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보혁기자(bhsuh@tongilnews.com)


북한 인민군 총정치국장 조명록이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특사자격으로 미국을 방문한 것은 양국간 관계개선은 물론 한반도의 긴장완화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전망을 낳고 있다. 조명록의 방문 결과를 담은 북-미 공동성명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먼저, 북-미 양국은 궁극적으로 국교수립을 지향하는 1994년의 제네바 합의 정신에 입각하여 그 과정에 나서는 현안들을 포괄적으로 협의하였다. 그 결과 양국은 미국이 우선적인 관심을 두고 있는 핵, 미사일 등 대량살상무기의 발사 유예, 테러 반대와 북한이 강조하는 체제의 안전보장, 인도주의적 지원 등에 공감과 합의를 이루었다. 이로써 양국은 "근본적인 관계개선"의 길로 접어들기 시작하였다.

다음으로, 북-미 양국은 상호간에 "적대적 의사를 가지지 않을 것"에 합의하고, 정전협정의 평화보장체제로의 전환을 위해 4자회담 등 여러 방법들을 강구하기로 하였다. 특히 북한이 지금까지 주장해온 북-미간 평화협정 체결을 4자회담과 같은 다자적 틀에서 논의할 수 있다는 점은 매우 의미심장한 대목이다.

◆ 물위로 오르는 주한미군 문제

만약 북-미 양국이 공동성명에서 합의한 대로 진지하고 성실하게 노력해 나간다면 북-미 관계 정상화와 한반도 긴장완화 문제는 매우 큰 진전을 볼 것이라는 예상을 할 수 있다.

그렇게 된다면, 북한을 주적으로 삼아 현재의 정전협정체제를 실질적으로 지탱하고 있는 주한미군의 장래가 핵심적인 문제로 부상될 것은 필연적이다. 조명록의 방미 기간중 이 문제가 북-미간에 어느 정도 또는 어떤 방향으로 논의되었는지 사뭇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주한미군 문제는 이번 공동성명에서 언급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지난 남북정상회담에서도 언급되지 않았다. 그러나 평양 정상회담 이후 김대중 대통령이 북한과의 일정한 공감대 형성을 여러 차례 언급한 점을 미뤄볼 때, 이번 북-미 고위급회담에서도 이 문제가 논의되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내용의 일부분이 이후 미국 당국자들의 입을 통해 흘러나올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그렇다면, 북-미 양국간에 주한미군 문제가 어느 정도 논의되었을까? 북한의 공식 입장은 주한미군 철수이고, 미국의 공식입장은 계속 주둔이다. 평행선을 달리는 양국간의 입장속에서 어떤 타협점이 가능할 것인가?

◆ 북한의 주한미군 인식에 대한 두가지 의견

지난 평양 정상회담 이후, 특히 김 대통령이 정상회담 기간 중 김정일 위원장이 동북아 세력균형자로서의 주한미군의 역할에 반대하지 않았다는 여러 차례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북한은 어떠한 반응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조명록 방미를 준비하는 김계관-카트먼 회담 직전에 주한미군 철수를 주장한 바 있다. 이 두 가지 모순된 상황에 대해 전문가들은 몇 가지 분석을 내놓고 있다.

첫째, 주한미군 철수를 주장하는 북한의 입장에는 변함이 없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남북정상회담 기간 중 김정일 위원장의 발언은 역설적으로 남한과 미국내 주한미군 철수 여론을 조성하기 위한 것이라고 본다. 그리고 북한이 최근 주한미군 철수 주장을 자제하는 것은 관계개선 분위기를 활용, 남한과 미국으로부터 안전과 지원을 획득하기 위한 고도의 정치적 수완으로 이해되는 것이다. 이들은 북-미 고위급회담도 북한의 이런 전술의 일환으로 파악하고 있다.

둘째, 주한미군 문제에 대한 북한의 입장은 변화하고 있다는 주장이다. 이런 의견을 제출하는 사람들은 북한의 국가능력과 의지, 정책결정자의 신념과 처한 현실간의 모순을 강조하며, 북한이 공식 담론상으로는 주한미군 철수를 고수하고 있지만 주한미군 철수를 실현할 수 없다는 점을 인식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들은 북한에게 주한미군문제는 주민통합 및 협상력 제고 등 제한적 의미로 축소되고 있다고 판단한다. 이런 입장에 설 때 이번 북-미 고위급회담에서 북한은 주한미군의 성격변화(북한 주적론의 폐기)를 전제로 주한미군의 존재를 `사실상` 인정하고 체제안정을 도모하려 했다는 평가가 성립된다.

◆ 북-미 관계진전에 돌입한 미국

한편, 주한미군의 계속 주둔 의사를 천명하고 있는 워싱턴 당국은 북한의 태도에 상응하는 방식으로 접근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조명록의 방문 직전 동아시아를 순방한 코언 미 국방장관은 북한의 군사적 위협을 재차 강조한 바 있다. 그러나 남북정상회담 이후 남북관계 개선에 신중한 태도를 보여오던 미국은 몇 가지 요인들에 의해 북한과의 전격적인 관계발전을 도모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 요인들로는 △남북관계 개선에 임하는 북한의 태도에 `진실성`이 있다는 판단 △ 남북관계 개선 속도가 미국이 통제할 수 없는 수준으로 상승하기 전에 한반도문제에 대한 개입력을 높일 필요 △남북관계 개선이 결과적으로 한반도를 거점으로 하는 중국의 영향력 확대로 귀결될 가능성을 차단할 필요 △같은 매락에서 북-일 수교협상을 진척시킬 환경을 조성하여 한-미-일 동맹관계를 유지·강화할 필요 △중동 평화협상의 교착상태에 직면한 클린턴 대통령의 외교적 치적을 보완할 필요 등이 그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국간 정책결정자간, 특히 북한 최고위 군부인사와의 접촉이 처음이라는 점에서 양국간에 조명록의 방미 기간중 주한미군 문제에 대한 심도깊은 논의가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북-미 공동성명에서 주한미군문제가 언급되지 않았다는 것은 이러한 관측을 가능하게 해준다.

그러나 서로가 이 문제에 대해 상대의 의중을 탐색하는 정도의 의견 교환이 있었다고 예측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이런 예상 가운데는 북한의 문제제기에 대해, 주한미군 문제는 한-미간의 문제라는 미국의 일축도 포함되어 있으며, 그럴 경우 북한은 주한미군의 존재 자체 보다는 성격 및 지위 변화라는 현실적 접근의 필요성을 더욱 절감했을 가능성이 높다.

◆ 북한, 주한미군 철수 불가능 인식- 의견 접근에 시간 걸릴 듯

김 대통령의 주장처럼, 미국이 주한미군의 지위와 성격을 지역 균형자 또는 안정자로서의 역할로 전환하여 북한을 주적으로 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조명록에게 주지시켰다면, 향후 정전협정의 평화협정체제로의 전환은 기존의 예상과 달리 새로운 국면을 맞이할 것으로 보인다. 코언 국방장관이 동아시아 순방 중 미국 국방당국자로서는 처음으로 동아시아에서 다자안보기구의 수립 필요성을 제기하였다. 그러나 주한미군의 평화유지군으로서의 재편은 한반도 문제에 대한 중국 등 국제사회의 개입을 불러와 새로운 혼란과 갈등을 가져올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을 것이다.

북-미 공동성명에서 주한미군 문제가 언급되지 않았다는 것은 이 문제에 대한 양국간 상호 이해와 의견 접근에 많은 시간이 걸릴 것이라는 점을 말해준다. 그럼에도 북한이 미국과의 관계 정상화를 통해 체제안정 보장을 최우선으로 하고 있으며, 동시에 남북관계 개선을 지속한다면 주한미군문제는 향후 북-미, 남북관계는 물론 한-미관계에도 큰 영향을 줄 핵심적인 사안으로 등장할 것이 분명하다.

주한미군문제는 이제 관련 당사자국들의 일방적인 선전이나 주장에서 타협과 재조정의 현실 사안으로 부상하고 있다. 그리고 이 문제에 대한 북한의 태도 변화가 감지된다면 주한미군문제의 해결 방향에 남한의 입장이 더욱 중요한 변수로 작용할 필요가 있다. 주한미군 문제는 한반도 및 아태지역의 평화 정착, 군사주권 등의 차원에서 균형되게 접근할 필요가 있다.
저작권자 © 통일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