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몸이 죽어 죽어 일백 번(一百番) 고쳐 죽어,
     백골(白骨)이 진토(塵土)되어 넉시라도 잇고 업고,
     님 향(向) 일편 단심(一片丹心)이야 가싈 줄이 이시랴

이 시조는 너무나 유명한 정몽주의 `단심가(丹心歌)`입니다. 정몽주가 이방원의 `하여가`에 대한 답으로 이 시조를 보냈으며, 그 결과 이방원이 선죽교에서 정몽주를 죽였다는 것은 너무나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국어 시간에 이 시조의 주제는 `충절` 또는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정신`, 즉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 정신이라고 배웁니다. 고려 말의 충신이라 일컬어지는 정몽주의 `단심가`를 읊을 때 어쩐지 숙연해짐을 느끼는 경험을 누구나 한번쯤은 갖고 있을 것입니다. 이 시조의 내용은, 정몽주의 충절을 위한 비장한 마음이 가슴 속 깊이 전해져 오는 느낌을 갖게 하곤 합니다. 정몽주처럼 지조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치기는커녕 시류와 자기의 이해에 따라 간에 붙었다 쓸개에 붙었다 하는 `철새 정치인`들이 많은 현실은 이러한 느낌을 더욱 많이 갖도록 합니다.
 
그런데 역사적 사실을 곰곰이 살펴보면 이런 이해는 뭔가 석연치 않은 점이 있습니다. 정몽주가 선죽교에서 죽임을 당한 해는 1392년이었습니다. 이 해는 조선이 건국된 해입니다. 조선을 개국한 세력들은 정몽주를 죽인 뒤 조선 건국에 박차를 가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앞에서도 보았듯이 위화도 회군 뒤 고려 왕은 두 차례나 바뀝니다. 과연 이때 정몽주는 무엇을 했을까요?
 
정몽주는 공민왕 때부터 벼슬을 했던 사람입니다. 우왕 때에 북원을 섬기지 말 것을 주장하였다가 권문세족인 이인임의 미움을 받아서 일시 귀양을 간 적도 있었지만, 이성계를 따라서 운봉에서 왜구를 물리친 공으로 밀직제학(密直提學)이라는 벼슬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 뒤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기도 했고, 삼사좌사(三司左使)라는 벼슬에 오르기도 합니다. 위화도 회군에서 정몽주가 어떤 역할을 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만, 위화도 회군 뒤에 대제학(大提學)에 오르는 것을 보면 이성계 쪽을 지지한 것은 확실해 보입니다.
 
이런 사실들을 바탕으로 볼 때 정몽주와 이방원은 고려 말의 권문세족을 몰아내는 데에서는 동지로서 같은 길을 걸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의 관계는 위화도 회군을 지나 최영을 제거할 때까지도 전혀 문제가 없었습니다. 위화도 회군 뒤에 이성계를 중심으로 하는 사대부들은 최영을 제거함과 아울러 우왕을 몰아내고, 그의 어린 아들인 창왕을 왕으로 앉혔습니다. 우왕은 권문세족인 이인임 들이 왕위에 앉힌 사람이고, 이인임 들이 제거된 다음에는 최영에게 모든 것을 의존했던 왕이기 때문에 최영을 제거한 사대부들이 우왕을 제거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귀결이었습니다. 이때에도 정몽주는 전혀 반대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적극적으로 참여하기까지 했습니다.
 
최영과 우왕을 제거한 사대부들은 과전법을 비롯한 개혁을 실시하면서 겨우 1년 만에 창왕마저 제거했습니다. 그들은 우왕은 공민왕의 아들이 아니라 신돈의 아들이고, 우왕의 아들인 창왕도 정통 왕손이 아니라 신돈의 혈통이므로 왕의 자격이 없다는 명분을 내세웠습니다. 우왕에 이어서 창왕마저 제거할 때도 정몽주는 반대하기는커녕 함께 참여했습니다. 말하자면, 정몽주는 최영과 우왕, 창왕을 제거하는 과정에서는 이방원과 동지이자 공범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정몽주가 이방원과 싸우면서 지은 시조의 내용에 있는 `임`은 임금을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이와 같은 시대적 상황을 생각해 볼 때, 우리는 당시의 세력 관계를 다음과 같이 그려 볼 수 있습니다. 고려 말 권문세족에 대항하는 세력으로서 최영과 사대부들이 있었습니다. 위화도 회군 다음 최영이 제거되었습니다. 최영의 제거와 함께 우왕과 창왕도 제거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세력은 사대부들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정몽주와 이방원은 왜 싸운 것일까요? 더욱이 그 싸움은 죽음도 마다 않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그때 사대부들이 심각하게 분열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사대부들은 권력까지 차지한 마당에 무엇 때문에 서로 갈라선 것일까요?
 
그 무렵 사대부들은 개혁의 폭과 속도를 둘러싸고 많은 견해 차이가 있었습니다. 공동의 적이 있을 때에는 이러한 견해 차이는 그저 개인적 차이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공동의 적이 사라진 상황에서 그 견해 차이는 분열로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역사의 격변기에는 이러한 현상이 일반적으로 나타납니다. 그때의 사대부들도 자기네들 사이의 의견 차이가 분열로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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