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피와 구호

흔히 TV광고를 자본주의 꽃이라고 부른다. 광고는 상품을 팔기 위한 정보를 전달하는 기능을 하지만 현대는 그 기능을 넘어 사람살이의 깊은 곳까지 파고든다.

빠르고 지속적인 광고는 감성을 자극하면서 이성을 무력화시키거나 상징체계를 바꾸어 놓기도 한다. 예전에 `침대는 가구가 아닙니다`란 광고 카피 때문에 답안을 잘못 쓰는 해프닝이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학생은 선생의 가르침보다도 광고 카피를 더 믿고, 부모의 충고보다 광고의 충고를 더 따른다. 부모가 된장국을 권하고, 광고에서 햄버거를 권한다면 학생들은 당연히 햄버거를 먹을 가능성이 크다. 말하는 사람의 진실성을 파악하기 힘든 사람일수록 일반성을 더 믿는 까닭이다.

이것은 비단 아이들의 문제만은 아니다. 광고는 반복적이고, 지속적이며, 문제제기나 논쟁을 허락하지 않는다. 우리는 광고를 만만하게 생각하지만 사실은 상당히 권위적인 셈이다.

하나의 광고가 수십만 명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고, 그 위력은 생각보다 엄청나다. 광고 카피를 분석함으로써 사회와 사람살이의 키워드를 찾으려는 학자들이 있을 정도이다.

90년대 초반 신세대 논쟁이 있었을 때, 나는 여기에 대한 답을 광고 카피에서 찾았다. 지하철역에 붙어있던 패션 광고였는데, `창조한다, 주장한다, 표현한다, 의도한다, 시도한다`라는 단어로 신세대를 규정하는 카피였다.

이 카피를 통해 단일 세대 중심의 논쟁에서 사람의 올바른 본성으로 생각의 폭을 넓히는 힌트를 얻을 수 있었다. 또한 `아름다운 개인주의`란 말도 좋아하는 광고 카피이다. 왜곡된 패거리주의에 대한 피해의식이 있어서일까?

상품광고가 없는 북한에서도 우리의 카피처럼 광범위하게 인민들의 삶에 파고드는 것이 있다. 일명 당의 정책과 방향 그리고 인민의 행동을 요구하는 `구호`가 그것이다. `속도전`, `주체의 요구대로`, `더디 가도 사람 생각하지요`, `당이 결심하면 우리는 한다`, `인민을 위해 복무함`, `우리식 사회주의를 건설하자`, `내나라 제일로 좋아` 따위는 TV나 영화, 미술, 연극, 노래에 수시로 등장하고 심지어는 공장이나 농장, 건설현장에 선전그림과 함께 걸린다.

북한에서 이러한 구호는 인민의 생각과 행동을 규정하는 틀이다. 하지만 북한의 구호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문제제기와 논쟁을 거부하는 닫힌 구조는 아니다. 상품 소비의 경우는 개인의 판단과 취향에 의해 수용과 배척이라는 개별적인 선택이 가능하지만, 북한의 구호는 진행형이고, 개인의 선택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살아가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자기논리가 필요하다. 자신을 합리화하는 것부터 현실과 미래에 대한 나름의 전망까지 자기논리에 따라 생각하고 행동한다. 어쩌면 자기논리는 자신을 가장 잘 드러내는 한마디 카피이거나 구호일 수도 있고, 모든 사람은 카피라이터나, 구호를 생산하는 자이다.

남은 문제는 나의 카피와 구호가 얼마나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게 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군인건설자

▶조국은 병사들을 잊지 않으리-장군님의 믿음에 충성으로 보답하리
평양미대 조선화학부 집체작/조선화/160*380/1996

이번에 소개할 작품은 대형 집체작이다. 이 작품은 평양미대 조선화학부에서 집단창작 형태로 그린 <조국은 병사들을 잊지 않으리>란 연작의 한 부분이다.

대략 26명 정도의 학생과 교수들이 참여한 것으로 보인다. 총 8개의 연작으로, 한 작품의 가로크기가 3미터 80센티면 전체 크기가 약 30미터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대작이라고 할 수 있다.

<조국은 병사를 잊지 않으리>라는 집체작은 금강산 발전소를 건설하는 군인건설자의 모습을 담고 있다. 총 8편의 연작은 건설 초기부터 완공에 이르는 전 과정을 그리고 있는데, 소개한 작품은 <장군님의 믿음에 충성으로 보답하리>라는 부제가 붙어있다.

작품의 내용을 살펴보자. 이 작품은 발전소를 건설하는 군인의 노고를 격려하고 치하하기 위해 김정일 위원장이 선물을 보냈고, 여기에 감격한 군인들이 충성을 다짐하고 임무를 완수하겠다는 편지를 쓰는 모습을 담았다. 작품 앞쪽에는 보내온 각종 선물상자들이 놓여있고 주변의 군인들은 환호하며 결의를 다지고 있다.

이 작품의 창작 배경에는 김일성 사후, 가뭄과 홍수 그리고 미국의 위협을 이겨내려는 `선군정치`와 관련이 있다. 자신을 지킬 수 있는 주요역량으로 군대를 선택한 것이다. 이는 북한의 위기의 핵심이 미국의 군사적 위협에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실제 북한의 군인들은 각종 건설현장에 투입되어 왔다.

이러한 군인의 모습을 미술작품에 담은 경우도 많았다. 하지만 30미터에 달하는 대형 집체작으로 군인건설자의 모습을 담는 경우는 특별한 정치적 의도가 없이는 불가능하다. 정치적 의도는 군인의 역할을 높이 평가하고 사기를 진작시키며 사회적 분위기를 형성하는 것이리라.

또한 북한 최고를 자랑하는 평양미대 조선화학부의 실력 있는 인재들이 총동원 된 것도 군인의 역할과 사기에 힘을 붙여주고 있다.

이 작품에는 많은 구호가 등장하고 있다. 상단 암벽에 쓰인 `래일을 위한 오늘에 살자!`라는 구호는 조국의 미래를 위해 한 몸의 편안함을 헌신하자는 의미가 담겨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이미 사라졌거나 입시생, 고시생 정도가 사용하는 구호로 전락했다.

또한 왼쪽 암벽에는 `영원히 추억하라, 공화국의 영웅들을`이란 구호 아래 사람들의 이름이 적혀있다. 아마 공사 중에 죽거나 다친 군인들의 이름일 것이다.

눈여겨볼 것은 김정일 위원장이 내려준 선물이다. 과일상자와 악기가 대부분으로 초라하기 이를 데 없다. 이 정도 선물에 감격하는 북한의 군인들도 마치 어린아이 같이 순진해 보인다.

하지만 군인들이 감격한 것은 선물의 내용이 아니다. 선물의 형식이고, 그 안에 담긴 뜻이다. 선물에는 당과 김정일 위원장이 군인들을 믿고 역할을 높이 평가한다는 의미가 담겨있다.

악기를 선물로 보낸 것은 사실 이해가 잘 가지 않는다. 작품의 내용으로 보면 노고를 치하하면서 `잘 놀고 쉬어라`라는 뜻으로 보이거나 혹은 문화선동대에 악기가 필요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는데, 북한 사회를 잘 모르는데서 오는 정서적 차이는 어쩔 수 없다.

조국을 위해 오늘의 청춘을 바친다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다. 우리나라에도 조국의 민주와 통일을 위해 목숨을 바친 숱한 청춘들이 있었다. 지금 이 시간에도 자기 한 몸의 편안함을 버리고 사회와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헌신하는 수많은 청춘들이 있다.
그래서 내일의 태양은 더욱 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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