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첫 번째 이야기는 해방과 분단이었습니다. 우리를 반세기 이상이나 갈라놓은 비극적 분단은 미·소의 분할점령으로부터 시작되었고, 신탁통치 분쟁으로 심화되었는데 결국 분단의 일차적 책임은 외세에 있지만 우리 민족 내부의 분열에도 책임이 있다는 것을 몇 번에 걸쳐 이야기했습니다.

이번에 이야기 할 주제는 해방 후 김일성의 정치무대 등장과 정치지도자로의 부상 과정입니다. 김일성은 도대체 어떤 인물이기에 해방 후 정치공간에서 그 쟁쟁한 항일혁명가, 공산주의자, 민족주의자들을 다 물리치고 북한에서 최고 정치지도자로 부상할 수 있었던 것일까? 이 비밀의 문을 열기 위해서는 김일성의 출생과 성장 및 그의 활동 경력에 관한 이해가 있어야 하며, 동시에 그를 바탕으로 벌어지는 해방 후 활동 상황에 대해 알아야 합니다. 이를 몇 번에 걸쳐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1. 김일성의 귀국과 활동

해방 후 김일성이 언제 북한에 들어왔는가? 다시 말해 김일성의 귀국 날짜는 언제인가? 이 문제는 한동안 북한을 연구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논란거리였습니다. 왜냐 하면 김일성이 대중들 앞에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은 해방된 지 두 달이나 된 10월 14일 평양시 군중대회에서였기 때문입니다. 분명 김일성은 그 전에 귀국했을 텐데 그 사이의 행적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8월말과 9월이라는 주장이 엇갈렸었습니다.

그러나 이 문제는 김일성 자신이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서 9월 19일로 분명히 밝힘으로써 더 이상 논란거리가 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김일성은 이때 귀국해서 10월 14일 평양시 환영대회에서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낼 때까지 어떻게 활동했을까요?

김일성이 해방된 지 한 달이나 지난 뒤에야 귀국하게 되는 데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습니다. 사전 준비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김일성은 귀국 후 활동계획을 세우는 한편,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 정치국원 겸 서기 쥬다노프, 소련군 극동군 사령관 바실리예프스키 원수, 제1방면군 군사위원 스티코프 등 소련 당·군의 유력한 지도자들을 만나 향후 활동에 대해서 긴밀히 의논합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김일성은 북한에 들어오기 전에 이미 소련군의 강력한 후원을 보장받게 됩니다.

이런 준비 과정이 어느 정도 마무리되자 김일성과 항일유격대 일행은 추석 전날인 1945년 9월 19일 소련 군함을 타고 원산항으로 들어옵니다. 원래는 하바로프스크에서 국경선을 넘어 육로로 올 예정이었으나 길이 험하고 시간이 오래 걸릴 것을 염려해 배편을 이용했던 것입니다. 여기에는 김일성을 비롯, 안길, 김책, 최현, 박성철, 김일, 오진우 등 북한 정권의 주역이 될 인물들이 대거 타고 있었으며 50여명의 유격대원들도 함께 왔습니다. 최용건은 사정상 10월에, 김정숙 등 여성대원과 아이들은 11월에 귀국합니다. 또 오백룡 등 일부 유격대원들은 소련군과 함께 일본군과 싸우면서 이미 북한에 들어와 있었으며, 초대 인민군 총참모장이 되는 강건은 해방사업을 유격부대를 이끌고 만주로 갔다가 1946년에야 귀국합니다.

북한에 들어온 김일성과 항일빨치산 세력들은 당분간 자신들의 귀국을 공개하지 않기로 합니다. 일단 주민들 속에 들어가 건당·건국·건군의 3대 과업을 위한 조직적 기반을 닦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판단합니다. 그래서 김일성 일행은 대중 사업을 위해 주요 인물들을 각 지방으로 파견합니다. 함경남도는 김책, 함경북도는 최춘국·박성철, 평안북도는 김일, 이런 식으로 말입니다.

그리고 김일성은 평안남도에서 사업하게 될 동료들과 함께 9월 20일 평양행 기차를 타고 원산을 떠나 9월 22일 평양에 도착합니다. 이 과정에서 김일성을 마중하러 오던 소련군 사령부의 기차와 충돌하는 사고가 일어나기도 했지만 큰 사고는 아니었습니다.

평양에 도착한 김일성은 중구역 근처에 사무실을 차린 뒤 김동환이란 가명으로 활동을 시작합니다. 김일성의 활동은 우선 당 조직 건설에 집중됩니다. 일차적으로 국내 공산주의자들 가운데 서울의 박헌영과 노선을 달리하고 있던 박정애, 이용범 등을 접촉하면서 북한에서 독자적인 당 조직을 건설하기 위한 기반을 다집니다.

김일성은 당 조직 사업과 더불어 통일전선 사업에도 손을 댑니다. 당시 평남 정치인민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하면서 민족주의자들에게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던 조만식을 만납니다. 33세의 젊은 빨치산 대장 김일성이 63세의 민족주의자 거목 조만식을 처음 만난 것은 1945년 9월 30일. 소련군의 주선으로 이날 오후 6시 평양에 있는 일본식 요정 `화방`에서 첫 대면이 이루어집니다. 이들은 첫 만남에서 공산주의자와 민족주의자가 힘을 합쳐 건국 사업에 함께 나서야 한다는데 동감하게 됩니다. 이들의 협조관계는 45년 말 모스크바 결정으로 신탁통치 문제가 불거지면서 좌우 연립체제가 파탄 나기 전까지는 비교적 무난하게 진행됩니다.
이와 함께 김일성과 항일빨치산 세력은 혁명무력이 될 군대를 창건하기 위한 준비도 해 나갑니다. 이를 위해 정치 군사 간부를 전문적으로 양성할 학원을 준비합니다. 그렇게 해서 1946년 초에 평양학원이 세워집니다. 이 문제를 책임진 인물은 김책이었습니다. 김책은 후에 초대 내각 부수상과 한국전쟁 당시 전선사령관을 맡아 북한 정권 수립의 일등공신이 되는 인물인데, 1950년 병으로 사망합니다. 김일성은 김책과 찍은 사진을 평생 그의 금고에 따로 보관했을 정도로 김책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다고 합니다. 김책의 장남인 김국태는 김정일 체제에서도 핵심 인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대를 이어 충성하는 대표적인 본보기인 셈입니다.

이처럼 김일성과 항일빨치산 세력은 해방 후 귀국하자 치밀하고도 조직적으로 사업을 진행해 갑니다. 그 결과 김일성과 빨치산세력은 주력이 귀국한 지 채 한 달이 안 돼 북한에서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갖게 됩니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김일성을 비롯한 항일유격대세력이 하나로 뭉쳐 조직적으로 움직인 때문이고, 대중 속에서 기반을 확대하는 정치사업을 계획적으로 했기 때문입니다. 반면 국내에 있던 세력들은 파벌 의식이 강했고, 대중조직사업 보다는 과거의 명성으로 한몫 보려는 경향이 컸습니다. 김일성과 항일유격대 세력이 힘을 확보하게 되는 데는 소련군의 체계적인 지원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점도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소련군과 항일빨치산 세력은 이런 조직사업을 기반으로 김일성을 대중적인 지도자로 부각하기 위한 작업에 들어갑니다. 김일성을 대중적인 정치 지도자로 부각시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사람들에게 강한 인상을 심어줄 계기가 필요했습니다. 그를 위해 `평양시민대회`를 개최하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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