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와 짐승들도 슬피 울고 강산도 찡그리니,
  무궁화 온 세상이 이젠 망해 버렸어라.
  가을 등불 아래 책 덮고 지난 날 생각하니,
  인간 세상에 글 아는 사람 노릇, 어렵기도 하구나.

황현이 1910년에 나라를 빼앗겼다는 소식을 듣고 목숨을 끊을 때 남겨 놓은 한시(漢詩)인 `절명시(絶命詩)` 가운데 세 번째 수입니다.

이 시의 마지막 구에 나오는 `글 아는 사람`은 사대부계층을 말하는 것이라고 봐도 되겠지요. 그리고 그것은 조선 사회에서는 지배층이기도 합니다. 물론 사대부계층이 모두 지배층인 것은 아닙니다만, 조선 사회를 이끌어 가는 계층이 사대부이었던 것은 분명하지요.
 
이렇듯 지배층에 속한 사람으로서 나라를 빼앗긴 것을 안타까워하고, 그에 대한 뚜렷한 대응책을 찾지 못하여 괴로워하다가 목숨을 끊은 사람도 있습니다만, 그와는 달리 오히려 그런 때에 자신의 영달을 위해 온갖 추태를 부린 자들도 적지 않았습니다. 아니 우리 역사를 살펴보면 그런 자들이 더 많았다고 보아야 하겠지요.
 
앞에서 우리는 몽고가 침략했을 때 당시 집권 세력이었던 무신들은 도망가기에 바빴고, 농민과 천민 등의 민중들이 처절한 항전을 하였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렇다면 무신 정변으로 집권 세력에서 밀려난 문벌 귀족들은 어땠을까요?

그들은 무신 정권이 안정기에 들어간 뒤 무신 집권자들과 결탁하면서 서서히 힘을 되찾아 갔습니다. 그것은 무신 정권이 문벌 귀족들을 필요로 했기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무신 집권자들은 통치를 위해 문신의 힘을 필요로 했을 뿐 아니라, 그들의 출신에 대한 열등감 때문에 문벌 귀족과 혼인을 맺고 싶어했던 것입니다. 무신 정권기에 되살아나기 시작한 문벌 귀족들 역시 몽고에 맞서 항전하지 않았습니다.
 
고려 왕조가 몽고에 항복하고 원나라의 간섭이 노골화되던 때에 원나라는 자신들의 지배에 협력하는 한에서는 무신 족벌이든 문벌 귀족이든 기득권을 상당 정도 보장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들 역시 원나라에 적극적으로 협력하여 막강한 부와 권력을 그대로 지닐 수 있었습니다.

이들과 더불어 새로운 힘을 가진 세력들이 떠올랐는데 이른바 친원 신흥 세력이었습니다. 이렇게 원나라 지배하에서도 여전히 부와 권력을 누리는 무신 족벌, 문벌 귀족 그리고 친원 신흥 세력을 통틀어서 우리는 권문 세족이라고 합니다.
 
이들의 중심은 이른바 친원 신흥 세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친원 신흥세력으로서 가장 두드러진 사람들은 역관 출신들이었습니다. 평양 조씨인 조인규는 그 대표적 인물로서 최고 지위인 중찬까지 올랐습니다. 외세에 빌붙어서 이득을 누리는 자들이 외국어에 얼마나 민감한지는 전광용의 소설 `꺼삐딴 리`에서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이인국 박사는 그 때나 지금이나 자기의 처세 방법에 대하여 절대적인 자신을 가지고 있다.
 
"얘, 너 그 노어 공부를 열심히 해라."
  "왜요?"
  아들은 갑자기 튀어나오는 아버지의 말에 의아를 느끼면서 반문했다.
  "야 원식아, 별수없다. 왜정 때는 그래도 일본말이 출세를 하게 했고 이제는 노어가 또 판을 치지 않니. 고기가 물을 떠나서 살 수 없는 바에야 그 물 속에서 살 방도를 궁리해야지. 아무튼 그 노서아말 꾸준히 해라."

 
이렇게 아들에게 일본말을 열심히 할 것을 강조하다가 다시 러시아말을 열심히 할 것을 강조한 이인국은, 월남한 뒤에는 영어를 열심히 할 것을 딸에게 강조합니다.
 
권문 세족이 지배층이었던 시대에도 몽고어를 잘하면 그것을 발판으로 출세할 뿐만 아니라 자기 집안을 힘있는 가문으로 끌어올릴 수 있었습니다. 이외에도 응방을 거쳐 진출한 세력도 막강했습니다. 응방은 몽고가 요구하는 매를 공출하기 위해 특별히 설치한 기관이었습니다. 매사냥은 고려왕들의 취미이기도 했으므로 응방 출신들은 특수한 기술을 발판으로 친원 세력이면서 아울러 왕의 측근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밖에 몽고에 갔다온 환관 출신들, 왕을 따라 몽고에 자주 들락거리던 사람들, 몽고 공주의 수행원들 따위가 모두 그런 부류였습니다. 이들은 정해진 관료의 진출 경로를 밟지 않고도 고위 관직에 오르고 영향력도 막강했습니다.

저작권자 © 통일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