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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넷째 마당, 대몽 항쟁의 마지막 횃불이었던 삼별초 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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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01.12.24  1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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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서 우리는 왜 진정으로 민족 자주를 생각하는 사람은 민족 내의 평등을 지향할 수밖에 없는지를 이해하게 됩니다. 우리 민족사를 보면 이 시대 이후로 민족 자주와 평등 사상은 거의 궤를 같이 하여 왔습니다. 이런 점은 우리에게 오늘날의 민족 문제를 이해하는 데에도 많은 시사점을 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삼별초가 어떤 과정을 거쳐 새 정부를 수립하고, 어떤 활동을 하였으며, 그 결말이 어떠했는지, 그리고 이들의 항전이 어떠한 역사적 의의를 갖는지를 살펴보도록 합시다.
 
개경 정부의 환도에 맞춰 강화도에서 봉기를 일으킨 삼별초는, 근거지를 진도로 옮긴 뒤 그해 6월 1일 배중손, 노영희 들이 주도해서 새 독립 정부를 세우고, 11대 문종의 동생인 평양공 기의 직계 후손인 승화후 온을 황제로 받들었습니다. 이들이 개경 정부와 대립해서 수도를 따로 만들고 새로운 황제를 받들어 세운 것은 이전의 봉기들과는 다른 특징입니다.

물론 이들은 고려 왕조나 봉건 체제 자체를 부정하는 데까지는 나아가지 못했습니다. 이들이 지닌 역사적 한계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이들은 다른 봉기와는 달리 외세에 굴복한 왕을 정면으로 부정하고, 자신들의 봉기를 단순한 항거의 차원이 아니라 새로운 정부를 만들어 대안으로 보여주는 차원까지 끌어올렸습니다.
 
삼별초의 투쟁도 보람없이 진도 정부는 이듬해 5월에 몽고와 고려 연합군의 공격으로 함락되고 말았습니다. 삼별초가 진도를 수도로 정한 것은 그곳이 몽고의 침략을 막아낼 수 있는 천혜의 요새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덕분에 삼별초는 몽고와 고려의 연합군을 여러 차례 물리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100척이 넘는 전함으로 쳐들어오는 몽고와 고려 연합군의 물량 공세 앞에서 결국 패배하고 맙니다. 이 패배로 황제인 승화후 온과 그의 아들 수사도 환 그리고 반란의 지도자 배중손, 노영희 들이 모두 처형되었습니다.
 
진도 정부가 함락된 뒤 삼별초의 나머지 세력은 김통정의 지휘로 제주도에 가서 새로운 근거지를 만들었습니다. 제주도에 자리잡은 삼별초군은 안팎에 튼튼한 성을 쌓고 싸울 태세를 갖추었습니다. 그런 다음 추자도, 거제도, 흑산도들을 점령하여 남해안 일대에서 활동할 전초 기지로 삼았습니다. 그 뒤로 2년 가까이 삼별초군은 남해안은 말할 것도 없고 멀리 중부 해안까지도 출몰하면서 몽고군과 고려 정부군을 괴롭혔습니다.

그러나 1273년 4월 28일 만여 명의 병력과 160여 척의 전함으로 총공격을 해온 몽고와 고려 연합군에게 끝내 함락되고 말았습니다. 이때에도 삼별초는 여러 가지 힘든 조건 속에서도 용감히 싸웠으나, 몽고와 고려 연합군의 대대적인 물량 공세 앞에 중과부적으로 패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민중 봉기를 가혹하게 진압하는 등 무신 정권의 하수인 노릇을 하던 삼별초가, 이미 고려 정부는 항복했는데도 스스로 몽고에 대한 항전을 펼쳐 민중의 지지를 받으며 반외세 투쟁의 선봉에 섰다는 것은 참으로 감동적인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삼별초의 항전은 비록 몽고군의 막강한 군사력 앞에 실패하고 말았지만, 몽고와 개경 정부에 커다란 타격을 주었습니다.

몽고는 삼별초의 항전 때문에 두 번이나 노려보았던 일본 침공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일본을 침공하려던 계획을 포기하게 됨으로써 민중에 대한 가혹한 수탈이 어느 정도 풀렸습니다. 또 몽고는 삼별초의 항전을 진압한 뒤 서둘러서 고려에 대한 지배 체제를 가다듬기 시작했습니다. 삼별초의 반란은 대몽항쟁 기간 동안의 농민, 천민들의 항전과 함께 몽고의 고려 지배가 간접적인 지배에서 머무르도록 쐐기를 박는 구실을 하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진도 해안가에 있는 굴포리 어귀엔 삼별초를 이끌었던 배중손의 사당이 있습니다. 이곳 주민들은 지금도 매년 정월 보름이면 당제를 지냅니다. 민중들은 700년이 훨씬 지난 오늘까지도 항전의 주역을 기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그곳 주민들에 국한되는 것은 그 뒤 오랜 역사 동안 우리 민족의 지배층이 진정한 민족 자주 의식을 가진 세력이 아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처럼 민족을 위해 온몸을 바쳐 싸운 이들의 정신은 민중들 속에서 면면히 이어 오고 그것이 오늘 우리를 있게 한 강인한 민족 정신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그것을 민족 정신의 정통으로 되살리고, 많은 이들에게 특히 우리의 후대들에게 온전히 전해 주어야 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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