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해랑 / 주권자전국회의 공동대표, 21세기 민족주의포럼 대표
 

연재를 다시 시작하며

58년 개띠 노동자 이야기를 다시 하려고 합니다. 잠시 쉰다는 것이 1년을 넘겨 버렸습니다. 그 동안 우리의 주인공 신돌석씨도 많은 일을 겪었습니다. 세상은 많이 변한 것 같은데 어찌 보면 완강하게 버티며 변하지 않는 것 같기도 합니다. 변한 것은 무엇이고, 변하지 않은 것은 무엇인지, 그보다도 변해야 할 것은 무엇이고, 변하지 말아야 할 것은 무엇인지를 소소한 일상을 통해 그려 보고자 합니다. 통일뉴스 독자 여러분들의 많은 응원과 질책을 부탁드립니다. / 필자

 

▲ [삽화-백소(白笑)]

2002년의 대선은 정말 극적이었다. 노무현이 후보가 되는 과정도 그렇지만 마지막 날은 정말 극적이란 말 이외에는 표현할 말을 찾기 힘들었다. 이 극적인 과정이 평생 보수적인, 아니 수구적인 생각으로만 살아온 형의 마음을 움직인 것이었다. 대선 날 아침에 정몽준이 노무현 지지를 철회한다는 발표가 신문에 났다. 신돌석씨는 그 전날 늦게까지 술을 마시느라 무슨 일이 벌어진지도 몰랐다. 지수가 전화를 해서야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알았다.

노무현과 단일화하기로 합의하고, 노무현으로 단일화되자 지지를 약속한 정몽준이 갑자기 선거 전날 지지를 철회하였다. 물론 정몽준으로서도 할 말이 있을 것이다. 노무현과 단일화를 한 이상 차기는 자기여야 하는데 노무현이 전날 유세에서 정동영, 추미애 등을 거론하면서 다른 후보들도 많이 있다는 발언을 하자 이를 두고 발끈하였고, 그것이 지지 철회까지 나갔다. 문제는 이렇게 되자 둘의 단일화 때문에 위기의식을 느낀 수구세력들이 쾌재를 부른 것이었다.

정몽준이 단지 그 발언 때문에 지지를 철회했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한나라당과 미 정보기관의 공작이 있었다는 설도 있다. 아무튼 조선일보가 정몽준의 노무현 지지 철회 발표를 듣자마자 다음 날 발간될 신문을 인쇄하던 윤전기를 멈추고 특별 사설을 써서 무가지를 만들어 여기저기 수많은 양을 돌렸다고 한다. 이전 같으면 이러한 물량 공세는 성공했을 것이다. 하지만 세상이 달라졌다. 인터넷이란 것이 노무현을 지지하는 젊은 사람들을 그 밤에도 연결시키고 있다는 사실을 그들은 몰랐다.

지수와 지훈이는 투표권이 없는 나이였다. 지수는 지금 같으면 있을 나이인데 그때는 없었다. 지수는 만 20세에 몇 달 못 미쳤었고, 지훈이는 두 살 정도 어렸다. 이 둘도 인터넷을 통해 무가지가 마구 살포된다는 것을 듣고 그것을 수거하는 대열에 동참했다. 직원을 동원하여 무가지를 뭉텅이로 뿌리고 다니는 조선일보는 자발적으로 나서서 그것을 수거하며 다니는 젊은이들을 이기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의 교묘한 특별 사설은 거의 시민들 손에 들어가지 못했다고 한다.

새벽 3시경 무가지를 수거하고 들어온 지수와 지훈이가 아빠 방으로 쳐들어갔다. 지수가 먼저 울면서 말했다. 자기들이 무엇을 하고 오는 길인지를 말하면서 우리 같은 서민이 왜 이회창 같은 사람을 지지해야 하냐고 하였다. 형은 아무 말 없이 듣기만 했다고 한다. 이어서 지훈이가 자기가 졸업하고 군대 갈 때는 안 가고 도망갈 거라고 했다. 아빠가 군대 빼줄 힘도 없으니 자기가 도망가는 수밖에 없지 않냐고 했다고 한다.

다음 날 아침 형이 투표를 하러 나간다고 하면서 아직 뭐가 뭔지 똑똑히는 모르겠지만 너희 삼촌 말도 있고, 너희 말도 들었으니 가서 노무현을 찍어야겠다고 하더란다. 이대로 나라가 가서는 안 되겠고, 뭔가 억울하다는 생각도 들더라는 것이다. 놀라운 변화였다. 이러한 변화들이 모여서 결국 노무현 대통령을 만들었다. 우리 역사가 한 걸음 전진한 것이었다. 거기까지는 좋았다. 신돌석씨는 솔직히 권영길이 안 돼서 서운한 것은 잊었고, 노무현이 된 것에 대해 엄청난 기쁨을 느꼈었다.

그해 마지막 날에 미순이 효선이 추모 집회를 종로에서 하고, 제야의 종소리가 울리는 보신각으로 가서 폭죽을 쏘면서 지수, 지훈이, 힘찬이, 아름이와 즐겁게 한 해를 보냈던 기억이 있다. 이제 모든 것이 잘 될 줄 알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탄핵 위기가 있었고, 그것이 극복되어 총선에서 여당이 압승을 했는데도 다시 세상은 수구를 지지하는 분위기로 돌아갔다. 그것과 맞추어서 형도 다시 변하기 시작했다.

묘역에서 나와서 오른편에 노무현 대통령의 일대기를 그린 그림과 글들이 죽 진열되어 있었다. 형은 노무현에 대해 그 동안 많은 연구를 한 듯하였다. 자세히 보면서 하나 하나 자기 견해를 덧붙여 말했다. 신돌석씨도 새삼 옛일들이 떠올랐다. 처음 노무현 이름을 들은 것은 87년 7,8,9월 노동자대투쟁 때 대우조선 투쟁을 적극 지지하다 구속되게 된 때였다. 검사가 판사 집에까지 찾아가서 영장을 발부해 달라고 졸랐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그때만 해도 그런 노동인권 변호사가 있나 보다 했다.

신돌석씨가 요즘 애들 말대로 노무현에 꽂힌 것은 1988년 가을쯤이었을 것이다. 노동법 개정을 위한 북한산 등반대회를 갔을 때였다. 지지 발언에 나선 노무현 당시 의원은 노동법 개정을 위해 자신이 앞장서고 만약 안 되면 달고 있는 금배지를 팽개쳐 버리겠다고 해서 열광적인 환호를 받았었다. 실제로 그는 그 뒤 노동법 개정이 제대로 안 되자 의원직 사퇴를 했는데 시민단체와 노동단체가 집까지 쳐들어가서 반대하자 사퇴를 철회했었다.

노무현 하면 생각나는 일 중 하나가 5공, 광주 청문회 때였다. 장세동, 정주영을 쩔쩔매게 만든 노무현은 이 청문회들을 통해 일약 청문회 스타로 떠올랐다. 청문회 스타로 떠오른 노무현은 청문회의 마무리로 마련된 전두환 청문회에서 명패를 집어 던졌다. 여야의 타협으로 전두환이 나와서 자기 생각을 읽는 식으로 청문회를 끝내려고 하였다. 그런데 전두환은 자기변명으로 일관했다. 이에 대한 항의로 명패를 집어 던진 것이었다.

▲ [삽화-백소(白笑)]

이날은 1989년의 마지막 날이었다. 형네 집에 가서 형과 함께 한잔하면서 텔레비전에서 중계되는 청문회를 보고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형과 정치에 관한 이야기는 해본 적이 없었다. 신돌석씨의 행적에 대해 우려하는 형이 일장 훈계를 하는 것을 일방적으로 듣는 정도였다. 전두환은 그때까지 백담사에 가 있다가 내려와서는 청문회 참석하고 풀린 것이었다. 그런데 청문회에서 질의도 없이 준비해 온 것을 혼자 읽고는 끝냈다.

전두환이 준비해 온 글을 읽는 도중에 광주 출신으로 시민군이었던 어느 의원이 달려나가는 것이 제지되기도 했다. 그러다가 다 읽고 나갈 때 노무현이 명패를 집어던진 것이었다. 신돌석씨는 말도 안 되는 변명을 늘어놓은 전두환의 행태에 분노가 솟구쳤다. 하지만 형은 달랐다. 형은 박정희든 전두환이든 무조건 추종하지는 않았다. 아니 어느 때는 미워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희한하게도 형은 박정희, 전두환보다 그에 반대해 싸운 김대중이나 재야인사들을 더 미워했다.

청문회장이 술렁거리는 것이 중계되고 그것이 노무현이 던진 명패 때문이라는 것이 방송되고 노무현이 그에 대한 자기 입장을 나와서 말했다. 그러자 형은 못마땅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아무리 그래도 전직 대통령한테 명패를 집어던지는 것이 말이 되냐고 하였다. 그러니까 저런 애들한테 정치 맡기면 안 된다고 하였다. 신돌석씨가 한마디 하려고 하다가 그냥 참았다. 그래 봤자 제대로 이야기가 되리라는 생각이 안 들어서였다. 그리고 그때만 해도 무엇이 옳고 그른지는 알았으나 왜 그런지에 대해 말할 자신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었다.

일대기를 죽 본 뒤 신돌석씨와 형은 부엉이 바위를 한참 올려다 보았다. 눈물이 나올 것 같아서 참느라 애를 먹었다. 그리고는 형을 보니 형도 그런 것 같았다. 잦아들던 비가 다시 쏟아져 내렸다. 묘역 입구에 있는 편의점 앞 평상으로 갔다. 형이 샌드위치와 커피를 싸왔다고 여기서 먹자고 하였다. 둘이 앉아서 그것을 먹었다. 비가 오는데도 사람들이 적지 않게 왔다. 특히 젊은 사람들이 몇몇씩 온 것이 눈에 띄었다.

형이 말했다. 검사들이 대통령이 된 노무현한테 함부로 말하는 걸 보면서 대통령한테도 저럴 정도이니 우리 같은 사람은 말할 것 없지 않느냐는 생각을 했다는 것이다. 도종환 시인이 언젠가 쓴 글을 읽었는데, 가난해서 상고 간 비주류, 죽어라 공부하면 주류가 될 줄 알아서 고시 공부해서 합격했는데 거기서도 비주류, 대통령이 돼도 비주류, 그런 비주류가 군수를 행자부 장관 시키고, 여성을 법무부 장관 시키니 주류들이 속이 많이 상했을 거라고 했다. 형은 왜 진작 자기가 그런 생각을 못했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자신도 철저한 비주류 아니냐는 것이다.

신돌석씨는 노무현을 생각할 때 가장 생각나는 것이 선거 기간 중 장인 문제로 공격을 받았을 때 ‘그러면 장인 때문에 마누라를 버리라는 말이냐’라고 했던 것이라고 하였다. 형은 그때 동감을 표하지는 않았지만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사실 그런 문제가 생기면 대부분 사람들이 변명하기에 바쁘다. 하지만 그는 그렇지 않았다. 정말 신선한 충격이었다. 해방 정국에서 좌익 활동을 한 사람은 수도 없이 많다. 그런 사람을 사돈에 팔촌까지 엮어서 공격거리로 삼는 야만에 대해 정면으로 대응을 한 것이다.

“노무현이 대통령이 된 뒤에 고모가 뭐라고 했는지 아니? 평양에서 자기네 딸이 청와대에 입성했다고 그랬단다. 아버지 좌익 전력 가지고 하는 이야기지. 너도 알다시피 나는 노무현을 찍었어도 그때까지 긴가 민가 했었는데 고모 이야기를 들으니 화가 나더라구. 그때 고모한테 화를 좀 냈었지. 해방 정국을 알 만한 분이 왜 그런 소리를 하냐고 했지. 이제 그런 걸로 시비 걸 때 아니지 않냐구.”

고모가 그랬다는 이야기는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고모는 형과 아무래도 대화를 더 많이 하므로 그런 이야기까지 했던 모양이다. 고모는 나이도 많고, 경상도 출신에, 교회까지 다니다 보니 아무래도 보수적인 생각이 강했다. 하지만 전두환 때까지도 그런 이야기를 잘 하지 않던 고모가 노태우, 김영삼 이후로는 정치적인 문제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면서 만나기만 하면 그런 이야기를 끄집어냈다. 특히 김대중 때부터는 아주 심하게 그랬다. 그리고 그런 이야기는 거의 교회에서 듣고 온 것이었다.

진영역에서 내렸을 때 김원일이 쓴 ‘어둠의 혼’이 생각났었다. 소설의 주인공인 아버지가 고학을 해서 일본 유학을 다녀온 사람으로 해방 전에 야학 등을 하다가 해방 뒤 본격적인 좌익 활동을 하고, 대구 10.1항쟁 때 진영에서 시위를 조직하다가 수배되고, 끝내 잡혀서 지서에서 총살당한 이야기였다. 아버지에 대해 옹호하거나 변호하는 이야기는 전혀 없이 그냥 어린이의 눈에 비친 아버지의 모습을 그리면서 아버지와 함께 했던 추억과 아버지가 왜 그런 일을 했는지 알고 싶은 마음을 전달하는 소설이다.

학생 출신 활동가한테 이 소설을 빌려보고, 신돌석씨는 처음에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 이전까지는 그런 일을 하는 사람이 아들에게 다정다감하게 했을 것이라고 전혀 생각한 적이 없었다. 그리고 이런 소설이 출판돼서 있다는 것 자체가 당시 신돌석씨로서는 의아하게 느껴졌다. 그런 사람이 수도 없이 많았다는 것, 특히 경상도 전라도 지방에 많았다는 것은 충격적이었다. 그리고 어느새 자신도 그때 살았으면 그런 사람처럼 살지 않았을까 생각하게 되었다.

지서에서 총살당한 것에 대해서는 별로 느낌이 없었다. 그런데 그것은 재판에 회부되는 일도 없이 사람을 처형하는 것이고, 그때가 6.25전쟁 전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이미 전쟁은 일어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설명을 들은 뒤 가만 생각해 보니 그게 맞는 것 같았다. 소설 속의 아버지가 항일의식을 가지고 활동을 했고, 해방 되던 날 만세를 불렀다는 것을 떠올리면서 그런데 왜 해방된 조국에서 쫓겨 다니고 즉결처분식 총살을 당해야 했을까를 생각하며 신돌석씨의 생각은 깊어져 갔었다.

그런데 이 고장에서 그 당시 어린 나이였을 사람이 마침내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되었다. 좌익 활동을 했던 사람의 딸을 만나 결혼을 했고, 사법고시에도 합격하여 판사도 되고 변호사도 하였다. 그리고 인권 변호사도 했다. 이런 사람이 대통령이 된다고 하니 화들짝 놀란 사람들이 많았으리라. 그리고는 사람들의 냉전의식을 이용하여 그를 비난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당당하게 맞섰다. 신돌석씨가 기억하는 노무현의 가장 멋진 모습이었다.

▲ [삽화-백소(白笑)]

비가 좀 잦아들자 생가로 올라가 봤다. 대통령의 집 방문은 제한된 사람이 예약을 하고 가는 모양인데 이미 예약이 만료되었다. 생가는 방이 달랑 두 개이고, 부엌이 옆에 붙어 있고, 오른쪽에 헛간이 있었다.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는 것이 생가를 보면 느껴졌다. 노무현의 아버지가 어떤 사람인지 신돌석씨는 알지 못하지만 이런 집에 살았으면 빈농이었을 것이다. 그 아들인 노무현의 눈에 비친 해방 정국이나 전쟁 기간이 어떠했을지는 짐작할 수 있었다.

신돌석씨는 누구의 생가를 볼 때마다 드는 생각이 있었다. 그래도 생가가 남아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이냐? 신돌석씨 자신은 생가가 오직 본인의 기억 속에서만 희미하게 남아 있다. 외가처럼 이북에서 내려온 사람, 자기 고향이 댐 건설 등 때문에 수몰지구가 된 사람, 대규모 공단 등이 들어서서 사라져 버린 사람 등 고향을 잃은 사람들이 수없이 많지만, 도시 출신들은 대개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면서 고향이 사라졌고 신돌석씨 역시 그랬다.

건너편으로 가서 봉하밥상이란 곳에서 막걸리를 마셨다. 이곳 특산물인 듯한 안주를 먹었다. 형이 같이 와줘서 고맙다고 하면서 꼭 한번은 와서 미안하다고 하고 싶었다는 말을 다시 했다. 다시 비가 많이 쏟아 붓기 시작했다. 버스가 한 시간에 한 대씩 있다고 식당 주인이 알려주었다. 열차는 아직도 세 시간 정도 남아 있었다. 비가 와서 그런지 식당 안에는 주인과 잘 아는 사람들 몇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뿐이었다.

봉하밥상은 대로변에서 한층 밑으로 내려온 곳에 있었다. 비탈에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지하는 아니었다. 하지만 대로가 있는 쪽은 보이지 않았다. 버스가 올 시간이 되었다. 신돌석씨가 술값을 내려고 나가니 형이 말렸다. 자기가 오자고 했으니 자기가 내겠다고 하였다. 대로 쪽으로 올라가니 버스가 와 있었다. 형이 아직 시간이 많으니 한 잔 더 하자고 했다. 그래서 아까 꽃을 샀던 가게에서 캔 맥주를 샀다.

비가 세차게 내렸다. 형은 신돌석씨더러 너만은 공부해서 뭐라도 되었으면 했다고 하였다. 신돌석씨가 웃으면서 그런다고 지금과 뭐가 달라졌겠냐고 했다. 대학 갔으면 학생운동 하지 않았겠냐는 말이었다. 형이 웃으면서 그렇다고 한 뒤 공장 여기저기 떠돌 때는 속이 상했는데 그래도 노동운동도 하고 대견하다고 하였다. 형으로서는 신돌석씨가 대단히 불안했을 것이었다. 물론 형은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버스가 왔다. 가는 길이 30분 이상 걸린다고 한다. 돌아서 가기 때문이란다. 공단을 거쳐서 갔다. 그다지 큰 공단은 아닌데 버스가 정차할 때마다 외국인 노동자들이 탔다. 이제 정말 생산직의 상당수는 외국인 노동력을 써야만 하는 세상이 된 걸까? 신돌석씨는 20여 년 전에 외국인 노동자 실태조사 아르바이트를 했던 기억이 났다. 그때 봤던 많은 외국인 노동자들이 떠올랐다. 이들도 형이 중동에 갔듯이 자기네 나라에서 받는 봉급보다 훨씬 많은 돈을 받기 때문에 오는 것이겠지.

진영역에서 내린 뒤 우동 파는 곳이 있으면 먹으려고 했는데 없었다. 할 수 없이 서울역에 도착해서나 먹자고 하였다. 형이 이제 마음이 편해졌다고 하면서 자기 같은 사람이 없어야 한다고 하였다. 신돌석씨는 형처럼 정직하게 사는 사람은 자기 성찰을 하고, 생각과 행동을 바꾸니 훌륭한 거라고 말했다. 이건 형을 단순히 위로하거나 하는 말은 아니었다. 실제로 형의 변화 과정에서 신돌석씨는 놀라운 마음이 들었다.

한 사람이 자기 생각을 바꾼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더욱이 과거에 자기가 가졌던 생각이 잘못이었다고 인정하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자기를 합리화하려고 온갖 개똥철학을 동원하는 것이다. 이전에는 그런 짓은 지식인들이 한다고 들었는데 그건 아닌 것 같았다. 지식인이고 아니고를 따질 것 없이 인간 누구나가 그러려고 한다. 지식인들이 그 정도가 더 심할 뿐이지.

그런데 형은 과감히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생각과 행동을 바꾸었다. 그러한 변화는 노무현을 대선에서 찍었을 때보다 그 뒤 노무현이 이명박 정권으로부터 박해를 받고, 결국 스스로 저 세상 사람이 될 때까지의 과정이 더 놀라운 것이었다. 대선의 과정에서 여러 가지 혼란과 자책감 등으로 노무현을 선택했어도 형은 여전히 갈등을 했던 것 같다. 그럴 수밖에 없을 만큼 이전에 군사독재로부터 주입된 내용은 강렬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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