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나라는 고려의 영토를 빼앗았을 뿐 아니라, 일본 정벌이라는 구실로 군대를 비롯한 많은 인적, 물적 자원을 징발하였습니다. 그리고 내정을 간섭하였고, 여러 가지 구실로 금, 은, 베를 비롯하여 인삼, 약재, 매 등의 특산물을 수탈해 가기도 하였습니다. 특히 여자를 공물로 바치게 한 것은 원나라가 자행한 만행의 극치를 보여 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원나라의 만행을 앞장서서 대신 해 주는 위치에 권문 세족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런 짓을 해 주는 대가로 엄청난 권력과 부를 누렸습니다. 말하자면 민중은 이중의 고통을 받게 되었던 것이지요. 이들은 이전의 지배층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엄청난 규모의 토지를 `합법적, 불법적` 수단을 동원하여 차지하였습니다.

권문 세족들이 소유한 토지는 산이나 하천으로 경계를 삼을 만큼 엄청난 규모였고 농장으로 경영되었습니다. 이들의 농장에서 경작을 맡아 일하는 농민들은 여러 계층 출신이었습니다. 권문 세족의 가내 노비들이 농장에서 일하는 외거 노비로 바뀌기도 했고, 양인인 농민들이 농장의 경작인으로 자진해서 들어오기도 했습니다.

또한 이들의 토지 소유 확대 과정에서 토지를 잃고 떠돌던 농민들이 농장으로 몰려들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농민들 중에서는 제 스스로 권문 세족의 노비가 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이들은 민족을 배신하였을 뿐 아니라, 그 결과로 민중을 도탄에 빠뜨리는 짓까지 자행했던 것입니다.
 
지금까지 보았듯이 권문 세족은 외세인 원나라에 적극적으로 야합하고 민중에게 가혹한 수탈을 자행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이전에 고려 사회의 지배층이었던 문벌 귀족 및 무신 족벌과 무관하게 완전히 새롭게 등장한 세력은 아니었습니다. 한 나라가 외세의 지배를 받게 되면 그 나라의 지배층에는 변화가 있게 마련인데, 근본적인 변화가 생기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그것은 지배층일수록 외세에 적극적으로 저항하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외세와 적극적으로 야합함으로써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일쑤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외세 또한 토착 지배층을 완전히 무너뜨리기보다는 그들의 기득권을 얼마간 인정해 줌으로써 안정적인 지배를 꾀하곤 합니다.
 
이러한 점은 우리 근대사에서도 확인이 됩니다. 1910년 8월 22일에 일본제국주의가 강제로 조인하게 하고 같은 달 29일에 공포한, 이른바 `한국병합에 관한 조약` 제5조를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제5조 일본국 황제 폐하는 훈공 있는 한국인으로서 특히 표창함이 적당하다고 인정되는 자에 대하여 영광스런 작위를 수여하고 또 은사금을 지급하기로 한다.

이에 따라 많은 얼빠진 양반들이 작위를 받고 은사금이라는 것을 받게 됩니다. 이런 상황을 다룬 김정한의 소설 `수라도`를 한 번 살펴 볼까요?

  "고조할배는 머한다고 간도란 데로 갔있덩강요?"
  "그건 니가 좀더 크야 안다."
해 놓고서도, 이내 덧붙였다.
  "왜놈들이 우리 나라를 뺐고서 미안새김 겸 입이라도 틀어막아 보겠다고 베실아치나 이름 있는 양반네들에게 `합방은사금`이란 걸 내 주었는데 그 고조할배는 그 돈을 더럽다고 그 자리에서 되돌려 주었더란다. 그러니 그놈들이 좋다 캤겠나. 그 길로 밋비이다가 할 수 없이 그만 조선 땅을 떠나싰다고 안하나!"

주인공 가야부인이 손녀인 분이에게 시할아버지 이야기를 해주는 대목입니다. 가야부인의 시할아버지 되는 사람은 국권이 피탈 되고 이른바 `합방은사금`이라는 것이 주어지자 되돌려 주고 간도로 가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시신이 되어 돌아온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들도 물론 있었습니다. 국권 피탈을 안타까워하고 그에 대한 대응책을 마련하지 못함을 선비로서 부끄러워하며 목숨을 끊은 황현 같은 사람도 있었듯이 말입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은 극히 소수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이 소수라는 것이 문제가 될 것은 없습니다. 어차피 그것은 고난의 길인데 권력과 부에 맛들여온 지배층 중에서 그러한 사람이 얼마나 나오겠습니까?
 
우리가 역사를 공부하는 것은 과거의 사실들을 통해 현재에 교훈이 되는 것을 찾아내기 위해서입니다. 권문 세족의 경우로 보아도 그렇고, 일제에 국권을 빼앗기던 때를 보아도 같은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민족의 역사에서 지배층은 거의 외세와 결탁한 세력들이고, 피지배층인 민중을 중심으로 역사를 보는 것이 정당함을 다시 한번 알 수 있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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