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머리 사람들

우리나라 사람들은 머리를 숭상하는 이른바 `대두(大頭)문화`를 가지고 있다. 사극에 나오는 궁중여인들의 `가채`나 왕이나 양반들의 왕관이나 갓은 모두 머리를 크게 보이려는 심리의 산물이다. 머리가 크다는 것은 그만큼 지식이나 지혜가 많이 들었다는 것의 상징이며 권위이다.

사실 머리는 인체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고, 눈이나 코, 귀, 입 따위의 핵심적인 감각기관들이 몰려있는 곳이기도 하다. 그래서 머리를 조아리거나 절을 하는 행위는 상대방에게 복종하는 행위로 인식된다. 요즘 젊은 친구들은 서구의 영향을 받아 작은 머리를 선호하지만 여전히 모자는 인기가 있다. 특히 신체의 다른 곳을 때리는 것보다 머리를 때리는 것이 훨씬 자존심을 상하게 한다.

심지어는 머리가 잘못한 일을 손발에게 떠넘기거나 감각기관에게 책임을 뒤집어씌우는 경우도 허다하다. 시쳇말로 `손이 안 따라준다`, `눈이 삐었다`라는 말이 대표적인 경우다. 엄밀히 말해 머리의 명령 없이 손이 자기 멋대로 움직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또한 눈은 판단기능이 없기 때문에 무언가를 잘못 보는 것은 사실 머리에서 오판을 한 것일 뿐이다.

이러한 현상은 자기 머리를 과신하는 결과이다. 이는 자의식이 강한 민족적 특성에 기인한다고 할 수 있다. 어린 아이가 뭔가를 한창 이해할 때 자신이 마치 천재라고 여기듯이 대부분의 우리 사람은 자기의 머리가 완전무결하다고 생각한다. 뭔가를 모르는 것은 관심이 없어서이고, 교육 탓이고, 세상 탓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그래서이지 사람들은 일단 성인이 되면 거의 공부를 하지 않는다.

사회활동에 필요한 재교육을 받는 경우도 후진국 수준이다. 1년에 평균 책 한 권도 읽지 않으며 가정에도 잡지책 몇 권만이 나뒹구는 현실이 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 동사무소나 복지회관 또는 문화센터에서는 각종 교육 프로그램을 진행하지만 헬스나 에어로빅 따위 외에는 수강생이 없어 폐강을 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는 결국 철학의 빈곤과 정치나 언론, 경제, 혹은 문화의 후진성으로 나타난다.

모방능력이 강하고, 눈치, 콧치로 세상의 변화와 흐름을 읽어 가는 독특한 능력은 감성이 풍부하기 때문에 가능하다. 감성이 풍부한 민족의 두뇌는 우수한 편이다. 이렇게 공부를 하지 않는 민족이 이만큼 잘살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하지만 우리는 보다 질적으로 발전된 사회와 삶을 요구하고 있다. 이기주의가 판치는 삭막한 세상, 분단구조가 만들에 내는 온갖 비민주적이며 기형적인 세상, 한순간에 모든 것을 불태워버리는 전쟁을 원하는 사람은 없다. 싸고, 나쁘고, 질 낮은 상품이나 가치는 대부분 사람들의 감성을 유혹하는데 탁월하다.

반대로 고급스럽고 수준 있는 가치는 어렵고 투박하며, 맛깔스럽게 생기지 않았다. 만약 이런 가치를 모르고 추구하지 않는다면 아주 머리가 나쁜 사람이거나 바보일 것이다. 옳고 좋은 것을 판단하는 능력은 감성능력 뿐만 아니라 이성의 폭넓은 활동의 산물이다.

`자신이 뭘 모르고 있는지를 아는 사람은 지혜롭다`는 옛말이 있다. 자신의 머리를 너무 과신한 나머지 새롭고 진보적인 가치를 공부를 하지 않는 것은 머리 나쁜 사람들의 본보기에 지나지 않는다. 

책 읽는 여성

▶쉴 참/심철웅/유화/99*118/1995

이번에 소개할 그림은 북한화가 심철웅의 `쉴참`이란 유화이다. 이 작품은 마치 서양의 인상주의 화풍을 떠올리게 한다. 한적하고 평화롭게 보이는 농촌을 배경으로 화사한 햇살이 비치는 나무그늘과 점심식사, 책을 보고 있는 모습 따위는 인상주의 화가들의 단골 소재였다.

아무튼 작품의 내용을 살펴보자. 농촌의 점심시간에 아들로 보이는 소년과 어머니가 점심을 함께 먹고 있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왼쪽 상단에 보이는 트랙터 같은 농기구와 작업복 차림이 여성 주인공의 직업을 말해주고 있다.

보통은 단체로 점심을 먹거나 집으로 돌아가서 먹겠지만 아들과 점심을 함께 먹기로 약속을 했거나 혹은 그냥 햇빛이 좋아 즐기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풀어헤친 보자기 위에는 조촐한 음식이 놓여있고 독서 삼매경에 빠진 젊은 엄마의 젓가락은 엉뚱한 곳을 향하고 있다.

물론 이 작품은 아들과의 좋은 관계나 햇빛을 즐기는 것을 의도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작품의 핵심적인 의도로 접근시키기 위한 적절한 장치일 뿐이다. 작품의 의도는 책을 보고 있는 여성이다. 책을 보는 여성을 통해 농촌을 한층 격조 높게 보이게 하고, `전 인민의 인텔리화`를 추구하는 당의 방침과도 일맥상통한다. 책의 내용이 무엇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작품의 배경이 농촌인데, 여성농민이 쉴 참을 이용해 책을 본다는 것은 우리 현실에 비추어 볼 때 충격적이다. 북한건설 초기 문맹을 타파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여 빠른 시간 안에 문맹을 퇴치할 수 있었다고 한다. 마찬가지로 지속적인 교육을 위해 `공장대학`이나 `농장대학` 따위의 교육기관을 만들고 발달시켰다고 한다.

우리나라 교육열은 세계적으로도 유명하지만 북한의 교육열도 만만치 않다. 우리가 높은 교육수준을 바탕으로 첨단산업과 경제발전으로 이루었듯이 북한도 높은 교육열과 수준으로 체제를 이끌어가고 있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북한의 체제가 가뭄이나 물난리 혹은 미국의 경제봉쇄와 군사압박에도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지 않나 생각해 본다.

흔히 남북경협에서 북한의 숙련되고 값싼 노동력과 남한의 자본과 기술을 결합하는 것을 상상하겠지만, 북한은 오히려 30만개 이상의 정밀부품으로 자체 개발한 인공위성을 만들고 정보통신의 소프트웨어 부문은 세계적 수준에 도달했다고 한다. 오히려 북한의 고급인력, 첨단기술과 남한의 자본과 유통이 결합하는 것이 더 유리할 지도 모른다. 

공부에는 나이가 없다고 한다. 얼마 전 중국에서 80세가 넘은 할머니가 글자를 배운다고 해서 해외토픽이 된 적이 있다. 왜 그 나이에 글자를 배우려고 하느냐는 질문에 할머니는 `그게 사람이야`라는 싱거운 대답을 했다. 

배움은 사람의 본성이고, 공부하는 사람과 민족이 세계를 이끌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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