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석근 / 시인

 

필자의 말

안녕하세요?
저는 아득히 먼 석기시대의 원시부족사회를 꿈꿉니다.
사람과 사람, 사람과 천지자연이 하나로 어우러지던 눈부시게 아름답던 세상을 꿈꿉니다.
인류는 오랫동안 그런 세상을 살아왔기에
지금의 사람이 사람을 죽이고, 천지자연을 황폐화시키는 세상은 오래 가지 않으리라 믿습니다.
또한 우리에게 지금의 고해(苦海)를 견딜 수 힘이 있으리라고 믿습니다.
저는 그 견디는 힘으로 ‘詩視한 세상’을 보고 싶습니다.
원래 시인인 ‘원시인’의 눈으로 보면 우리는 이 참혹한 세상에서 희망을 볼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소유적 인간’은 자기가 가진 것에 의존하는 반면, ‘존재적 인간’은 자신이 존재한다는 것, 자기가 살아있다는 것, 기탄없이 응답할 용기만 지니면 새로운 무엇이 탄생하리라는 사실에 자신을 맡긴다.

                                                            - 에리히 프롬,『소유냐 존재냐』에서 


 청와대 수석들이 일제히 사표를 냈단다. 헉! 그 높은 자리보다 돈이 좋다니! 집이 두 채 이상 있는 수석들에게 집 한 채를 처분하라고 했더니, 집이 아니라 자리를 차버리는 것이다. 

 한 채를 팔아도 전체 재산에서 그렇게 크게 손실은 나지 않을 텐데, 손익계산서에서 자리를 버리는 쪽을 선택했구나!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은 결국 세 가지다. 돈, 권력, 명예. 그 중 하나만 가져도 소위 출세 한 거다.      
 
 그런데 그 중에서 어느 것이 가장 좋을까? 우리는 돈이 없어도 초야에 묻혀 사는 고고한 선비를 사랑했었다. 그는 돈, 권력이 없어도 명예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를 청빈한 삶으로 볼까? 아니면 궁핍한 삶으로 볼까?

 여러 애경사나 모임에서 출세했다는 청와대 수석이 왔는데, 금일봉을 내놓지 않고 가면 우리는 그를 고매한 인품으로 볼까?      

 나는 한평생 가난하게 살던 한 재야 인사가 지지자들의 헌신적인 도움으로 국회의원이 되었을 때, 그에게서 돈 봉투를 받으려는 등산모임 사람들을 본 적이 있다. 아, 성금을 내야 할 사람들이 그에게서 돈을 뜯어내려하다니!   
  
 나는 ‘나의 길’을 찾고 싶어 잘 다니던 직장을 버리고 한동안 ‘자유인’으로 산 적이 있다. 내 인생에서 가장 신나던 시절이 아니었을까? 

 그때 내 고향 상주 도서관에 강의를 간 적이 있다. 나는 신이 났다. 오, 고향에 가는구나! 강의는 내 가슴을 충만하게 했다. 강의의 열기를 가득 안은 채, 자전거를 타고 마구 달렸다. 그러다 길가의 농기구 상회의 창으로 한 후배를 보았다. 저 녀석이 농기구 가게를 하는구나.

 나는 설레는 마음으로 가게를 들어섰다. 그는 나를 멀뚱히 바라보았다. 나는 오랜만에 만난 그에게 반갑게 악수를 청했으나 그는 마지못해 손을 내미는 것이었다. ‘이 녀석이 내게 무슨 오해가 있었나?’   

 그 뒤 나는 그의 속마음을 전해 들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단다. “그 형은 왜 그 좋은 직장을 그만두었는지 모르겠어. 조용히 다니면 교감 교장도 하고 나중에는 연금도 받는데, 모두지 이해를 못하겠어.” 

 나는 그 당시의 삶이 너무나 신났는데, 남들에게는 그렇게 비쳤구나. 나는 그 후 그런 부류들과는 일부러 멀리하고 지냈다. 나는 ‘천상천하유아독존’이니까! 

 그 당시 내가 읽은 책이 에리히 프롬의 ‘소유냐 존재냐’였다. 인생의 경험이 쌓이며 다시 읽은 그 책은 내 귀에 대고 속삭였다. ‘너는 어떤 삶을 살 거니?’ 
 
 나는 그 당시 칼 마르크스가 말한 ‘당신이 덜 존재할수록 그리고 당신의 삶을 덜 표출할수록, 당신은 그만큼 더 많이 소유하게 되며, 당신의 소외된 삶은 그만큼 더 커진다’는 것을 체험으로 뼈저리게 알았다. 
    
 나는 자연스레 존재양식의 삶을 지향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렇다고 모든 소유를 내려놓고 깡촌에서 오두막을 짓고 산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아직 내 몸엔 속세의 때가 너무나 많이 더덕더덕 묻어 있으니까. 

 하지만 적어도 ‘소유양식의 삶’은 떨쳐버릴 수 있었다. 거기엔 행복이 없으니까. 거기엔 오로지 허망한 쾌락밖에 없으니까. 

 나는 ‘내가 살아있다는 것, 기탄없이 응답 할 용기만 지니면 새로운 무엇이 탄생하리라는 사실’에 나를 맡겼다.

 시인 랭보는 보리밭을 걸으며 지고의 행복에 이른다. 


 검푸른 빛으로 짙어가는 여름의 해질녘,
 보리까라기 쿡쿡 찔러대는 오솔길로 걸어가며 잔풀을
 내리 밟으면
〔......〕
〔......〕
 한없는 사랑은 영혼에서 솟아나리니
 나는 이제 떠나리라. 방랑객처럼
 연인을 데리고 가듯 행복에 겨워, 자연 속으로.
                                           
                                                 - 랭보,《감각》부분

  
 혼자 걸어도 그는 연인과 함께 간다. 우리 마음속의 ‘아니마’이리라. 그의 마음속의 여성이 다 깨어났으니 그는 온전한 인간. 

 우리는 쉽게 말한다. “나 행복해!” 하지만 그건 행복이 아니라 행복감이다. 행복은 경지다. ‘존재양식의 삶’만이 이르게 되는 경지.

 

저작권자 © 통일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