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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넷째 마당, 대몽 항쟁의 마지막 횃불이었던 삼별초 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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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01.12.17  1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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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삼별초는 만든 목적과, 임무의 특수성 때문에 정치적 사안에 민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말할 나위 없이 무신 정권이 안정되었던 기간에는 삼별초는 그 친위 세력이었고, 농민과 천민의 봉기를 무자비하게 진압한 부대였습니다. 그리고 야별초는 강화도에서 정변이 일어나는 동안 계속 동원되었습니다.

그들은 정변이 일어날 때마다 권력 야욕에 눈이 먼 무신들의 이용 대상이 되었습니다. 삼별초의 나머지 하나인 신의군 역시 대몽 항쟁의 과정에서 적에게 포로가 되었다가 도망쳐 온 전력 때문에 몽고 지배의 기간에 정치적으로 민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삼별초는 무신 정권의 친위 세력이기는 하였으나, 출신은 거의 다 농민 또는 천민이었습니다. 그 시대에는 군대에 들어가는 것이 생계 보장과 출세에 유리했기 때문에 농민이나 천민 중에서 힘이 세고 무예에 자신 있는 사람들은 삼별초에 지원했습니다. 그러므로 이들은 자신들에게 보장되던 특혜가 사라지게 되는 순간에는 언제든지 농민 또는 천민의 이익을 위해서 싸울 수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무렵의 상황에서 삼별초는 본격적인 군사 작전을 펼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정예 부대였습니다. 그 때는 전시과 제도가 무너지고 대토지 소유자들이 군인전을 강탈하면서 도망하는 병사가 속출하는 상황이었습니다.

더구나 무신 정권이 도방을 중심으로 정권을 지키기 위한 사병을 강화하고 정규군은 괄시했기 때문에, 정규군은 노인이나 약골들만 남아서 자리만 차지하고 있는 지경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정예 병사들로 구성된 삼별초의 용맹함과 전투력은 견줄 데가 없었습니다. 또 봉기를 일으킨 뒤에는 다른 봉기와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로 완강하게 저항하였습니다.
 
고려 정부가 개경으로 돌아가고 삼별초가 정부의 명령을 거부하며 봉기를 일으키자 이 봉기에 동참하려고 강화도로 많은 민중이 몰려들었습니다. `제왕운기`를 쓴 이승휴는 이때의 상황을 "개경으로 환도할 때 불량한 무리들이 까마귀떼처럼 강화도로 모여들었다"고 표현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들이 진도에 수도를 세우고 본격적인 대몽 전쟁에 들어갔을 때 전라도와 경상도 일대만이 아니라 전국 각지에서 삼별초 정부를 지지하는 많은 봉기가 일어났습니다. 경남 밀양의 당시 지명은 밀성이었습니다. 1271년 1월에 이곳 밀성 사람들이 봉기해서 부사를 죽이고, 인근의 청도와 선산에까지 진출한 적이 있습니다. 그들의 명분은 진도의 삼별초 정부에 호응하자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비슷한 시기에 개경에서도 봉기가 모의됐습니다. 관아의 노비들이 무리를 모아 관직자를 죽인 뒤, 진도에 가서 삼별초가 세운 정부에 합류하려고 시도했던 것입니다. 개경에서 이런 일이 있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인천 앞바다에 위치한 대부도에서도 민중들이 봉기를 일으켜, 당시 여기에 주둔 중인 몽고병들을 살해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면 왜 민중들은 삼별초를 그토록 지지한 것일까요? 몽고 침략에 대해 농민과 천민들이 주로 항전하였다는 사실은 앞에서도 보았습니다. 그러나 항전이 장기화하면서 이들의 항전은 수그러들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런데 당시에 몽고는 가혹한 징발로 민중을 수탈하였습니다. 그리고 개경 정부는 그 하수인 노릇을 하였습니다.

이에 대한 민중들의 분노는 하늘을 찌를 듯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이들은 스스로 항전을 조직하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민중들은 누군가가 나서주기만 하면 언제든지 발벗고 나서서 호응할 태세였습니다. 그때 마침 삼별초가 대몽 항쟁의 횃불로 선봉에 나섰던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또 한 가지 의문을 짚고 넘어가 볼까요? 이승휴의 `제왕운기`는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에서는 몽고 침략의 위기를 경험한 지식인들이 민족적 자주 의식을 바탕으로 썼던 책 중 하나라고 꼽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삼별초의 봉기에 동참하려고 했던 사람들을 `불량한 무리`라고 표현했을까요?
 
삼별초가 세운 정부는 이전의 고려 정부나 그때 개경에 있던 정부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여러 가지 혁명적인 조치를 취합니다. 그 중의 하나가 노비 문서를 불태우는 일이었습니다. 삼별초가 노비 문서를 불태운 것은 노비들의 호응을 얻기 위한 조치이기도 하였지만, 앞에서도 보았듯이 그들의 다수가 농민 또는 천민 출신이었기 때문이기도 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조치는 민중들에게 열렬한 지지를 받았지만, 지배층들에게는 극도의 거부감을 주기도 하였던 것입니다. 나름대로 민족 자주 의식에 눈을 떠 가던 지식인인 이승휴가 대몽 항전에 나서려고 하는 사람들을 `불량한 무리`라고 일컫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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