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북조선 분국과 김일성의 권력 장악

김일성과 박헌영이 역사적인 첫 대면을 한 것은 1945년 10월 8일 저녁. 이들이 만난 곳은 38선 근처의 소련군 38경비사령부 회의실. 이들 두 사람은 이곳에서 다음날 새벽까지 일반 정세·정치노선·조직노선을 두고 치열한 토론과 논쟁을 벌입니다.

33세의 젊은 빨치산 지도자 김일성과 45세의 한국공산주의운동의 대부 박헌영은 운명적 만남에 대해서는 1990년대 이전까지 남한에는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이전까지는 박헌영이 미군정의 수배를 받아 월북하면서라고만 짐작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그러나 실제로는 그것보다 1년 전부터 두 사람의 만남이 시작되었고, 중요한 문제가 있을 때마다 두 사람은 만나 박헌영이 월북할 때까지 여섯 차례나 비밀회동이 이루어졌습니다.

서울의 박헌영은 왜 그 바쁜 시각 38선을 넘어 김일성을 만나야 했을까요? 박헌영으로서야 서울에서 만나고 싶었겠지만 보안과 안전을 보장할 수 없으니 소련군 점령지역에서 만날 수밖에 없었지만, 두 사람이 만나야 할 필연적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문제의 핵심은 북한 지역에서 당 중앙조직을 건설하는 문제였습니다. 앞에서 보았듯이 김일성과 빨치산파는 독자적인 당 창건을 위해 치밀하게 준비를 진행해 갔지만 난관에 부닥쳤던 것입니다. 당을 조직하기 위한 전 단계로 ’서북5도당 책임자 및 열성자 대회’를 개최하기로 하고 10월 5일부터 8일까지 예비회의를 열었습니다. 그런데 예비회의에서 북조선 지역의 독자적인 당 중앙지도기관의 결성이라는 빨치산파의 주장이 서울의 박헌영을 지지하는 국내파의 심각한 반대에 부딪치게 됩니다. 결국 김일성은 이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박헌영을 만나 담판을 짓지 않을 수 없다고 판단하게 됩니다.

그렇게 해서 이루어진 김일성과 박헌영의 첫 만남에서 두 사람은 상당한 견해차를 노정했습니다. 정세판단에서 심각한 차이가 나타났습니다. 박헌영은 자신의 ’8월 테제’의 정세인식을 거듭 주장했고, 김일성은 그에 대해 논박했습니다. 핵심 문제는 미국에 대한 입장과 통일전선문제였습니다. 박헌영은 미국을 파시스트 제국주의와 싸운 민주주의 국가로 보았고, 미군이 점령한 서울에서의 공산당 활동에 대해서도 낙관적으로 보았습니다. 반면 김일성은 미군정의 공산당에 대한 탄압이 거셀 것을 염려해 소련군이 점령하고 있는 북한 지역에 당 중앙을 두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견해를 피력했습니다. 또 김일성은 박헌영의 ’인민전선’ 주장에 대해 좌경적이라 비판하면서 민족부르주아까지 포함하는 광범위한 ’민족통일전선’이 되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런 정세 인식의 차이는 결국 북한에 독자적인 중앙조직을 두는 것이 옳으냐 그르냐는 문제로 연결되었습니다. 박헌영은 1국1당 원칙을 주장했고, 김일성은 남북의 정세 차이를 근거로 이북 5도 지역의 중앙조직 결성을 주장했습니다. 소련군도 김일성의 주장을 지지했습니다. 결국 토론은 박헌영이 김일성의 주장을 받아들이는 방향으로 결론지어졌습니다. 박헌영은 "중앙당에 속하되 북부 지역 공산당 조직을 지도할 수 있는 중간기구로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을 설치하자"고 한발 물러선 것입니다.

김일성과 박헌영의 회동으로 북한 지역에서 당 중앙조직을 창설하는 문제는 현실화되었습니다. 10월 10일 ’조선공산당 이북5도 책임자 및 열성자 대회’가 열려 북조선분국 설치가 결정되었습니다(현재 북한의 당 창건 기념일은 10월 10일). 10월 13일에는 북조선분국 집행위원도 선출되었습니다. 책임자로 김용범이 선출됐고, 집행위원회 김일성, 안길, 김용범, 박정애, 주영하, 장순명, 오기섭, 박정호 등 17명이 선출됩니다. 이로써 북한 지역에 독자적인 당을 창건해야 한다고 주장한 빨치산파의 주장은 관철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김일성이 권력을 완전히 장악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김책, 최용건 등 빨치산파의 핵심 인물들은 집행위원에 선출되지도 않았으며, 당의 정치노선도 여전히 서울 박헌영의 주장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에 김일성과 빨치산파는 ’북조선분국’을 의도적으로 ’중앙지도부’ 또는 ’중앙위원회’라고 부르는 등 서울의 조선공산당과 차별화된 독자적인 조직으로 전환하는 작업에 들어갑니다.

이런 작업을 바탕으로 11월 23일과 24일에 열린 제2차 확대집행위원회 회의에서 김일성은 [4대 당면과업에 대하여]란 제목으로 보고를 하게 됩니다. 그 주요 내용은 "토지·노동·산업 등에서 민주개혁을 해야 하고, 이를 통해 혁명 근거지를 이북에 창설해야 하며 민족반역자를 숙청하되 민족통일전선의 기치 하에 전 민족이 단합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2차 회의에는 감옥에서 나온 공산주의자들이 대거 참가해 김일성의 민족통일전선 주장에 지지를 보냈습니다. 이를 계기로 김일성은 북조선분국의 주도권을 장악하게 됩니다. 정치노선도 반제반봉건민주주의혁명과 민족통일전선으로 틀이 잡혔고, 분국의 활동도 서울 중앙조직과는 별개로 독자적으로 활동했습니다.

그러나 공산당은 아직 세력도 미약했고 혼란도 심각했습니다. 당시 공산당원 수가 4,200여명에 불과했는데도 당내는 온갖 파벌들이 활개를 치고 있었습니다. 당내에서 여전히 ’박헌영 만세’, ’오기섭 만세’가 외쳐지는 등 파벌의식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당과 대중의 연계사업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11월말에는 공산당과 학생들이 충돌한 신의주 사건이 발생했는데 이 사건은 공산당의 취약한 대중연계를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신의주 사건은 김일성이 직접 파견되어 가까스로 수습의 가닥을 잡기는 했으나 공산당에 적지 않은 타격을 주었습니다. 공산당은 인민위원회에 대한 지도도 미약했고, 인재양성 프로그램도 갖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1945년 12월 무렵 북조선분국이 처한 상황은 한 마디로 매우 심각했습니다. 공산당은 당, 통일전선, 대중사업에서 심각한 시행착오를 범하고 있었고, 이러한 오류가 시정되지 않으면 아무리 소련군의 암묵적인 지원이 있더라도 주도권을 상실할 위험에 놓여 있었던 것입니다. 당시 이런 사정을 김일성은 후에 "당시 그대로 놓아두어 가지고는 죽도 밥도 안 되겠더라"고 회상했을 정도로 공산당은 문제가 심각했던 겁니다.

이런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김일성이 당을 틀어쥐어야 한다는 요구가 강력히 제기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12월 17일 제3차 확대집행위 회의가 개최되었습니다. 회의에서 김일성은 [북부조선공산당 공작의 착오와 결점에 대하여]라는 보고를 통해 그 동안 당이 범한 착오와 결점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향후 과업을 제시하게 됩니다.

그리고 12월 18일 오후에는 ’김일성 책임비서 추대안’이 처리됩니다. 이로써 김일성은 북조선분국의 1인자로 떠오르게 됩니다. 동시에 10월 만주에서 귀국한 최용건도 확대집행위원에서 상무집행위원으로 선출됩니다.
김일성은 북조선분국 창설 2개월 뒤인 12월 18일 책임비서로 선출됨으로써 북한에서 확고한 지위를 구축하게 됩니다. 이미 항일투쟁의 영웅, 젊은 청년장군으로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진 상태에서 공산당까지 장악합니다. 이로써 김일성은 북한에서 가장 강력한 정치지도자로 자리잡게 되고, 1945년 12월 말 북한의 정치질서는 김일성을 중심으로 일차적인 재편을 마무리합니다. 이제 북한 곳곳에서는 ’김일성 장군의 노래’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그를 미화하는 구호가 넘쳐나게 됩니다.



** 지난 이야기는 [임영태의 북한 역사이야기] 메뉴에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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