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장원(전교조 통일위원회 사무국장, 무학여고 교사)


6월 4일 충무로 가게 앞에서 맥주 한잔 하며, 축구를 보고 있었다. 승리를 환호하는 부산구장은 `붉은 물결`이었다. 함께 보던 친구가 말했다. "오늘 한국은 `레드 컴플렉스`을 완전히 벗어났다." 웃었다. 전철 안 `붉은 악마`들이 적지 않게 눈에 띄었다. 6월 10일은 그 수가 10배는 불어난 듯싶었다.

불현듯 학교 운동회가 생각났다. `청군백군`. 내가 초등학교 다닐 때부터 응원전은 청군백군이었다. 그리고 40이 넘은 지금도 학교의 응원전은 `청군백군`이다. 왜 하필 청군백군일까? `붉은 악마`를 보면서 불현듯 이런 의문이 들었다.

`청실홍실`, `청단홍단`, 예로부터 우리에겐 `청`과 `홍`이 음양의 대비색으로서 어울리는 쌍이었다. 당연히 두 패로 나뉘어 경기와 응원을 한다면 `청군홍군`이었다.  

어울리지 않는 말 `청군백군`이 쓰이게 된 것은 한국전쟁 이후라고 한다. `홍`이 `빨갱이`를 의미한다고 그렇게 바꾸었다고 한다. 동무란 말이 금기어가 되고, 인민이란 말이 모든 문장에서 사라져버렸듯이, `청군홍군`도 사라져 버렸다. 적대적 대결의식 = 냉전의식의 만들어낸 현상이다.

지금 `청군홍군`이란 말을 되살려 쓰자고 하면 어떨까? 어쩌면, 색깔공격을 받을지 모른다. 작년인가 한완상 전 교육인적자원부 장관이 `창발성`이란 말을 썼다고 한국교총으로부터 집중공격을 받은 일이 있었다. 그 말이 북에서 사용하는 말이라는 까닭에서였다.

조금만 객관적으로 생각하면 참 어이없는 일이다. 남과 북은 같은 언어를 사용하던 한 민족이다. 8-90% 이상의 어휘를 함께 쓰고 있고, 때문에 이산가족이 만나도 통역없이 의사소통을 할 수 있다. 북에서 쓰는 말을 남에서 쓰고, 남에서 쓰는 말을 북에서 쓰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문제의 심각성은 한국교총의 이런 어이없는 공격이 큰 저항없이 통하고 있다는 점이다. 한국교총은 대학총장, 교수, 교장, 교감 등 한국 사회의 최고 엘리트들이자 한국 교육의 중추를 이루고 있는 집단의 결집체이다.

그런 한국교총에서 `북에서 사용하는 말`이란 이유로 한 나라의 교육 수장을 `빨갱이`인 듯한 인상을 심어주는 공격을 해도 별 저항 없이 통용되는 것은 한국 사회의 냉전의식의 위력이 상상 이상의 것임을 짐작하게 해준다. 지금 학교에서는 남북의 언어 이질화를 걱정하며, 언어 통합이 중요하다고 가르치고 있다. 그런데, 그런 교육을 하는 사람들이 `북에서도 쓰는 말`을 썼다고  `빨갱이` 운운하면 대체 어찌하자는 것인가?

냉전의식은 사람들의 사고를 묘하게 되틀리게 만들고 있다. 냉전의식은 사람들에게  다른 것에서는 상식적이고 합리적으로 사고하다가도 남북 관계, 사상 관계 문제만 나오면 `상식`과 `합리`는 저 멀리 가고, `몰상식`과 `흑백논리`가 정당한 듯, 당연한 듯 생각하게 하는 힘을 갖고 있다. 한국사회의 최고 지성인에게까지......

1999년 6월 금강산 관광객 민영미씨가 북에 억류되자 온 나라가 발칵 되집혔다. 금강산 관광이 중단되고 북에 대한 비난과 공격의 언어들이 전국을 뒤엎었다. 상당수의 언론과 지식인들이 이 극단적 언술의 정점에 섰다. 그러나, 조금만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민영미 관광객 문제는 그렇게 온 나라가 발칵 되집힐 문제는 아니었다.

우리는 교과서에서 `속지주의`를 배우며, 속지주의를 당연한 세계의 보편적 규율로 받아들인다. 때문에 미국에 가면 미국법을 지키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누군가가  미국법을 어겨 조사 받거나 구금된다고 난리를 피지 않는다. 금강산은 북쪽 땅으로서  북의 법률이 지배하는 지역이다.

민영미 관광객이 북의 땅에서 북의 법을 어겼다면, 북의 조사를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자국민 보호 차원에서 민영미 관광객에게 큰 피해가 가지 않게 하려는 마음을 가졌다면, 오히려 외교력을 동원하여 조용히 풀었어야 했다. 그런데, 상당수 우리의 언론과 지식인은 `큰 일`이나 난 것처럼 난리법석을 피웠다. `속지주의`의 세계 보편적 상식은 접어둔 채로.......

강원도 평창군 용평면 노동리에는 이승복 기념관이 있다. 체험학습으로 해마다 수만명의 학생들이 이 기념관을 들른다. 강원도, 충청남도 등의 초등학교에는 이승복 어린이 동상이 적지 않게 서 있다. 그리고 지금도 `이승복 어린이 추모 글짓기 대회`가 관청주도로 열리고 있다.

고 이승복 `공산당이 싫어요` 발언 여부에 대한 진위(眞僞) 논란이 여전히 미결인 채 남아있지만, 고 이승복 어린이는 학교교육에선 반공투쟁의 전사요, 영웅으로 추앙되어 왔고, 지금도 그러하다.

문제는 사망 당시 고 이승복 어린이의 나이가 10살에 불과했다는 점이다. 10살이라면 정치사상을 이해할 수 있는 나이가 아니다. 지금 대부분의 지식인들은 준성인인 고교생들의 사회참여조차 부적절하다고 하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하물며 10살 어린이의 정치사상적 발언을 했다고 그것을 추앙하고 기린다는 것은 `지성인`의 정상적인 사고일 수 없다.

10살 어린이가 그 무서운 상황에서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 하고 외칠 수 있었다는 것은 오히려 기리고 추앙해야 말 문제가 아니라, 반공교육이 얼마나 비정상적으로 사람을 세뇌시켰는가를 `교육학적으로 반성해야 할` 문제이다. 그러나 한국 교육사회에선 전국 초등학교에 동상을 세워 기리고, 추모 글짓기를 크게 벌일 정도로 자연스레 통하고 있다-한국의 대표적인 지성인이 자리한 학교 사회에서......

왜 그런가? 냉전의식이 비상식적이고 합리적이지 못한 사고를 정상적인 것처럼 만들어주고 있기 때문이다.

`퍼주기론` 등 지금도 끊임없이 만들어져 유포되고 있는 이런 비상식적이고 합리적이지 못한 냉전적 사고는 `난=선, 넌=악`이란 자기중심적 흑백논리에서 나온다. 때문에 객관을 보려 하지 않고, 나에게 유리한 것은 선이요, 불리한 것은 악이고, 이것이 남북관계에 적용되면 남은 무조건 `선`, 북은 무조건 `악`으로 판단하게 되고, 또 그것이 정당하고 그렇게 말하지 않는 사람은 `나쁜 놈`이 되게 된다.

이런 자기중심적 흑백논리가 가치관으로 자리잡으면서, `청군홍군`이 `청군백군`으로 바뀌고, `창발성`이란 말을 썼다고 `사상을 의심받는` 코미디가 벌어졌다. 냉전의식이 우리의 언어까지 옥죄는 삶의 현장이다. `웃어야 하지만, 웃을 수 없는` 분단 민족의 비극이다.

아마 좀더 `붉은 악마`에 대해 냉전세력이 `왜 붉은 색이냐` 하는 공격을 일찍 시작했더라면 `붉은 악마`는 `하얀 악마`로 바뀌는 코미디가 만들어졌을런지도 모른다. 다행이 그런 색깔 공격은 크게 일어나지 않았다. `붉은 악마`가 정치색이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여하튼 `붉은 악마`는 `붉은 색`에 대한 콤플렉스를 지우고 `붉은 색`을 해방(?)시켰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우리 사회 곳곳에 스며들어 우리들의 상식과 합리적 생각을 가로막는 냉전의식의 벽이 하나하나 깨져나가길 기대해본다.

우리 사회가 `상식이 통하는` 그런 사회가 될 때, 민중의 상식의 힘으로써, 냉전의 벽을 허물고 화해평화통일로 나가는 거대한 힘이 분출되어 나오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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