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영태 / 출판기획자 겸 역사교양서 저술가
 

올해 2020년은 광복(또는 해방) 75주년이자 6.25전쟁(한국전쟁) 발발 70주년이 되는 해이다. 우리에겐 해방이 곧 분단이었으니 분단 75주년이기도 하다. 왜 우리는 3/4세기 동안이나 분단된 상태로 살아야 했던가? 왜 우리는 해방과 함께 분단이라는 있을 수 없는 상황을 맞아야 했던가? 우리는 왜 해방 3년 만에 두 개의 정부가 수립되고 마침내 5년 만에 전쟁이라는 참화를 겪어야 했던가? 이러한 물음에 대한 답은 해방 전후사에 들어 있다. 해방 75주년, 한국전쟁 70주년의 해에 해방 전후 역사를 다시 돌아보는 이유다. 이 연재는 매주 월요일에 게재된다. / 필자 주

 

카이로선언은 미국 주도의 강대국 타협의 산물

한국의 독립 문제가 최초로 언급된 카이로 선언에 대해서 조금 더 이야기를 해보자. 1943년 11월 27일 이집트의 수도 카이로에서 미·영·중 수뇌가 발표한 ‘카이로 선언’에서 “3개국 영수는 한국 인민의 노예 상태를 유념해 적절한 시기에 한국이 자유와 독립(상태가) 될 것을 결의한다”고 함으로써 한국은 연합국으로부터 ‘독립을 약속받은 유일한 아시아 국가’가 되었다. 카이로 선언은 한국의 자유·독립 회복을 결정했지만 그것이 지금 즉시 또는 전쟁 직후가 아니라 ‘적절한 시기’라고 했다. 앞에서 말했듯이 이는 미국 대통령 프랭클린 루즈벨트의 ‘다국적 신탁통치 구상’을 반영한 것이었다. 동시에 이 카이로 선언은 연합국들 사이에 존재했던 한국에 대한 인식과 정책의 차이가 외교적 타협을 통해 조정된 결과였다. 카이로 선언에서 ‘한국의 자유와 독립 회복’ 부분에는 중국 정부와 장제스의 의중이, ‘적절한 시기’ 부분에는 미국 정부와 루즈벨트의 의중이 반영되었던 것이다.(주1)

▲ 카이로선언과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활동을 다룬 학술토론회 자료집.

카이로 회담이 개최되기 전 충칭 임시정부의 김구 주석과 외교부장 조소앙 등은 중국 정부에 한국의 독립 문제가 언급될 수 있도록 해달라는 요청을 하였고, 중국의 장제스는 실제로 회담에서 ‘한국의 자유 독립’ 조항을 강하게 주장했다.(주2) 미국은 그러한 중국의 요구를 중국의 한반도에 대한 야심으로 판단했지만 해당 조항을 카이로선언에 삽입하는 데 동의했다. 미국 입장에서 한국의 자유·독립과 신탁 실시가 상충하거나 대립적인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미국은 2차 대전을 수행하는 일반적이고 포괄적인 원칙에서 장래 한국의 독립에 찬성했는데, 그러한 한국에 대한 정책은 다자간 국제신탁통치 실시였고, 카이로선언에서 ‘적절한 시기’로 표현되었다. 식민지 국가의 독립을 근본적으로 반대했던 영국은 카이로선언에 한국조항을 삽입하는 것 자체를 반대했으나, 미국과 중국의 반대로 무산되자 가급적 모호하고 불명확한 용어를 사용하기를 원했다.(주3)

▲ 1943년 카이로 회담에 참석한 장제스 중국 총동, 루즈벨트 미국 대통령, 처칠 영국 수상과 참석자들.

그러나 카이로 선언을 주도한 것은 미국이었다. 따라서 카이로 선언에는 당시 루즈벨트 대통령이 갖고 있었던 전후 아시아에 대한 정책 전반의 구상이 포함되어 있었다.

카이로 선언 전인 1941년 8월 14일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과 영국의 처칠 수상은 대서양 영국 군함 프린스 오브 웨일스 호에서 연합국의 목표와 전후 정책을 논의한 뒤 14개 조항으로 된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루즈벨트는 ‘대서양 헌장’으로 이름붙은 이 선언 3조에서 천명한 민족자결권 원칙이 제2차 세계대전 후 전 세계에서 보편적으로 적용되어야 한다는 입장이었으나 처칠은 전범국가인 독일 점령하의 유럽국가에만 적용되어야 하며 영국, 프랑스 등 유럽 제국주의 국가들의 식민지에는 적용되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이었다. 영국으로서는 식민지 국가들의 민족자결권을 인정하거나 신탁통치를 인정하게 되면 유럽제국의 질서가 와해될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영국으로서는 이미 최강국으로 부상하고 있던 미국의 주도권을 무조건하고 반대할 수 능력도 명분도 없었다.(주4)

루즈벨트 대통령은 1943년 3월 27일 영국 외상 이든(Anthony Eden)과 전후 만주, 한국, 대만, 인도차이나 등에 관해 논의 하면서 인도차이나에는 신탁통치를 실시하고, 만주와 대만은 중국에 반환하며, 한국은 미국·중국 외에 1〜2개국이 더 참여하는 국제신탁통치하에 두자고 제안했다. 이든은 이 제안에 호의적으로 응답했지만 영국과 프랑스는 자국의 식민지였던 곳에서 신탁통치를 실시하는 것에 반대했다. 이같은 유럽 제국의 입장은 카이로회담 뿐만 아니라 얄타회담에서도 그대로 이어졌다. 이에 미국은 기존에 신탁통치를 실시하고 있는 곳, 이전에 적(추축국 동맹, 즉 독일과 일본, 이탈리아 등)의 영토였던 곳, 그리고 신탁통치를 자발적으로 받아들이는 곳에만 이러한 원칙을 적용한다는 입장을 취했다.(주5)

카이로선언이 한반도에 주는 진정한 의미

유럽제국의 입장은 카이로 회담에서도 그대로 반영되었다. 장제스는 한국을 독립시키고 중국과 미국이 전후 인도차이나의 독립을 위해 공동 노력해야 한다는 입장이었으나 루즈벨트는 유럽제국의 입장을 받아들여 인도차이나와 태국의 독립 제안에 부정적이었다. 결국 카이로 선언은 중국의 주장을 일부 수용하면서도 유럽의 주장도 고려하는 방향에서 타협한 것이었다. 미국으로서는 당시 중요한 문제였던 버마(미얀마)전선에서 중국의 협조가 필요했으므로 중국 입장을 어느 정도 고려해 줄 필요가 있었으며, 대서양의 파트너인 영국의 입장을 인정해줄 필요가 있었다. 그렇게 해서 일본이 점령한 과거 중국의 영토는 중국에 되돌려주고 한국의 독립에 대한 중국의 주장을 선언에 반영하면서도 아시아의 다른 지역에 대해서는 “일본은 폭력과 탐욕으로 약탈한 다른 일체의 지역으로부터 구축될 것”이라는 애매한 표현으로 사실상 영국 등 유럽제국의 재식민지화(의 가능성)를 인정하였던 것이다.(주6)

▲ 인도-버마 전선에서 중국의 쿤밍과 인도 레도를 잇는 버마의 미치나는 요충지였다.
▲ 일본군은 버마를 쉽게 장악한 뒤 인도의 수도 델리를 향해 진격한다는 과감한 계획을 세웠으나 버마와의 국경 도시 임팔에서 영국군과 맞붙었는데 임팔 전선에서부터 고전했다. 미국-영국의 연합국도 이곳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중국의 협조가 무엇보다 필요했다. 중국에도 무언가를 주어야 했다. 카이로 선언은 이런 국제연합국 강국들의 이해가 타협한 결과였다.
▲ 임팔 전선 상황.

이것은 제2차 세계대전 이전 유럽의 식민지였던 아시아 국가들의 독립은 인정하지 않는 것이었다. 이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제창된 민족자결주의가 승전국의 식민지에는 적용되지 않았던 것과 동일했다. 일본의 식민지였던 지역에는 대서양 헌장 3조의 ‘민족자결권’이 적용될 수 있지만, 다른 지역은 과거의 상태로 되돌아갈 수 있는 가능성을 그대로 남겨두었던 것이다. 프랑스가 과거 식민지였던 베트남에 재차 진입했던 것은 이러한 강대국간의 타협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반면, 일본의 식민지였던 만주와 대만은 중국에 되돌려주고 한반도는 ‘독립’시키기로 했고, 그 주도권을 미국이 가졌던 것이었다.

이와 함께 유럽에서는 전범국가에 대해 분할 점령하는 방식을 취했지만 아시아에서는 전범국이었던 일본제국을 분할하는 방식을 채택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었다. 독일은 미국, 소련, 영국, 프랑스에 의해 분할되었지만, 일본제국은 대만과 만주는 중국에, 한반도는 독립, 일본본토는 미국이 점령하는 방식으로 분할했던 것이다. 유럽과 아시아에서 이와 같은 차이가 났던 것은 유럽전선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소련이었기에 소련의 영향력을 무시할 수가 없었으나, 아시아 전선에서는 미국이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기에 주도적으로 전후 질서 재편을 주도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주7)

카이로 선언에 따르면, 한국을 제외한 다른 아시아 국가들의 경우 1945년 8월 15일의 일본 패망이 곧바로 독립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영국은 이미 제1차 세계대전 때 인도의 독립을 약속했고 제2차 세계대전에서도 인도가 중요한 역할을 했기 때문에 독립시켜 주어야 했지만 영연방의 틀 안에서 묶어두고자 했다. 인도네시아의 독립운동세력은 1945년 독립을 선언했지만, 1949년까지 네덜란드를 상대로 독립전쟁을 벌여야 했다. 인도차이나의 베트남도 1945년 독립을 선언했지만 프랑스가 복귀하면서 1946년부터 1954년까지 독립전쟁을 벌여야 했다. 그 다음에는 프랑스를 대신해 미국이 들어오면서 1975년 통일될 때까지 싸워야 했다. 홍콩은 다시 영국 소유가 되었다가 1997년 7월에야 중화인민공화국에 반환되었다.

한편, 한국의 경우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의 패전과 동시에 일본제국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기회를 얻었으나 열강의 입장에서는 바로 ‘독립’이 아니라 ‘적절한 시기’(in due course)에 ‘자유로운 국가’가 되는 것이었다. 이런 내용은 포츠담 선언 8항에서도 확인되었다. 미국의 관점에서 본다면 1945년 8월 15일은 한국의 ‘독립 자체’가 아니라 ‘일본제국으로부터의 분리’를 의미했다. 임시정부의 노력과 장제스의 역할로 카이로 선언에 한국 관련 내용이 포함되기는 했지만, 미국의 전후 정책에 따라 한국은 완전한 독립을 약속받지 못했다. 카이로 선언의 ‘적절한 시기’의 의미는 ‘신탁통치 구상’일 뿐만 아니라 미국의 입장에서 ‘독립’이 아니라 ‘일본제국으로부터의 분리’를 의미했다는 점을 파악해야 한다.(주8) 결국 한반도는 일본제국에서 분리되어 미국이 주도하는 ‘신탁통치 실시’로 가닥이 잡혔던 것이다. 이것이 카이로 선언의 진정한 의미이다.

신탁통치안과 국제민간기구 형태의 과도정부 구상

미국의 전후 동아시아 대한 정책 구상의 핵심 고민은 간단히 말하면 일본제국이 해체된 뒤 그 공백을 미국이 어떻게 장악하여 안정적인 패권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대서양 헌장, 카이로 선언, 얄타선언, 포츠담 선언으로 이어지는 국제적인 회담과 선언에는 이러한 미국의 고민이 깔려 있었다. 그와 같은 근본적인 고민 속에서 한반도에 대한 다국적 신탁통치 구상도 마련되었다.

▲ 영국, 프랑스 등 유럽제국의 식민지로 분할 된 동남아시아. 2차 대전 후 미국은 이곳에서도 ‘신탁통치 실시 후 독립’을 구상했으나 영국 등의 반대로 카이로 선언에서 언급하지 못하고, 일본제국의 식민지였던 ‘한국’에 대해서만 ‘적당한 시기에 독립시킨다’(신탁통치 후 독립)고 천명했다.

카이로 선언 이후 미국 루즈벨트 행정부의 ‘기획’ 집단은 전후 상황을 ‘한국의 독립정권 설립문제’라는 비망록에 집약, 정리하였는데, 그 내용 중 주목할 것은 먼저 해방에서 독립에 이르는 경로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이 문서는 군정실시 이전의 시기를 1) 혁명적 요소들이 적극 활성화될 ‘진공기(眞空期)’, 2) 일본 항복이전 연합군의 한국 점령, 3) 일본 항복시 영토 이양의 세 단계로 나누었다. 특히 진공기에 “토착혁명세력이 야기하는 분규와 혼란이 초래할 위험성을 우려”하면서 “점령군의 임무는 진공기의 분규와 혼란을 방지하는 것”이라는 점을 밝히고 있다. 또한 소련의 참전 여부와 상관없이 ‘한 자리를 보장해 줄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다는 점도 중요하다. 군정실시 이후의 시기는 다시 1) 군정, 2) 유엔의 공동민간행정의 2단계로 나누고, 군정단계는 적절한 군사적 보장 장치를 동반하고 한국군의 훈련에 대한 조치가 포함되어야 함을 지적하였다.(주9)

다음으로 주목할 내용은 한반도에 대한 군사전략적 고려다. 한반도의 지정학적 위치와 군사전략적 중요성 때문에 어느 한 강대국의 독점을 막고 4대국 협정에 의한 안전보장장치가 필요하다고 했지만, 사실은 소련의 남진 저지가 1차적이고, 일본의 통제가 2차 목표였다. 미국이 지역안보 차원에서 계속 4대국 협정에 의한 국제신탁통치를 주장한 주된 이유는 여기에 있었다.(주10)

신탁통치 문제는 카이로 선언 이전부터 미국 정가와 언론에서 심심찮게 흘러나왔고, 루즈벨트 대통령은 대서양헌장(주11) 발표 이후 간헐적으로 전후 식민지역에 대한 신탁통치안을 내비쳤다. 루즈벨트는 1943년 3월 영국 외상 이든을 만난 자리에서 한국에 대한 국제신탁통치를 제기해 최초로 공식 거론했다. 하지만 미 국무부 극동국의 한국 전문가 랭던은 태평양전쟁 발발 3개월 후인 1942년 2월 20일에 벌써 신탁통치에 의한 국제관리를 포함하여 한국에 관한 전후 설계를 국무부에 제출했는데, 이는 미국 정부내 실무관리들 사이에서도 일찍부터 신탁통치구상이 제기되었음을 뜻한다.(주12)

▲ 제2차 세계대전 후 재점령하러 온 네덜란드에 저항해 독립투쟁에 나선 인도네시아의 자바 독립군(1946)(사진=위키피디아)

미국의 신탁통치안은 전후 기획 과정에서 도출된 것으로써 한국에만 적용되는 원칙이 아니었다. 따라서 한반도 신탁통치안에 담긴 미국의 대응방안을 국제적 차원과 한국 내부적 차원으로 나누어 봐야 할 필요가 있다.

국제적 차원에서 미국이 고려한 것은 한반도 신탁통치를 통해 동북아시아 지역에서 소련과 일본을 견제하고 미국의 안보이해를 보장받는 것과 신탁통치안을 식민종속지역의 전후 영토문제 처리의 일반원칙으로 고수하는 것이었다. 한국 내부적 차원에서 미국의 고려사항은 한국의 정치적 독립의 실현방식과 절차, 한국 민족운동에 대한 대응 문제 등이었다. 국제적 차원과 한국 내적 차원의 양 측면은 현실에서는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어서 분리될 수 없지만, 미국은 일단 각각을 내용적·논리적으로 분리시켜 구체적 대응책을 마련했다.(주13)

▲ 2차 대전 후 인도차이나를 재차 지배하기 위해 들어온 프랑스에 대항해 독립 전쟁을 벌이면서 인도차이나 전쟁이 시작되었다.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처절하게 패배한 뒤 프랑스는 베트남에서 물러갔으나 그 뒤를 미국이 들어오면서 베트남은 1975년까지 전쟁을 벌여야 했다.

국제적 측면에서는 미국이 식민지의 정치적 독립 문제를 제기할 때, 피압박민족의 내재적 요구, 즉 민족해방을 통한 독립국가의 건설이라는 과제의 해결보다는 강대국 사이의 영토 처리와 미국의 안보 이해를 우선적으로 고려했다. 국제적인 질서를 재편하면서 미국의 주도권을 어떻게 확보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중요했던 것이다.

또한 한국의 내부 정세에 대한 대응책으로 미국은 신탁통치를 위한 다단계 관리방식과 함께 국제민간행정기구(International Civil Administrative Authority)를 구상했다. 이러한 국제민간행정기구는 일종의 과도정부를 의미했는데 미국은 이와 관련하여 2가지 안을 준비했다. 하나는 1명의 고등판무관(High Commissioner)을 수반으로 하는 행정부를 구성하고 이 고등판무관이 연합국에서 적당한 요원을 선발하여 관리를 등용하는 방안이었다. 다른 하나는 5명 정도의 ‘판무관 집합체’로 기구를 설치하고, 스웨덴, 스위스, 네덜란드 같은 ‘2등 국가’의 대표를 의장으로 지명한 뒤 4명의 위원은 미국, 영국, 중국, 소련 등 ‘1등 국가’에서 뽑는 방안이었다. 한국인은 이 민간행정기구에 행정요원이나 행정 훈련을 받기 위해 참여하는 것으로 예정되었다. 해방 후 1945년 12월 모스크바 3국 외상 회담에서 미국이 제안한 한국문제 해결방안은 위의 2가지 안을 절충한 것이었다.(주14)

이처럼 미국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구체적으로 한반도 문제를 검토하고 있었다. 물론 그것은 일본과 중국을 일차적으로 고려한 동아시아 정책 전반에 대한 구상에서는 부차적인 내용이기는 했지만 말이다.

미국 종전 구상 – 한반도 분할점령안의 구체화

미국은 태평양 전쟁이 시작되면서 전후 처리 문제를 검토하기 시작했고, 그 결과 미 대통령 루즈벨트 참모진이 중심이 된 기획집단과 국무부를 중심으로 한 관료집단은 전후 처리와 관련하여 한반도의 신탁통치 구상과 함께 일종의 과도정부 형태로 국제민간행정기구안을 마련했다. 1945년 들어 전황이 더욱 유리하게 전개되면서 미국은 정치·군사적 목표를 실현할 수 있는 방안을 대일 군사작전과 관련하여 보다 현실적인 기초 위에서 모색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문제는 미국이 일방적으로 처리를 할 수 없었으므로 주변 강대국들과 이해관계를 조정해야 했는데 어떻게 미국측에 정치·군사적으로 유리한 위치를 점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 주된 관심사였다.

미국 국무부는 1945년 2월 4일에 개최된 얄타회담을 준비하면서 다시 한국 문제를 전반적으로 검토했다. 이 단계에서도 미국의 입장은 군사적 점령이나 군정 모두 연합국(미·영·중·소 4개국)의 공동점령 및 공동관리를 지향했다. 그러나 소련의 대일전 참전이 일정에 오른 상황에서(주15) 지리적으로 한국에 근접해 있는 소련의 강력한 지상군의 존재는 미국에게 불리한 조건으로 작용할 것이 분명했다.

미국이 신탁통치안, 공동점령·공동관리 입장을 제기했으나 얄타회담에서는 한국에 대한 구체적인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다만 미국의 신탁통치안에 대해서는 스탈린의 소극적인 동의를 얻을 수 있었다. 얄타회담에서 루즈벨트는 “20〜30년간의 신탁통치가 필요하다”고 했으나 스탈린은 “그 기간이 짧을수록 좋을 것”이라고 대답했다. 루즈벨트는 미·중·소 3개국에 의한 신탁통치를 주장했으나 소련은 영국의 참여를 고집했다. 또한 스탈린이 한국에 외국군이 주둔할 것인지에 대해 묻자 루즈벨트는 부정적으로 답변했다.(주16)

얄타회담에서 연합국 사이에 한반도에 대한 문서화된 합의는 없었지만, 한반도에 대한 신탁통치는 합의된 상태였다. 미 군부도 한반도에 대한 군사전략적 중요성을 평가하고 대응 방침을 고민했는데, 그 기본 방향은 전후 기획집단의 구상에서 벗어난 것은 아니었다. 미국의 전후 기획집단과 국무부, 군부 모두 만주와 일본에 대한 이해관계는 비교적 분명했지만, 한반도에 대해서는 다소 복잡했다. 미국 군부는 한반도 처리와 관련해 “책임과 권한이 압도적이지는 않더라도 명목상의 것 이상이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 미국 전쟁성 작전국 전략기획단이 기안한 한반도 분할점령 및 관리안. 출처: 미국 전쟁성 OPD, S&P/WDGS(1945년 1월 10일-2일 작성)(주17)

미국 군부는 이러한 목적을 위해 한반도의 몇몇 지역에 대한 우선점령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미 군부가 한반도에서 우선점령지역으로 선정한 곳은 주요 항만시설과 해군기지가 있는 부산·진해지역, 한국의 정치적 중심지인 서울과 그 관문이자 서해안의 주요항구인 인천, 한국과 만주의 주요 접경지역인 항구도시 청진과 나진이었다. 이 가운데 미군이 확보해야 할 지역으로 부산·진해 지역과 서울지역을 꼽았다.(주18) 미 군부는 점령방식으로 지역분할을 예상했다. 이것은 미 국무부가 예상한 연합국의 공동점령과 공동관리 방식을 실질적으로 변경한 것이었지만, 군부의 분할점령안도 신탁통치안 자체를 반대한 것은 아니었다. 군부는 이후 전개될 한반도 주변의 군사적 상황을 예측하면서 신탁통치 실시 이전 단계의 점령방식과 군정실시에 대해 의견을 밝힌 것이었다.(주19)

군부가 이처럼 지역분할 방식을 택한 것은 국무부가 상정했던 공동점령과 공동관리에 의해 중앙통제를 할 경우 동북아시아에서 막강한 육군을 보유하고 있는 소련이 미국보다 군사적으로 유리한 위치에 서게 되고, 그에 따라 미국의 영향력과 발언권이 약화될 것이라는 우려에서 나온 것이었다. 미국 군부는 점령단계에서 미국이 한반도를 하나의 통일된 단위로 장악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라고 판단했고, 전략지역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분할점령이 좋을 것이라고 보았다. 한반도의 38선 분할은 실제로는 일본이 미국의 예상보다 빨리 항복했기 때문에 미국측 관련자들에 의해 긴급하게 결정되었을지라도 군부 기획자들의 머릿속에는 그 전부터 분할점령이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었다.(주20) 따라서 38선 획정은 결코 두 명의 대령장교에 의해 몇 시간만에 그어진 것이라고 단순화시킬 수 없는 것이다. 미국의 전후 정책의 일관된 흐름 위에서 구체적인 실행 과정이 그렇게 표출되었던 것이었다.

▲ 얄타회담(1945.2.4.-2.11)의 세 영수 처칠, 루즈벨트, 스탈린. 얄타회담에서 세 영수는 한반도의 신탁통치에 대한 암묵적 합의는 이루었으나 구체적인 내용은 마련하지 못했다.

루즈벨트는 얄타회담에서 스탈린에게 외국군의 주둔 없는 신탁통치를 이야기했으나 미국 군부는 실질적으로 한반도의 분할점령을 예상하고 있었다. 남한점령 후 한반도 문제를 두고 워싱턴의 정책당국자와 현지점령군부와의 사이에 입장 차이가 생겼던 것처럼 전후 처리 문제를 두고도 구체적인 부분에서는 차이를 보이고 있었다. 군부는 군사전략적 고려를 최우선에 두고 판단하기 때문에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방안을 선호했다. 반면, 루즈벨트의 신탁통치안은 한반도뿐만 아니라 식민지일반에 대한 처리방안으로 구상했던 것으로 이상주의적 요소를 갖고 있었다. 이것이 현실에서 구체화되는 과정에는 많은 변화가 일어날 수밖에 없고, 한반도에서는 분할점령이 분단으로 이어지는 비극적 상황을 가져왔다.

----------------------------

<주>

1) 정병준, 카이로회담의 한국 문제 논의와 카이로선언 한국조항의 작성과정, 역사비평 2014년 5월호, 308〜309쪽

2) 한시준, 『대한민국임시정부 Ⅲ』,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8, 180〜187쪽

3) 정병준, 위의 글, 340쪽

4) 박태균, 미국의 관점에서 본 한국의 8.15,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군사』 제96호(2015.9), 6쪽

5) 박태균, 위의 글, 6〜7쪽

6) 박태균, 위의 글, 7〜8쪽

7) 박태균, 위의 글, 8〜9쪽

8) 박태균, 위의 글, 10〜11쪽

9) 정용욱, 1942〜47년 미국의 대한정책과 과도정부형태 구상, 서울대 박사학위논문, 1996, 25쪽

10) 정용욱, 위의 논문, 26쪽

11) 1941년 8월 14일, 대서양회담을 마친 루즈벨트 미국대통령과 처칠 영국수상이 밝힌 8개 항목의 전후 세계 구상. 헌장 가운데는 ‘피침략국의 주권과 자치의 회복’이 포함되어 있었다.

12) 정용욱, 위의 논문, 26〜27쪽

13) 정용욱, 위의 논문, 29쪽

14) 정용욱, 위의 논문, 29〜30쪽

15) 얄타회담에서 소련은 대독전 종결 이후 3개월 안에 대일전에 참전하기로 약속했다.

16) 정용욱, 위의 논문, 33〜34쪽; 이완범, 『한국해방 3년사』, 태학사, 2007, 35쪽

17) 김기조, 28선 획정의 국제적 요인: 한반도 분할 과정의 재조명(1941-1945), 한국전쟁학회 편, 『한국 현대사의 재조명』, 명인문화사, 2007, 86쪽

18) 정용욱, 위의 논문, 37쪽

19) 정용욱, 위의 논문, 37〜38쪽

20) 정용욱, 위의 논문, 38쪽

 

 

저작권자 © 통일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