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민왕의 부인이었던 노국공주는 잘 알려져 있듯이 원나라의 공주였습니다. 흥왕사의 난은 친원 세력에 의한 반란이었는데 난을 일으킨 자들은 원나라의 공주 출신인 노국공주가 가로막고 나서자 감히 어떻게 하지 못하고 그 위세에 밀려서 물러났던 것입니다. 정말 뿌리 깊은 외세숭배자들이라고 할 수밖에 없겠지요.
 
여기에서 우리가 또 하나 흥미롭게 볼 사실은 노국공주는 왜 이 난을 목숨을 걸고 막고 나선 것일까 하는 점입니다. 원나라의 공주 출신으로 고려의 왕비가 된 사람은 모두 여섯 명이었습니다. 이들이 친정인 원나라를 등에 업고 권력을 남용한 경우는 고려사에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심지어 왕권을 무력화시키거나 왕의 문제점을 원나라에 보고하는 경우까지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노국공주만은 그런 기록이 전혀 없습니다. 더욱이 노국공주의 남편인 공민왕은 처가인 원나라에 대하여 반대하는 정책을 취하였는데도 노국공주가 그것을 반대했다는 기록은 전혀 없습니다. 그것은 노국공주가 공민왕과 비슷한 견해를 가졌다는 해석도 가능하게 합니다.

노국공주가 흥왕사의 난에서 무사 50여 명을 가로막고 나선 것은 물론 남편인 공민왕에 대한 사랑 때문이었겠습니다만, 그들의 사랑은 정치적인 견해까지도 같이 할 정도로 유달리 깊었다고 볼 수도 있겠지요. 그것은 또 노국공주가 젊은 나이에 일찍 죽자 공민왕에게 깊은 상처를 남기는 계기가 되기도 합니다.
 
앞에서 보았듯이 공민왕은 신돈을 자신의 개혁을 추진할 책임자로 임명하는데, 흥왕사의 난 이후에도 친원 권문 세족들은 끊임없이 공민왕의 개혁 정책에 저항합니다. 결국 공민왕은 권문 세력의 압력에 굴복하여 1371년 신돈을 처단하는데, 그리고 3년 뒤 자신도 의문의 죽음을 당합니다. 현재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에서는 공민왕의 죽음을 시해당한 것으로 서술합니다.
 
공민왕의 개혁이 시행되고 또 좌절되는 과정을 통해서 우리는 여러 가지 역사적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먼저 영원한 강대국은 없다는 것입니다. 눈앞에 보이는 강한 세력만을 좇는 자들은 강한 자는 영원히 강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역사는 우리에게 영원히 강한 자는 없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원나라는 세계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확보한 나라였습니다. 그러나 그 나라도 내외의 모순을 견디지 못하고 기운이 꺾이어 가다가 드디어 멸망의 길로 들어섰습니다. 그렇지만 외세에 의존하는 부패한 무리들을 몰아내는 일은 외세의 힘이 약해질 때 저절로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 역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교훈입니다. 그러한 자들을 몰아내려면 그들과의 투쟁은 물론 그들을 지원하는 외세와의 투쟁은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충선왕의 경우에서 보면 외세와의 투쟁을 피한 채 외세 추종 세력을 개혁하려고 했기 때문에 그것은 결국 실패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비록 충선왕의 개혁 정책은 실패로 끝났지만, 그러한 개혁의 시도는 항상 다음 세대에게 토대를 마련해 주는 법이므로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충선왕이 세운 사림원은 개혁 세력인 신진 사대부들이 힘을 기르는 근거지로서 구실을 했다는 사실이 이것을 잘 보여줍니다.

마지막으로 공민왕은 당시에 강력하던 외세인 원나라가 기울어져 갈 때 개혁을 추진한 것이었지만, 그런 경우에도 외세 추종 세력들의 반역사적 행동은 얼마나 강하게 지속되는가를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반역사적 행동들을 깨부수어 나가는 하나 하나의 투쟁이 모두 모여서 하나의 커다란 흐름으로 민족의 역사를 더욱 강하게 이끌어 왔음을 우리는 역사 속에서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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