수립될 ‘한국임시정부’ 내각후보 명단안을 작성하기도 했다. 사포쥬니코프는 해방 후 북한에 직접 파견되어 정보 활동에 종사하기도 했고, 총정치국 내에서 한반도 관련 업무에 가장 깊이 관여하였다.(주11)

소련의 북한 내 정책집행과 제반 사업의 현지지도는 연해주군관구 군사회의의 지휘 아래 평양에 소재한 25군 군사회의를 통해 이뤄졌다. 25군 군사회의 의장으로 사령관인 치스차코프 근위상장, 위원으로 레베데프 소장, 로마넨코 소장, 프루소프 소장 등이 포진해 있었다. 처음 북한 점령군 사령관으로 부임한 치스차코프는 단순히 군무만이 아니라 민정기관과 관련된 업무에도 상당정도 관여하였다. 1947년 4월 북한 주둔 사령관은 치스차코프에서 코로드코프 중장으로 교체되었다. 민정담당 부사령관을 맡았던 로마넨코는 스티코프의 지도하에 북한의 정치, 경제, 사회의 각 부문, 즉 민정에 대한 실무지휘를 담당했다. 35군 정치부장 출신으로 민정기관 행정‧정치부장이 된 이그나치예프는 인민위원회와 정당‧사회단체 지도부를 접촉, 관계 유지를 책임졌다. 그는 북한의 민족간부 양성에 큰 관심을 가졌는데 북한 지도자들과의 일차적인 접촉의 그의 주요 임무였다.(주12) 이밖에도 민정기관 간부들이 다수 활동했다.(<그림2> 참고)

평양 현지에서 가장 중요한 정치적 역할을 한 인물은 정치부사령관인 레베데프 소장이었다. 그는 “우리 사령부(정치사령부)는 거의 매일 밤샐 정도로 바빴다 일손이 모자라 극동사령부에 정치일꾼들을 보강해달라고 긴급 요청하기도 했습니다”라고 회고했는데, 초기 북한의 정치상황을 정리하는데서 핵심 역할을 담당했다. 당시의 정치상황과 정보를 총괄하며 북한 정치 질서를 정리, 재편하는 데서 핵심적 역할을 맡았던 25군 군사회의(흔히 ‘정치사령부’로 불림)에는 레베데프 소장 외에도 후르소프 소장과 제7부 정치부장 그로모프 대좌, 제7부 정치부부장 이그나치프 대좌, 특수 정보부대장 일레인스키 대좌 등의 정치부 전문장교들이 포진, 활동했다.(주13)

9월 초순에는 제1극동전선 사령부 제7국 소속 메크레르 중좌와 강미하일 소좌가 평양에 도착, 합류했다. 소련군은 경무사령부를 설치하여 치안을 확보하고, 민정기관을 통해 북한 내의 정치질서를 잡아갔으나 복잡한 정치 사정 등으로 혼선이 계속되었다. 이에 동경주재 소련 대사관에서 근무하던 일본 전문가 발라사노프가 평양으로 와서 25군 사령부 직속 정보참모팀(당시 사령부 안에서는 발라사노프 참모부로 불림)을 만들어 핵심 역할을 담당했다. 발라사노프는 외형상으로는 소련 외무성 소속 외교관이었지만 실제로는 스탈린 시대 막강한 권력을 가졌던 소련정보기관인 내무인민위원부(NKVD) 소속의 현역 대위였다. 대일전쟁 전 일본의 정세 등을 분석해 모스크바에 보내 소련의 대일전 준비에 중요한 정보를 제공했던 그는 평양에서 남북한 정세분석과 판단, 북한의 정치 상황분석, 북한의 민주개혁 등에 깊숙이 관여한 실세 정보장교였다.(주14)

출처: 기광서, 소련의 대한반도-북한정책 관련 기구 및 인물 분석, 현대북한연구 창간호(1988), 130쪽
출처: 기광서, 소련의 대한반도-북한정책 관련 기구 및 인물 분석, 현대북한연구 창간호(1988), 130쪽

<그림> 북한점령 소련군 사령부 체계도

김국후, 『평양의 소련군정』, 한울, 2008, 94쪽
김국후, 『평양의 소련군정』, 한울, 2008, 94쪽

 

1945년 겨울 평양주둔 제25군 사령관 치스차코프 대장(왼쪽)과 소련군 민정담당 사령관 로마넨코 소장(오른쪽) 등이 대화하고 있는 모습.
1945년 겨울 평양주둔 제25군 사령관 치스차코프 대장(왼쪽)과 소련군 민정담당 사령관 로마넨코 소장(오른쪽) 등이 대화하고 있는 모습.

해방 후 북한과 소련 관계의 최고 실력자였던 스티코프

소련의 대일 전쟁이 종결되고 난 뒤인 1945년 9월 3일 전시 편제의 제1극동전선군은 연해주 군관구로 개칭되었다. 연해주군관구는 북한 주둔 25군에 대한 군사상 지휘뿐 아니라 모스크바 지도부의 대북한 정책을 25군 군사회의와 민정기관에 하달하고 이들의 보고와 정책 건의를 취합하여 자체안을 작성, 상부에 보고하는 체계를 갖추고 있었다. 연해주군관구 군사회의가 북조선 민정사업을 지도했다. 연해주군관구 사령관은 메레츠코프 원수이고, 군사회의 위원은 T. F. 스티코프 상장이었다.

한반도 문제와 관련해서는 스티코프가 무엇보다 중요한 역할을 했다. 스티코프는 모스크바의 대북 정책결정을 25군사령부에 단순히 전달하는 데 그치지 않고 스스로 정책입안에서 핵심적 역할을 수행했다. 그는 스탈린, 몰로토프, 쥬다노프 등 모스크바 최고 정책결정자들과 직접적인 연결 통로를 가지고 있었다. 특히 그는 쥬다노프의 사위로서 모스크바에도 영향력을 확보하고 있었다. 당정치국 ‘정령’ 초안들이 그에 의해 작성된 경우도 있었다. 또한 스티코프는 한반도의 운명을 결정하기 위한 미소공동위원회 소련 대표단 단장으로서 서울과 평양을 오가며 미소간의 교섭에서도 막대한 권한을 행사했다. 그는 일련의 파업 투쟁과 3당 합당을 통한 남로당 결성, 김일성과의 정책문제 협의 등을 통해 해방정국에서 한반도 정치상황 변화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군사회의가 해소되는 1947년 1월 이후에도 정치부 부사령관을 맡아서 이전의 역할을 고스란히 수행했다. 그는 연해주군관구와 25군사령부의 정치기관을 포함한 대북한 민정업무를 총괄했고, 모스크바 당국의 대한반도 정책판단과 결정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해방 3년간 북한의 주요 정책 입안과 집행 등에 개입하지 않은 일이 없다고 할 정도로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주15) 그는 북한 정권 수립 후 초대 북한 대사까지 지냈으며 『스티코프 일기』를 남겼다.(주16)

해방 후 북한의 정치 상황 변화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던 소련군 연해주군관구 정치위원 쉬띄꼬프(스티코프)와 그가 남긴 『쉬띄꼬프 일기』
해방 후 북한의 정치 상황 변화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던 소련군 연해주군관구 정치위원 쉬띄꼬프(스티코프)와 그가 남긴 『쉬띄꼬프 일기』

스티코프는 북한 정치 상황 변화에 핵심 역할을 했지만 일방적으로 북한 지도부에 지시하는 방식을 취하지는 않았다. 대체로 김일성‧김두봉 등의 북한지도부와 협의, 논의하였고, 소련과 스티코프의 입장이 모두 북한 지도부에 일방적으로 수용된 것은 아니었다. 또한 스티코프는 소련의 이익을 일방적으로 대변한 그런 인물은 아니었다. 그는 소련의 정책을 “조선인의 견지에서 파악하려고 애쓴 몇 안 되는 인사”에 속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는 크레믈린의 방침과 대치될 수 있는 북한측의 요구사항을 수용하려는 태도를 취하기도 했으며, 그 때문에 모스크바 지도부의 질책을 받기도 했다. 그 때문에 스탈린으로부터 “당신은 소련의 대표이지 조선의 대표가 아니다”라는 질책을 듣기도 했다.(주17)

북한 정권 수립 후 초대 북한대사로 부임해 한국전쟁 때도 대사로 있었던 스티코프는 1950년 9월 미군의 인천상륙작전 후 인민군의 후퇴와 북한이 위기 상황에 처하자 소련본국으로부터 현지 지휘부에 문책 차원에서 1950년 11월 대사에서 해임, 경질되었다. 소련으로 돌아간 스티코프는 한동안 시련의 시기를 보냈으나 스탈린 사후 곧 노브고로드주 당위원회 제1서기로 재기하였다. 이어 그는 연해주 변경위원회 제1서기를 거쳐 1956년 소련공산당 중앙위원으로 승진하였다. 그 후 주헝가리 특명전권대사(1959), 러시아연방 내각회의 국가검열위원장(1961),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 러시아연방 조직위원회 및 내각회의 당국가검열위원회 부위원장(1963) 등을 역임하며 출세가도를 달렸다. 그러다가 1964년 10월 레닌그라드에서 심장마비로 57세의 비교적 젊은 나이에 생을 마쳤다.(주18)

1949년 1월 군복을 벗고 초대 주북한 소련대사로 부임한 스티코프와 김일성의 기념촬영.
1949년 1월 군복을 벗고 초대 주북한 소련대사로 부임한 스티코프와 김일성의 기념촬영.

스티코프 외에 중요한 인물로 연해주군관구 정치국장이 있는데, 처음에는 칼라쉬니코프 중장이었다. 1946년 중반 이후에는 제2극동전선군 참모부 정찰부장으로서 88독립보병여단(동북항일연군교도려) 결성에 관여했던 소로킨 중장이, 1948년경에는 두보스키 소장이 각각 임명되었다. 정치국 7부장 메끌레르 중좌는 해방 직후 북한에 들어와 정세파악과 김일성 동행 업무를 수행하며 현지에서 핵심적인 실무역할을 담당했다. 또한 앞애서 언급한 바 있는 25군 산하 정치부장 그로모프 대좌, 연해주군관구 정치국 부국장 바빌로프 대좌 등도 북한 현지에 투입되어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주19)

김일성과 소련군 제7부 정치부장 메크레르 중좌의 대화 모습(1945년 9월 26일)
김일성과 소련군 제7부 정치부장 메크레르 중좌의 대화 모습(1945년 9월 26일)

1945년 8월 9일 한반도 북부에 대한 공격과 함께 진격을 개시한 소련군은 8월 말경 38선 이북에 대한 점령을 끝냈다. 소련군은 경무사령부를 중심으로 북한의 치안을 확보하는 한편, 민정기관을 통해 인민위원회 등 인민자치조직들과 협력관계를 맺어 간접적인 방식으로 이북지역을 장악, 통제하였으며, 1948년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가 수립, 출범할 때까지 북한의 정치 상황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소련군사령부는 남한의 미군과 달리 미군정청과 같은 권력기구를 만들지 않고 뒤에서 인민조직을 지원하는 형식을 취했기 때문에 ‘소군정’이라는 표현은 적절치 않지만 북한 정세 변화에 결정적인 영향일 미친 것은 확실하다. 그럼에도 북한의 권력기관인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나 북조선인민위원회가 출범하면서 북한에서는 소련군은 배후에서 북한의 권력기관의 활동을 지원하는 형식을 더욱 강화했기 때문에 이후의 전반적인 인민정권 차원에서 파악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 부분은 뒤에 북한의 정치상황을 다루면서 살펴보도록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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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1) 서대숙, 소련 군정: 개설, 『아시아문화』 8, 1992.12, 118쪽

2) 김국후, 『평양의 소련군정』, 한울, 2008, 53〜54쪽

3) 기광서, ‘소군정’은 실재했는가, 『역사비평』 2005.11, 78〜79쪽

4) 기광서, 위의 글, 79쪽

5) 기광서, 위의 글, 79쪽

6) 기광서, 소련군의 북한 진주와 ‘부르주아민주주의’ 노선, 『통일문제연구소』(조선대학교) 제20권 제1호(2005), 77∼81쪽

7) 서대숙, 앞의 글, 123쪽

8) 기광서, ‘소군정’은 실재했는가, 『역사비평』 2005.11, 80쪽

9) 김광운, 소련의 대북한정책과 공산당 중앙지도기관의 결성, 역사와현실 22(1996.12), 183쪽

10) 기광서, 소련의 대한반도-북한정책 관련 기구 및 인물 분석, 『현대북한연구』 창간호(1988), 122〜123쪽

11) 기광서, 위의 글, 123〜126쪽

12) 기광서, 위의 글, 132〜135쪽

13) 김국후, 앞의 책, 86쪽

14) 김국후, 위의 책, 86쪽

15) 기광서, 소련의 대한반도-북한정책 관련 기구 및 인물 분석, 128〜129쪽

16) 국사편찬위원회 편집부엮음/전현수옮김, 『쉬띄꼬프일기 1946〜1948』, 국사편찬위원회, 2004 참조.

17) 기광서, “슈티코프, 해방 후 북소관계의 실력자”, 『내일을여는역사』 24(2006.6), 154쪽

18) 기광서, 위의 글, 151〜152쪽

19) 기광서, 소련의 대한반도-북한정책 관련 기구 및 인물 분석, 131〜132쪽

 

임영태 필자 약력

 

출판기획자, 저술가. 청년시절 민주화․사회운동에 관계했으며, 한국 근현대사와 세계사, 인문․사회 관련 대중서의 기획․집필에 힘쓰고 있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에서 공식 보고서 발간을 총괄했으며, 지금은 평화박물관의 ‘반헌법행위자 열전편찬위원회’ 조사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저서로는 『한국에서의 학살-한국현대사, 기억과의 투쟁』, 『새로 쓴 한국현대사-해방부터 촛불항쟁까지 35장면』(공저), 『솔직하고 발칙한 한국 현대사』(공저), 『스토리 세계사 1~10』, 『두 개의 한국 현대사』, 『산골대통령, 한국을 지배하다』, 『국민을 위한 권력은 없다』, 『대한민국사 1945~2008』, 『대한민국50년사』, 『북한50년사』, 『거꾸로 읽는 한국사』(공저), 『거꾸로 읽는 통일이야기』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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