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김일성과 당 조직사업

김일성이 귀국해서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많은 정력과 시간을 들였던 것은 당 조직 건설입니다. 공산주의자에게 있어서 당은 정치활동을 하는데서 가장 중요한 원천입니다. 당은 공산주의자의 정수분자들이 모인 집단이며 대중을 묶어 세워 정치적 목표를 실현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무기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김일성이 당을 조직하는데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이미 김일성이 북한에 들어오기 전에 서울에서는 박헌영을 중심으로 조선공산당이 조직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미 중앙당이 서울에 조직된 상황에서 1국1당주의를 생각한다면 평양에 중앙당을 세울 수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김일성이 볼 때 서울에 공산당 중앙조직을 두는 것은 여러 가지 면에서 문제가 많았습니다.

우선 서울은 미군이 장악한 지역이었습니다. 공산당에 대한 미군정의 탄압이 당장에는 없다하더라도 미군이 공산당 활동을 방관만 하고 있을 리는 없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서울의 중앙조직만 바라보고 정세가 다른 북한 지역에 중앙조직을 만들지 않은 것은 옳지 않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이런 사정을 김일성은 [조선로동당의 역사적 경험]이란 문헌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해방후 우리 나라의 정세는 매우 복잡하였습니다. 특히 미제의 남조선 강점으로 말미암아 우리 나라의 북과 남에는 판이한 정세가 조성되었습니다. 북반부에서는 나라의 주인이 된 전체 인민들이 해방의 기쁨을 안고 새 조국 건설에 한 사람같이 떨쳐나섰지만 남반부의 형편은 그렇지 못하였습니다. 남반부에서는 미군정이 실시되고 공산주의자들과 애국적 인민들의 혁명적 진출이 가혹하게 탄압 당하였으며, 인민의 창의에 의해 세워진 인민위원회들이 강제로 해산되었습니다. 이러한 정세하에서 남북 조선의 공산주의자들을 다 망라하는 통일적인 당을 창건할 수 있는 조건이 성숙될 때까지 가만히 앉아 기다릴 수가 없었습니다. 나라의 북과 남에 조성된 판이한 정세는 북과 남에서 해당 지역의 특성에 맞게 혁명을 발전시키며 당 창건사업을 추진시킬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우리는 유리한 정세가 조성된 북반부에서 지체없이 당을 창건하도록 하였습니다. 북반부에서 당을 빨리 창건하여야 각 지방에 조직되어 활동하는 공산당 조직들을 통일적으로 실현할 수 있었으며, 광범한 대중을 두리에 묶어세우고 건국사업을 잘하여 북반부를 튼튼한 기지로 전변시킬 수 있었습니다."

김일성과 항일빨치산 세력의 생각은 소련군이 주둔한 북한 지역에서 북한 5도를 총괄할 독자적인 중앙당 조직을 건설하고, 그를 바탕으로 북한 지역을 민주건설의 기지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른바 `민주기지론`입니다. 그러나 김일성의 이런 생각은 현실적으로 적지 않은 어려움에 부닥쳤습니다.

무엇보다도 국내파 세력들이 여기에 강력한 제동을 걸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1국1당 원칙을 들고 나왔습니다. 이미 서울에 당 중앙이 조직된 이상 북한 지역에 독자적인 중앙조직은 필요가 없고, 도당과 하부조직만 있으면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들은 박헌영이 발표한 `8월 테제`([현정세와 우리의 임무]라는 제목으로 내놓은 정치노선 문건)를 근거로 정세 판단을 안이하게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또 이들은 당의 조직적 기반을 확대하기 위한 대중 정치사업 보다 자신들의 과거 명성을 내세우며 파벌 싸움에 열중하고 있었습니다.

김일성과 빨치산 세력은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핵심 인물들이 숙식을 같이 하면서 비밀리에 당 조직 사업에 착수합니다. 이들이 활동했던 중구역 기슭의 작은 집은 현재 북한이 `조선혁명의 사령부`라고 부르면서 당 창건 사적지로 보존하고 있다고 알려집니다. 여기서 김일성은 김책, 안길, 최용건 등과 함께 유격대 출신 간부들을 지방으로 파견하기도 하고, 국내 공산주의자들과 만나 독자적인 당 창건을 설득합니다.

항일빨치산 세력은 사회의 주요 부문과 단위에 자신들의 조직원을 파견해 통일적인 지도체제를 마련합니다. 그 결과 각 지역과 부문의 실정과 동향은 즉시 김일성 등 핵심 지도부에 보고되었고, 그들이 세운 방침도 하부 단위에 제대로 전달, 실행되었습니다.

또 김일성은 국내에서 활동했던 김용범, 박정애, 주영하, 오기섭 등과 면담하면서 공산당과 단체들을 중앙집중화하고 조직사상적 통일을 실현하기 위해 새로운 `당 중앙지도기관`을 창설해야 한다고 설득했습니다.

1945년 9월 말 김일성과 항일빨치산 세력은 그동안의 활동을 바탕으로 본격적인 당 조직 결성작업에 들어갑니다. 김일성은 항일 빨치산 세력에 김용범, 박정애, 장순명, 주영하 등을 충원해 핵심 지도부를 구축하는 한편, 북한 각 지역에 파견되었던 유격대원들을 평양으로 집결시켰습니다.

중앙지도부는 파견원들을 통해 각지의 정치 정세와 공산주의자들의 활동상황, 그리고 일반 주민들의 실정을 파악할 수 있었습니다. 김일성은 항일빨치산 세력의 조직적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해 각 지방에 다시 소조들을 새롭게 파견하고, 시·군 지역 등 하부 당 조직의 장악에도 나섰습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항일빨치산 세력은 북한 지역에서 전국적인 활동 전망과 인적 자원을 확보하게 됩니다. 사실상 북한 지역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유일한 세력이 됩니다. 소련군의 지원도 받고 있었기 때문에 더욱 영향력을 급속히 확대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항일 빨치산 세력의 영향력이 확대되고 독자적인 당 창건 노선이 확산되면서 그에 대한 반발도 점차 본격화됩니다.

1국1당 원칙을 내세우면서 박헌영의 중앙조직을 지지하는 국내파들이 북한 지역의 독자적인 창당에 반대하고 나선 것입니다. 그 바탕에는 근본적인 정세 인식의 차이가 존재했습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파벌의식도 크게 작용하고 있었습니다. 결국 이런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김일성이 박헌영을 직접 만나 담판을 짓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김일성과 박헌영은 10월 8일 저녁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역사적인 대좌를 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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