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철기(동국대 국제관계학과 교수)


국민적 자각이 위기 막아

 
부시 방한이 남긴 최대의 성과는 우리 국민들의 정신적 자각이다. 미국에 대한 맹목적인 동경과 환상을 깨뜨리는 계기가 되었고, 우리 사회 전체에 대미인식의 변화를 가져오는 중요한 전환점을 제공했다. 미국의 실체와 이중성에 대해 국민들이 비로소 깨닫기 시작한 것이다.
 
기고만장한 부시의 막가파식 돌출발언을 막고 전쟁위기감을 누그러뜨린 것은 한미동맹과 한미공조를 외쳐대는 맹목적인 친미사대주의자들 덕이 아니다. 분노한 우리 국민들의 자각과 여론 때문이다. 국민들의 반미감정이 해방 후 최고도에 달했다. 이에 당황한 부시는 발언 수위를 누그러뜨릴 수밖에 없었다.
 
반면 국내의 일부 언론과 야당, 심지어 전문가를 자처하는 `비전문가`들은 부시의 `악의 축` 발언에 장단을 맞추면서 부화뇌동하기에 바빴다. 전세계의 비난 여론과 심지어 미국내에서조차 일고 있는 비판의 목소리에도 아랑곳없이, 이 지구상에서 거의 유일하게 부시의 발언을 거들고 나선 이 나라 냉전수구세력들의 엽기적인 행동에 분노하지 않을 수 없다.
 
이들은 한미동맹과 한미공조에 문제가 생겼다고 난리다. 또 햇볕정책을 폐기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미국의 부당한 주장과 정책을 일방적으로 무조건 따라가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잘못되었다는 것인지. 부시의 `기관지`를 뺨치는 일부 수구언론들의 보도태도와 `미국 공화당 2중대`식의 한나라당의 행동은 비판받아 마땅하다. 이들의 사대주의적 태도와 악의적 왜곡에 연민의 정마저 느끼게 한다.
    
부시 기관지와 미 공화당 2중대
 
일단 한반도를 휘감았던 전쟁위기감을 해소하는데는 성공했다. 그나마 한미정상회담의 성과라면 성과다. 그러나 여전히 북미관계의 앞날은 불투명하고 언제라도 다시 전운이 감돌 수 있다. 부시의 햇볕정책에 대한 원론적이고 의례적인 지지 표명에도 불구하고, 햇볕정책의 앞날은 험난해 보인다.
 
부시는 방한하여 북한에 대해 대화를 촉구하는 제스처를 썼지만, 그것은 진심이 아니다.   부시 행정부의 한반도정책 기조는 남북관계의 급속한 진전을 억제하고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을 견제하는 것이다. 설사 북미대화가 재개된다 하더라도 대화채널만 열어놓은 채 협상을 진전시키지는 않을 가능성이 있다. 부시의 입장에서 북한과 관계 개선은 시급한 과제가 아니며, 결코 서두를 아무런 이유가 없다. 오히려 "변화하지 않은 북한", "깡패국가 북한", "테러지원국 북한", "미국의 안보에 위협적인 북한"이 MD계획과 같은 군사정책 및 군사전략에 명분을 실어주기 때문이다.
 
작년 6월 6일 부시의 대북 대화재개 선언은 미국의 이 같은 의도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미국이 제시한 대화 의제는 북한으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것들이다. 미국은 조건 없는 대화를 말하지만, 미국이 제시한 의제 속에는 사실상 많은 전제와 조건이 함축해 있기 때문이다. 북한이 도저히 받을 수 없는 "썩은 당근"을 내밀고 받을 것을 강요하고 있는 꼴이다.
    
북한이 받을 수 없는 썩은 당근
 
또 94년 [제네바합의문]과 99년 [베를린합의], 2000년 10월 [북미공동성명]과 같은 기존의 북미간 협상결과와 합의사항을 완전히 무시하고 있다. 북미관계가 근본적으로 풀릴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미국의 과거 핵에 대한 조기 사찰 요구는 경수로 핵심부품이 인도되기 직전에 받도록 합의한 [제네바합의문]의 약속을 벗어난 것이다.
 
최대 현안인 미사일문제도 미국은 실제로는 북한과 협상할 생각이 없다. 미사일문제는 2000년 10월 조명록의 방미에 의한 북미회담을 통해 상당한 의견 접근이 이루어진 바 있다. 그러나 부시가 등장하면서 미사일협상은 난관에 봉착했다. 일체의 경제적 보상을 할 수 없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는 것은 물론, 미사일협상의 이행여부에 대한 검증을 새로운 조건으로 들고 나왔다. 미국은 MD계획의 명분 약화를 가져올 수 있는 북한 미사일에 대한 협상에 나설 이유가 없다. 북한은 이른바 `불량국가` 가운데서도 가장 미사일 기술이 앞선 국가이기 때문이다.
 
미국이 제기한 북한의 재래식 군축도 어려운 문제다. 재래식 군축과 전전배치 군사력의 후방 이동은 북한의 생존이 걸린 문제인 까닭이다. 미국이 북한에 요구하고 있는 것은 무장해제하고 항복하라는 소리와 똑같다. 북한이 군사력을 전진배치 시키고 있는 것은 한미연합군의 공세적 전략에 대한 대응적인 측면이 크다. 제공권과 후방지원능력이 절대 열세인 북한으로서는 군사력을 가능한 한 전진배치해 놓아야 하기 때문이다. 또 미군이 핵무기를 사용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북한군을 한미연합군과 밀착시켜 배치해야 한다.
 
생물무기에 대한 사찰 요구 역시 이해하기 힘든 대목이다. 국제적으로 사찰제도가 마련돼 있지 않은 상황에서 어떻게 사찰을 받으라는 것인지 황당하다. 생물무기에 관한 한 미국은 할말이 없다. 생물무기를 세계에서 가장 많이 비축하고 있는 것은 미국이다. 게다가 기존 [생물무기금지협약(BWC)]을 강화해 생물무기의 완전한 폐기와 강제사찰을 규정한 [강화의정서]를 만들려는 국제사회의 노력이 미국의 반대로 무산될 위기에 처해 있다. 북한은 이미 1987년 BWC에 가입했다.
    
미국, 한반도에 긴장 원해
 
잘나가던 남북관계가 삐꺽거리기 시작한 것은 부시 등장 이후이다. 남북관계의 급속한 진전과 남북간의 화해, 그리고 한반도문제의 남북한 주도는 미국의 이익에 부합되지 않는다. 남북간에 "일정한 거리"가 유지되고 한반도에서 "적당한 긴장"이 조성되는 되는 것이 미국의 정책적 이해관계에 부합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부시는 한국정부의 햇볕정책에 대한 표면적인 지지 표명에도 불구하고, 햇볕정책에 제동을 거는 전략으로 나오고 있다. 김대중 정부와는 일정한 거리를 두면서, 미국의 입맛에 맞는 친미사대적이고 냉전수구적인 성격의 차기정권 등장을 기다리는 정책을 쓸 가능성이 있다.  
 
부시는 한국내에서 일고 있는 반미감정과 미국에 대한 비판적 기류를 억누르면서, 미국의 MD계획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주한미군의 장래와 미국의 무기판매를 확실히 보장해 줄 친미정권이 절실한 형편이다. 따라서 올 대선에서 자신의 입맛에 맞는 친미사대정권의 집권이 여의치 않을 경우, 이들에게 유리한 국면과 여론을 조성하기 위해 한반도에 군사적 긴장을 조장할 가능성을 경계해야 한다. 이제는 "북풍(北風)"이 아니라 "미풍(美風)"을 우려해야 할 판이다.
 
대선에서 친미사대주의 정권이 집권하게 된다면, 내년 민족의 운명은 그야말로 풍전등화다. 부시의 강경정책에 일방적으로 동조하여 그나마 견제력을 상실하게 되어, 남북관계는 최악의 상태를 맞고 한반도에는 일촉즉발의 전운이 감돌 것이다. 한국은 미국의 도태무기 전시장이 될 것이다. 남북정상회담 이후 남북이 쥐고 있던 한반도문제 해결의 중심축은 다시 미국으로 넘어가게 될 것이다.  
    
친미사대정권 집권시 전쟁위기
 
남북한이 선택할 수 있는 여지는 별로 없어 보인다. 남북이 중심이 되어 자주적으로 남북관계를 지속적으로 또 상당한 수준까지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 [6.15 남북공동선언]을 실천한다는 차원에서 남북관계를 진전시켜 나가야 한다. 북쪽은 미국 핑계를 대지 말고, 남쪽은 미국 눈치를 보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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