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환(통일뉴스 편집국장)

북한과 미국은 진정 백년숙적(百年宿敵)의 관계인가? 정녕 한 하늘을 이고 함께 살 수 없는 불구대천(不俱戴天)의 원수란 말인가? 최근 악화일로를 걷고 있는 양국의 관계와 그로 인한 한반도정세의 불안정성을 보면 이러한 생각이 저절로 난다.

북한은 미국을 1945년에 38선을 그은 남북분단의 장본인이자 1950년 한국전쟁의 당사자로서 그리고 그 이후 한반도 긴장의 원인제공자와 민족통일을 가로막는 외세로 인식하고 있을 것이다. 반면에 미국은 북한에 대해 한마디로 자국의 세계지배전략에 사사건건 제동을 거는 지구상에 몇 안되는 `불량국가`(rouge state)로 간주하고 있을 터이다.

사실 미국이 보기에 북한은 `눈엣 가시`와 같은 존재임에 틀림없다. 지구상 어느 나라도 미국의 지위와 힘 앞에 `알아서` 기는데 유독 북한을 포함한 몇 나라만이 뻐땡기니 말이다. 미국이 "대화를 하자"고 하면 북한은 "클린턴 행정부때의 수준에서부터 하자"고 맞서고, "혼내 주겠다"하면 "대화에는 대화로 강경에는 초강경으로 맞서겠다"고 으름장을 놓는다. 그리고 미사일 등 대량살상무기에 우려를 나타내면 "전적으로 우리의 자주권에 속하는 문제"라고 일축하고 "테러지원국가로서 혐의가 짙다"고 하면 오히려 "미국이 테러 왕초"라고 비아냥거린다. 도무지 미국의 뜻대로 움직여 주질 않는다.

9.11 이후 미국의 `압박`과 북한의 `맞받아치기`

그런데 이러한 양국관계에도 화해 분위기가 있었던 적이 있다. 모두가 알고 있듯이 2000년 10월 당시 북한의 조명록 특사와 미국의 올브라이트 국무장관간의 워싱턴-평양 교차방문 및 10.12북미공동코뮤니케 합의, 그리고 불발은 되었지만 예정된 미 대통령의 평양방문 등으로 양국은 1950년 한국전쟁의 종식과 더불어 관계정상화의 길로 접어들면서 백년숙적의 관계에 종지부를 찍는 듯했다.

그러나 지난해 부시 행정부 출범이래 양국은 대세잡기와 힘겨루기를 하듯 상호압박을 주고받다가, 특히 9.11테러사태를 지나면서 힘의 우위를 앞세운 미국의 일방적 `압박`과 북한의 `맞받아치기`가 하나에서 열까지, 작은 것에서부터 큰 것에 이르기까지 첨예하게 부딪히면서 금속성 음을 내고 있다.

9.11 이후 미국은 수퍼 강대국으로서의 지위와 체모를 만회하고자 힘의 우위를 바탕으로 세계를 `테러(지원)국`과 `반테러국`으로 나누고 모든 나라들로 하여금 여기에 줄서게 만들었다. 미국은 자신의 구상대로 세계질서를 재편하고는 대테러전쟁이라는 명분으로 아프간을 공격하고 승리를 목전에 두자 "아프간 다음은 북한"이라면서 2002년을 `전쟁의 해`로 선언했다. 이 `테러와 전쟁` 한가운데에는 늘 북한이 있었다.

양국관계의 최악의 상태는 올해 1월 부시 대통령의 연두교서에서 나왔다. 부시가 북한을 겨냥해 `악의 축`이라 하자 북한은 이를 "선전포고로 받아들인다"면서 "타격의 선택권은 미국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외무성대변인 성명, 1.31)고 맞받아친다. 또한 지난달 부시 대통령이 방한시 언급한 `북한 체제와 주민` 간의 분리에 대해서는 "부시 패거리와는 상종할 생각이 없다"(외무성대변인 담화, 2.22)고 단호히 맞선다.

이어 미국이 북한을 포함해 7개 국가를 핵공격 대상으로 지정한 `핵태세검토보고서`(NPR) 내용이 보도되자, 북한은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 어떤 조·미 합의에도 구애됨이 없이 그에 대응한 실질적인 조치"(외무성대변인 담화, 3.13)를 취하겠다며 부시 행정부에 대한 강한 불신감을 드러낸다.

또한 한미연합사령부가 3월21일부터 27일까지 연합전시증원연습과 독수리연습을 통합시켜 훈련을 실시한다고 하자 북한은 이를 `북침전쟁 연습` 또는 `북침 핵예비전쟁`이라 하면서 "우리 공화국에 대한 선제타격 계획을 실전에 옮기기 위한 종합적인 전쟁연습이며 핵전쟁의 도화선에 불을 달 기회를 만들려는 매우 위험천만한 전쟁도발 책동이다"(외무성대변인 담화, 3.18)고 비난했다.

2003년 `한반도 위기설` 

왜 이러한 현상이 일어나는 것일까? 특히 최근에 와서 양국의 한치의 양보도 없는 설전과 힘겨루기는 무언가 어떤 극대점을 향해 나아가는 느낌이다. 그것은 아마도 양국관계를 10년 동안 규정해 온 1994년 제네바 핵합의의 만기일을 겨냥한 `다툼`일 공산이 크다. 이른바 2003년 `한반도 위기설`을 향한 `기선잡기`다.

2003년 위기설 근원의 하나는 10년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94년 제네바 핵합의의 요지는 북한이 기존의 핵프로그램을 동결하는 대신에 미국은 2003년까지 경수로 2기를 건설하고 매년 중유 50만톤을 제공한다는 내용이다. 그런데 2003년까지 경수로가 준공되지 않는다. 어쨌든 미국은 약속을 어기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일단 제네바 핵합의는 그 이행여부를 놓고 중대한 난관에 봉착할 수밖에 없다.

다른 하나는 미사일문제다. 북한은 미국의 아킬레스 건인 미사일문제를 놓고 `대화와 반대급부(외화)` 전략을 쓰면서, 2000년 7월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방북했을 때 "미국이 위성을 대신 쏴주면 우리는 개발을 안하겠다"는 입장을 전했고 지난해 5월 페르손 스웨덴 총리 방북때에는 미사일 시험발사 유예조치를 2003년까지 지킬 것이라고 선언한 바 있다.

따라서 내년은 경수로건설 지연에 따른 북한의 손해배상 요구와 북한의 미사일 시험발사 유예 등의 시한이 집중돼 있는 해로서, 북미간에는 1994년의 전쟁 일보 직전까지 갔던 한반도 상황을 떠올리게 한다.

특히 최근 제네바 핵합의에 관한 부시정부의 부정적 인식이 나오자 북한은  "미국이 우리와의 약속이 불편스러워 그것을 깨 버린다면 우리도 제 갈길을 가면 되는 것"(민주조선 3.22)이라고 밝혔다. 만약 제네바 핵합의가 파기된다면 이는 그간 북미관계를 규정하고 제어했던 10년 질서가 붕괴되는 것이다. 한반도 질서가 와해되는 것이다.

특사 방북은 민족공조의 리트머스 시험지

이러한 때 남한 임동원 특보의 방북 특사 소식은 일단 `안도의 한숨`을 내쉬게 한다. 남북이 공동발표문에서 밝힌 `한반도 긴장조성을 예방`(남한)과 `민족앞에 닥쳐온 엄중한 사태`(북한)는 모두가 최근 북미관계의 악화에 따른 한반도 긴장상태와 더 나아가 2003년 `한반도 위기설`을 반영하고 있는 듯하다.

예전 같았으면 북미간의 갈등에 남한이 끼어들 여지가 없었다. 북한의 이른바 통미봉남(通美封南), 선미후남(先美後南) 정책 때문이었다. 따라서 그 어떤 완충장치나 아무런 중재자도 없이 북미갈등은 늘 벼랑끝까지 갔다. 그래서 그것을 겪어야 하는 북한주민이나 구경해야 하는 남한국민에게는 고통 그 자체였다. 그러나 6.15 공동선언 이후 한반도문제를 민족공조의 입장에서 대처하자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이번 임동원 특사의 방북은 민족공조의 리트머스 시험지가 될 것이다.

따라서 임동원 특사가 평양에 가서 북한당국에 지난 2월 서울에서 열린 한미정상회담의 결과를 설명하고 핵 미사일 등 대량살상무기 문제 등 미국의 우려사안들을 가감없이 전달하면서, `북미대화를 촉구`할 것으로 알려졌는데 이러한 설명이나 전달은 그 자체로는 별 의미가 없어 보인다. 뻔한 것을 부언하거나 설사 모르고 있다해도 알으켜 주는 정도로는 왠지 `특사의 역할`이 왜소하다.

분명 최근의 `한반도 긴장조성`과 `민족앞에 닥쳐온 엄중한 사태`는 미국에 기인한 바 크다. `특사`라면 남북이 민족공조를 통해 당장의 한반도 긴장을 해소하고 2003년 위기설을 잠재울 수 있는 모종의 역할을 해야 한다. 그것만이 6.15 공동선언의 정신을 살리고 길게는 북한과 미국으로 하여금 `백년숙적`의 관계에서 `백년손님`의 관계로 상호 인정하게 하는 첫걸음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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