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과 악

지금은 미스코리아 선발대회에서 등수를 매기는 정도로 쓰이지만, 원래 `진. 선. 미`는 인간사회의 높은 가치기준을 뜻하는 말이다. `진. 선. 미`는 시대와 문화, 환경에 따라 각기 다르게 해석되고 적용되는 방식도 다르다. 또한 추상적이고 관념적이어서 현실생활에 구체적인 사례를 통해 손에 잡히는 개념이기도 하다. 그리고 복잡하고 혼란스러워 갈 길을 헤매는 현대사회에서 옳고 그름, 아름다움과 추함, 궁극적인 이상을 추구하는 일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렇다면 과연 선과 악의 기준은 뭘까? 철학자들이 탁상에 모여 앉아 심오한 토론을 벌여야 결론이 나올 것 같지만 사실은 의외로 간단하다. 기준은 `인간존엄과 성숙`이다. 여기에 기여하면 선이고, 방해하면 악이다. 인간이나 사회가 다른 인간이나 사회를 착취, 살해, 폭행하는 따위는 인간존엄을 해치고 발전과 성숙을 가로막기에 모두 악이 된다. 구체적으로는 자유를 억압하는 행위, 발전의 기회를 박탈하는 행위, 지식이나 자본을 독점하는 행위도 악의 범주에 속한다.

그런데 이렇게 간단한 선과 악을 사람들은 잘 구분하지 못한다. 알고 있지만 애써 외면하고 있는 사람들도 많다. 선과 악을 잘 구분하지 못하는 것은 잘 알 수 없도록 복잡하고 교묘하게 위장하거나 기준을 애매하게 적용시키기 때문이고, 알면서도 외면하는 것은 모른 체 하는 것이 자신의 욕망과 부합되기 때문이다.

뿔 달린 괴물이라고 교육받아온 북한과 갑자기 정상회담을 하고, 멋있고 아름다운 나라라고 배워온 미국은 전쟁미치광이처럼 날뛰는 현실에서 사람들은 무엇이 선과 악인지 방향감각을 잃어버린다. 마치 우리에게 안중근은 독립운동 의사(義士)지만 일본 극우파에겐 테러리스트로 불릴 수 있는 것처럼 여기서는 악이 되던 것이 저쪽에는 선이 된다. 전쟁에서 당사자는 선이고 상대방은 언제나 악으로 간주한다. 어느 쪽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렇다면 전쟁을 조장하거나 전쟁을 통해 이익을 보는 사람은 누구일까?

21세기를 전쟁으로 시작한 인류사회는 선보다는 악이 지배한다. 그 책임은 거리의 부랑아나 조직폭력배, 정신이상자에게 있기보다는 세계를 이끌어 가는 정치인이나 지배층에게 있다. 하지만 여전히 소말리아나 이디오피아 같은 나라가 못사는 것은 그 나라 국민이 게으르기 때문이고, 사회가 혼란스러운 것은 조직폭력배이나 마약중독자, 혹은 노동자의 파업 때문이고, 국방의 의무가 잘 지켜지지 않는 것은 `유승준` 같은 가수 때문이라고 책임을 전가한다.

그것이 풍부한 자원을 독점하여 착취하고, 사회를 혼란에 빠트려 위기를 조장해 살상무기를 팔아먹고, 자신의 의무를 은폐하려는 고단위 수작에 불과한데도 말이다. 언론과 방송, 영화는 사람들의 귀와 입을 막고 판단을 흐리는 역할을 하고 떡고물을 받아 챙긴다. 

하지만 악은 악일 뿐이다. 아무리 권력과 학벌과 사상으로 위장을 해도 본질은 다르지 않다. 하느님을 팔아먹고, 평화를 말하고, 정의를 지껄이지만 이들이 정말 원하는 것은 단순하다. 그것은 자기들만 잘먹고, 잘살고자 하는 욕망이다. 이러한 욕망은 거리의 양아치와 하등 다를 바가 없다. 거리의 범죄자는 몸뚱아리와 어설픈 욕심밖에 없지만 권력 꼭대기의 악당은 자신을 보호해줄 권력과 법과 사상을 가지고 있다는 차이뿐이다.

이웃을 내 몸 같이 사랑하고, 부질없는 욕심을 버리라는 선지자들의 외침은 우리에게 여전히 유효한 가르침이다.

북한의 수묵화

▶김광일/북부계곡에서/수묵화/129*63/1992

이번에 소개할 작품은 북한화가 김광일이 그린 <북부계곡에서>라는 수묵화이다. 이 작품은 <6.15공동선언 1주년 기념 북한미술특별전>에 출품되어 우리에게 알려졌다. 창작연도가 1992년으로 비교적 최근 작품에 속한다.

사실 북한의 수묵화는 북한미술특별전에서 처음 보았다. 재미있는 것은 북한미술에서 수묵화는 양반들의 지배문화라고 여겨 퇴출되었던 형식이라는 점이다. 전통미술에서 선(線)과 흑백의 수묵을 배제하고 입체감과 색상을 결합시킨 것이 조선화이다. 이러한 조선화 형식은 60년대 말에 정착되어 거의 2~30년 간 북한미술을 떠받치는 기둥이었다. 그러던 것이 90년대 들어오면서(다르게 말하면 김정일 시대) 부분적으로 선과 수묵이 등장하였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동양화 혹은 한국화라고 불리는 형식과는 약간의 차이가 있어 보인다. 북한의 수묵화는 동양화에서 주로 쓰는 여백이나 부감법(역삼각형구도) 따위는 사용하지 않고 사실적인 표현방법을 사용하고 있다. 마치 조선화를 흑백으로 보는 듯한 느낌인데, 이 작품에다 색상만 얻으면 조선화와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비슷하다. 이런 현상은 유화에서도 나타난다. 유화로 그렸지만 전체적인 구도나 색상, 소재, 주제 따위는 거의 조선화와 비슷하다. 다시 말하면 조선화는 북한의 거의 모든 회화장르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수묵 같은 흑백의 색상은 시대가 어려울 때 주로 나타났다가 사회가 풍족하고 다양해지면 색상에게 자리를 내어주고 사라진다. 그러다가 좀더 고급스런 문화를 추구하는 시대가 오면 다시 부활하는 성격을 가졌다. 이를테면, 흙벽을 헐고 콘크리트로 집을 짓다가 다시 황토방을 선호하는 것처럼 말이다.

색상은 다양하고 풍부한 느낌을 주지만 아무래도 깊이는 떨어진다. 어린아이들은 원색을 선호한다. 그러다 나이가 들면 은은한 파스텔 톤의 색조를 좋아하고 더 깊어지면 흰색이나 검정색 혹은 회색이나 단색을 찾게된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파스텔 톤의 색조에서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고 다시 어린아이의 원색으로 퇴행한다. 늙은이들이 빨강이나 노랑 같은 원색의 옷을 입고 다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북한미술에서 수묵화가 등장한 것은 아마도 북한체제가 안정되고 다양한 인민들의 생활적 요구를 수용한 결과라고 여겨진다. 하지만 수묵화는 여전히 고급취향을 반영하기 때문에 북한미술의 비중 있는 장르로 등장하는데는 시간이 걸릴 것이다.

전쟁위협이나 경제봉쇄, 식량난 따위의 위기를 맞고 있는 상황에서 다양한 문화를 원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삶의 질을 높이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생존의 문제가 우선하기 때문이다. 한반도의 평화정착은 우리 모두에게 삶의 질을 높이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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