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암흑의 시절` 에 불렸던 `타는 목마름으로`

80년대에 대학을 다닌 사람이라면 `타는 목마름으로`라는 노래를 한번쯤은 들어 봤을 것입니다. 이 노래가 김지하의 시에 곡을 붙인 것이라는 것은 많은 사람이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 노래를 많이 부르던 사람들 중에서 지금 고등학생들이 배우는 문학 교과서에 이 시가 실려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또 이 시를 교과서를 통해 배우고 있는 학생들은 이 시가 교과서에는 실리지 못하고 노래로 만들어져서 술집 또는 집회 장소에서나 불렸다는 말을 들으면 대부분 의아하게 생각합니다. 그만큼 우리 사회는 지난 10여 년 동안에 매우 많이 변했습니다. 하지만 그 변화 속에서 아직도 변하지 않고 있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질곡이 되어 앞으로 나아가려는 우리의 발목을 잡고 있기도 합니다.

앞에서 우리는, 우리 사회가 `민주`를 이루기 위해 많은 피와 땀을 흘렸고, 그 결과 군사독재정권은 이제 물러났지만, 아직도 군사독재의 망령과 그 유산인 비민주적인 법과 제도가 시퍼렇게 살아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망령과 그릇된 법과 제도는 `타는 목마름으로`라는 시가 씌어진 70년대 중반을 전후해서 집중적으로 강화된 것이었습니다. 그 당시 상황을 실감나게 보여 주는 이 시의 한 구절을 봅시다.

아직 동 트지 않은 뒷골목의 어딘가/ 발자욱소리 호르락소리 문 두드리는 소리/ 외마디 길고 긴 누군가의 비명소리/ 신음소리 통곡소리 탄식소리 그 속에 내 가슴팍 속에/ 깊이깊이 새겨지는 네 이름 위에/ 네 이름의 외로운 눈부심 위에/ 살아오는 삶의 아픔/ 살아오는 저 푸르른 자유의 추억/ 되살아오는 끌려가던 벗들의 피묻은 얼굴//

피묻은 얼굴로 끌려 가는 사람들의 외마디 비명이 전국 방방곡곡에서 울리던 시절이었습니다. 정말 `암흑의 시절`이었지요. 그 시절 군사독재정권의 법은 정말 야만 그 자체였습니다. 유신 헌법과 긴급조치는 한 개인의 영구 집권을 보장하기 위해 모든 국민들의 정치적 자유를 억압하는 것이었습니다. 유신 체제는 국정 교과서인 국사 교과서에서조차 `독재 체제`로 규정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체제가 만든 법과 제도는 바람직한 역사관에 역행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러한 체제가 만든 법과 제도가 아직도 곳곳에 엄존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는 사람들이 그 시절에 만들어진, 군사독재의 유산이라는 사실조차 까맣게 모르는 것도 있습니다.


■ 국사교과서를 국정교과서로 제한하는 것은 획일적인 역사관을 강요하는 것

30여 년 만의 민간 정부라고 하던 김영삼 정부는 `국민교육헌장`을 폐지했습니다. `국민교육헌장`은 1968년 박정희 군사 정부가 국민 교육을 획일적으로 통제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든 것으로 민간 정부라면 당연히 폐지해야 할 군사독재의 잔재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근본적인, 교육에 대한 획일적인 통제는 국정 교과서를 거쳐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지금 중고등학교에서 배우는 국사 교과서는 교육부가 발행하는 국정 교과서 한 종류뿐입니다. 지금 이 책으로 교육을 받고 있는 학생들이나 대부분의 교사들과 학부모들은 이러한 사실을 너무나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국사 교과서가 국정 교과서로 된 것은 `유신` 조치 직후인 1974년부터입니다. 이 말은 그 이전에는 우리 나라에도 국사 교과서가 여러 종류가 있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역사는 정치의 시녀`라는 말이 있습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모든 지배층과 집권 세력은 자신의 입맛에 맞는 획일적인 역사관을 역사 연구나 역사 교육에 강요하려고 합니다. 독재 체제는 그것을 힘으로 강요하고, 그렇지 않은 체제는 다양한 방법을 통해서 강요하려고 합니다. 국사 교과서를 국정 교과서로 제한하는 것은, 집권층의 입맛에 맞는 획일적인 역사관을 힘으로 강요하는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 종군위안부 내용이 일본 교과서에는 있는데 우리 교과서에는 없다.

몇 년 전에 일본의 역사 교과서에 종군위안부와 관련된 내용이 실리게 되었다는 보도가 있었습니다. 그 때 언론에는 일본의 역사 교과서들이 자세히 소개되었습니다. 일본에는 매우 많은 종류의 역사 교과서가 있다는 사실이 우리 언론에 보도된 것입니다. 일본에서는 역사 교과서가 검인정 제도입니다. 출판사가 국사 교과서를 만들고 정부의 검인정을 받는 제도이지요. 유럽이나 미국에는 아예 검인정이라는 제도도 없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한 가지 알아 두어야 할 사실은, 우리 언론들은 일본의 역사 교과서에 종군위안부와 관련된 내용이 실린 것이 뒤늦은 일이기는 하지만 바람직한 일이라고 환영하였는데, 정작 우리의 국사 교과서에는 종군위안부와 관련된 내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국사 교과서가 국정 교과서이기 때문입니다. 교육부가 지정한 국사 교과서 집필진들이 그런 내용이 국사 교과서에 실리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하니까 국사 교육 내용에서 빠져 버리는 것입니다. 좀더 정확하게는 현재의 집권층이 그러한 생각을 하니까 그렇게 되는 것이지요.

만약 우리에게 다양한 국사 교과서가 있다면 그처럼 중요한 문제가 국사 교과서에서 빠질 까닭이 없겠지요. 누군가 교과서에 실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다른 교과서에서도 그것을 외면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극단적인 반공주의자들은 4.3 항쟁을 무장폭동으로 규정

국정 교과서를 통해 획일적인 역사관만 강요할 때 많은 사실들이 은폐됩니다. 우리 국사 교과서에 친일파와 관련된 내용이 하나도 없는 것도 이 때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또 해방을 전후한 우리 역사는 극단적인 반공주의자들이 쓴 역사를 그대로 학생들에게 가르쳐야만 합니다.

1948년에 제주도에서 일어났던 4.3사건은 많은 학자들이 분단의 고착화를 가져올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는 제주도민들의 항쟁으로 평가합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있었던 무자비한 진압에 대한 진상 규명 요구가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국사 교과서에서는 공산주의자들이 총선거를 교란시키기 위하여 일으킨 무장 폭동이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마침내 최근에는 국회의원이라는 사람이 남북회담이 제주도에서 열린 것을 두고 제주도가 폭동을 일으킨 지역이라서 북한 사람들이 좋아한다고 하는 상식 이하의 발언까지 하였습니다. 이처럼 너무나도 큰 사고의 차이를 획일적인 역사관의 강요로 마냥 덮어 두려고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제는 `민주`에 바탕을 둔 올바른 역사관을 수립할 때

이제 우리는 `민주`에 바탕을 둔 역사관으로 역사를 서술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먼저 획일적인 역사관을 강요하는 국정 교과서 제도가 폐지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획일적인 역사관만을 강요하는 법과 제도가 사라져야 합니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국가보안법입니다.

오늘도 이 땅에는 획일적인 역사관에서 어긋나는 사람이라면 이적행위를 하는 자, 또는 적 그 자체라고 규정하는 극단적인 반공주의자들이 매우 커다란 영향력을 갖고 있습니다. 이들의 위해로부터 벗어나서 자유롭게 역사를 말할 수 있는 것, 그것이 바로 올바른 역사관을 수립하기 위해 우리 사회가 갖추어야 할 첫째 조건일 것입니다.
저작권자 © 통일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