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사월혁명회(rev419.jinbo.net)의 `사월혁명회보` 64호(2002. 4)와 동시 게재됩니다.(편집자 주)


김 승 호(전태일을 따르는 민주노조운동연구소 이사장)

                                      
                                          차     례

1. 문제 제기 : 민족, `민족적인 것`은 과연 부정적으로 전화했는가?

2. 민족에 대하여 : 민족은 선조들이 남긴 귀중한 유산인 동시에 근대성이라는 진보적 내용을 담고 있다
1) 민족은 인민대중이 수천 년에 걸쳐서 만들고 전승시켜 온 귀중한 유산이다
2) 민족은 근대성의 표현이고 획기적인 사회진보를 포함하고 있다

3. 민족국가에 대하여 : 민족국가는 인민대중의 쟁취물이며 인민주권을 담보하는 정치공동체이다
1) 민족국가는 인민대중의 쟁취물이다
2) 민족국가는 민주주의를 진전시키는 유효한 국가형태이다

4. 세계화와 관련하여 : 민족국가와 `민족적인 것`은 세계화 상황 속에서 인민대중의 삶을 유지·향상시키기 위해 여전히 중요하다
1) 가까운 장래에 민족국가보다 진보적인 국가형태가 등장할 가능성은 없다
2) 신자유주의 세계화 공세에 맞서 인민대중의 삶을 방어하기 위해서 민족적인 것(민족경제, 민족언어, 민족문화, 민족역사 등)은 오히려 재강조되어야 한다

5. 맺음말 :  민족국가는 사회변혁의 기본틀이다

 

1. 문제 제기 : 민족, `민족적인 것`은 과연 부정적으로 전화했는가?

요즈음 포스트모더니즘, 포스트콜로니얼리즘 운운하는 포스트(post)-주의가 유행하고 있다.(주1)  이들은 근대적인 이념들에 대해 그 근거를 비판하여 해체하고자 하는 점에서 모두 공통된다. 이들에 따르면 근대성이란, `인간 해방`을 추구하는 양식--이념이나 질서--이 아니라 인간의 근원적 욕망을 억압하고 그것의 충족을 지연시키면서 그 대신 왜곡된 욕망을 추구하도록 강요하는 `인간 억압`의 양식으로서, 하루빨리 해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주2) 이것이 이른바 탈(脫)근대주의 논의의 핵심이다. 

이 같은 맥락에서 이들은 `민족`에 대해서도 비판하고 해체를 기도한다. 민족은 실재(實在: 인간의 인식이나 경험과는 상관없이 독립하여 존재하는 것)하는 것이 아니라 인위적으로 꾸며낸, "상상된(imagined) 공동체"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인간의 진정한 행복을 위해서는 근대성을 탈피해야 하듯이 민족과 `민족적인 것(the national)`들로부터도 탈피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민족은 과연 한갓 허구에 불과한가? 민족을 규정하는 요소인 민족언어, 민족문화, 민족사, 민족정체성, 민족경제, 민족국가 등 `민족적인 것`들은 모두 허구이며 하루빨리 버려야 할 유물들인가?

한편 이것과 비슷한 맥락에서 신자유주의 세계화 세력 또한 `민족적인 것`의 의의를 폄하한다. 이들은 금융시장의 세계화는 미국이 기획한 국가전략 또는 외세의 음모라기보다는 문명사적 발전의 결과이고 세계사의 중요한 흐름이므로, 이 같은 시대적 흐름에 능동적으로 적응해야 한다고 말한다.(주3)  물론 이들도 "민족공동체의 발전"을 위해서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는 말한다. 그러나 전 지구적 자본주의와 신세계질서로의 통합에 저항하고 민족공동체의 자주·자립적인 발전을 고집하는 것은 "고질적 내셔널리즘"으로서 하루빨리 청산해야 한다고 말한다.(주4)  

그러면 이들 세계화주의자들은 민족주의는 부정하되 민족과 `민족적인 것`들은 긍정하는 것일까? 이들의 주장은 여러 가지 논리를 동원하고 있지만 실은 서구적인 것, 미국적인 것, 더 정확하게는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제국주의 이념과 논리를 인류의 보편적 가치와 규범(global standard)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제국주의 세력이 세계 정치·경제·문화를 지배하는 새로운 질서 즉 아메리카-제국 질서(Pax-Americana)에 하루빨리 통합·동화되어야 한다는 것이다.(주5)  결국 민족주의는 물론 `민족적인 것` 전부를 무력화하고 해체시키는 방향을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

과연 세계화가 급속히 진전되는 오늘날의 현실에 능동적으로 적응하기 위해서 `민족적인 것`들은 그처럼 무력화되고 해체되어야 하는가?


2. 민족에 대하여 : 민족은 선조들이 남긴 귀중한 유산인 동시에 근대성이라는 진보적 내용을 담고 있다

1) 민족은 인민대중이 수천 년에 걸쳐서 만들고 전승시켜 온 귀중한 유산이다

송두율 교수 같은 사람은 "민족은 영원하다"고 말한다. 포스트주의자들의 주장과는 반대로 민족은 과연 그처럼 영구불멸하는 실재인가? 아마 그렇지 않을 것이다. 민족의 실재성과 가치를 강조하기 위해 그렇게 말했을 터이다. 예컨대 우리 민족이 5천년 전부터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존재했던 것은 아니다. 민족은 수천 년에 걸쳐 "역사적으로 형성"되어 왔다.(주6)  따라서 민족이 선험적으로 존재하는 것으로 전제하고 그 민족이 주체가 되어 역사를 만들어 온 것처럼 연관짓는 것은 분명히 옳지 않다.(주7)

그러나 민족이 허구적 관념의 소산이라는 주장은 민족이 선험적으로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그릇된 생각이다. 민족은 그 실체(實體: 생멸변화하는 현상의 배후나 기초가 되어 영원히 변하지 않는 본체)인 인민대중--소수 지배계급이 아니라--이 일정한 영토를 삶의 기반으로 해서, 혈연적으로 상호 결합되고, 언어·문화적으로 공통성을 만들고, 경제적 분업과 협업을 진전시키고, 또 정치공동체 구성원으로서의 경험을 축적하는 등의 "자연사적 과정"을 통해 만들어 왔다. 민족은 인민대중이 부족과 종족 단계를 거쳐 정치공동체로서의 응집력이 낮은 민족체로부터 강고한 응집력과 정치적 주체의식을 갖는 수준으로 장기간에 걸쳐 계승·발전시켜 온 엄연한 사회·역사적 실재인 것이다.

이렇게 민족이 형성되는 과정에서는, 인민대중만이 아니라 국가와 지배계급이 일정한 역할을 했음이 사실이다. 그러나 민족이 형성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어디까지나 인민대중이다. 예컨대 백제라는 국가가 망하고 지배계급이 당나라에 잡혀가거나 왜로 이주해 갔어도 그 인민대중은 그대로 남아서 우리 민족 형성에 중요한 부분을 담당했다. 또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건국되어 지배계급 구성이 바뀌었어도 그 인민대중은 거의 그대로 이어졌다. 이처럼 국가와 지배계급이 부침을 거듭하는 속에서 인민대중은 사회공동체를 유지시키고, 통합시키고, 그 유대관계를 공고화하고, 이를 후대로 전승시켜 왔다. 이처럼 민족은 인민대중의 수천 년에 걸친 간고한 노력이 녹아들어 있는 귀중한 유산인 것이다.

2) 민족은 근대성의 표현이고 획기적인 사회진보를 포함하고 있다

많은 학자들은 어떤 집단에 혈연, 언어, 문화 같은 공통적인 요소들이 존재한다 하더라도 그것만으로 민족이 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어떤 집단이 하나의 민족이 되는 것은 오로지 자신을 하나의 민족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주8) 그렇다면 민족은 마음먹기에 따라 임의적으로 조작된다는 것인가?

혈연, 언어, 문화, 경제 등 생활상의 공통성과 유대에 기반하지 않고도 스스로 민족이라고 생각하기만 하면 하나의 민족이 된다면, 민족은 수시로 여러 개로 쪼개지고 합쳐지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앞에서 말했듯이 민족은 고정불변의 실재가 아니라 가변적인 것이지만, 장기간에 걸쳐서 역사적으로 형성되는 것이지 수시로 마구 조작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위의 말은 민족이 자의적으로 만들어질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니라 혈연적·언어적·문화적 공통성과 유대가 있더라도 공동의 정치적 목적의식을 지니지 않을 때 민족체에 머무를 뿐 민족이 되지 못한다는 의미로 이해되어야 한다.(주9)

이처럼 민족은 정치적 공동운명체이며 나아가 정치의 주인·주체라는 의식을 갖고 있는 인민대중이다. 이런 의식 가운데서도 특히 피지배 인민대중이 스스로 정치의 주인·주체라고 생각하는 의식은 전근대적인 신민의식과 뚜렷이 구별되는 근대적인 의식이다. 민족은 근대적 세계관--개체가 자주·독립적 존재이며, 이 개체들 간의 관계는 자유롭고 평등해야 한다고 하는--에 기반한다. 이 관념에 기반하여 인민대중의 정치적 주인·주체화 즉 탈(脫)신민화가 진전되었고, 그럼으로써 민족이라는 관념이 확립되었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민족은 근대의 산물이고, 민족이라는 존재 속에는 인민대중의 지위와 역할에서의 획기적인 진보가 포함되어 있다.


3. 민족국가에 대하여 : 민족국가는 인민대중의 쟁취물이며 인민주권을 담보하는 정치공동체이다

1) 민족국가는 인민대중의 쟁취물이다

인간은 고립된 존재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공동체를 이루고 살아간다.(주10)  그런데 공동체는 그 결속력이 강고할수록 (주11) 그리고 그 범위가 클수록 인간의 삶을 풍부하게 해 준다. 협소한 촌락공동체의 삶이 얼마나 빈약한가?(주12) 민족의 형성과 확립 또한 `보다 범위가 크면서도 강고한 결속력을 갖는 공동체`를 향해 나아가는 인류 역사 발전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민족공동체는, 인민들 사이의 교류와 유대가 전근대적 공동체의 범위를 넘어서 확대되면서 등장했다. 생산력의 발전과 교역의 증대에 따라 인민들 사이의 교류와 유대의 범위는 협소한 전근대적 공동체를 넘어 점차 확대되었고 그러한 발전의 과정에서 민족공동체가 확립되었던 것이다. 서구의 경우 이 과정을 부르조아들이 주도했다. 혈연적, 언어적, 문화적으로 공통적인 것을 바탕으로 경제적인 공동체로, 그리고 정치공동체로!

그런데 이러한 민족공동체의 확립은 민족국가의 수립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그러다 보니 혹자는 민족공동체 또는 민족의 확립을 국가의 산물이라고 말한다. 인민대중의 혈연적, 언어적, 문화적, 경제적, 정치적 공통성과 유대의식이 민족국가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라는 의미에서이다.

민족이 형성되고 확립되는 과정에서 국가가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것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민족공동체나 민족을 국가의 피조물로 파악하는 것은 사실에 부합하지 않는다. 간단한 예로 제국이나 봉건영주 국가의 경우 국가는 민족이나 민족공동체를 만들어 주지 않았다. 민족이나 민족공동체는 제국이나 봉건영주 국가에도 `불구하고` 만들어졌다. 그러면 절대주의 국가는 민족을 만들어 주었는가? 절대주의 국가가 민족체 형성에 일정한 역할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 국가는 인민대중을 신민으로 묶어두려고 하였지 민족으로 만들려고, 즉 민족으로 "확립"시키려고 하지 않았다.

민족국가는 근대적인 인민주권 의식을 바탕으로 인민대중이 정치의 주인·주체로 나서는 과정을 통하여 수립되었다. 그 경로는 일률적이지 않았다. 어떤 경우에는 생활상의 유대의 범위가 확대되는 데 질곡으로 작용하던 봉건적인 소국들을 `범민족적`으로 통합하면서 민족국가 수립으로 나아갔다. 또 다른 경우에는 제국의 지배 하에 있던 민족(체)이 제국으로부터의 분리·독립을 쟁취하면서 민족국가를 수립했다. 그래서 민족국가는 대내적으로 통일적이고, 대외적으로 독립적인 것을 원칙으로 한다. 또 다른 경우에는 기존 국가--예컨대 절대왕정 국가--의 영토와 주민은 그대로 유지되는 가운데 부르조아 민주주의 혁명을 통해 정치체제를 변혁함으로써 민족국가를 탄생시키기도 했다.(주13)

이처럼 그 경로는 여러 가지이지만 민족국가를 수립하는 과정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기존의 국가나 지배계급이 아니라 인민대중이었다. 근대 민족국가는 민족의 실체인 인민대중이 정치의 주인·주체로 진출하면서(민족의 확립!) 기존 국가의 안팎을 가로질러서 쟁취한 성과물인 것이다. 다시 말해 민족--그 실체인 인민대중--이 민족국가를 만든 것이지 민족국가가 민족을 만든 것이 아니다. 민족국가가 수립된 이후 그 민족국가가 민족공동체와 민족의 정체성을 공고화하는 쪽으로 역할하지만 말이다.

2) 민족국가는 민주주의를 진전시키는 유효한 국가형태이다

민족국가는 일정한 영토 안에서 함께 생활하는 인민대중이 부족적·종족적 정체성을 넘어서는 민족 구성원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고 결속함으로써 만들어졌다. 역으로 민족국가의 수립으로 이러한 민족공동체로의 유대와 결속은 획기적으로 강화되었다. 이러한 결속은 다른 한편으로 인민대중의 정치화, 즉 정치의 주인·주체로 진출하는 것과 밀접하게 결부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민족국가는 왕권신수설 따위의 전근대적인 주권 관념을 폐기하고, 근대적인 인민주권의 원리를 그 기초로 삼게 된다.

물론 근대 민족국가에 있어서 인민주권은 많은 한계를 지니고 있다. 인민대중의 강고한 유대와 결속이 이루어지고 이를 바탕으로 하여 정치적 자주성이 충분히 고양되지 못한 상태에서, 특정계급이 `민족`을 내세워 전체 인민을 과잉 대표하면서 계급적 지배를 관철해 나갔던 것이다. 부르조아 민주주의가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부르조아 민주주의 안에서도 인민대중의 민주적 권리는 꾸준히 신장되어 왔다. 한편으로는 점차 더 많은 인민대중이 주권을 행사하게 되었다. 초기에는 납세자인 유산계급만이 정치적 권리(예컨대 선거권과 피선거권)를 행사할 수 있었으나 일정 연령 이상의 성인 남자 전체로 확대되었고, 20세기에 들어와서는 여성으로까지 확대되었다. 다른 한편으로 인민주권의 내용도 형식적인 평등만을 보장하는 정치적 시민권으로부터 실질적인 평등을 담보하는 사회적 권리로 확장되었다. 민족국가가 인민주권을 원리로 하는 한 이러한 민주적 권리의 신장을 수용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주14) 그리고 인민대중이 더욱 진취적으로 진출함에 따라 마침내 인민주권의 원리가 철저히 관철되는 인민민주주의로 발전해 나갔다.

이처럼 민족국가는 인민주권 관념에 기초하는 만큼, 계급지배 장치라는 한계를 가짐에도 불구하고, 민주주의를 진전시키고 구현하는 국가형태이다. 그리고 전 세계적으로 볼 때 아직은 민족국가라는 틀 안에서 진전시켜야 할 민주주의가 많이 남아 있다. 구 동유럽과 같은 사이비 인민민주주의가 아닌 참된 인민민주주의--대의민주주의를 넘어선 직접민주주의의 심화에 의해 인민대중이 지배계급을 통제하고 무력화함으로써 민중이 실질적으로 주인의 역할을 하는--를 실시하고 있는 경우가 얼마나 되는가? 민족국가 안에서 이것이 불가능한가? 아니다. 구성원들간의 공고한 유대와 인민주권의 원리에 기초하는 민족국가야말로 이런 참 민주주의를 급진적으로 신장시키는 데 가장 효과적으로 복무할 수 있는 국가형태이다.


4. 세계화와 관련하여 : 민족국가와 `민족적인 것`은 세계화 상황 속에서 인민대중의 삶을 유지·향상시키기 위해 여전히 중요하다

1) 가까운 장래에 민족국가보다 진보적인 국가형태가 등장할 가능성은 없다

민족국가가 인민대중의 쟁취물이며 근대적인 변혁의 성과를 담고 있다고 하더라도 지금과 같은 이른바 세계화 시대에는 더 이상 지난날과 같은 유의미성을 갖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다시 말해 이 시점에서 민족국가를 옹호하는 것은 시대의 흐름을 읽지 못하는 퇴영적인 태도에 불과한 것은 아닌가?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인류 역사의 현 단계에서 민족국가의 의의와 중요성은 여전히 유효하다. 아직은 인민주권이 실현되는 정치공동체로서 민족국가를 대체할 보다 나은 국가형태가 등장하지 않고 있고, 또 가까운 미래에 그런 것이 등장할 가능성도 거의 없기 때문이다. 

보자. 세계화가 진전되고 있다고 하지만 아직까지 인류공동체가 성립될 수 있는 조건은 성숙되지 않고 있다. 지금의 세계화는 초국적 자본이 주도하는 자본의 세계화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전 세계적 차원에서 인민대중의 생활상의 공통성과 유대를 공고하게 하면서 인민대중의 물질적·정신적 삶을 향상시키고 정치적 주권을 신장시키는 방향으로 작동하지 못하고 있다.

현실은 오히려 그 반대 방향이다. 약소국 경제에 대한 초국적 자본의 수탈과 약탈(사유화)이 가속화되고 있다. 부국과 빈국의 격차는 더욱 벌어지고 있고, 자본주의 세계체제에서 배제된 지역은 경제적으로 붕괴되어 그 주민들을 극심한 고통으로 몰아넣고 있다. 이렇듯 세계화 과정에서 전 세계 절대다수 인민대중의 삶이 피폐해지고 있고, 민족국가를 통해 신장되어 온 인민대중의 정치적 주권은 형해화되고 있다. 결국 신자유주의 세계화는 전 세계적으로 경제적인 교류와 통합을 촉진시키는 측면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관계에서의 통합을 통해 인류공동체를 형성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인류적인 통합과 통일보다는 오히려 분열과 충돌을 야기하고 있다!

이런 상태에서 민족국가를 넘어서는 전 지구적인 정치공동체--초민족국가--를 수립한다고 할 때 그것은 인류공동체에 기반한 세계국가가 될 수 없다. 현 단계에서 초민족국가는 인민주권의 원리가 실현되는 민주적인 세계국가(세계정부)가 아니라 전 세계 인민대중을 제국의 신민으로 만드는 `세계 제국`--현실적으로는 아메리카 제국(Pax-Americana)--일 뿐이다.

그러면 현재의 유럽연합과 같은 지역단위 민족국가 연합체의 경우는 민주적인 세계국가 수립의 전망을 보여주는 전조가 될 수 있는가?(주15) 유럽연합은 기존 민족국가의 틀을 넘어서는 정치공동체로의 지향을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민족국가를 기본 단위로 한 연합체의 위상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기존의 민족국가를 완전히 대체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민족국가 연합체에서는 기존의 민족국가에 비해서 인민주권의 원리가 매우 제한적으로만 관철되고 있다.(주16) 이로써 국가--각 민족국가들 및 유럽연합을 모두 망라해서 본--에 대한 인민대중의 통제력은 오히려 축소되고 있다. 역사·문화·언어 등 여러 측면에서 공통성과 유대의식이 비교적 높고, 경제적·정치적 공동체 형성을 향해 오랫동안 노력해 온 유럽이 이러할진대 동아시아를 비롯하여 그러한 조건이 갖추어져 있지 않은 다른 지역에서 그보다 진전된 민족국가 연합체가 만들어지는 것은 상당기간 안에는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면 유럽연합은 왜 이러한 한계를 보이고 있는가? 유럽연합과 같은 현재의 민족국가 연합체는 보다 큰 시장을 바라는 자본의 이해와 요구에 의해 추동되어 왔다. 그리고 이처럼 인민대중이 공고한 유대를 바탕으로 정치적인 주인·주체로 진취적으로 떨쳐나서지 못하는 가운데 수립되고 있으므로 인해서 부르조아 지배계급이 인민대중의 민주적 통제를 받지 않고 자신들의 이해에 따라 정책을 결정할 수 있는 여지가 민족국가에 비해 훨씬 크다.

요컨대, 계급지배 장치라는 성격을 제한하고 인민대중의 주권을 신장시켜 나가는 점에 있어서 현단계로서는 민족국가가 현실적인 대안이 되는 국가형태 가운데 가장 보편적인 형태라고 할 수 있다. 민주적인 세계국가를 만들어낼 수 있을 정도로 인류공동체가 완성되기 전까지는 분명 그러하다. 그 중간에 지역 수준의 `국가연합` 형태가 생겨날 수 있으나 그것의 성격은 확정적이지 않으며, 연합을 구성하는 국가들에서의 인민주권의 상태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즉 연합을 구성하는 국가들에서 참 인민민주주의가 이루어지고 있을 경우에 한해서 그 연합은 인민주권 신장에 긍정적으로 기여할 것이며, 그 반대의 경우는 부정적으로 기여할 것이다.(주17)

단, 이처럼 현재로서 민족국가 이상의 현실적 대안이 없다고 해서 기존의 민족국가를 무조건 지키는 것이 사회진보의 대안이 될 수는 없다. 기존의 민족국가는 한편으로는 계급지배에 물들어 있는 점에서, 다른 한편으로는 대외적으로 그 주권을 절대화하는 점에서 심각한 문제를 지니고 있다.

전자와 관련해서 민족국가는 민주주의가 급진적으로 신장되는 방향에서 재구성되어야 한다. 지금은 신자유주의가 급속히 세계화되고 있는 시기이다. 이런 상황에서 민주적으로 급진화되는 방향에서 재구성되지 않을 때 민족국가는 초국적 자본의 지배 관계망 안에 갇힘으로써 공동체와 그 구성원들의 삶을 방어하는 역할을 수행할 수 없다. 이런 재구성을 추구하지 않는 속에서의 민족국가 옹호는 민족적 가치와 이익을 방어하기는커녕 오히려 계급지배를 유지·강화하는 방향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또 후자와 관련해서 민족국가의 주권은 인류보편적 가치기준과 공통의 이해관계에 비추어 일정한 제한을 받아야 한다. 예컨대 민족국가는 대외적으로 절대적 주권을 갖는다고 인정됨으로써 반인륜적인 문제를 안고 있더라도 묵인되는 경향이 있었다. 또는 강대국이 자신의 주권 행사임을 내세워 약소국을 희생시키는 횡포를 부릴 수 있었다.(예: 테러와의 전쟁,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공격 등) 이러한 무조건적 주권행사는 마땅히 제한되어야 하며, 그 제한은 강대국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UN이나 기존 국제기구들에서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다. 예컨대 출범을 앞두고 있는 국제형사재판소와 같이 `인류적 가치의 보호`라고 하는 혁신적 관점 위에서 만들어지는 국제기구(단, 민족국가들만이 아니라 사회운동의 범세계적 네트워크의 폭넓은 참여가 보장되어야 한다)가 그러한 역할을 맡아야 할 것이다.

2) 신자유주의 세계화 공세에 맞서 인민대중의 삶을 방어하기 위해서 민족적인 것(민족경제, 민족언어, 민족문화, 민족역사 등)은 오히려 재강조되어야 한다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인민대중은 강고한 공동체적 유대와 결속을 통해 경제적, 사회·문화적 생활을 향상시킴은 물론 정치의 주인·주체로 나서게 된다. 그런데 신자유주의는 이러한 공동체적 유대를 철저히 파괴하고 해체시키는 자본주의 패러다임이다. 모든 인간을 공동체적 유대와 절연된 원자화된 개인으로 만들고 이윤의 극대화라는 자본의 논리에 따라 재조직한다. 이렇게 공동체적 유대가 파괴·해체되면 인민대중 개개인은 어떻게 되는가? 개개인은 개별화되고 상품화된 존재로서 자본의 지배에 무방비상태로 노출된다. 노동력 상품 판매자, 상품생산자, 상품소비자로서 자본의 이윤과 축적 논리에 철저하게 포섭되고 예속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자본주의·제국주의 세력은 신자유주의 패러다임을 전면적으로 관철하기 위해 그에 방해가 되는 모든 공동체적인 구조물들을 파괴하는 공세를 감행하고 있다. 그 가운데에서도 가장 주요한 표적은 바로 민족공동체이다.(주18) 민족공동체가 인류역사의 현단계에서 생활상의 강고한 유대와 결속 그리고 그에 기초한 인민대중의 주인·주체화를 담보하는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반면 부족적·종족적 공동체는 인민대중의 광범위하고 보편적인 유대를 이루는 데 있어서 민족공동체의 한계에 비할 수 없는 뚜렷한 제한성을 가지고 있으며 심지어 그것을 저해하기로 한다.(주19) 또 인류공동체는 아직 맹아 수준에 불과하고 유교권, 이슬람권 따위의 문명권도 민족과 같은 결속력에는 훨씬 미치지 못한다.

민족공동체를 파괴하기 위한 공세는 전방위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초국적 자본은 민영화라는 이름 아래 민족경제의 근간을 이루는 국가기간산업(전력, 통신, 가스, 철도 등)을 강탈하여 사유화하고 있다. 또 이들 기간산업 외에도 자본주의 경제의 명줄을 쥐고 있는 금융, 식량주권과 관계된 농업 및 종자산업, 그리고 자동차, 철강, 반도체, 의약품과 같은 주요 제조업 등 산업과 경제의 모든 핵심부분을 소유·장악해 나가고 있다. 민족공동체의 물적 토대를 이루는 민족경제를 해체하고 경제적 식민지로 만들어나가고 있는 것이다.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제국주의 세력은 더 나아가 일상 생활과 의식에서도 미국적인 생활양식과 사고방식을 인류보편적인 것으로 수용하도록 강요하고 있다. 이를 위해 민족정체성을 규정하는 요소들인 민족 고유의 언어, 역사, 문화, 가치 등 모든 `민족적인 것`들을 부정하고 해체시키려 하고 있다. 예컨대 영어 공용화가 공공연히 추진되고 있다. 탈민족적인 포스트모던 역사학이 유행하고 있고, 미국식 상품문화가 범람하고 있다. 경제적으로 뿐만 아니라 정신적, 문화적으로도 민족적인 것을 해체하고 식민지화하고 있는 것이다.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제국주의 세력은 이처럼 물질적인 것으로부터 정신적인 것에 이르기까지 민족공동체의 제 측면을 이루는 `민족적인 것`들 모두를 해체시키려 하고 있다. 이러한 공세에 맞서기 위해서는 민족국가의 역할이 보존--물론 폭력독점장치로서의 성격이 약화되고 민주적인 정치공동체로서의 성격이 강화되는 방향으로 재구성되어야 한다--되어야 할 뿐 아니라, 민족국가를 떠받치는 민족공동체 자체가 더욱 강화되어야 한다. 민족국가는 이런 민족정체성과 민족공동체의 강화가 밑받침되지 않는 한 허약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민족공동체를 강화하려면 그것의 제 측면을 구성하는 민족의 언어, 문화, 역사, 경제 등 `민족적인 것`들 각각을 신자유주의적 제국주의의 공세로부터 지켜내야 한다. 다만, `민족적인 것`들을 지켜내는 것이 전통적인 것, 기존의 것들을 `고수`하는 데 머물러서는 안 된다. `민족적인 것`들은 인민대중의 입장에서 부단히 재창조되어야 한다. 예컨대 전통적인 것들 속에 내포되어 있는 계급지배적 요소들은 과감하게 제거되어야 하고, 노동자·민중적 요소가 획기적으로 강화되는 방향에서 혁신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민중적인 민족정체성은 객관적 환경이 변화·발전하는 데 발맞추어 능동적으로 변화·발전되어야 한다. 예컨대 정보기술의 생활화 및 정보민주화의 진전이라든가, 생태적 관점에 입각한 생활양식의 변화라든가, 여성의 지위와 역할에서의 변화라든가 하는 것들이 여기에 포함된다. 또 민족정체성은 획일성 강화를 추구할 것이 아니라, 예컨대 방언 살리기와 같이, 다양성을 살려나가는 방향을 추구해야 할 것이다. 아울러 외부적으로도 닫혀 있는 것이 아니라 세계적인 흐름과 교류하고 긍정적인 요소들을 주체적으로 소화하는 열린 민족정체성이 되어야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민족적인 것`들을 부단히 혁신하고 발전시켜 재창조하는 것으로 되어야 한다.

이러한 혁신과 발전 및 재창조는 사회·문화적 분야에서만이 아니라 경제 분야에서도 적극 추진되어야 한다. 민족경제는 남북을 망라해서 정태적으로가 아니라 동태적으로 혁신·발전되어야 한다. 예컨대 남북경협은 대북 지원이라는 햇볕정책 수준을 넘어 민족경제의 선진화를 향한 협력이라는 관점에서 대담하게 추진되어야 한다.


5. 맺음말 :  민족국가는 사회변혁의 기본틀이다

민족을 해체하자고 주장하는 포스트-주의자들은 사회변혁과 관련해서도 민족, 민족국가의 의의를 부정한다. 사회변혁은 이제 민족국가의 틀 안에서가 아니라 초국가적 틀에서 `자율적인 개인들의 세계적인 연대`를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 근거로서 이들은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따라 민족국가는 그 위상이 추락되어 사멸해 가고 있으며 그 대신 `세계제국`이 출현하고 있다고 얘기한다.(주20)

그러나 지금 진행되고 있는 현실은 세계제국이 민족국가를 대체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신자유주의적 세계제국 질서는 민족국가를 소멸시키고--그 위상을 저하시키기는 하지만-- 있는 것이 아니다. 민족국가는 이제, 제국적 질서 안에서, 초국적 독점자본--국내 독점자본이 아니라--의 전 지구적 지배관계의 응축물인 동시에 그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장치로서 역할하도록 재구성되고 있다. 따라서 제국이 민족국가를 대체하고 있으므로 민족국가는 사회변혁의 틀로서 유의미성을 상실했다는 주장은 그 사실적 근거부터가 잘못된 것이다.

각도를 바꾸어 사회변혁의 주체적 조건을 살펴보자. 전지구적 자본주의와 신세계 질서(`제국`)의 완성을 향해 폭력적 공세를 가해오고 있는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제국주의 세력에 맞서기 위해 전 세계 노동자·민중은 국제적 연대를 획기적으로 강화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은 실로 자명하다. 우리 민족운동도 종래처럼 `민족대단결`을 강조하는 데 머물러서는 안 되며, 반제·반자본의 국제연대를 중시하는 방향으로 크게 변화되어야 한다. 이런 변화를 통해서 신세계 질서를 완성하려는 초국적 자본세력의 책동에 대해 세계 각국의 노동자·민중들과 어깨걸고 함께 투쟁해야 한다. 이런 새로운 노력 없이 `제국`의 완성을 막아내기 어려울 것이다.

그렇다면 민족 단위의 실천이 갖는 의의는 사라지는가? 사회변혁은 인민대중이 강고한 유대를 바탕으로 단결하여 떨쳐 일어섬으로써 가능해진다. 그런데 세계화에도 불구하고 인민대중은 자본처럼 영토상의 경계를 넘어 자유롭게 이동하지 못하고 있을 뿐 아니라, 역사적으로 형성된 혈연적, 언어적, 문화적, 경제적 차이들을 일거에 뛰어넘지 못하고 있다. 혹자는 지금 빠르게 `세계시민`이 형성되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부르조아계급의 세계화, 부르조아 세계시민화일 뿐 노동자·민중의 세계화, 노동자·민중의 세계시민화가 아니다. 그러므로 가까운 장래에 관한 한 전 세계 인민대중이 하나의 민족처럼 강고하게 단결하고 떨쳐나서서 `제국`을 전복할 가능성은 극히 희박하다. 국제연대를 획기적으로 높이고자 아무리 노력하더라도 세계 민중이 `민족`과 같은 수준의 강고한 유대의식을 갖는 `세계시민`으로 형성되기까지는, 그리하여 민족을 `세계시민`으로 대체하기까지는, 자연사적 과정이라고 부를 만큼의 장구한 세월이 걸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주체의 준비정도라는 이 같은 측면에서 보더라도 민족단위의 사회변혁을 세계 차원의 사회변혁으로 대체하려는 접근은 매우 잘못되어 있다.(주21) 사회변혁의 전망은 객관적 조건만을 따져서 설계할 수 없으며, 반드시 그것을 수행하는 주체의 준비정도를 포함시켜 설계해야 하는 것이다.

이치가 이러하다고 할 때, 사회변혁은 민족국가를 무력화·해체시키고자 하는 신자유주의 세계화 조류에 편승하는 것을 통해서가 아니라 그 조류를 거슬러서 민족 국가의 역할을 방어하는 것을 통해서 실현되는 것으로 구상되는 것이 옳을 것이다. 단, 그 같은 민족국가의 방어는 민족국가의 낡은 모습(정치체제)을 고수하는 것을 통해서는 이루어질 수 없다. 인민주권에 근거한 국가라고 하는 민족국가의 긍정적·진보적 측면을 획기적으로 진전시키는 것을 통해서만 민족국가의 역할은 방어될 수 있고, 또 방어될 가치가 있다. 그렇게 되지 않을 때 민족국가는 민족공동체와 그 구성원의 이익을 방어하는 역할은 상실한 채 초국적자본의 지배장치로 재구성되어 부정적으로 역할할 뿐이다.

이와 같이, 인민주권 원리에 철저하게 복무하는 방향에서 민족국가가 재구성되는 것과 자본에 의한 노동자·민중의 착취·수탈과 억압을 극복하는 방향에서 사회를 변혁하는 것은 상호배제적이 아니라 상호보완적인 관계에 있다. 민족국가 차원의 사회변혁과 신자유주의 제국에 저항하는 국제연대의 강화 또한 그러한 관계에 있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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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1) `탈/국가, 탈/민족 역사서술에 대해 듣는다`, <역사비평> 2002년 봄호를 보시오. 이 잡지에서는 이런 문제를 2001년 가을호부터 연이어 특집으로 다루고 있다. 또 <포스트모더니즘과 역사학>, 김기봉 외, 푸른역사, 2002.3을 보시오.

(2) 안토니오 네그리는 이런 인간 억압적 양식을 근대성의 두 가지 양식 가운데 하나일 뿐이라고 말한다. 그에 의하면 근대성은 두 가지 양식으로 나타나는데, 하나는 인간의 (진정한 : 필자) 욕망을 역사의 중심에 두는 양식이고, 다른 하나는 (진정한 : 필자) 욕망에 대항하여 질서를 부과하는 계몽주의 양식 즉 부르조아적 양식이라고 한다. 그리고 후자가 현실을 지배해 왔다고 한다. 안토니오 네그리와 마이클 하트, <제국>, pp117~127.

(3) 이홍구, `월드컵으로 공동체의 힘 다시 모으자`, <중앙일보>, 2002.1.10일자를 보시오.

(4) 위에서 인용한 글에서 이홍구 씨는 한국의 민족주의를 "피해의식이 고착된" 고질적인 내셔널리즘이라고 부르며 맹렬히 질타한다. 나아가 "우리가 무슨 선진국이 되겠느냐"는 이른바 `엽전 근성`도 차제에 말끔히 씻어버려야 한다고 말한다.

(5) 그는 "따라서 후진국 대열에서의 기수 역할보다는 어떠한 어려움이 있더라도 선진국 대열에 당당하게 참여하겠다는 국민적 선택이 있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요컨대 과감하게 서구화·미국화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6) 채웅석, `고려시대 민족체 인식이 있었다`, <역사비평> 2002년 봄호를 보시오. 또 같은 책의 오수창, `조선시대 국가·민족체의 허와 실`을 보시오.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하여 민족체 강화에 큰 전기가 되었지만, 고려중기 농민항쟁이 격렬하게 벌어졌을 때 비록 세력이 크지는 않더라도 신라·고구려·백제 부흥운동이 나타난 것은 그때까지 응집력에 한계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들(포스트모드니즘 논자)이 우리 전근대역사에 없었다고 설명하는 `국가`와 `민족`이야말로 서구의 역사경험을 바탕으로 한 근대민족, 국민국가인 것이다. 적어도 조선시대에는 서구 역사적 경험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근대 민족국가로 이어지는 국가와 민족체가 분명히 존재했다."

(7) "국가와 민족이 선험적으로 전제되는 경향은 극복될 필요가 있다. 근대국가 체제와 민족집단의 정치화가 역사적 현상으로 `설명`되기보다 ... 오랜 역사변동을 설명해 줄 주체로서 `전제`되고 있는 경향이 강하다.", 박명규, `역사논쟁에 대한 사회학적 이해`, 위의 책.

(8) "민족이란 본디 혈통이나 체질에 의해 저절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동질적인 집단이라 생각하고, 자기들은 독립된 통일국가를 건설하여 함께 살아야 한다는 뚜렷한 목적의식을 가지게 된 인간공동체이다." 서의식, `포스트모던 시대 한국사 인식과 교육의 방향`, 김기봉 외 위의 책, p. 300.

(9) 정치적 성향상의 좌우를 막론하고 많은 학자들은 민족의 실체는 인민대중이 아니라 민족의식이며 따라서 민족은 관념적인 구성물이라고 말하고 있다. 또 민족의식은 부르조아 계급이 만들어낸 허위의식에 불과하거나(그렇다면 노동자 계급과 근로민중이 주도하는 비자본주의적 근대사회에서는 민족의식이 없어야 마땅하다.) 인종적·문화적 동일성에 대한 자의식에 불과하다고 한다.(그렇다고 할 때 민족nation과 종족ethnic은 구별되지 않는다.) 이는 부르조아 주도로 민족이 확립된 서구의 경험을 무비판적으로 절대화하거나, 민족의식을 인민대중의 정치적 주체의식을 사상한 채 복고적·낭만적 운명공동체 의식으로 제한하고 왜곡한 것이다. 하지만 서구에서조차 민족의식은 아무런 근거도 없이 가공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또 단순히 인종적·문화적인 공통성에만 근거한 의식도 아니다. 민족은 혈연적, 언어적, 문화적, 경제적, 정치적 제 영역을 포괄하는 생활공동체의 구성원 집단--그 실체는 지배계급이 아니라 인민대중이다--을 지칭하며, 특히 정치생활에 있어서까지 주체화된 인민대중이다. 즉 민족의식은 생활세계에서의 "공동체적 관계에 기반한" 의식으로서, 인민대중이 정치화하여 정치의 주인·주체로 진출함으로써 비로소 나타난다. 바로 이런 점에서 민족은 인민대중이 정치화하지 않은 단계에 있는 민족체와 뚜렷이 구별되는 것이다.

(10) 그리고 문명단계에 들어선 이후에는 국가라는 정치적 공동체를 이루고--지배계급으로서든 피지배계급으로서든--살아 왔다. 이 국가는 지배계급이 인민대중을 지배하고 착취하는 장치였음과 동시에, 그러한 착취·지배를 위해서도 공동체를 유지·발전시키고 대외적으로 보호하는 기구로서의 성격을 또한 가지고 있다.

(11) 공동체의 결속력은 구성원 상호간의 교류·협력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기 위한, 그럼으로써 구성원들의 삶을 풍부하게 하기 위한 전제조건이다. 또 그렇게 결속력이 강고하려면, 그 결속력은 물리적·이데올로기적 강제가 아니라 그 구성원들의 현실 생활상의 공통성과 유대에 기반해야 한다.

(12) 인도의 촌락공동체를 미화하는 것은 허구이다. 거기에는 생활의 물질적 수준이 낙후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카스트 제도 같은 전근대적 신분제의 질곡이 엄존하고 있다. 반면 사파티스타 원주민들은 고립된 촌락공동체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소공동체들 간의 교류와 연대를 강화하여 큰 생활공동체를 만들어 가고 있으며 이를 바탕으로 자율적인 정치공동체(자치정부)를 건설하기 위해 투쟁하고 있다. 이에 관해서는 마르코스, <우리의 말이 우리의 무기입니다>, 해냄, p. 715 참조.

(13) 영국과 프랑스 혁명은 전형적이다. 식민지로 전락한 이후 대한제국을 버리고 대한민국(임시정부)으로 변혁한 것도 같은 맥락으로 간주할 수 있다. 이는 갑오농민전쟁과 애국계몽운동 등을 통해 인민대중이 봉건왕조를 거부하고 국가의 주인·주체가 되는 방향으로 진출해 온 데 힘입은 것이었다.

(14) 사파티스타도 1994년 1월 봉기 당시 이러한 인민주권의 원리에 근거하여 그들의 전쟁선언을 정당화하였다. "이런 일이 지속되는 것을 막기 위해 … 마지막 남은 희망인 헌법에 기대어, 우리는 헌법 제39조에 호소합니다. `이 나라의 주권은 본질적으로 그리고 원천적으로 국민에게 있다. 모든 정치권력은 국민에게서 나오며, 국민의 이익을 위해 존재한다. 국민은 언제나 자신의 정부형태를 바꾸거나 수정할 수 있는 양도할 수 없는 권리가 있다.`", 마르코스, 앞의 책, p. 90∼91.

(15) 구 소련에서 분리독립한 민족국가들로 구성된 독립국가연합(CIS)도 민족국가연합체의 한 예이다.

(16) 예컨대 유럽연합은 의회가 있으나 입법기능이 없으며, 가맹국 정부 대표자들이 모여서 다수결로 정책을 결정한다. 이런 방식은 직전제보다 간선제가 민주적이지 못하듯이 민주주의를 약화시키고 있다. 물론 유럽연합이 인민주권에 근거한 하나의 정치공동체로, 기존의 민족적 경계를 넘어서는 새로운 민족을 형성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가능성도 없지 않다. 그러나 그러한 새 민족(서유럽 민족)의 형성은 인민대중이 자본주의라는 낡은 사회적 관계를 넘어 새로운 사회적 관계를 만들어 나가는 변혁적 진출 과정에서만 역동적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17) 이 점은 남북관계에서도 적용될 수 있다. 남북 모두에서 인민대중에 의해 통제되는 참 민주주의가 이루어지게 될 때 남북연합은 통일과 사회진보로 나아가는 데 있어서 매우 긍정적 의미를 가질 수 있으나 그것이 결여될 경우 현재의 질서를 온존시키는 쪽으로 귀결될 수 있다.

(18) "신자유주의 유토피아를 향해 나아가는 이러한 움직임은, 순수-시장의 논리에 대해 방해물로  될 소지가 있는 `모든 종류의 집단주의적 구조물들을 문제시하는 것`을 그 목표로 삼고 있다. 이렇게 문제시되는 집단주의적 구조물로는, 그 운신의 폭이 부단히 좁아지고 있는 `민족`이 대표적이다.…(또) 노동자들이 자신의 권리를 방어하기 위해 만들어 낸 집단체들 즉 노동조합, 사회운동단체, 협동조합들이 목표물이 되고 있다. 심지어 가족이라는 집단주의적 구조물조차도, 연령계층에 따라 시장이 분단적으로 구성되는 것을 통해서, 소비에 대한 자신의 [집단주의적] 통제권의 일부분을 잃어가고 있다." 삐에르 부르디외, "신자유주의의 본질", <르몽드 디쁠로마띠끄> 1998년 3월호.

(19) 민족공동체를 파괴하는 방편으로 이러한 부족적·종족적 공동체들 간의 갈등이 부추겨지는 사례들이 빈발하고 있다. 사회주의 체제의 붕괴에 이은 급속한 자본주의화의 과정에서 종족별로 분열되어 격렬한 내전을 거듭하고 있는 구 유고연방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아프가니스탄에서도 부족간의 갈등이 이용되었다. 이런 공동체들은 일정한 영토에서 살아가는 인민대중이 하나의 정치공동체(민족국가)를 이루어 정치의 주인·주체로 나서고 있는 오늘날 퇴행적인 작용을 하고 있다.

(20) 네그리, 앞의 책

(21) 물론 사회변혁이 꼭 기존의 민족국가의 경계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국제적인 변혁을 통해서 현재의 민족국가보다 확대된 국가를 건설할 수도 있을 것이다. 예컨대 역사적으로 하나의 민족체로 형성되는 과정을 거쳐왔음에도 불구하고 제국주의 세력의 분할지배 전략에 따라 여러 민족국가로 나뉘어져 있는 아랍권이나 남미 국가군--베네수엘라, 볼리비아, 콜롬비아 등--의 경우에 그러한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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