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활웅(재미 통일문제 자유기고가)


임동원 특사가 한반도 위기를 해소하고 남북대화의 물꼬를 트기 위해 평양을 다녀왔다. 그 결과 북한이 미국과의 대화에 응하기로 했으며 또 남북간에 6개항의 공동보도문이 발표됐다. 
  
남북간에는 이제 이산가족 방문, 경제협력추진위원회, 북한경제사절단의 남한방문, 금강산관광활성화를 위한 당국회담 등 행사가 연달아 열리도록 일정이 잡혔다. 또 동해와 서해의 철도와 도로를 연결하고, 개성공단건설과 임진강 수해방지대책 등을 논의할 실무협의도 가동키로 했다.

그리고 이런 사업의 진척에 따라 장관급회담과 군사당국자회담도 가진다는데 원칙적 합의를 보았다. 이와 같이 남북간에 교류가 늘고 화해와 협력이 이루어져야 통일의 전망도 밝아질 것이니 이는 매우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임 특사의 노력은 높이 평가할 만 하다.
  
그러나 임 특사의 방북은 남북대화의 물꼬를 트는데는 일단 성공했으나, 한반도의 위기국면을 말끔히 해소하지는 못했다. 미국과 대화하라는 남측의 설득을 북측이 수용한 것은 다행한 일이다. 그러나 북미관계 파국의 책임이 전적으로 북한에게만 있는 것은 아니다. 미국은 말로는 조건 없이 대화하자고 하지만 북한을 능멸하고 그의 안전을 위협하는 언동을 계속하고 있다. 또 북한이 수용하기 어려운 요구들을 내세우며 이를 관철시키는 것이 대화의 목표라고 공언하고 있다. 우리는 북한에 대한 미국의 진의가 과연 무엇인지 제대로 파악할 필요가 있다.
  
미국의 끊임없는 요구

그 동안 약 10년에 걸친 북미간 외교교섭의 경과를 살펴보면 양측 협상자세에 뚜렷한 차이가 있다. 북한은 한꺼번에 모든 문제를 포괄적으로 타결하기를 바라는데 비해 미국은 매 회담마다 한가지 문제의 타결만 추구하여 왔다. 그리고 다른 문제들은 다시 순차적으로 제기하여 마침내는 모든 문제를 해결한다는 것이 미국의 자세이다. 그 결과 미국은 매번 한가지 구체적 문제에 대해 북한의 확실한 약속을 얻어내는 데 비해, 북한은 미국으로부터 주로 포괄적 문제에 대한 막연한 언질만 얻고 있다.     
  
1993년 북미회담이 시작됐을 때 미국의 협상목표는 오직 북한 핵 개발계획의 저지였으며 그것은 1994년 10월의 기본합의서의 서명으로 이루어졌다. 미국은 그 대가로 2003년까지 경수로 2기를 건설하고, 그 완공 때까지 매년 5십만 톤의 중유를 제공한다는 구체적 약속을 했다. 그리고 북한의 포괄적 요구에 대해서는 1) 정치경제관계의 전면적 정상화(즉 외교관계 격상과 경제제재 완화), 2) 위협 및 무력사용의 금지, 3) 상호 주권존중 및 내정불간섭, 4) 한반도 평화통일의 지원 등을 약속했다. 그때 많은 사람들은 이것을 `북한외교의 승리`라고 했다. 
  
그러나 미국은 구체적 약속은 물론 이런 막연한 언질의 실행을 지연시키면서 새로운 요구를 내놓았다. 한국전 때 북한에서 사망한 미군유해 발굴작업에 협력하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대가로 경제제재를 풀어주고 외교관계를 격상시켜주겠다고 했다. 이미 써먹은 낡은 미끼로 새 고기를 낚자는 것이었다. 그래도 북한은 이 요구를 들어주었다.
  
그 다음에 미국은 미사일 문제를 들고 나왔다. 북한은 미사일문제는 주권국가로서 아무 규제를 받을 의무가 없다고 버티었다. 그러자 미국은 또 다시 경제제재 완화와 외교관계 격상 등 낡은 미끼를 들고 나왔다. 그리고 불응하면 미사일관련시설을 폭파하겠다고 위협했다. 이것은 94년 기본합의의 위반이었지만 그렇다고 물러설 미국이 아니었다.

결국 북한은 협상에 응해 2000년 10월의 공동코뮤니케로 미사일발사의 한시적인 자진보류와 약속이행을 보장하기 위한 검사를 받을 용의를 표명했다. 이 때 북한이 약속 받은 반대급부는 대체로 94년에 이미 받기로 한 것의 재탕이었지만, 새로운 내용으로 한국전을 공식으로 끝내고 평화체제를 수립한다는 것과 서로 적대적 의사를 철회한다는 약속을 받았다. 그러나 이것도 역시 막연한 포괄적 언질을 믿고 구체적인 약속을 해준 사례였다.
  
이제 북미교섭이 재개되면 한반도 위기는 일단 모면한 듯 보일 것이다. 그러나 미국은 재개된 대북협상에서 기왕에 북한이 약속한 내용의 재확인을 받는 동시에, 대량살상무기, 특히 생화학무기의 완전통제를 목표로 삼고, 낡은 미끼와 무력위협을 번갈아 쓰면서 북한을 압박할 것이다. 이 때 북한이 만약 미국의 요구에 불응하면 한반도 위기는 되살아나게 마련이며, 한국은 또 대북 특사를 보내 북한을 설득해야 하게 될 것이다.
  
결국 한반도의 위기는 언제나 북한이 미국의 요구를 수용해야만 모면하게 되는데, 문제는 그간의 경위가 입증하듯 미국은 한가지 요구가 관철되면 그것으로 끝내지 않고 또 다른 요구를 꺼낸다는데 있다. 즉 미국은 대량살상무기 문제가 해결되면 재래식무력의 전진배치문제를 들고나올 것이고, 그것이 타결되면 북한 인권문제를 걸고 넘어질 것이고, 그것이 끝나면 북한의 경제체제문제를 따지고 들 것이고, 그것을 매듭지으면 북한의 정치체제문제를 들추고 나오는 식으로, 결국 북한체제가 붕괴되기 전에는 대북 압력의 고삐를 늦추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 과정의 어느 시점에서 북한으로서도 더 이상은 물러설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어, 결국 한반도의 위기는 마침내 도저히 면할 수 없는 국면에 도달할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가 된다.

남한은 더 이상 미국의 대북정책에 동조할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밝혀야

그런 즉 한반도의 전쟁위기를 철저히 차단하기 위해 한국이 해야 할 일은, 1) 북한이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는 선, 따라서 미국이 더 이상 밀어붙여서는 안될 선이 어디인가를 북한과의 대화를 통해서 정확히 판단하고, 2) 미국이 그 이상 나가지 않도록 자제할 것과 또 기왕의 대북 약속을 지킬 것을 설득하는 동시에, 3) 미국이 이를 무시하는 경우에는 한반도의 평화와 한민족의 생존을 위해서, 더 이상 미국의 대북 정책수행에 동조할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해 두는 것이다. 그런 중요한 문제를 애매하게 다루니까 북으로부터 동족과의 공조냐 외세와의 공조냐는 추궁을 받게 되는 것이다. 
  
부시 미 대통령은 지난 1월 29일의 시정연설에서 북한은 "악의 축"에 속하는 나라로서 미국의 다음 공격대상국의 하나라고 했다. 이에 대한 한국인들의 비판이 거세지자, 3주 후 서울에 온 그는 미국은 북한을 침공할 생각이 없다고 언명했다. 이 한마디에 한국의 관민 모두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미국 수뇌들의 대북 규탄의 강도는 계속 제고되고 있는 가운데 다시 3주 후에는 미국의 새로운 핵 정책이 북한을 공격대상으로 상정하고 있다는 것이 밝혀졌다. 부시가 거짓말했다는 것이 입증된 것이다.  
  
한때 미국이 북한은 안 칠 것, 아니 못 칠 것이라는 것이 한반도 문제를 연구하는 전문가들의 정설이었다. 북한의 중요 시설은 모두 지하 깊숙이 숨겨져 있으며 휴전선에는 막강한 포병병력이 배치돼 있어, 미국이 북한을 침공하면 희생만 크고 성과가 적을 것이라는 판단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미국은 다르다. 미국은 그 동안 지하벙커를 꿰뚫는 무기도 개발했으며 적의 병력을 먼저 잠재워놓고 공격하는 신무기도 개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미군의 피해를 최소한으로 줄이면서도 적을 확실히 격파할 수 있다는 자신만 서면, 어느 나라든지 주저 없이 공격할 수 있는 것이 미국이다. 미국의 여론도 정부의 그런 태도를 지지하는 추세다.   
  
미국은 또한 약속을 지키지 않는 나라다. 그간의 대북협상의 경과가 이를 증명할 뿐 아니라, 세계 여러 권위 있는 기관들이 그렇게 지적하고 있다. 바로 며칠전(4월 4일)에도 "에너지와 환경 조사원(Institute for Energy and Environmental Research)"과 "핵 정책에 관한 법률가위원회(Lawyers` Committee on Nuclear Policy)"가 공동 발표한 보고서 "힘의 지배냐 법의 지배냐(Rule of Power or Rule of Law)"가 "미국은 국제안전에 관한 주요 협약들을 하나도 성실히 준수하지 않고 있다"고 밝혔다.  
  
김대중 대통령은 얼마 전 국방부 업무보고를 받은 자리에서 "한미연합방위체제는 우리의 안전을 위해 절대적인 생존조건"이며 "이 대목에서는 눈치를 보면 안 된다"고 말한 것으로 보도되었다. 한반도에서 전쟁을 하고싶어 하는 쪽은 북한이 아니라 미국이다. 그런데도 눈치를 보지 말고 미국에만 매달려 있어야 한다는 말인가?
  
평양에 간 임 특사에게 북한은 6.15 공동선언 이행에 차질이 생긴 것은 미국과 더불어 남측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따졌다 한다. 남한의 관민 모두가 자성하고 각성해야 할 일이라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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