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한필 (광주전남6월항쟁 사무처장)

▲ 지난 9월 21일 타계한 민족통일운동가이자 24반무예명인인 임동규 선생님. [사진제공 - 임한필]

 

임동규 선생님을 처음 뵌 것은 1992년 어느 여름날 저녁이었습니다. 제 고향인 광주 광산구 본량면 탑동마을에 임동규 선생님께서 1989년에 설립하신 민족도장무예도장 경당이 구한말 의병활동이 왕성하게 있었던 용진산 자락에 자리잡고 있을 때였습니다. 경당 마당에 있는 대나무 평상에서 막걸리를 전교조 해직교사 출신이셨던 임추섭 선생님, 사회평론 발행인이었던 정진백 선생님과 함께 막걸리를 드시고 계셨습니다. 저는 제가 평소 존경해온 두 분을 함께 뵈면서 임동규 선생님을 더 신뢰할 수 있었습니다. 큰 절을 올리고 배움을 청했으며 그 후로 저는 영화에서나 나오는 무예 스승과 제자의 모습처럼 무예수련 뿐만 아니라 죽어라 매일 노동을 보냈습니다.

새벽에 일어나 임동규 선생님과 함께 광주 전남대 운동장과 염주체육관에서 무예수련과 지도를 했습니다. 낮에는 당시 경당의 수입 사업이었던 죽염을 굽기 위해서 대나무를 베고, 소나무를 베고, 헌집을 헐어서 나무를 구했습니다. 아홉 번을 밤새 구었으며, 아홉 번을 단단한 소금기둥을 절구로 부셨습니다. 목검도 직접 나무를 자르고, 깎고, 그라인드 작업을 했습니다. 132㎝의 경당만의 목검이 당시 2만5천원에서 3만5천원의 가격에 판매가 되었습니다. 임동규 선생님은 무예수련은 단순히 기술을 익히는 일이 아니라 그 정신을 배우는 것이 중요하기에 다양한 일을 통해서 노동의 소중함을 익히게 했습니다. 저희는 아무런 불만 없이 무예수련과 노동을 함께 했습니다.

임동규 선생님은 1960년대와 70년대에 서울대 향토개척단, 구농회, 농업근대화연구회, 고려대 노동문제연구소 등 당시 농민, 노동 등에 관심을 갖고 활동을 했으며, 1979년에는 남민전 및 통혁당재건위 사건으로 쌍무기수를 받아서 10년간 복역하셨습니다. 1989년에 민족무예도장 경당 및 우리무예연구회를 조직해서 문무를 겸비한 민족간부 양성을 위해 헌신하였으며, 2000년에는 조국통일범민족연합 남측본부 광주전남 의장으로 활동하셨습니다. 2002년에 (사)24반무예경당협회 총재로 취임해서 24반무예의 전국화와 세계화에 전념하셨습니다. 또한 민족통일운동가로서 분단시대를 극복하고 민족문제의 큰 과업인 통일을 위해서 자신의 모든 삶을 헌신하신 애국자이셨습니다.

임동규 선생님의 삶을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더욱더 역사적인 삶을 살아오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1939년 2월 19일에 전라남도 광산군 본량면 지산리 탑동마을에서 출생하셨습니다. 본량초등학교, 광주서중학교, 광주제일고등학교를 졸업하였으며, 1959년에 서울대학교 상과대학 입학하셨습니다. 서울대 재학시절에 농촌문제에 관심을 가지면서 서울대 농대생 이우재 등과 함께 ‘남산농촌사회연구회’에서 활동하였으며, 서호연, 이우재, 홍갑표, 신재억 등과 함께 ‘구농회’라는 조직을 만들어 협업농장운동을 전개하였으며, 서울대학교 향토개척단을 만들어서 본격적으로 농촌문제 해결을 위해 대중운동을 시작하였습니다. 1962년에는 당시 농촌문제 및 사회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토론하였던 ‘학사주점’을 운영하기도 하였습니다.

▲ 임동규 선생님은 지금까지 전국에 250명의 사범과 10만명이 넘는 제자를 배출하셨다. 사진은 24반무예 지도자 단합대회. [사진제공 - 임한필]

1964년에 인혁당 사건으로, 1968년에는 통혁당 사건으로 조사를 받으셨으며, 대중경제론의 기초가 되었던 ‘대중경제 100문 100답’을 박현채 선생님과 함께 집필하기도 하셨습니다. 이후 농업근대화연구회 사무국장으로 서울농대 김문식 교수, 이대 법대 최병욱 교수 등과 함께 연구활동 및 후진 양성에 전념하셨으며, 1970년대에는 단순한 체육인 아닌 무예인으로서의 실사구시(實事求是)의 민족운동을 하기 위해 세계정도술협회 사무국장을 맡아서 정도술 보급에 애쓰셨습니다. 또한 조선시대 정조대왕에 의해 편찬된 국방무예교범인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의 24반무예 중 권법, 곤방 등 일부 무예를 복원하는 일을 정도술 달인이었던 안길원 선생님과 함께 하셨습니다.

또한 고려대학교 노동문제연구소 총무부장을 맡아서 노동문제에 관심을 갖고 연구하셨으며, 1979년에 통혁당재건위 사건으로 지정관, 김재욱, 양정규 등과 함께 체포되어 무기징역형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남민전 사건으로 무기징역형을 또 선고받는 등 유사 이래 처음으로 쌍(雙)무기수가 되었습니다. 약 10년간 감옥에서 보내시면서 ‘무예도보통지 24반무예’ 복원작업에 매진하였으며, 문익환 목사님께서 “빗자루도사”라는 별명을 지어 부르시기도 하셨습니다.

1988년에 민주화의 열풍으로 석방되셨으며, 1989년 7월 1일에 민족무예도장 경당(총관장)과 우리무예연구회(회장)를 창립하여 ‘체육으로서의 무예만이 아니라 민족학의 연구, 인격교육’을 통하여 오늘의 국제화된 사회에서 뚜렷한 주체의식과 민족적 긍지를 갖춘 민족간부의 양성을 목표로 수많은 제자를 양성하였습니다. 당시 전국 150개 대학 중 100여개 대학에 경당 동아리가 결성되었고, 운동권 학생의 생활총화로서 무예수련이 활용되어 공안당국이 긴장하기도 하였습니다. 지금까지 전국에 250명의 사범과 10만명이 넘는 제자를 배출해오셨습니다.

1990년에 『한국의 전통무예』를, 1991년에 『무예사연구』를, 1996년에는 『實演․註解 무예도보통지』를 발간하셨으며, 1992년에는 민족무예도장 경당을 자신의 고향인 광주 광산구 탑동마을에 이전을 해서 본격적으로 고구려의 상무정신과 조선의 선비정신을 잇는 ‘문무겸전(文武兼全)의 민족간부’를 양성하는 데 노력하셨습니다. 1994년에는 동학100주년 기념행사에서 경당사범 및 수련생 100명이 1주일간 참가해서 동학군과 관군의 전투를 재현하였으며, 1994년에 사단법인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특별분과위원장으로 참여하셨습니다.

▲ 임동규 선생님은 감옥에서 ‘무예도보통지 24반무예’ 복원작업에 매진해 “빗자루도사”라는 별명을 얻었다. [사진제공 - 임한필]

이후 한국전통무예총연맹 창립 및 고문으로 활동하셨으며 2000년대에 노르웨이, 덴마크, 미국 등을 방문하여 전통무예세미나를 개최하여 24반무예를 최초로 지도하셨습니다. 2002년에 사단법인 24반무예경당협회 총재로 취임하셨으며, 24반무예 문화재 지정 및 훈련원 복원 사업을 추진하였으며, 2005년에 무예도보통지 워크숍 및 24반무예 시범을 국회의원회관에서 무예단체 최초로 시범을 보였으며, 한일전통무예교류회를 2008년부터 전무총 산하 무예원로와 일본 무예원로들과 함께 2년에 한 번씩 개최함으로써 무예를 통해 한일 간의 교류와 화해협력을 이끄셨습니다.

또한 민족운동과 통일운동에도 매진하셨습니다. 2001년 8월에 조국통일범민족연합 남측본부 광주전남 의장으로서 평양축전 방북단 일원으로 북한을 방문하였으며, 방북 목적에 없는 회의 개최 혐의(국가보안법 위반)로 구속 기소돼 1심에서 징역 2년6월 및 자격정지 2년6월을 선고받고 항소했으나 기각되었으며, 2008년에 대법원 파기환송심에서 징역 1년6월 및 자격정지 1년6월에 집행유예 3년이 선고되었습니다. 2012년에 대장암수술을 하시고 요양병원에서 투병생활을 8년 넘게 하셨습니다. 2014년에 대한민국 무예명인 패 및 인장을 수여(사단법인 한국무술총연합회) 받으셨으며, 2019년에는 1981년 간첩단 사건으로 무기징역을 선고한 대법원 확정판결로부터 38년만에, 재심 청구 이후 5년 만에 서울고법 형사12부(재판장: 홍동기 부장판사)에서 무죄판결을 함으로써 명예를 회복하셨습니다. 2020년 9월 21일에 폐렴 및 폐혈증으로 별세하셨습니다.

임동규 선생님은 서울대 상대출신으로서 안락한 삶을 추구하실 수 있었지만, 당시 남북의 분단구조를 타파하고 민족해방의 전선을 구축하고자 하셨으며, 빈곤한 농민과 노동자의 삶을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외롭고도 힘든 삶을 선택하셨습니다. 이론적 틀을 구축하시고 실천으로서 증명하시고자 하셨습니다. 분단을 극복하고 통일의 신념을 실하기 위해서 남민전의 전사로 활동하셨으며, 주체의식과 민족적 긍지를 갖춘 민족간부를 양성하기 위해 조선의 국방무예인 무예도보통지의 24반무예를 복원하고 민족무예도장 경당을 설립해서 250명의 사범을 양성하고 10만명이 넘는 대학생과 시민들에게 검을 쥐게 하고 통일을 외치게 하셨습니다.

1979년에 남민전과 통혁당재건위 사건에 연루되어 ‘쌍무기수’라는 전대미문의 타이틀을 군사독재정권이 새겨주었지만, 임동규 선생님은 결코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좌절하지 않았습니다. 1.5평의 작은 공간에서 빗자루를 들고 24반무예라는 민족혼을 부활시켰습니다. 임동규 선생님은 굴곡진 역사의 흐름에서 한 치도 비켜서지 않으셨습니다.

지난 3일 간에 임동규 선생님의 당당하고도 우렁찬 길을 되새기고 기리기에는 너무나 짧은 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광주와 전국의 수많은 시민사회단체가 함께 해서 그 분의 숭고한 삶을 기억하고 계승하기 위해 노력하셨습니다. 이제는 저 세상에서 평소 좋아하시는 술 한 잔과 함께 웃으시면서 여유로운 망중한을 갖기를 바랍니다. 민족의 전사였던 임동규 선생님! 편히 영면하시옵소서.
 

※ 추모글을 쓴 임한필 사무처장은 1992년 22살에 ‘경당대학’에 입문해서 임동규 선생님으로부터 24반무예를 전수받고 경당사범으로 활동하였다. 문무겸전의 민족간부가 되기 위해 뒤늦게 북한 및 통일 문제를 공부하기 위해 조선대와 북한대학원대학교를 졸업하고,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하였다. 24반무예경당협회 사무총장으로 14년간 활동하면서 24반무예의 대중화에 노력하였으며, 공직선거에도 도전했다. 현재는 고향인 광주에서 광산시민연대 수석대표, 1987작은도서관 관장, 광주전남6월항쟁 사무처장, 김대중평화캠프조직위원회 사무처장으로 보내는 등 시민사회단체에서 임동규 선생님과 경당의 정신을 실천하기위해 노력하고 있다.

 

(수정, 2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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