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중한 역사

나는 역사과목을 좋아한다. 나에게 책읽기를 가르쳐준 중학교 선생님도 역사선생님이었다. 대학입시 때도 수학은 형편없었지만, 같은 시간에 본 역사과목은 거의 만점을 받을 정도였다. 하지만 `태정태세문단세...` 따위의 왕조를 외우거나 특정 사건을 나열하는 식은 별 관심이 없었다. 동학혁명의 전봉준 이야기나 만적의 난,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 고려의 무신정권 따위의 사건에 얽힌 이야기를 듣는 것이 너무 좋았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만약 그때 이런 일만 생기지 않았어도...`라는 밑도 끝도 없는 상상 속으로 빠져들곤 했다.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진 것도 결국 역사를 새롭게 배우면서이다. 내가 알고있던 대부분의 역사는 식민사관의 영향을 받았거나 돈 많고 힘있는 일부 지배자에 의해 왜곡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올바른 역사의 이해는 숱한 청춘들의 인생을 바꾸어 놓았다. 그것은 독재와 싸우고 민주사회와 통일을 위한 싸움의 출발점이 되었다.

사회가 불안하거나 사는 것이 힘들어지면 사람들은 복권당첨 따위의 행운을 바라거나 점쟁이를 찾는다. 하지만 어느 역사에도 점쟁이에 의해 미래가 달라졌다는 이야기는 없다. 오히려 미래는 역사 속에 담겨있다. 불안한 사회를 바꾸기 위해 사람을 대상으로 실험을 할 순 없다. 굳이 실험을 하지 않고도 대략의 결과를 예측할 수 있는 방법은 바로 역사에서 비슷한 사례를 찾아 적용시키는 것이다. 지금 행해지는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정치개혁,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공격 따위의 실체와 결과를 알고 싶으면 역사를 뒤적여보면 된다. 역사가 반복되진 않지만 우리에게 충분한 교훈과 지혜를 준다.

이것은 개인의 영역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가끔 사람들에게 `살아보면 알아`라는 따위의 말을 듣는데, 정말이지 짜증나는 경우도 많다. 꼭 경험을 해야 알 수 있다면 뭐 하러 애써 공부하겠나? 결혼하고 자식 놓고 나이 먹고, 사는 일이 개인에게는 처음이지만 사회적으로 보면 흔하고 흔해 빠진 경험 아닌가? 사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자기 자식에게는 경험적인 충고를 한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살아온 다양한 역사를 공부함으로서 충분히 간접경험을 할 수 있고, 보다 나은 미래를 계획하고 예측할 수 있다.

역사는 힘의 논리나 욕심에 따라 왜곡되고 달라지는데, 이는 개인의 경우에도 해당된다. 기억하고 싶은 것만 기억하고, 자신에게 유리하게 생각하며, 합리화하다보면 마치 그런 과거가 있었는지도 희미해진다. 나중에는 자신의 꿈이 뭐였는지도 모르고, 사람들에게 한 약속도 잊는다. 아니, 아예 그런 일은 없었다고 확신한다. 타인은 속일 수 없지만 자신은 완벽하게 속일 수 있다. 물론 타인이 지적을 하면 세상 탓이라고 적절히 둘러대거나 진짜 본심은 그게 아니었다고 우기면 끝이다. 그러나 역사를 부정하는 것은 결국 자신을 부정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현재의 자기 모습은 좋은 역사와 나쁜 역사가 함께 만든 것이기 때문이다.

나에게도 청춘시절의 역사가 있다. 친구들과 뛰고 달리며 함께 고민했던 사건들이 고스란히 기억에 남아있다. 그때의 사건들은 누구의 강요나 압박에 의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선택하고 사람들과 함께 만든 역사이다. 사실 내 손으로 만든 첫 역사이기도 하다. 그 시절의 꿈은 황당하고 실현 불가능한 것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그 꿈의 중심에는 언제나 사람에 대한 사랑과 정의가 있었다. 어설프지만 나에게는 소중한 역사이고 밑거름이며 뿌리이다.

그런 나의 역사를 기억하고 있는 숱한 사람들이 있는 한 말이다.

평양의 환호

▶평양의 환호/정동혁, 김동환, 김수남/조선화/277.5*177/1991

이번에 소개할 작품은 북한화가 정동혁, 김동환, 김수남의 공동작품인 <평양의 환호>라는 조선화이다. 작품의 크기가 거의 3미터에 가까운 대작으로 북한미술 특유의 속도감과 현장감을 잘 살린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작품의 내용은 1991년 전대협 대표 자격으로 북한에 들어간 `박성희, 성용승`이 평양시민에게 환영받고 있는 장면을 그린 것이다. 작품의 중앙에 박성희, 성용승 대표가 할머니의 손을 잡거나 왼주먹을 번쩍 든 모습으로 서 있고 주변에는 두 대표를 환영하기 위해 꽃다발을 든 소녀와 학생, 카메라를 든 취재진과 평양시민들이 환호하고 있다.

평양시민들의 표정은 그야말로 열광적이다. 왼쪽 상단에 `구국의 강철대오 전대협`이란 깃발과  `기어이 우리 대에 조국을 통일하자`, `전대협 5기 박성희, 성용승`이란 글씨가 이들의 방북 목적과 정체를 알려주고 있다.

이 작품의 특징은 제작 속도에 있다. 전대협 대표가 순안공항에 도착한 시간은 1991년 8월 3일인데, 이 작품은 1991년 8월 11일로 서명되어 있다. 실제 대표가 평양에 들어온 정확한 날짜는 모르겠으나 1, 2일을 뺀다하더라도 거의 일주일만에 완성된 것으로 보인다.

빠른 현장감을 살리기 위해 3명의 손 빠른 화가들이 공동작업을 했을 것이다. 이것은 북한의 `속도전`과 관련이 있다. 임수경씨의 경우도 `백두산을 올라갔다 내려오니 백두산에서의 모습이 미술작품으로 그려져 있더라`라고 쓴 글을 어디선가 읽은 기억이 있다.

보통 이러한 역사적 사실은 한참 지난 후에 작품으로 그려지는 것이 일반적이다. 내 기억에도 단일 사건을 이 정도 빠르기로 미술작품에 남긴 경우는 보지 못했다. 이렇게 빠른 작품을 하려면 몇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하나는 조직의 전폭적인 지원과 지지가 있어야 하고, 준비된 화가가 있어야 하며, 무엇보다도 역사적 평가가 끝나야 한다. 특히 역사적 평가는 화가 개인이 내리기에는 어려움이 많다. 북한의 경우 당의 방침이 신속하게 내려졌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볼 수 있다.

전대협 대표 박성희는 `나의 방북이 5분이라도 통일을 앞당길 수 있다면...`라는 믿음으로 방북을 결심했다고 한다. 물론 임수경, 박성희, 성용승 말고도 많은 한총련 대표들이 북한을 방문했고 이들은 말못할 고초를 겪었다. 당시 대학 4학년이었던 박성희의 역사는 10년 후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과 6.15공동선언을 이끌어 낸 좋은 거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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