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과 공동체

사람들은 미술에 대해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 중에서 `그림은 으레 혼자 하는 것이다`는 생각은 얼핏 듣기에도 그럴싸하고 실제 많은 미술가들이 이와 비슷하게 생각하고 있어 설득하기가 쉽지 않다. 화실에서 혼자 창작을 위해 고민하거나 혹은 캔버스를 찢고 붓을 던지는 행위는 영화나 여러 매체를 통해 사람들의 의식 속에 깊이 남아있다.

물론 다 틀린 얘기는 아니다. 그러나 이런 얘기는 기차 여행에서 멋있는 연인을 만나는 광고를 보고 모든 사람들이 대체로 그런 인연을 맺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만큼 어처구니없다. 나는 지금까지 캔버스를 딱 한번 찢어봤는데, 그림에 대한 고민이라기보다는 입대를 앞둔 스트레스 때문이었다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문화에는 크게 `소비` 형태와 `창조`의 요소가 함께 있다. 문화소비의 경우는 개별적으로 가능하다. 이를테면, 영화, 독서, 음악감상, 전시감상 따위는 모두 혼자서 가능한 일이다. 대중문화는 대부분 개별성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인기가수를 보고 소리를 지르고 손을 흔드는 행위는 개별성의 발현이지 집단성과는 별 관련이 없다. 얼핏 많은 팬들이 모여있다고 집단적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으나 그것은 영화를 보기 위해 영화관에 몰려든 사람들과 다를 바가 없다. 따라서 대중문화가 발달한 나라일수록 사람들은 소외당하고 외로움에 몸부림친다.

하지만 문화창작의 경우는 개별성보다는 공동체를 기반으로 한다. 창작을 하기 위해서는 오랜 배움의 시간이 필요하고, 함께 할 동료가 있어야 하며, 전시회를 통해 관객과 교류해야 한다. 예술은 독학이 거의 불가능하다. 혼자 공부했다는 사람도 있으나 실제로는 여러 사람에게 배웠거나 거짓말을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나도 중학교 미술부에서 미술선생님에게 그림을 배우기 시작해 고등학교 미술부, 미술학원, 미술대학에 이르기까지 거의 선생님이나 교수에게 그림을 배웠다. 심지어는 학교선배나 동료, 후배에게 끊임없는 자극과 교류를 통해 배우기도 했다. 혼자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흔히 대학 1, 2학년생 중에는 `그림은 혼자 하는 것이다`라고 말하는 학생도 있다. 이런 학생에게 `그림을 혼자 하는 것이라면 무인도나 절간에서 그림을 그리지 왜 미술대학에 들어왔으며, 전시회나 공모전에 출품은 왜 하나?`라고 물으면 뭐라고 대답할 것 같은가? 화가들이 개인작업실에서 혼자 창작을 하는 것은 겉보기와는 달리 보이지 않는 네트워크가 있기 때문이다.

창작을 하기 위해서는 뜻이 맞는 동료가 있어야 하고 자신의 창작물을 공유해 주는 관객이 있어야 한다. 이들과의 정신적 교감이나 관계를 통해 비로소 올바른 창작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실제로 8,90년대 많은 진보적인 미술가는 미술공동체를 꿈꿨으며, 공동창작 방식을 정착시키려 애썼다. 빈센트 반 고흐가 그랬듯이 말이다.

혹 사람들은 공동창작 속에서 개인의 다양성과 개성이 무시될 수 있다고 걱정한다. 하지만 개인의 발전과 공동체의 발전을 함께 이루는 것은 추구해야 할 이상이고 진행형이지 완료형이 아니다.

현대인들은 문화를 단지 소비하는 단계를 넘어 창조의 대열에 끼고 싶어한다. 낮은 수준이지만 휴대폰 벨소리, 컴퓨터 바탕화면, 인터넷 아바타, 홈페이지, 보험상품, 종이공예, 퀼트, 칼라믹스 지점토공예, 십자수, DIY, 인형만들기, 홈패션 따위에서부터 영화제작, 애니메이션, 미술창작과 전시, 음악작곡과 연주, 사물놀이, 댄스, 글쓰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창작 분야로 확산되고 있다. 이것은 소비중심의 소외를 극복하고 창조적인 공동체를 추구하는 흐름과 다르지 않다. 여전히 우리 사회에는 희망의 싹이 돋아나고 있다. 

평양 전경화

▶향도의 해발아래 꽃피는 평양/집체작/조선화/89*800/1993
최성룡, 안창국, 김형락, 김광식, 오린모, 김원택, 박창룡, 최광휘, 김정원, 정현일,
리명철, 리병준, 최경화, 한성철

이번에 소개하는 작품은 북한의 집단창작의 장점이 잘 드러난 <향도의 해발아래 꽃피는 평양>이라는 제목의 조선화이다. 이 작품은 <폐허 우에 일떠서는 평양>이라는 같은 크기의 작품과 짝을 이루는 연작중 하나이다. 작품의 길이가 무려 8미터에 이르는 대작이다. 나머지 한쪽과 합친다면 16미터에 이른다. 평양 시가지의 전체 모습을 사실적인 묘사기법으로 그린 이 작품은 감상자를 숨막히게 만들기에 충분하다.

작품 중앙에 대동강에서는 거대한 물줄기를 뿜어 올리는 분수대가 있고, 고려호텔, 주체사상탑, 능라도 경기장 따위의 눈익은 건물들이 보인다. 계절은 진달래가 흐드러지게 핀 봄이며, 우측 끝에는 학의 무리가 평양시내로 날아드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학의 모습이나 진달래의 표현은 이 그림이 단순히 있는 그대로를 묘사한 작품이 아니라 창작자의 생각이 적절히 더해져서 그려진 `사회주의적 사실주의` 창작방법을 사용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제목에서도 드러나듯이 김일성 주석의 영도 하에 평양이 발전하고 있다는 것을 이 작품은 의도하고 있다. 특히, 같은 짝을 이루는 <폐허 우에 일떠서는 평양>이라는 작품은 한국전쟁 때 미군의 폭격으로 그야말로 `폐허`가 된 평양을 건설하는 장면인데, 이 작품과 극단적인 대비를 주어 지금의 발전된 평양의 모습을 강하게 드러내는 방법을 사용하고 있다.

이 작품은 14명의 화가들이 함께 그린 집단창작품이다. 만약 개인이 그렸다면 족히 몇 년 이상이 걸렸을 것이다. 다시 말해 집단창작이 아니고서는 창작되기 어려운 그림이란 뜻이다. 

북한미술에서 집단창작은 세계적으로 찾아보기 힘든 특징 중에 하나다. 그렇다고 모든 미술이 집단창작의 형태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집단창작은 주로 사회적으로 필요한 내용, 중요한 사안, 빠르게 그려야 할 때 기량이 뛰어난 화가들을 조직해 이루어진다.

특히 벽화나 기념비조각 분야에서는 장르의 특성상 집단창작이 기본을 이룬다. 집단창작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당과 화가들의 사상이 일치되어야 하며, 개개인의 능력이 높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어야 한다. 또한 재정, 시간, 장소 따위의 창작조건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흔히 집단창작을 하면 작품의 질이 떨어지는 현상이 발생하는데, 이는 화가 개개인의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음악으로 본다면 오케스트라나 미국의 재즈, 우리나라의 시나위를 떠올리면 된다. 서로가 서로의 능력을 믿고 각각의 개성을 충분히 소화할 수 있는 실력이 있어야 가능한 연주처럼 미술에서의 집단창작도 그런 흐름이다. 따라서 북한의 주요 사안에 대해 집단창작팀으로 조직되는 화가는 인민예술가 정도의 수준이 되어야 가능하다.

집단창작은 사회주의 나라 북한에 가장 걸맞고 경쟁력 있는 창작형태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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