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대(군사전문가)


전투기와 주적 개념의 상관관계

국방부가 새로 발간될 [국방백서]에서도 주적개념을 완강히 고수하기로 했다는 보도가 있다. 이 `주적`이라는 괴물 덩어리는 연일 정치권 색깔논쟁의 주 메뉴가 되다시피 하였고, 이제는 수구 보수세력이 절대 사수를 외치는 하나의 우상이 되어 가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오래된 이야기를 하나 들추어 보자. 다음은 1992년 1월 29일자 김재홍 기자가 쓴 "통일대비 「민족군대」 청사진/국방부 보고 「신국방정책」 의미"라는 제목의 동아일보 기사 중 일부다.

"국방부가 28일 노태우 대통령에게 보고한 92년도 업무계획은 지금까지의 북한에 대한 군사력강화 위주에서 탈피, 주변열강의 잠재적 위협에 눈을 돌려야 한다는 신국방정책 및 군사전략의 첫시행을 포함하고 있어서 주목된다. 지난해부터 국방부 정책팀이 마련해온 신국방정책은 북한을 「주적」으로 삼은 억제전력 조성에서 주변열강들에 대비한 중장기적 군사력건설로 방향을 전환해 간다는 내용이다...즉 단기 및 중기까지는 대북 억제전력의 증강과 대주변국 자주방위력 확보를 동시에 추진해 나가야 하는 이중고를 겪어야 한다는 것이 국방부당국의 설명이다...지금까지 북한을 「주적」 개념으로 삼았던 전력구조에서 주변열강을 「가상적」으로 대체한 신군사력으로 탈바꿈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지상군 비중을 줄이고 해공군을 증강시켜 간다는 것이 국방부의 복안이다...기술집약형 전력구조란 장거리 지대지 유도무기를 포함해 핵심적으로는 전투함 및 잠수함과 F15급 이상 전술기의 보유를 뜻한다."

이 기사가 나가고 동아일보는 국방부 측의 강력한 반발에 직면했다. 이튿날 [주적보도 국방부 시각(기자의 눈)]이라는 제목의 동아일보 기사를 보자.

"국방부는 28일 지금까지 북한을 대상으로 했던 「주적」개념이 주변열강들의 잠재적 군사력위협을 겨냥하는 방향으로 바꾸어지고 있다는 본지기사가 사실과 다르다며 이의 정정보도를 요구했다. 이날 오후 국방부 정책실장 김재창 중장, 교육정훈국장 양상태 소장, 대변인 윤창노 준장 등은 주적이란 용어에 경악하는 표정을 지었다. 김실장은 『국방부가 주적이라고 규정하고 나면 선전포고와 같은 것』이라며 『도대체 국방부에서 신국방정책이라고 씌어진 문건을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다』고 흥분했다. 곧 이어 육군본부의 한 대령은 『군사훈련 등에서 공격목표를 뜻하는 주공이라는 용어를 쓰지만 주적이란 말은 처음 들어본다』고 거들었다."

독자 여러분께서는 이 두 개의 기사를 보고 어떤 생각이 드는가. 여기에서 국방부 입장 중 중요한 것은 우리의 주된 위협이 북한이냐, 주변국이냐 하는 논쟁이 아니라 주적이라는 용어 자체를 인정 못하겠다는 것이다. 국방부가 `주적`이라는 용어는 처음 들어보며, 이런 용어를 쓰는 것은 선전포고를 한 것과 같다고 흥분하는 모습이 이채롭다. 다시 말하면 10년전 국방부는 주적이라는 용어는 절대 써서는 안되는 금기사항으로 파악했다는 점이다.
 
그런데 10년 후 지금은 어떠한가. 세계 어느 나라 국방백서에서 주적을 명기한 나라는 없다며 이와 같은 용어를 폐지하자는 주장, 즉 10년전 국방부와 똑같은 주장에 대해 지금의 국방부는 마찬가지로 흥분하고 있다. 군 대비태세 유지를 위해서는 주적개념을 절대 포기할 수 없다는 투다. 이제 이런 주적개념 폐지 주장에 대해서는 색깔이 의심스럽다며 정치권의 수구 보수세력도 단단히 가세하고 있다. 재향군인회도 마찬가지다.
 
이것이 바로 국방부의 수준을 보여주는 한 사례라고 보여진다. 10년전에 주적 용어의 존재 자체도 불인정했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이제 와서 주적이라는 용어가 사라지면 국방 대비태세가 허물어지는 것처럼 호들갑을 떨고 있다.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 중에는 10년 전에도 국방의 주요 정책결정 라인에 있던 사람들이 다수 있다. 그들은 10년전 자신이 했던 말도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는 말인가. 이렇게 이들이 한입 갖고 두말하는 동안 어리둥절해 지는 것은 국민들이다.
 
이 기사를 작성한 당시 동아일보 김재홍 기자는 대북한 주적개념을 고수하는 군사력 건설은 북한 위협만을 대상으로 하는 재래식 군사력 건설을 뜻하는 것이요, 주변 위협, 즉 가상적으로 시야가 확대되면 첨단 군사력 건설을 위한 국방비가 대폭 확대된 상황으로 파악했다. 즉, F-15K를 도입하는 10년 후 현재 상황이 김 기자의 눈으로는 주적개념이 북한에서 대주변으로 확대된 새로운 차원의 국방으로 바라보았다는 점이다.

국방부 말바꾸기는 감정논리

사실 국방부가 내세운 F-X사업의 당위성은 크게 두 가지다. 노후전력 공백을 보충한다는 것과 한반도 주변 5백km 인근의 불특정 위협을 응징·보복하는 고성능 전투기를 갖는다는 것이다. 즉 북한 위협을 넘어선 대주변 불특정 위협에 대비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10년전 시각으로 볼 때 주적개념은 이미 폐기된 것과 다름없지 않는가.
 
이렇게 보면 원래 주적논쟁 존폐논란은 대북한 위협에 충실한 전력증강을 하자는 세력과 대주변 위협까지 고려한 첨단전력 군비증강을 하자는 세력 간의 논쟁, 즉 보수 내부논쟁이 되어야 옳다. 단순히 파악하자면 그렇다. 그러나 현실은 마치 보수-혁신 세력간의 색깔논쟁으로 이 문제가 비화된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주적 용어 자체를 일체 불인정하던 국방부가 범정부 차원의 합의도 전제되지 않은 채 95년부터 국방백서에 난데없이 주적이라는 용어를 쓰면서부터였다. 이 때부터 주적이라는 용어는 `제1의 가상적`이라는 본래의 군사적 의미가 사라지고 반북 수구보수를 입증하는 하나의 부적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이 부적은 본래 생겨난 목적이 사라진 뒤에도 냉혹하게 존재하며 국민을 편가르고 소모적 정쟁으로 몰아넣는 희대의 괴물 덩어리가 되고 말았다. 이렇게 국민을 혼란시킨 책임 하나만으로도 국방부는 비난을 면할 수 없다.

이렇듯 군사적 용어에서 정치적 용어, 주술적 용어로 둔갑한 것이 주적개념이라면 이 개념은 더더욱 필요가 없다. 10년전 이 가능성을 가장 경계했던 국방부가 어느 순간엔가 무분별하게 이 용어를 구사하면서 발생한 이 소란에 왜 우리가 천둥에 개 뛰듯 흥분해야 하나.
  
그러면 이제 F-15K를 비롯한 각종 첨단장비가 정권 말기에 눈사태처럼 쏟아져오는 이 시기에, 방위개념의 혁명적 전환이 이루어지고 있는 이시기에 국방부는 한마디 설명이라도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공공연히 대주변 위협을 거론하며 첨단전력으로 전환하는 배경에는 주적에 대한 일정한 개념의 전환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말은 왜 못하는가.

바로 국방부가 색깔론에 발목이 잡혀있기 때문이다. 원래 있으나마나 한 용어를 갖고 북한이 폐지하라니까 자존심 상해서 못하겠다는 게 수구 보수세력과 국방부의 입장이다. 이것이 바로 국방부 수준이며 근거 없는 똥배짱은 아닌가. 이러고도 국민들은 비전문가 운운하는 그들의 전문성이 의심스럽다.
  
북한을 주적으로 하는 국방부에 F-15K 전투기는 필요 없다. 단순히 대북 위협에 대한 대응이라는 주적에 집착하려면 F-15K를 사지 말고 F-16을 더 생산하는 방법이 훨씬 값싸고 손쉬운 방법이라고 믿어진다. 신형 구축함은 더더욱 필요가 없다. 해공군 육성보다는 육군이나 계속 증강하는 것이 낫다. 그래서 계속 재래식 육군 전력에 집중하여 오직 북한만을 바라보는 주적개념에 충실하라고 권하고 싶다. 이것이 냉전시대를 그리워하는 국방부의 솔직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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