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도 차면 기운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나라에도 적용될 수 있는 말이겠지요. 세계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차지했던 원나라이지만 그 나라도 기우는 운명을 어찌할 수는 없는 일이었습니다.
 
앞에서 보았듯이 권문 세족의 토지 집중과 대농장 경영으로 빚어진 고려 사회 전반의 부패와 무기력은 고려 사회를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가고 있었습니다. 권문 세족의 탐욕과 횡포는 민중뿐만 아니라 많은 관료 세력과 지주들에게도 불만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불만은 좀처럼 직접적인 행동으로 나타나지 못했고, 나타난다고 하더라도 원나라의 막강한 힘을 등에 업은 권문 세족에게 제압당하기 일쑤였습니다. 그런데 원나라의 운명이 기울어지자 이제 권문 세족의 탐욕과 횡포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고려 사회를 개혁해 보려고 하는 기도가 여러 형태로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원나라가 쇠망하기 이전에도 권문 세족의 횡포를 저지하려는 기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많은 농민, 천민들의 항쟁이 소규모로 산발적으로 있었습니다. 농민들이 농토를 버리고 유랑하는 것은 소극적 저항의 한 형태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왕에 의한 위로부터의 개혁 시도도 있었습니다. 26대 왕인 충선왕은 세자 시절부터 학문에 열중한, 왕치고는 보기 드문 이상주의자였습니다. 그의 아버지인 충렬왕이 왕위에 있을 때부터 "지금 백성들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을 만큼 곤궁하고 일본 정벌로 온 나라 안이 정신이 없는데 어째서 부왕께서는 멀리 사냥만 다니십니까?"라고 간언할 만큼 일찍부터 사회 개혁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충선왕은 충렬왕한테서 왕위를 이어받자 개혁을 단행했습니다. 충렬왕 때 원나라의 강요로 바뀐 관제를 되살리고, 권문 세족 중에서 횡포가 심한 사람들을 숙청했으며, 조세를 줄이고 농민들이 소유한 토지를 침탈하지 못하도록 억눌렀습니다.
 
그러나 그의 개혁 정책은 곧바로 원나라와 권문 세족의 저항에 부딪혔습니다. 충선왕은 그의 개혁 정책을 못마땅하게 여긴 원나라로 불려가 죽을 때까지 개경으로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충선왕의 개혁 정책이 꺾이는 것을 볼 때 원나라가 강성한 상황에서는 권문 세족들의 부패를 개혁하거나 원나라한테서 주권을 되찾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원나라라고 해서 언제까지나 강성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중국 본토와 몽고 일대는 말할 것도 없고 멀리 동유럽까지 지배하던 강대국 원나라는 14세기 중반에 접어들면서 서서히 국력이 약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중에 남중국에서 일어난 주원장의 반란군이 1368년에 명나라를 세웠습니다. 명나라는 북진을 거듭하여 마침내 원나라를 본래의 근거지인 몽고 지방으로 쫓아냈습니다. 몽고 지방으로 쫓겨난 원나라를 북원이라고 합니다.
 
명나라가 세력을 넓혀 가던 무렵에 고려에서는 공민왕이 왕위에 올랐습니다. 공민왕은 즉위하자마자 이전의 왕들이 입었던 원나라식 복식과 변발을 풀어헤치며 고려가 자주국가임을 대내외적으로 선포했습니다.

공민왕의 본격적인 반원정책은 당시 원나라의 힘에 기대어 권세를 누리던 기철, 권겸, 노책 들의 숙청으로 시작됐습니다. 기철 일당은 원나라 황제의 황후였던 기황후의 형제들이었습니다. 이들의 제거는 본격적인 반원 정책의 출발이자 상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또한 공민왕은 원나라 연호를 폐지하고, 고려 내정을 간섭하던 총독부격인 정동행성을 폐지했습니다.

정동행성이라는 것은 원나라의 일본 원정을 지원한다는 구실로 개경에 설치한 것인데 그 뒤 고려 내정을 간섭하는 기관으로 되어 버린 것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공민왕은 원나라가 직접 통치하고 있던 철령 이북의 쌍성총관부를 공격해 몽고군을 내쫓고 우리 땅을 되찾았습니다. 그리고 요동으로 쫓겨난 동녕부에 대한 정벌도 계속 추진하였습니다.          
 
공민왕의 이러한 반원 정책은 원나라를 배경으로 하는 권문 세족의 기반에 심각한 타격을 주는 것이었습니다. 공민왕은 반원 정책으로 어느 정도 주권을 회복한 뒤 권문 세족의 경제적 기반에 타격을 주기 시작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권문 세족과 전혀 연고가 없는 신돈을 등용해서 권문 세족에 타격을 입힐 수 있는 전권을 주었습니다. 신돈과 관련한 이야기는 다음 마당에서 다시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이렇듯 공민왕의 반원 정책이 본격적으로 추진되자 이에 대한 저항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1362년에는 쌍성총관부가 수복되자 그곳에 있던 원나라 무리들이 요양성으로 가서 그곳의 장관인 납합출에게 호소하여 납합출의 군대가 처들어온 적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기세가 오른 고려의 군대와 민중들은 납합출의 군대를 보기 좋게 격퇴하였습니다.

이렇게 원나라가 직접적으로 무력 행사를 하는 것만이 아니라 내부 친원 세력이 일으키는 반란도 있었습니다. 1363년 4월1일, 공민왕이 즉위한지 12년이 되던 때였습니다. 두 차례에 걸친 홍건적의 침입으로 개성에 있는 궁궐이 완전히 불타 버리자, 지금의 임진각 근처에 있는 흥왕사라는 절을 임시 궁궐로 사용한 적이 있었습니다.

공민왕도 당시 그 곳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날 밤 50여 명의 무리가 공민왕을 시해하기 위해 흥왕사로 들이 닥쳤습니다. 이들의 난은 반원 정책을 펴던 공민왕을 시해하고 친원적인 왕을 세우기 위한 목적으로 일어난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흥미 있게 봐야 할 장면이 있습니다. 고려사의 기록을 보면 흥왕사의 난이 일어났을 때 그 난을 막은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공민왕의 부인이었던 노국공주였다고 합니다. 왕비가 혼자서 왕이 숨어 있는 밀실을 막아서 50여 명의 무사들을 물리쳐 난이 평정됐다는 것이지요. 이런 대목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노국공주가 신통술을 부리는 사람이 아닌 다음에야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 수 있는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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