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쿠데타가 일어난 뒤에는 기존 집권 세력에 대한 무자비한 숙청이 이루어집니다. 특히 집권 세력의 대표격인 왕이나 대통령, 혹은 수상에게는 희한한 구실을 붙여서 그 자리에서 물러나게 하고, 이어서 대체로 목숨까지도 빼앗곤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런 역사적 사실을 접하면서 승자의 논리에 따라 생각하는 데 익숙해져 있습니다. 권력이란 으레 그런 것이라거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거니 하는 논리들을 말하곤 합니다.

사람들이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쿠데타로 얼룩진 우리 역사에서 승자의 논리를 그냥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데 익숙해져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런 논리는 자칫 일제의 지배도 강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합리화할 수 있고, 그 강한 자에 붙어 살았던 친일파의 논리도 정당화할 수 있는 논리입니다.
 
그러면 위화도 회군 뒤에는 기존 집권 세력에 대한 무자비한 숙청이 어떻게 이루어졌으며, 그것을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지 살펴보도록 합시다.
 
위화도 회군을 단행한 이성계는 먼저 최영을 유배 보낸 뒤 우왕을 공민왕의 자식이 아니라 신돈의 자식이라는 구실로 물러나게 합니다. 우왕이 신돈의 자식이라는 의심을 받게 된 것은, 우왕이 어린 시절을 신돈의 집에서 자라다가 신돈이 유배된 뒤 궁으로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공민왕은 신돈을 유배시킨 뒤 수시중으로 있던 이인임에게 "신돈의 집에 아름다운 여자가 있길래 가까이 했더니 아들을 얻었다"고 말하였다고 합니다. 왜 그때까지 신돈의 집에서 자라게 했는지 또 그때까지 공식적으로 밝히지 않았는지는 알 수 없는 일입니다.

공민왕에게 틈만 있으면 위해를 가하려고 하는 권문세족으로부터 아들을 보호하기 위해 가장 신임을 받는 신돈에게 아들을 맡긴 것인지 아니면 정말 신돈의 아들을 자신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인지는, 공민왕과 신돈을 둘러싼 많은 일들이 의문에 쌓여 있듯 역시 확실한 것을 알기가 어렵습니다.
 
아무튼 공민왕은 공식적으로 `우`가 자신의 아들이며 궁인 한씨가 그의 생모라고 밝혔습니다. 궁인 한씨는 그때 이미 죽고 없었습니다. 공민왕은 죽기 직전인 1374년 9월에 이 사실을 공표하고, 한씨의 3대 조상과 그녀의 외조에게 벼슬을 추증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공식적인 발표였을 뿐 공민왕이 이인임에게 밝힌 바에 따르면 `우`의 어머니는 신돈의 여종인 반야였습니다. 반야는 나중에 자신이 우의 생모라고 주장했다가 이인임에게 죽임을 당합니다. 그런데 공민왕이 궁인 한씨를 우의 생모라고 한 것은, 우가 반야의 아들이라고 하면 사람들이 우를 신돈의 아들이라고 의심할까봐 이렇게 꾸며 댄 것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여기서 그 진위를 가릴 수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습니다. 아무튼 이성계는 그것을 구실 삼아 우왕을 폐위시킬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웃기는 것은 그 다음 왕으로 창왕을 앉힌다는 것입니다.

우왕이 신돈의 아들이라면 창왕은 신돈의 손자가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어째서 이런 일들이 일어날까요? 그것은 우왕이 신돈의 아들이니 어쩌니 하는 것은 한낱 구실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왜 이처럼 어설프게 일을 처리했을까요? 그것은 우왕의 폐위나 창왕의 등극이 쿠데타 세력들 사이의 타협의 산물이기 때문입니다.

조선왕조실록에서도 창왕을 왕위에 앉힌 것은 조민수가 우왕의 장인 이임과 인척 관계에 있어서 우왕의 아들인 창왕을 왕위에 앉히라고 고집해서 그렇게 됐다고 합니다.
 
이성계를 비롯한 쿠데타 세력들은 우왕을 폐위시킨 뒤 강화로 유배 보냈다가 다시 강릉으로 유배지를 옮깁니다. 그리고 우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앉힌 창왕도 불과 1년 5개월만에 폐위시키고 강화도로 유배를 보냅니다. 그리고 왕실의 먼 일가인 공양왕을 왕위에 앉혔습니다. 공양왕이 즉위한 뒤 우왕과 창왕은 죽음을 맞이합니다.
 
창왕에 이어 왕위에 오른 공양왕도 곧 왕위를 이성계에게 넘겨주고 공양군으로 강등당합니다. 공양군이라는 것은 왕위를 공손하게 넘겼다는 치욕적인 이름입니다. 그리고는 강원도 지방에 유배되어 이곳 저곳으로 옮겨 다니다가 그 아들과 함께 2년이 채 안 된 1394년 4월에 목이 졸려서 죽임을 당합니다.
 
이성계를 비롯한 조선 개국 세력들은 고려 왕들만 죽인 것이 아니라, 왕가 일족의 많은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살해합니다. 강화와 거제에서는 왕씨들을 강화 나루와 거제 바다에 던졌습니다. 그러고는 중앙과 지방에 지시해 왕씨의 남은 자손을 대대적으로 수색하고 이들을 모두 목베었습니다. 또 전 왕조에서 왕씨로 성을 받은 사람은 모두 본래 성을 따르게 하고, 왕씨 성을 가진 사람은 고려 왕실의 후손이 아니더라도 모두 어머니 성을 따르게 했습니다.
 
이런 과정을 보면 어느 시대에나 볼 수 있는 특징이 있습니다. 최고 권력자인 이성계는 기존 왕과 왕실에 대한 숙청을 별로 원하지 않는 듯한 태도를 취합니다. 그런데 밑에 있는 신하들이 강력하게 요청합니다. 결국 신하들의 뜻대로 진행됩니다. 삼척동자가 보아도 웃을 일을 꾸며서 진행하지요.
 
우왕이 폐위되고 창왕이 왕위에 오를 때 창왕의 나이는 고작 아홉 살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1년이 지난 열 살 때 운명을 다하고 맙니다. 역사적으로 누가 옳고 그르고는 논외로 하더라도 9살 밖에 안 된 애를 왕위에 앉혔다가 금세 다시 물러나게 하고 유배를 보내고 죽이는 일은 절대로 정당화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이런 것이 역사에서 불가피한 일인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모든 역사는 현재의 관점에서 보아야 합니다. 현재의 관점으로 볼 때 그런 일들은 봉건 지배층들의 추악한 권력욕이 빚어낸 반인륜적 범죄에 지나지 않습니다.

물론 그 과정에서 역사가 진보해 왔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도 아니고, 고려 왕조가 영원 무궁했어야 한다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역사는 승자의 것이고, 승자는 정당화될 수 있다는 생각은 이제 사라져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무엇 때문에 역사를 재평가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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