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평양시 환영대회와 김일성의 부각

1945년 10월 14일. 이날은 김일성이 역사 무대에 그 화려한 모습을 드러내는 날입니다. 이름하여 `김일성 장군 환영 평양군중대회`. 이날 평양역전에는 해방 후 최대의 인파가 모인 가운데 성대한 군중집회가 개최되었습니다. 30만이 모였다고도 하고 40만이라고도 합니다만 아무튼 당시의 평양 시민 숫자를 생각한다면 대단한 인파가 모인 것은 분명합니다.
대회는 원래 10시에 시작하기로 했으나 11시가 넘어서 시작되었습니다. 사회는 10월 13일에 결성된 북조선 분국 책임자 김용범이 맡았고, 주석단에는 제25군 사령관 치스차코프 대장, 정치사령관 레베데프, 민정사령관 로마넨코 등 소련군 장성들과 환영대회 준비위원장 조만식이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레베테프와 조만식에 이어 세 번째로 [모든 힘을 새 민주조선 건설을 위하여]라는 제목으로 연설했습니다. 거기서 그는 "힘 있는 사람은 힘으로 돈 있는 사람은 돈으로 건국사업에 적극 이바지하여야 하며, 참으로 나라를 사랑하고 민족을 사랑하고 민주를 사랑하는 전 민족이 굳게 단결하여 민주주의 자주독립국가를 건설해 나가자"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날 대회에서는 약간의 소동이 있었습니다. 김일성이 너무 젊어서 가짜가 아닌가 하는 의문이 일었던 것입니다. 대중들은 항일 투쟁의 전설적 영웅으로 알려진 김일성 장군이 나이가 많은 노인일 것이라 생각했던 겁니다. 흰 수염을 휘날리며 말을 타고 만주벌판을 달리며 일본군을 쓰러뜨리고 축지법을 쓰는 인물로 신비화됐던 것이지요. 그러나 이것은 터무니없는 생각입니다. 만주지역은 겨울이면 영하 40도를 넘나드는 혹한의 땅입니다. 그런 곳에서 추위와 굶주림을 견디며 총을 들고 야수 같은 일본군과 싸운다는 것은 젊고 건강한 청년이 아니고는 불가능합니다.

어쨌든 이런 소동을 잠재우기 위해 소련군은 대회가 끝난 후 기자들을 만경대 김일성의 생가로 데리고 가 그의 조부모, 숙부와 숙모 등 친인척을 소개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 후 남한에서는 이런 일을 근거로 오랫동안 `가짜 김일성론`이 유포되기도 했지만, 이제는 더 이상 이런 주장은 통용되지 않습니다. 김일성의 항일투쟁에 대한 평가야 보는 시각에 따라 사람마다 다를 수 있지만, 북한 전 주석 김일성이 항일무장투쟁을 벌인 바로 그 김일성이라는 사실에는 더 이상 재론의 여지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김일성은 어떤 활약을 했기에 만 33세의 젊은 나이에 평양시 군중대회에서 항일 영웅으로 소개됐던 것일까요? 그의 경력을 간략히 살펴봅시다.

김일성은 1912년 4월 15일 평양 서남방 대동강 기슭의 만경대에서 아버지 김형직과 어머니 강반석의 3형제 가운데 맏아들로 태어났고, 그의 어린 시절 아명은 김성주였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조선국민회와 105인 사건에 연루된 적이 있고, 남만주 일대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고문 후유증으로 1926년 32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했습니다. 아버지와 항일의식이 강했던 집안의 영향을 받아 김일성은 어린 나이에 민족의식을 갖게 됩니다.

아버지 김형직이 사망한 후 만주로 간 김일성은 학교에 다니면서 공산주의 청년운동에 가담해 1929년에는 감옥살이까지 하게 됩니다. 1930년 출옥 후 김일성은 본격적으로 항일운동의 길로 나서고, 1932년 4월 25일 안도에서 무장유격대를 조직하면서 무장투쟁의 길로 들어섭니다(북한 조선인민군의 창군기념일은 4월 25일).

김일성은 1934년에 조직된 조·중 연합부대 동북인민혁명군에서 제2군독립사의 지도자로 활약합니다. 제2군독립사는 절대다수가 조선인이었고, 김일성, 안길, 최현, 김일 등이 그 지도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여러 차례 부대 명칭과 편제가 바뀌는 가운데서도 조선혁명에 대한 갈망을 버리지 않습니다. 그 때문에 `민생단`으로 몰려 많은 혁명가들이 처형되기도 하고 부당한 압력과 핍박을 받기도 합니다. 그러나 통일전선이 강조된 1935년 7월 제7차 코민테른 이후 중국공산당이 이 부대가 조선혁명의 주체임을 인정함으로써 상황이 달라집니다. 오늘날 북한에서 `조선인민혁명군`이라 부르는 부대는 제2군독립사를 근간으로 한 조선인 부대를 말합니다.

김일성이 항일무장투쟁에서 그 명성을 날리는 것은 1930년대 후반입니다. 특히 1937년 6월에 있은 보천보 전투는 동아일보에도 보도되어 김일성이 많은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결정적 계기가 됩니다. 보천보 전투는 그 규모 면에서 본다면 김일성이 벌인 수많은 일본군과의 전투 가운데 하나에 불과합니다. 100여명 정도의 유격대가 국경선을 넘어와 조그만 소읍의 경찰서를 습격하고, 국경 수비대 7명을 죽이고 7명에게 중상을 입히는 전과를 올렸던 것입니다.

오히려 전과로만 보면 일본군 육군 중위 가와타와 그의 부하 30명을 죽이고 무라야마 중위를 포함해 17명의 일본군을 생포한 1937년 2월 장백현 선명수 전투, 토벌대장 마에다 다케시를 죽이고 김일성을 잡으러 온 일본 경찰 58명을 몰살시키고 그들의 무기를 탈취한 1940년 초 하룡현 전투, 이런 것들이 훨씬 유명합니다. 일제의 대규모 공격을 피하면서 1938년 11월부터 1939년 2월까지 몽강현 남패자에서 장백현 북대정자까지 보통 행군속도로는 1주일이면 가는 거리를 무려 1백일이나 걸려 싸우면서 행군했던 `고난의 행군`도 빼놓을 수 없는 전투입니다.

그러나 보천보 전투는 일제 말기 암울한 상황에서 국내에서는 민족 지도자라고 떠들던 자들이 모두 친일파로 돌아서고 해방의 서광은 비치지 않던 시기에 일제가 `금성철벽`이라고 자랑하던 국경 수비대를 농락하고 국내로 진공작전을 펴 경찰 서장 오카와 슈이치를 죽이고, 조선 치안을 위협하는 등 조선인들의 반일 사상 통제에 커다란 타격을 가했다는 점에서 그 역사적 의의가 큰 것입니다. 더구나 김일성 부대는 혜산·갑산 지역을 중심으로 한 조국광복회 국내 세력, 즉 권영벽, 이제순 등의 국내 항일투사들과 조직적으로 연계해 사전에 정보를 탐지함으로써 국내 진공작전을 성공적으로 진행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김일성을 비롯한 만주에서 활약하던 조선인 유격대 지도자들이 끊임없이 조선의 해방과 독립을 생각하고 있었음을 말해줍니다.

김일성은 수많은 유격투쟁에서 일본군을 괴롭힙니다. 이미 30년대 후반 김일성은 만주 지역 조선인 유격대의 지도인물로 떠오릅니다. 일제는 김일성의 목에는 최고의 현상금을 걸고 프락치를 잠입시키고, 김일성 주변 인물에 대한 공작을 통해 김일성과 그의 부대를 와해시키려 합니다. 하지만 일제는 김일성을 사살하거나 체포하거나 그의 부대를 완전 궤멸시키지는 못하고 맙니다.

오늘날 북한이 주장하듯 항일무장투쟁이 모두 그의 지휘 아래 이루어졌거나 그가 모든 사건의 중심이었던 것은 아니지만 김일성은 항일무장투쟁에서 뛰어난 지도력을 발휘한 인물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이것은 김일성이 1945년 10월 14일 `평양시 환영대회`에 극적으로 등장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습니다. 소련군과 빨치산 세력은 이런 항일경력을 이용해 김일성을 대중적 지도자로 부각시킬 작업을 치밀하게 준비하게 됩니다. 그렇게 해서 김일성은 1945년 10월 14일 전설의 인물이 아니라 현실의 인물로 정치무대에 가장 극적이고도 화려하게 등장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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