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과 북은 나라의 통일을 위한 남측의 연합제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안이 서로 공통성이 있다고 인정하고 앞으로 이 방향에서 통일을 지향시켜 나가기로 하였다.` 지금도 눈에 선한 2년전 평양에서 남북의 정상이 합의한 6.15 남북공동선언의 제2 항이다. 언제 읽어보아도 명문(名文)일 뿐 아니라 그 의미도 매우 깊다.

◆ 이 제2 항은 `남과 북은 나라의 통일문제를 그 주인인 우리 민족끼리 서로 힘을 합쳐 자주적으로 해결해 나가기로 하였다`는 제1 항과 함께 모두 5개항으로 되어있는 6.15 공동선언의 정수(精髓)로 통한다. 제1 항이 `자주`라는 통일의 원칙을 밝혔다면, 제2 항은 `서로 다른 이념과 체제를 인정한` 바탕에서 통일의 방도를 밝혔기 때문이다.

◆ 그런데 23일 한나라당 이회창 대통령 후보가 관훈클럽 초청 토론회에서, 6.15선언과 관련한 질문에 처음에는 "6.15 선언의 원칙과 정신을 살릴 것이나 2항은 그대로 갈 수 없으며, 많은 국민의 생각과 크게 다른 만큼 분명히 짚고 정확히 해야 한다"면서 "이 조항을 폐기해야 한다"고 말했다가, 토론회 말미에 "대통령 후보로 나온 사람이 2항을 바로 폐기해야 한다는 것은 너무 오만한 자세로 보이기도 할 것"이라며 `폐기`가 아니라 `짚고 넘어가야 한다`는 의미라고 발언을 정정했다고 한다.

◆ `폐기`든 `짚고 넘어`가든 이회창 후보의 통일관에 대해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제2 항이 바로 6.15 공동선언의 정신, 즉 `남과 북이 서로 다른 체제와 이념을 존중하자`는 정신인데, 이를 부정하면서 6.15 공동선언의 정신과 원칙을 계승하겠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도대체 무슨 정신을 계승하겠다는 것인가? 게다가 제2 항이 `많은 국민의 생각과 크게 다른 만큼`이란 또 무슨 뜻인가? 6.15 공동선언은 세계가 지지하고 국민적 컨센서스가 이미 이뤄진 바 있다. 자기 주장이 맞게끔 보이기 위해 가만히 있는 `많은 국민`의 이름을 팔아먹어선 안된다.

◆ 또한 이회창 후보는 `금강산 관광사업`에 대해 "육로관광이 허용되고 금강산관광특구로 지정돼 수익성이 보장된다는 전제가 충족되면 계속해도 된다"고 말했고, 김정일 국방위원장 답방에 대해서도 "(전제조건은 아니지만) 답방하게 되면 남북한 신뢰구축을 위해 6.25 전쟁과 테러문제 등에 대해 사과나 해명이 있어야 한다"고 강경 입장을 개진했다. 금강산 관광사업이 갖는 `평화사업`적 측면을 애써 외면하고 `경제사업`만 강조하려는 것이나 `답방`에 전제 아닌 전제를 다는 것들은 모두가 `반대를 위한 반대`거나 `언어의 유희`로 밖에 들리지 않는다.

◆ 더 나아가 이회창 후보는 `집권한 뒤 미국 부시 행정부가 악의 축을 거론하며 북한을 공격한다면 지지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아주 추상적인 가정이므로 답변을 안하고 싶다. 다만 한국을 안전하고 평화롭게 유지하는 게 대통령의 임무라고 말하고 싶다"고 대답했다. 이 무슨 해괴한 답변인가? 아무리 `가정`이라 할지라도 명확히 대답할 말이 있고 슬쩍 회피할 말이 있다. 미국의 북폭에 대해 명확히 "안된다"라고 대답하지 못하는 이유가 어디 있단 말인가? 답변회피는 마치 북한공격 지지로 느껴질 정도이다.

◆ 재임중 대북정책이 스무번 이상 온탕과 냉탕을 왔다갔다해서 비판받은 김영삼 전대통령조차 1994년 미국의 대북침공 일촉즉발의 상태에서, 당시 클린턴 미 대통령과의 전화담판을 통해 이를 극구 말렸다고 무용담처럼 얘기한 적이 있다. `전쟁만큼은 막아야 한다`는 것이었다고 한다. 통일관과 대북관에 있어 `흡수통일론`과 `대북적대시 정책`도 모자라 전쟁관에 있어 `호전성`(好戰性)까지 띠어선 안된다. 또한 민족적인 문제를 정략적으로 이용해서도 안된다. 그런데 이번만큼은 이회창 후보의 통일 및 북한과 관련한 일련의 발언이 정략적인 발언이길 바라고 싶다. 그대로 받아들이기엔 그의 관점들이 너무 시대착오적이고 끔찍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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