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한 상황에서 개발된 화약 무기는 그 무렵 정부의 가장 큰 골칫거리의 하나이던 왜구를 토벌하는 데 결정적인 힘이 되었습니다. 1380년과 1383년에 침입해 온 왜구를 진포와 관음포에서 섬멸함으로써 고려 정부는 골치 아픈 문제를 최무선의 화약 무기로 한꺼번에 해결할 수가 있었습니다.
 
최무선이 개발한 화약 무기를 실전에 씀으로써 왜구와의 전투에서 커다란 공을 세운 신흥 무장 세력의 지위가 급격히 치솟았습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이성계였습니다. 이성계로 대표되는 신흥 무장 세력들은 고려 말 개혁 정치의 주도 세력인 신진 사대부들과 손을 잡고 사대부 정권을 세우는 데 결정적인 힘이 되었습니다. 1380년에 남원 황산에서 왜구를 섬멸한 이성계의 대첩은 오로지 최무선이 개발한 화약 무기의 도움에 힘입은 것이었습니다.
 
이 점은 이성계의 공을 찬양하는 데 초점을 맞춘 조선 왕조 실록에서도 인정하고 있습니다.
 
"임금이 병마도원수로 여러 장수와 함께 왜구를 남김없이 점멸했다. 이로부터 왜구가 점점 줄어들어서 항복을 비는 자가 연이어졌고 바닷가의 백성이 예전처럼 생업을 회복하였다. 비록 임금의 덕으로 말미암아 하늘이 응해 준 소치겠으나 최무선의 공 또한 적지 않았다."
 
다른 경우와 달리, 이성계의 대첩은 해안에서 패배한 왜구들이 내륙으로 몰려들어 만행을 일삼던 때였는지라 민중들에게도 몹시 통쾌한 승리였습니다. 그러므로 이 대첩에서 승리를 거둔 이성계는 자연스럽게 국민적인 영웅이 될 수 있었습니다.
 
이성계가 국민적 영웅으로 떠오르자 거꾸로 권문 세족의 부패와 무능이 뚜렷이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결국 최무선의 화약 무기 개발은 권문 세족 정권에 도움이 되었다기보다는 그 시대의 사회 모순을 더욱 드러내고, 그들을 대신한 신흥 세력이 떠오르는 계기로 작용했습니다. 원래 과학 기술의 발달은 사회가 그것을 담아내지 못할 때 그 사회의 모순을 더욱 날카롭게 만드는 구실을 합니다. 최무선의 화약 무기 개발도 고려 말의 사회에 그러한 영향을 끼쳤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앞에서도 보았지만 우리 나라는 세계에서 처음으로 화약 무기를 함선에서 쓸 수 있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시대의 과학 기술 수준은 일본보다 훨씬 앞서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부터 200년 뒤인 임진왜란 때에는 조총을 앞세우고 쳐들어온 왜군에게 우리의 강토가 짓밟히는 비극을 맞습니다.

그나마 이순신을 중심으로 한 수군이 일본군을 쳐부술 수 있었던 것은 최무선이 화약 무기를 개발했던 전통이 이어져 수전에서 쓰는 무기가 일본 수군을 압도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우리의 과학 기술 수준이나 국력이 일본보다 뒤떨어졌기에 왜군의 발길에 국토가 짓밟히는 비운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로부터 300년이 지난 뒤 끝내 일본의 식민지가 되는 처참한 지경에 빠지게 됩니다. 이제 그로부터 또 100년이 지난 오늘 우리는 이미 다 낡아서 단종을 목전에 둔 무기를 구입하라는 압력 앞에서 쩔쩔매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힘으로 무기를 개발한다는 것은 엄두도 내지 못합니다. 아니 자신의 힘으로 무기를 개발하는 것이 마치 세계 평화를 위협하는 것이나 되는 양 강대국의 논리를 앵무새처럼 떠들어대는 자들이 이 땅의 언론의 주된 흐름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최무선이 지하에서 이러한 상황을 봤다면 무엇이라고 했을까요? 우리 모두가 한번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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