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석근 / 시인

 

필자의 말

안녕하세요?
저는 아득히 먼 석기시대의 원시부족사회를 꿈꿉니다.
사람과 사람, 사람과 천지자연이 하나로 어우러지던 눈부시게 아름답던 세상을 꿈꿉니다.
인류는 오랫동안 그런 세상을 살아왔기에
지금의 사람이 사람을 죽이고, 천지자연을 황폐화시키는 세상은 오래 가지 않으리라 믿습니다.
또한 우리에게 지금의 고해(苦海)를 견딜 수 힘이 있으리라고 믿습니다.
저는 그 견디는 힘으로 ‘詩視한 세상’을 보고 싶습니다.
원래 시인인 ‘원시인’의 눈으로 보면 우리는 이 참혹한 세상에서 희망을 볼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낱말이 어떻게 기능하느냐는 추측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 낱말의 적용을 주시하고, 그로부터 배워야 한다. 그러나 난점은 이러한 배움을 가로막는 선입견을 제거하는 일이다. 그것은 어리석은 선입견이 아니다.

                                                     - 비트겐슈타인,『철학적 탐구』에서

 

한 교사가 말했다. “학생한테 ‘개새끼’라는 말을 썼다고 학부모인 교회 사모한테 항의를 받았어요.”

‘개새끼’라는 말, 이 말만 들으면 처음에는 누구나 거부감이 들 것이다. (선입견이다) 하지만 그 말은 ‘그 낱말의 적용’에 따라 의미가 천차만별 달라진다.

그 교사에게 그 말을 쓴 것만을 가지고 항의하지 말고 그 말을 언제 어떻게 썼을까를 봐야 한다.

평소에 우르르 몰려다니며 다른 아이들의 공부를 방해하는 아이들이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 교사는 그 아이들을 불러 “너희들처럼 몰려다니며 다른 아이들의 공부를 방해하는 건, 흡사 개들이 우르르 몰려다니며 마구 컹컹 짖어대는 것과 같아. 공부하는 학생의 자세가 아니야.”라고 했더니 아이들은 장난기 있게 개 흉내를 내며 킬킬거렸단다. 그래서 그 교사는 “너희들 모습이 정말 개새끼 같다.”라고 하며 함께 웃었단다.

이 아이들이 집에 가서 이 얘기를 부모님께 했는데, 학부모인 교회 사모가 학교에 전화를 해서 “어떻게 교사가 우리 아이에게 개새끼라고 할 수 있느냐?”고 항의를 한 것이었다.

그 학부모는 왜 ‘개새끼’가 쓰인 맥락을 읽지 못했을까? 그 교사가 아무리 전후 사정을 설명해도 막무가내였다고 한다. “그런 단어는 쓰면 안 돼요! 애 아빠가 목사님이라고요.”

우리가 학교 다닐 때, 학교에서 낱말 뜻을 풀어오라는 숙제를 많이 내 주었다. 그러면 우리는 국어사전에서 단어를 일일이 찾으며 숙제를 했다.

언어철학자 비트겐슈타인도 처음에는 “말할 수 없는 것은 침묵하라!”며 언어의 명징성을 추구했다. 하지만 나중에 초등학교 교사를 하며 아이들이 노는 것을 무심히 보다 아이들이 언어를 언어사전의 뜻대로 쓰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했다.

아이들은 흡사 언어를 게임처럼 사용하고 있었다. 게임에 어떤 규칙이 있듯이 언어를 어떤 상황에서 그에 맞게(이미 정해진 규칙처럼) 쓰더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언어이론을 수정한다. 언어는 사용에 있다. 언어는 어떤 고정된 의미가 있는 게 아니라 사용할 때 의미가 드러난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왜 언어에 대해 ‘선입견’이 이리도 강할까? 우리의 어두운 역사 속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과거 군사 독재 시대에 검열을 많이 했다. 어떤 특정한 말을 쓰지 말라. 어떤 학자들의 글은 읽지 말라.

검열에 길들여진 우리는 특정한 어떤 단어에 강한 선입견을 갖게 되었다. 빨갱이, 좌빨, 동성애...... . 우리 사회에 만연한 다양한 혐오들도 이런 어두운 역사의 흔적일 것이다.

교육은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가르치는 곳이다. 그런데 검열에 길들여진 많은 학부모들이 너무나 쉽게 교사의 교육권을 침해한다.

교사와 대화를 하려는 게 아니라 아예 교사의 교육을 좌지우지하려든다. 또한 교사의 교육권을 지켜주어야 할 학교의 관리자, 지원교육청들이 학부모의 민원이 두려워 교사의 입에 재갈을 물린다.

교사는 점점 위축되어 입시학원 강사가 되어 버린다. 교사와 학생의 교육적인 대화들은 사라진다. 교사와 학생의 갈등들이 법의 심판 대상이 되어버린다. 교육의 백년대계를 위해 교사의 교육권은 반드시 보장되어야 한다.

그 교사는 오래 전부터 글쓰기 모임에 나오기에 언어의 의미를 잘 안다. 언어는 쓰는 순간, 그 의미의 흔적을 남기고 부패해버린다는 것을 잘 안다.

 

몇 개째를 집어보아도 놓였던 자리가
썩어 있지 않으면 벌레가 먹고 있었다.
그렇지 않은 것도 집기만 하면 썩어갔다.

거기를 지킨다는 사람이 들어와
내가 하려던 말을 빼앗듯이 말했다.

당신 아닌 사람이 집으면 그럴 리가 없다고 ㅡ

                                                          - 김종삼,《원정(園丁》부분

                           

많은 사람들이 언어를 어떤 고정된 의미로 쓴다. 하지만 김종삼 시인은 안다. 언어는 단 한 번이다. 일의성이다. 그 순간, 하나의 의미의 꽃을 활짝 피우고는 허공으로 사라져버린다. 고정된 의미를 잡으려 하면 거기엔 부패의 냄새가 진동한다. 후각이 퇴화한 사람들은 부패의 냄새를 맡지 못한다.  

 

 

저작권자 © 통일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