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올림픽 공동입장은 가슴속 깊이 우러나오는 감동

2000년 9월 15일 오후 7시. 오스트레일리아 시드니시에 있는 올림픽파크 주경기장에서는 전세계를 감동에 몰아 넣는 일대 사건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우리의 전통 민요 아리랑이 배경 음악으로 흐르는 가운데 진한 푸른색 재킷에 베이지색 바지를 입은 남북한 올림픽 대표단이 손을 맞잡고 입장하였습니다. 근대올림픽 백년사에서 분단 국가 선수단이 손을 맞잡고 개회식에서 동시 입장하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습니다. 선수들은 흰색 바탕에 하늘색으로 그려진 한반도기를 흔들면서 흥분을 감추지 못했고, 고국에서부터 또는 전세계 방방곡곡에서 이 장면을 보러 먼 길을 온 동포들은 감동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또 오스트레일리아에 거주하는 동포들도 감격의 눈물을 흘리면서 열광적인 박수를 보냈습니다. 경기장을 가득 메운 관중들은 열렬한 박수로 남북한 선수들을 격려하였고, 귀빈석을 메운 사람들은 일제히 기립해서 선수단을 환영하였습니다.

이 장면을 텔레비전을 통해서 지켜 본 우리 민족 성원들 중에 가슴 속 깊이에서 우러나오는 감동을 느끼지 않은 사람은 아마 거의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순간만큼은 정말 세계를 감동시키는 저력을 지닌 한민족의 구성원임을 자랑스러워했을 것입니다. 물론 앞에서도 보았듯이 일제로부터의 해방조차 싫어하는 `이중생` 같은 사람도 있고, 또 그런 사람은 어느 시대 어느 나라에서나 있는 법이므로 이런 장면을 보고도 감동을 느끼지 못하거나 심지어 나쁜 마음을 먹는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날의 이 순간만큼은 이런 사람들의 좋지 못한 생각들이 감동의 물결 속에 묻혀 버리는 그런 순간이었습니다.

■ `민족`은 우리 민족에게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 보편적 가치

우리가 이런 광경을 보고 감동적인 느낌을 갖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민족`이 아직도 우리 가슴 속에 강렬하게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역설적이게도 우리 민족이 아직도 피억압과 종속의 상태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음을, 다시 말해서 여전히 우리에게 `민족 자주`가 중요한 과제로 살아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무엇을 주장할 때 `민족`을 근거로 내세우는 일이 많습니다. 80년대에 학생들이 전두환 정권을 규탄할 때 `살인마 전두환을 민족의 이름으로 처단하자`라는 제목으로 유인물을 만든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학생들은 그의 군사쿠데타, 민중 학살, 민주 세력 탄압 등이 모두 반민족적인 행위라고 보았던 것입니다.

이렇게 `민족`이 아직도 우리 민족 구성원의 가슴 속에 깊이 살아 있게 되자 전혀 `민족적이지 못한` 다시 말해서 `반민족적인` 사람들이 `반민족적인` 행위를 `민족`이라는 이름으로 합리화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남북정상회담과 6.15공동선언 및 김정일위원장의 서울 방문을 `민족의 이름으로` 반대하는 사람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외국 군대는 당연히 우리 나라에 있어야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고, 그 외국 군대에 의해서 우리 민중들이 희생을 당하고 있는 현실에 대해서도 한마디 언급도 하지 않는 사람들이므로 이들이 `민족`과 거리가 먼 사람들이라는 것은 굳이 언급할 필요조차 없습니다. 그리고 이들의 뿌리가 바로 `이중생`이나 `윤직원` 또는 `이인국`과 같은 사람이라는 것은 우리가 역사를 조금만 공부해 봐도 알 수 있는 일입니다. 이런 사람들조차 `민족`이라는 이름을 들먹일 정도로 `민족`은 우리 민족에게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 보편적 가치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 `세계화`에 앞서 완전 자주 독립 국가를 세우는 것이 더 중요하다.

그런데 요즈음 돌아가는 상황을 자세히 보면 `민족`이라는 것이 겉으로 명분으로 내세워지는 것만큼 실제로도 대접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어느 순간부터 우리는 `세계화`라는 말에 익숙해져 있고, `민족`을 말하면 마치 구시대 사람인 것처럼 생각하는 풍조가 확산되는 것을 목격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영어 공용화론`을 주장하는 사람까지 생긴 것이 현실입니다. 이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내세우는 근거가 되는 명제 중의 하나는 `민족은 역사적 발전의 산물`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전제하에서 이제 국가의 경계가 허물어져 가는 상황에서 민족은 시대착오적인 개념이 되어 가고 있다는 것이 이들의 주장입니다. 하지만 앞에서도 보았듯이 아직도 전세계는 억압하는 민족과 억압을 당하는 민족으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물론 이렇게 단 둘만으로 나뉘어져 있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대체적으로 구분해 볼 때 이러한 구분은 타당성을 갖고 있습니다. 특히 우리 민족은 강대국의 이해 관계에 따라 분단이 되었고, 지금도 그 비극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에게 아직도 `민족`은 소중한 가치이고, `민족 자주`는 우리가 이루어야 할 이 시대의 중요한 과제임이 분명합니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우리에게 교훈을 주는 글이 있습니다.
"세계 인류가 네요, 내요 없이 한 집이 되어 사는 것은 좋은 일이요, 인류의 최고요 최후의 희망이요, 이상이다. 그러나 이것은 멀고 먼 장래에 바랄 것이요, 현실의 일은 아니다. 사해 동포의 크고 아름다운 목표를 향하여 인류가 향상하고 전진하는 노력을 하는 것은 좋은 일이요, 마땅히 할 일이나, 이것도 현실을 떠나서는 안 되는 일이니, 현실의 진리는 민족마다 최선의 국가를 이루어, 최선의 문화를 낳아 길러서 다른 민족과 서로 바꾸고 서로 돕는 일이다. 이것이 내가 믿고 있는 민주주의요, 이것이 인류의 현 단계에서는 가장 확실한 진리다. 그러므로 우리 민족으로서 하여야 할 최고의 임무는 첫째로 남의 절제도 아니 받고 남에게 의뢰도 아니하는 완전한 자주 독립의 나라를 세우는 일이다. 이것이 없이는 우리 민족의 생활을 보장할 수 없을뿐더러 우리 민족의 정신력을 자유로 발휘하여 빛나는 문화를 세울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완전 자주 독립의 나라를 세운 뒤에는, 둘째로 이 지구상의 인류가 진정한 평화와 복락을 누릴 수 있는 사상을 낳아 그것을 먼저 우리 나라에 실현하는 것이다."

백범 김구가 쓴 `백범 일지`의 한 부분입니다. 이 글을 교훈으로 삼을 때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야 합니다. 우리는 완전한 자주 독립 국가를 이루었는가? 물론 대답은 부정적입니다. 우리는 여전히 분단되어 있습니다. 통일이 되기 이전에는 완전한 자주 독립 국가라고 보기 어렵지요. 그리고 백보 양보해서 동북아 안정을 위한 일이라고 해도 외국 군대가 우리 나라에 엄연히 주둔해 있습니다. 그뿐입니까? 그 외국 군대가 저지른 학살에 대해서 50년이 지난 이제야 조금씩 말할 수 있는 실정입니다. 그 외에 열거하자면 한이 없지요.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민족 자주`를 구시대의 유물로 돌리고 무엇을 해야 하는 것일까요?

■ 무엇이 `민족`이고, 무엇이 `반민족`인지를 역사를 통해 분명하게 알아야 한다.

이제 우리는 `민족 자주`에 바탕을 둔 역사관으로 역사를 서술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먼저 `민족`과 `반민족`의 개념을 분명하게 정립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바탕으로 하여 무엇이 `민족`이고, 무엇이 `반민족`인지를 역사를 통해 분명하게 서술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사회에는 아직도 친일파의 후예들이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친일파에 대한 역사적 단죄를 알게 모르게 방해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국사 교과서에 친일파에 대한 서술이 전혀 없다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는 일입니다. 친일파의 행적을 낱낱이 밝해 내서 `반민족적인` 행위는 역사 속에서 분명하게 단죄되는 것임을 보여 주는 것, 그것이 바로 `민족 자주`를 향한 미래를 열어 갈 수 있는 올바른 역사관을 수립하기 위해 우리 사회가 갖추어야 할 둘째 조건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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