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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공산주의운동의 동향②<연재> 임영태의 ‘다시 보는 해방 전후사 이야기’(19)-제1부 해방 전야(17)
임영태  |  ytlim2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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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20.09.07  01: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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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영태 / 출판기획자 겸 역사교양서 저술가
 

올해 2020년은 광복(또는 해방) 75주년이자 6.25전쟁(한국전쟁) 발발 70주년이 되는 해이다. 우리에겐 해방이 곧 분단이었으니 분단 75주년이기도 하다. 왜 우리는 3/4세기 동안이나 분단된 상태로 살아야 했던가? 왜 우리는 해방과 함께 분단이라는 있을 수 없는 상황을 맞아야 했던가? 우리는 왜 해방 3년 만에 두 개의 정부가 수립되고 마침내 5년 만에 전쟁이라는 참화를 겪어야 했던가? 이러한 물음에 대한 답은 해방 전후사에 들어 있다. 해방 75주년, 한국전쟁 70주년의 해에 해방 전후 역사를 다시 돌아보는 이유다. 이 연재는 매주 월요일에 게재된다. / 필자 주

 

이재유 그룹의 노동운동과 공산당 재건운동

국내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이재유그룹’의 활동이다. 이재유는 1930년대 한국 공산주의 운동과 노동운동에서 가히 ‘전설적인 인물’이라 할 수 있다. 김삼룡, 이현상, 정태식, 이관술, 이금순, 박진홍 등은 1939년 박헌영을 중심으로 결성된 경성콩그룹의 핵심이었고, 해방 후에는 조선공산당의 핵심인물로 활동했다. 1930년대 이 쟁쟁한 지하 혁명가들을 이끈 사람이 바로 이재유였다. 그러나 이들의 지도자였던 이재유는 해방을 1년도 채 안 남긴 1944년 10월 26일 청주보호교도소에서 옥사했고, 그 때문에 박헌영, 이현상, 김삼룡, 이관술 등과는 달리 오랫동안 잊힌 존재가 되었다.

1990년부터 이재유에 대한 연구 논문들과 단행본, 소설 등이 나오면서 지금은 상당히 널리 알려진 존재가 되었는데, 매우 후한 평가 점수를 받는 혁명가로 인정받고 있다. 김경일 교수는 “이재유는 20년대의 공산당운동에 전혀 참가하지 않았다(주1)가 30년대 뒤늦게 활동을 시작했으나 노동운동을 중심으로 한 직접적인 실천을 통해, 20년대 중반 이미 지도자적 위치를 확보하고 있던 박헌영보다 강력하고 탁월한 지도력을 인정받은 것으로 보인다”고 평가했다.(주2)

1905년 8월 28일 함경북도 삼수군에서 태어난 이재유는 12살 무렵까지 고향에서 조부에게 한문을 배웠다. 1920년 공부를 더 하고 싶은 욕심에 아버지가 친척에게 갚으라고 들려 보낸 돈을 갖고 무작정 상경한 그는 1925년 개성에 있는 송도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으나 송도고보에서 사회과학연구회를 조직, 동맹휴학을 주동하다가 1926년 11월 퇴학을 당했다. 이재유는 1927년 일본으로 건너갔고, 신간회 동경지회, 동경노동조합에서 활동하는 등 본격적으로 사회운동과 노동운동에 발을 들여놓았다. 1928년 조선공산당 일본총국 중앙위원, 고려공산청년회 일본총국 선전부장을 맡았으며, 도쿄에서 생활하는 동안 경시청과 경찰서 등에 70여 차례나 검속될 정도로 맹렬하게 활동했다. 그는 제4차 공산당 사건으로 1928년 8월에 체포되어 3년 6개월의 형을 선고받았다.

이재유는 1932년 12월 경성형무소에서 만기 출옥한 뒤부터 서울과 인천 등지에서 본격적으로 노동운동을 전개하였고 1933년부터 본격적으로 당재건운동을 이끌었다. 이재유는 1936년 12월 25일 일제 경찰에 체포될 때까지 놀라운 활약을 펼쳤으며, 그 때문에 그에 대해서 ‘당대 최고의 혁명가’라는 찬사가 뒤따랐다.

이재유는 당시 국제주의 노선과 달리 국내 상황에 근거한 자주적인 노선을 중시하였다. 이재유는 조선의 현실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과 그에 기초한 창조적인 운동방침, 운동노선이 필요하다고 보았고, 이른바 ‘국제선의 권위’에 대해서도 비판적이었다. 그는 운동 과정에서 이론과 실천의 결합을 강조하였으며, 특히 실천적 운동에서 탁월한 능력과 지도력을 발휘하였다. 그는 특히 이 시기 사회주의자들 중 일부가 민족문제를 경시 내지는 무시했던 것과 대조적으로 민족문제를 운동의 중심에 두어 사고하고 행동했다. 그는 혁명적이었던 만큼 민족적이었고, 민족적이었던 만큼 민중적이었다.(주3) 이재유가 이끈 그룹은 ‘경성트로이카’(1934.9) -> ‘경성재건그룹’(1934.11) -> ‘조선공산당재건경성준비그룹’(1936.10) 등으로 명칭을 바꾸며 노동현장에 바탕을 둔 당재건 활동을 전개했다.

   
▲ 1930년대 노동운동과 공산당 재건운동의 신화적 존재였던 이재유와 그의 동지들. 큰 사진부터 시계 방향으로 이재유, 박진홍, 이순금, 이효정, 이관술, 김삼룡, 이현상. 이재유는 옥사했고, 그의 동지들은 박헌영과 함께 경성콩그룹의 핵심으로 활동했으며 해방 후까지 조선공산당의 주요 핵심을 형성했다.

1932년 12월 출옥 후 이재유는 이인행의 집에 머물면서 많은 운동가들을 만났다. 그는 동지들과 함께 정세를 분석하고 운동 방침을 세우는 일에 몰두했다. 이재유는 이때 기존의 운동 방식에 대해 비판하고 새로운 방안을 찾았다. 그는 이론을 앞세워 인텔리들이 노동대중 위에 군림하면서 일방적으로 지도하려는 행태에 지극히 비판적이었다. 그는 만나는 사람마다 직접 노동자가 되어 공장으로 들어가 활동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운동가는 노동자가 되어 직접 대중 속에 들어가 대중적 기반을 마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재유는 당이 살아 있으려면 노동대중에 깊이 뿌리를 내려야 하고, 활동가들이 직접 공장으로 들어가 노동대중을 조직해야 한다고 보았다. 이재유의 지도에 따라 김삼룡, 이성출, 변홍대, 안병춘 등이 노동현장에서 조직을 결성하기 시작했다. 그러한 노력 끝에 1933년 9월 마침내 이재유를 중심으로 하는 ‘경성 트로이카’가 결성되기에 이르렀다.(주4)

트로이카는 “각각의 운동자가 자신의 자유의사에 따라 개인적으로 접촉하고 대중을 획득하여 상당한 그룹이 만들어질 때 비로소 조직을 만든다”는 원리에 기초한 조직 방식이었다. 그것은 모든 활동가들이 동등한 권리를 갖고 자신과 조직의 운명을 결정하고 그 결정에 따라 실천하는 개방적이고 민주적인 방식이었다. 이는 당시 지배적인 조직 방식이었던 오르그(organizer)에 의한 중앙집중의 하향식 조직 방식과는 대조적이었다. ‘민주집중제’가 현실에서는 민주적 요소는 무시된 채 일방적인 내리먹이기식의 집중만 강조된 것을 비판적으로 바라보았던 것과 무관하지 않았다.(주5)

‘경성 트로이카’는 경성(서울)을 중심으로 한 현장 중심의 혁명적 노동운동 조직이었다. 그것은 노동대중의 자발성과 자주성을 최대한 존중한 것이었다. 이재유가 이런 조직 방식을 택한 것은 그의 운동에 대한 주체적 사고 때문이었다. 그는 코민테른을 비롯한 국제 혁명조직이 식민지 조선의 운동에 대한 체계적이고 일관된 방침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고 보았고, 그 때문에 국제선의 권위를 내세우는 운동가들에 대해서도 별로 신임하지 않았다.(주6) 이러한 사고 때문에 그는 기존의 파벌 중심의 운동에 대해서도 비판적이었다. 경성트로이카 또한 하나의 파벌라면 파벌이라고 할 수 있었으나 이는 아래로부터 대중을 조직하는 데서 시작한다는 점에서 기존의 파벌 또는 정파와는 달랐다.(주7)

   
▲ 경성트로이카 조직도(http://blog.daum.net/bgtkfem/1537)

‘경성트로이카’가 조직되면서 섬유, 화학, 금속 등 주요 공장에서 대중의 불만을 파업으로 이끌어내고 지역의 연대파업으로 확장하는 노력들이 진행되었다. 1933년 하반기 편창제사, 중앙상공회사, 소화제사, 고려 고무회사, 동명고무회사, 조선견직, 서울고무, 종연방직, 경성제사, 용산공작소 영등포 공장 등 서울의 주요 기업에서 연쇄적으로 파업이 일어났다. 이처럼 노동자들의 투쟁이 연속적으로 일어나자 위협을 느낀 일제는 파업 주모자에 대한 강력한 탄압과 함께 그 배후 색출에 혈안이 되었고, 이현상, 안병춘 등 1차 경성트로이카 사건으로 200여명에 검거되기에 이르렀다. 1934년 1월 이재유가 체포되면서 경성트로이카 운동은 사실상 막을 내렸다.

‘당대 최고의 혁명가’로 평가받는 1930년대 좌익운동의 신화

일제는 체포된 이재유에게 갖은 고문을 다했는데, 국제선과 연락하여 전국 조직을 결성하려 했다는 자백을 받아내기 위해서였다. 1934년 3월 어느 날 이재유를 감시하던 간수가 졸고 있는 틈을 타 탈옥을 시도, 실패했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고 2번째 탈옥을 시도해 성공했다. 고문으로 불편한 몸을 이끌고 탈출한 이재유는 경성제대 미야케 시카노스케(三宅鹿之助) 교수의 집에 숨어들었다. 이재유는 미야케 교수의 집 아래 토굴을 파고 한 달가량 숨어 지냈다. 그러나 1934년 5월 17일 경성제대의 조수였던 정태식이 검거되면서 미야케 교수도 21일 검거되었다. 미야케 교수는 ‘취조를 하루만 연기해 주면 정신을 수습해 자백서를 쓰겠다’고 해 시간을 번 다음 22일 탈출한 이재유가 자신의 집에 있다는 사실을 실토했다. 일경이 집을 덮쳤을 때 이재유는 미야케 교수의 집을 탈출한 뒤였다.

여기서 미야케 시카노스케에 대해서 간략히 살펴보고 넘어가자. 미야케는 1899년 일본 오사카에서 태어나 동경제대 경제학부를 졸업하고 호세이(法政)대학 경제학부에서 재정학과 경제학을 강의했다. 그는 대학시절 마르크스 경제학에 빠졌고 사회주의자가 되었다. 그는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대만에서 보내면서 식민지에 대한 연대감을 형성하게 되었고, 조선에 대해서 같은 감정을 가졌다. 1927년 4월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조교수로 부임한 그는 이강국, 박문규, 최용달 등 조선인 학생들을 가르쳤는데 조선인 학생들이 만든 경제연구회의 지도교수를 맡았다. 그는 이미 조선 학생들에게 “단도직입적인 맑시스트” 교수로 널리 알려졌다. 미야케는 1929년 2월부터 1931년 4월의 2년 남짓한 기간동안 독일, 프랑스, 영국, 미국에서 연구활동을 했는데, 1929년 3월부터 1930년 5월까지 베를린에 머물려 독일공산당이 주도한 고양된 혁명적 분위기를 흠뻑 섭취했다. 이때 일본의 저명한 공산주의자로 유럽과 러시아에서 활동하던 가타야마 센, 구니사키 데이 등과 교류했으며, 이들과 1929년 7월 말에는 제2회 국제반제동맹대회에 일본 대표의 일원으로 참석하기도 했다.(주8)

조선에 돌아온 그는 조선 공산주의 운동의 현황을 독일공산주의자들에게 전하거나 거꾸로 독일의 상황을 조선에 전하기도 했다. 또한 그는 1930년 9월에 조직된 조선사정연구회를 지도하면서 조선인 졸업생이나 조수, 학생들과 함께 자료수집, 독서회 등을 하면서 합법·비합법 영역에서 활동하고 있던 수많은 조선인 운동가들을 만났다. 그는 대학의 경제연구회를 중심으로 한 이강국, 박문규, 최용달, 정태식 등과 함께 서울의 혁명적 노동운동을 주도하던 이재유 그룹과 국제선의 권영태 그룹 성원들, 형평전위동맹 활동가 이남철 등을 만났다.(주9)

미야케가 이재유를 만난 것은 1933년 겨울 동숭동의 대학관사에서 경성제대 조수였던 정태식의 소개를 통해서였다. 1930년대 전반 서울에서 혁명적 노동운동을 주도하던 양대 그룹이었던 이재유와 권영태 조직의 연결은 그를 통해서 가능했다.(주10) 미야케는 1934년 1월 중순까지 5, 6회 정도 이재유와 만나 노동운동을 중심으로 한 조선공산주의운동의 당면 임무를 팸플릿 형태로 정리하였다. 이 논의는 이재유가 1934년 하순 경찰에 체포됨으로써 일시 중단되었고, 3개월 후 4월 중순경에는 서대문경찰서를 탈출한 이재유가 경찰의 추적을 따돌리고 동숭동의 미야케 관사로 숨어들었다. 미야케는 이재유를 자신의 응접실에 딸린 다다미 방 아래에 삽으로 굴을 파고 그 아래 숨겨주었다. 이재유는 굴 안에 있는 동안 미야케와 중단된 운동 방침에 대한 논의를 진행했으나 1934년 5월 21일 미야케가 경찰에 검거됨으로써 끝났다. 미야케는 1934년 12월 27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과 출판법 위반, 범인 은닉죄로 3년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하던 중 전향서를 쓴 것이 고려되어 1936년 12월 25일 가출옥하였다. 미야케는 1935년 1월 9일자로 대학에서 면직되었고, 출옥 후 명동에서 ‘가메야(龜屋)’라는 고서점을 열었으나 1937년 1월 일본으로 돌아가서 고물상과 신문판매점 등으로 생계를 유지하며 종전 때까지 특고의 감시를 받았다.(주11)

한편, 미야케 집을 탈출해 경찰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1934년 8월부터 이재유는 경성트로이카에서 학생부문을 담당했던 박진홍과 신당동 아지트에서 동거하면서 조직의 재건에 들어갔다. 그는 박진홍을 통해 동료들과의 연락관계를 재개하는 한편, 이관술, 박영출 등과 운동 방침을 세워나갔다. 10월 일제 경찰은 이재유의 활동 단서를 포착하고 공성회 등 다수의 운동가를 검거, 고문을 가했으나 끝까지 조직의 비밀을 지켰다. 일제는 체포된 사람들을 모두 석방하고 뒤를 추적, 체포하기로 작전을 바꿨다.

1935년 1월 4일 이인행이 검거되었고, 그 열흘 뒤에는 박진홍도 동료를 만나러 갔다가 경찰에 체포되었다. 거주지를 떠난 이재유는 박진홍의 검거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박영출을 신당동 아지트로 보냈으나 잠복중인 경찰에 체포되고 말았다. 박영출은 모진 고문에도 침묵으로 일관했고, 임신 중이었던 박진홍은 이재유의 도피 시간을 벌어주기 위해 가혹한 고문에도 거처를 말하지 않고 버티었다. 그해 여름 박진홍은 서대문형무소에서 아이를 출산했다. 아이의 이름은 철창에 한이 맺혔다는 의미로 ‘철한’이라고 지었으나 2년만에 죽었다.(주12)

이관술과 함께 박영출의 아지트를 빠져나온 이재유는 병으로 누워 있던 유순희를 구출해 도주, 잠적했다. 이재유와 이관술은 농부로 변장해 중량천 제방에 팸플릿 등 비밀서류를 모두 묻었다. 이들은 삼각산에서 하룻밤을 자고 당시 양주군 노해면 공덕리(지금의 도봉구 창동)에 수재민으로 가장해 정착했다. 일제는 이재유를 잡기 위해 경찰에 총동원령을 내리고 삼엄한 경계를 폈다. 경성의 5개 경찰서 3천여명의 경관이 동원되어 경성 시내와 자하문밖, 왕십리, 신설리, 신당리 일대를 이 잡듯 뒤지고 철도와 도로편까지 경계했으나 이재유의 흔적은 오리무중이었다. 그 사이 서울 외곽에 자리잡은 이재유는 농민의 문맹을 깨우치는 농촌지도자로 변신해 주민들의 신망과 존경을 받는 존재로 활동하였다. 그는 서울 출입이나 동료들과의 연락이 자유롭지 못한 상황에서 당 재건 운동을 위한 수단으로 정치신문과 출판물을 발행하기로 했다. 이재유는 정치신문과 출판물을 활동가와 현장 대중에게 배포하여 조직 건설의 도구로 삼으려 했던 것이다.(주13)

   
▲ 이재유의 도피를 도와주었던 경성제대 미야케 스카노스케 교수 체포 소식이 실린 동아일보(1935.8.24.자) 보도.

이재유는 경성재건그룹, 트로이카그룹 등에서 활동했던 운동가들을 모아 ‘조선공산당재건 경성준비그룹’을 결성했다. 이와 함께 전국적 정치신문인 <적기> 1~3호를 1936년 10월부터 12월까지 발행했다. 이재유는 <적기>를 통해 노동자들이 쟁취해야 할 목표를 제시했다. 그러나 그러한 목표는 1936년 12월 25일 그가 체포됨으로서 실현되지 못했다.

체포 후 약 4개월간의 혹독한 고문취조를 거쳐 이재유는 1937년 4월 23일 서대문 형무소로 이감되었다. 1942년 그는 징역 6년의 형기가 만료되었으나 석방되지 않았다. 1941년 일제는 치안유지법을 개정해 예방구금제도를 신설했는데 이재유가 전향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석방하지 않고 청주보호교도소에 다시 수감했던 것이다. 고문 후유증과 각기병이 심해진 이재유는 해방을 불과 10개월 앞둔 1944년 10월 26일 옥사했다. 만 39세였다.

이재유는 오늘날 일제 강점기 한국 노동운동, 공산당 재건운동의 신화로 남아 있다. 그의 “영웅적 활동은 지하혁명운동 사상 최고의 기록을 우리 민족의 기억에 남겼다”라고 평가되기도 하고, 그는 “당대 최고의 혁명가” 또는 “30년대 좌익운동의 신화”라는 평을 듣기도 한다. 그에 대한 이같은 평가가 해방 전 옥사했기 때문에 ‘신화화’된 측면도 있을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옥사한 많은 이들 중에서도 이런 평가를 받는 인물이 드물다는 점을 감안할 때 결코 그에 대한 평가가 과도한 것만은 아니라고 볼 수 있다.

   
▲ 일제의 주요 감시대상 인물카드의 이재유. 32세 때인 1936년 12월 26일 형사과에서 작성했다.(사진=국사편찬위원회)
   
▲ 신출귀몰했던 이재유 등 간부 17명 공판 회부 소식을 전하는 1938.2.18.일자 동아일보 기사.

이재유그룹의 활동을 이어받은 ‘경성콩그룹’

이재유그룹의 뒤를 이어 활동을 전개한 것은 ‘원산그룹’으로 1936년부터 1938년까지 활동하였다. 원산그룹을 이끈 대표주자는 이주하로서, 그는 1936년 10월 적색노동조합 준비기관, 1938년 4월 적색노동조합원산좌익위원회, 1938년 7월 철우회(鐵友會) 등 혁명적 노동조합운동을 지도하는 한편, 조선공산당 재건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원산좌익위원회가 조직을 확대하던 중, 1938년 10월 일제 경찰에 발각되어 조직원 110여 명이 체포된 것을 비롯하여 1939년 7월말까지 375명의 관련자가 구속되었다. 체포를 면한 이주하는 흥남·원산·평양·진남포 등 공장지대에 잠입하여 해방될 때까지 반전·반일사상을 고취하였다.(주14)

이재유가 감옥에 있는 동안 그가 하던 일을 이어간 이는 이관술이었다. 이관술은 여동생 이순금과 함께 1939년 충주에서 김삼룡을 조직자로 초청하였고, 당시 서울에 있었던 장순명, 권오직, 김섬(金暹, 일명 ‘김수남’), 이현상 등과 협의해 ‘경성콩그룹’을 조직했다. 이관술은 자신이 이미 ‘경성공산주의자그룹’이라는 이름을 썼는데, 박헌영이 기관지를 직접 편집하면서 공산주의자를 ‘콤’으로 바꾸었을 따름이라고 했다.(주15)

그런데 사실은 ‘경성콩그룹’이란 명칭은 코민테른에서 파견된 권영태 등의 활동을 ‘정통노선’으로 인정하여 “조직체로서는 이르지 않았지만 ‘경성공산주의자그룹’의 이름”을 ‘인계하여’ 사용한 것이었다.(주16)

   
▲ 해방 후 남로당 총책으로 활동하던 김삼룡과 이주하 체포 소식을 전하는 신문보도(동아일보 1950.4.1.)

한편, 권영태는 1908년 함남 홍원 출신으로 ‘코뮤니스트그룹’ 채규항의 지도를 받으며 공산당재건운동에 참여하였는데, 1932년 12월 러시아에서 공산대학을 졸업하고 조선공산당 재건설의 사명을 띠고 국내로 잠입했다. 그의 활동에 대해서 동아일보는 다음과 같이 보도하고 있다.

“(권영태는) 우선 경성을 중심으로 활동을 개시하여 인텔리층·학생층·노동자층으로 동지를 얻어 마침내 경성적색노동조합을 조직해서 조선공산당 재조직으로 비약할 플랜 아래 인텔리층으로는 경성제대 조수 정태식과 그의 소개로 경성제대 미야케(三宅鹿之助) 교수를 획득하고 경성을 중심으로 종방(鍾紡: 종연방적)을 비롯하여 제사공장 고무공장 등 직공은 노동자측에서 얻고 학생층으로 각 전문 중등학생을 얻어 활동을 개시하였다. 한편 북평(北平)에서 김원봉이 세운 레닌학교 출신으로 김원봉의 밀령을 받고 잠입한 권인갑 등과 만나게 되고 또 권인갑 등은 강릉에 가서 일본 전협(全協)계로 조선공산운동의 기초공작에 맹렬한 활동을 전개한 최선규 등과 만나게 되었다. 이들은 비록 각기 그 배경이 다다르고 사명을 받은 지도계통이 다를지라도 일국일당원칙 아래 같이 악수하고 활동하기로 되어 ‘조선공산당 재건설 동맹’의 깃발 아래서 각기 지역별로 또는 계급별로 분담하여 활동을 개시하여 권영태는 경성을 중심으로 권인갑은 강릉으로 가서 전협계의 최선규와 손을 잡고 활동을 했다.”(주17)

이재유그룹과 권영태그룹은 경성제대의 정태식, 미야케 등의 주선으로 제휴를 모색하였으나 정태식이 체포되고 이재유가 도피, 행적을 감추면서 성사되지 못하였다. 이재유는 권영태가 일제경찰에 체포되고 조직이 와해된 다음 일부 운동가를 합류시켜 ‘재건경성준비그룹’을 조직했던 것이다.

   
▲ 일제의 권영태 감시 카드(사진=국사편찬위원회)

이재유가 체포되어 감옥에 있는 동안 이관술과 이순금은 조직을 결성하면서 김삼룡을 조직자로 영입했던 것처럼 능력있는 지도자를 찾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1933년 7월 상해에서 일제경찰에 체포되어 치안유지법 위반혐의로 징역 6년을 선고받고 복역중이던 박헌영이 1939년 9월 만기출소하게 되면서 그를 지도자로 영입하였다. 경성콩그룹의 지도자가 된 박헌영은 경성콩그룹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1932년 1월 조선공산 재건 준비 사업을 위해 코민테른에 의해 상해로 파견되었다. 상해에서 김단야와 함께 조선공산주의운동 기관지 『꼼무니스트』를 발행했으며, 이 잡지는 1933년 7월까지 발간되었다. 내가 일본 경찰에 다시 체포되고 나서는 1939년까지 감옥에 있었다. 출옥 후 1939년 9월에 이관술이 지도하는 서울의 지하 공산당조직과 관계를 맺었다.(주18) 그때에는 민족주의운동과 공산주의운동을 막론하고 지난날 지도자들은 혁명운동을 거부하고 있었다. 공산주의운동에 충실하고 혁명사업을 지속한 유일한 단체는 바로 이관술과 김삼룡이 지도하는 그룹이었다. 이 그룹에 들어간 나는 그 지도자가 되었다. 조직은 서울·○○·청진 노동자들 사이에서 선동을 했다. 나는 이 조직에서 발간된 잡지 『꼼뮤니스트』를 지도했으며 당 재건 준비사업을 실행에 옮겼다. 1939년에 이미 나는 비합법 상태에 처하게 되었다.”(주19)

이재유그룹과 권영태그룹 등 여러 조직을 통합한 경성콩그룹

경성콩그룹의 탄생 및 자신의 참여 과정에 대한 박헌영의 좀 자세하지만 약간 뉘앙스가 다른 증언도 있다.

“재건콤그룹은 1937년~1938년에 걸쳐 이재유와 권영태 동무들을 중심으로 경성과 인천에서 일하고 있었으며,(주20) 1939년에 대전에서 내가 출옥하여 그 동무들을 만났을 때 나더러 일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리하여 일하기로 결심하고 동무들의 조직은 무엇이냐고 물으니 '경성콤그룹'이라 해서 나도 그 이름이 좋다고 했다. 내가 모스크바에 있을 때 김단야·김정하·조두원·권오직·고명자·박용선 이외에 20여 동무들이 중심이 되어 ‘조선공산당 재건위원회’를 가졌었는데,(주21) 그것을 연상하여 8·15 후에 경성콤그룹을 재건위원회라고 개칭하였다. 내가 상해에서 나왔을 때 교양 사업으로 까들(당간부) 양성에 힘쓰다가 조선에 오게 되었다. 국내에서 재건운동은 늘 있었으니 이것은 다른 동무들이 일을 안했다는 것이 아니다. 조선에 나와 보니 권영태 동무와 이재유 동무가 싸우고 있었다. 그 싸움의 원인은 권영태 동무가 국제 오르그(조직·조직가)라고 주장한데 있으며, 그것은 확실히 권영태 동무가 옳지 못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1939년 내가 대전에서 나왔을 때 '경성콤그룹'이 있음을 알고 그 속에 들어가 일했다.”(주22)

조직체계를 완성한 후의 경성콩그룹의 간부는 지도자 박헌영, 조직부 김삼룡·장규경, 기관지부 박헌영, 기관지 출판부 이관술·김순룡, 인민전선부 김태준·정태식·이현상, 노동부 김삼룡, 가두부 이남래·김한성·이종갑, 학생부 조재옥·김순원·김영준, 일본학생부 김덕연·고우도, 함경남도책임 김섬, 함경북도책임 장순명, 마산책임 권우성, 대구책임 정재철, 부산책임 이기호, 금속노조책임 김재병·김동철, 섬유노조책임 김응빈·이주상, 전기노조책임 조중심, 출판노조책임 이복기·이인동 등이었다.(주23)

   
▲ 일제가 만든 요주의 인물 감시카드-이관술(한국학중앙연구원)
   
▲ 일제가 만든 이순금 감시카드. 이관술의 여동생으로 이재유그룹과 경성콩그룹의 핵심인물로 활동했으며, 해방 후 남로당에서 활동하다가 월북했다.

경성콩그룹은 1930년대 서울지역 운동을 대표하던 이재유그룹의 이관술·이순금·김삼룡·이현상·정태식 등이 주축을 이루었다. 이들은 적당한 지도자를 물색하다가 박헌영을 영입하였고, 박헌영을 통해 권오직·장순명 등을 끌어들였다. 경성콩그룹에서 마산과 대구를 책임지고 있었던 권우성과 정재철도 ‘이재유그룹’과 관련이 있었다. 여기에 ‘권영태그룹’ 출신을 포함해서 전향하지 않은 여러 사회주의자가 결합한 조직이 바로 경성콤그룹이었다.(주24) 결국 경성콩그룹은 이재유그룹과 권영태그룹을 중심으로 화요파·상해파 등 다양한 운동가들과 경성제대 출신, ‘이재유그룹’ 등의 새로운 운동가들을 망라하게 되었다.(주25)

경성콤그룹은 세 번에 걸쳐 검거되면서 조직이 와해되었다. 1차 검거사건은 1940년 12월부터 시작되었다. ‘서대문사건’으로 알려진 이 검거사건에서 이현상과 김삼룡이 체포되었다. 1941년 1월 7일에는 이관술마저 서울에서 검거되었다. 1941년 가을과 1942년 12월에도 일제 경찰이 경성콩그룹 검거에 나섰다. 경성콤그룹은 세 번에 걸친 검거로 큰 타격을 입었으나 핵심 지도자인 박헌영은 체포되지 않았다. 이관술은 1943년에 병보석으로 출옥한 뒤 탈출하여 다시 비합법운동을 했다. 이현상도 병보석 뒤에 일제 경찰의 눈을 피해 덕유산에 잠복한 뒤 운동을 계속했다. 박헌영은 “지하에서 지방의 혁명가 동지들과 연계하고 제2차 세계대전과 태평양전쟁, 일본의 패망, 조선에서 해야 할 일 등을 설명해주었다.” 경성콤그룹의 성원들은 그룹이 무너진 뒤에도 나름대로 활동했지만, “각자 망명하고 서로 연락이 끊어졌다.”(주26)

전향하지 않은 다양한 공산주의자그룹과 경성콩그룹의 패권 문제

경성콩그룹은 와해되었지만 사회주의세력의 활동은 계속되었다. 비록 분산되고 고립되었지만, 비합법 소규모 조직 활동을 계속 전개했다. 박헌영은 해방된 뒤에 쓴 글에서 “1941년부터 시작된 4~5 차례에 걸친 대대적인 검거 결과 조직은 와해되었지만, ‘조선공산당 재건위원회’ 계열의 3개 조직과 ‘TOC’(태평양노동조합)계열의 3개 조직이 전쟁 기간에도 활동을 계속했다”고 기록했다. 다른 기록도 있다. 해방된 뒤에 정백은 사회주의운동과 대중투쟁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적었다.

“김일수와 김태준 등의 공산당 재건사건·청진일철(日鐵)사건·성진고주파(高周波)사건·신의주 결사대사건·협동당 사건·성대이공(城大理工)사건·안양사건·함흥파옥(破獄)사건·포천사건·개성사건 등 봉기가 있었으며, 경성콤그룹의 김태준·서중석 서클, 이영·정백 등의 스탈린단, 그리고 조동호 그룹 외에도 여운형과 이걸소 등의 건국동맹 등의 지하공작이 활발했었다. ... ‘스탈린단’은 정백이 이른바 화요회그룹의 조동호와 만나 공산당 결성을 진행했다. 정종근은 경성콤그룹의 박상준을 만나서 서로 합류하는 문제를 거듭 토의했다. 비밀보장을 위해서 개별조직형태로서 평남·황해·강원도를 비롯하여 각도 간부를 구성했다. 이른바 화요그룹은 조동호·정재달·최원택·홍남표·이승엽 이렇게 5명으로 간부를 구성하고 인천을 비롯하여 황해와 경북, 그밖에 지방기관을 구성했다. 경성콤그룹은 콤그룹사건으로 피검 뒤에 감옥에서 보석으로 나와 각자 망명하고 연락이 서로 두절되었다. 김태준이 지도하는 변재호의 영등포노동자조직이 활발해서 1945년 8월 해방 뒤에 박헌영과 연락되었다. 이정윤의 서클은 경인(京仁) 사이의 노동자에게 뿌리를 박고, 김일수와 결탁하면서 노동자 최상덕과 신용우 등이 경향에 특히 호남 방면에 동지를 활발하게 모으고 있었다. 김일수·서중석 등의 서클은 출판 노동자 박광희 등이 강력하게 조직 투쟁을 해서 노동자 동지를 많이 가졌는데, 이것은 운동이 한발 더 전진한 것이다.”(주27)

   
▲ 박진홍을 다룬 매일신보 1937.4.30.자 기사. 불굴의 투사 박진홍은 이재유와 사이에 아들 ‘철한’을 낳았으나 일찍 죽었다. 이재유의 사망 후 출옥한 뒤 경성콩그룹에서 활동한 김태준과 함께 연안으로 탈출했다.
   
▲ 일제 강점기 한국 문학사의 기초를 닦은 한문학자이자 국문학자인 김태준. 그는 공산주의자로 경성콩그룹에서 활동했고, 출소 후 박진홍과 연안으로 탈출했다. 해방 후 남로당 문화공작대에서 활동하다 지리산에서 잡혀 1949년 11월 서울 수색에서 체포되었다.

일제시기 많은 공산주의자들인 전향하고 일제에 협력하는 길을 걸었으나 경성콩그룹은 끝까지 타협하지 않고 투쟁을 전개했으며 해방 후 조선공산당(남로당)의 핵심이 되었다. 해방 후 박헌영은 자신이 작성한 ‘8월 테제’(「현 정세와 우리의 임무」)에서 “이러한 곤란한 환경상에서도 어쨌든 국제노선을 대중 속에서 실천하는 진실한 의미의 콩그룹의 공산주의운동이 비합법적으로 계속하였던 것은 사실”이라고 하여 콩그룹의 정통성을 내세우고 있다.(주28)

경성콩그룹이 높은 평가를 받는 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하나는 대부분의 운동가들이 투쟁 전선에서 이탈하거나 전향하는 상황에서도 일제와 타협하지 않고 끝까지 싸웠다는 점, 다른 하나는 1920년대 활동했던 다양한 파벌의 운동가들을 망라하여 조선공산주의 운동의 고질적인 문제였던 분파를 극복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였다는 점이다. 반면, “콩그룹에 속한 사람들 역시 일제 치하에서 별다른 활동을 하지 못하였으며 대중 속에 조직 기반을 형성하기도 전에 대부분 검거되고 말았다”(주29)는 비판적인 평가도 있다. 이런 평가는 경성콩그룹이 대중적 기반도 없는 상태에서 상부에서 결합해 조직을 만들었다는 점에 근거하고 있다. 경성콩그룹이 부서를 배치하고 기관지(주30)를 발간해 하부로 배포하는 등 조직 틀을 먼저 만든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김경일의 연구에 의하면, 함북 및 경남 지역 등을 중심으로 노동자·농민들 속에서 대중적 기반을 구축해가는 과정에 있었던 점 등이 확인되고 있어서 “대중 속에 조직 기반을 형성하기도 전에 대부분 검거되고 말았다”는 평가는 재평가되어야 할 부분도 있다. 경성콩그룹은 일제 말기의 암흑 시기에도 대중적 기반을 확보하기 위한 “일정한 수공업적 활동을 계속”하였고, 그런 과정에서 1945년 해방을 맞이했던 것이다.(주31)

   
▲ 경성콩그룹의 지도자였던 박헌영. 1930년대 중반 조선공산당 재건을 위해 상해에서 국내로 잠입했다 체포되었을 때 모습으로 추정된다.

그렇다고 해서 경성콩그룹이 일제 말기 공산주의운동의 정통성을 배타적으로 주장할 만큼 운동세력 전반을 포괄하고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분산적이지만 각 지역에서 소그룹 형태로 공산주의 운동가들이 조직되어 활동하고 있었고, 경성콩그룹에 참여하지 않았지만 전향이나 일제에 협력하지 않으면서도 뛰어난 역량을 갖고 있었던 인물들도 적지 않았다. 해방 후 경성콩그룹이 조선공산당 재건에서 주도적 역할을 하고 남로당까지 이어지는 당권파가 되었지만 지나치게 당파적인 태도를 보여 좌익세력의 통합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박헌영의 경성콩그룹이 공산주의운동의 정통성을 배타적으로 주장할 정도가 아니었음에도(주32) 과도한 자기중심적 행태를 보임으로써 해방 후 공산당 활동에서 큰 문제를 야기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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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1) 1920년대에도 이재유는 사회주의운동에 활발하게 참여, 활동했으나 거물은 아니었다.

2) 편집부, 『발굴 한국현대사 인물 1』, 한겨레출판사, 1991, 104쪽

3) 김경일, “이재유, 좌절된 사회혁명에의 꿈”, 『내일을 여는 역사』 13(2003), 228쪽

4) 김경일, 『이재유 나의 혁명 시대 나의 혁명-1930년대 서울의 혁명운동』, 푸른역사, 2007; 안재성, 『경성 트로이카』, 사회평론, 2004, 107〜115쪽

5) 김경일, “이재유, 좌절된 사회혁명에의 꿈”, 229〜230쪽

6) 김경일, “이재유, 좌절된 사회혁명에의 꿈”, 231〜232쪽

7) 임영태, 이재유 일제강점기 한국 노동운동의 전설, 매일노동뉴스, 2019.10.28

8) 김경일, “지배와 연대의 사이에서-재조선일본인 지식인 이먀케 시카노스케(三宅鹿之助)”, 『사회와 역사』 제105집(2015), 297〜298쪽

9) 김경일, 위의 글, 299〜302쪽

10) 미야케가 1932년 12월 프로핀테른(적색노동조합인터내셔널) 극동부에서 파견된 권영태 그룹을 만나서 서로 제휴, 연대하기로 했다. 일본 검찰 기록에는 미야케가 정태식과 함께 그 존재를 알게 된 것은 1934년 4월 초라고 하는데, 실제로는 그 이전에 알았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김경일, 위의 글, 304쪽)

11) 김경일, 위의 글, 303〜308쪽

12) 이철, 『경성을 뒤흔든 11가지 연애사건』, 다산초당, 2008, 316〜317쪽

13) “탈주 탈주 탈주 4년간 적색거두 이재유 피포, 신출귀몰! ‘칠종칠금’ 피신술 일당 50명 금일 송국”, 조선일보 1937.5.1.자 호외; “연쇄 파업 주도…식민지 조선 뒤흔들어, 한겨레, 2005.9.8

14) 자세한 내용은 안태정, “1930년대 원산지역의 혁명적 노동운동(1930〜1938)-조직건설운동을 중심으로-”, 역사와현실2, 1989.12, 98〜125쪽 참조

15) 이정박헌영전집편집위원회, 『이정 박헌영 전집』 4, 119쪽.

16) 신주백, 박헌영과 경성콩그룹: 재판기록을 통해서 본 경성콩그룹의 조직과 활동, 역사비평 제13호, 1991년 여름호[1991.5], 295쪽

17) 동아일보, 1935.8.24.자 호외

18) 박헌영과 이관술이 만난 것은 1939년 12월 12일이다. 박헌영의 기억이 착오가 있었다.

19) 이정박헌영전집편집위원회, 『이정 박헌영 전집』 2, 58쪽; 최규진, 『조선공산당 재건운동』, 독립운동기념관 독립운동사연구소, 2009, 221쪽 재인용

20) 이재유는 1936년 10월, 권영태는 1935년 4월에 각각 체포되었다. 이는 이재유그룹과 권영태그룹이 활동하고 있었음을 말한 것이다.

21) ‘코뮤니스트그룹’의 활동을 말한다.

22) 한림대학교 아시아문화연구소 편, 『조선공산당문건자료집(1945〜1946)』, 1993, 153쪽; 최규진, 『조선공산당 재건운동』, 독립운동기념관 독립운동사연구소, 2009, 221〜222쪽 재인용

23) 김경일, 경성콩그룹과 지방 조직, 한국사회사학회 42, 1994, 46〜47쪽

24) 최규진, 『조선공산당 재건운동』, 독립운동기념관 독립운동사연구소, 2009, 222쪽

25) 신주백, 박헌영과 경성콩그룹: 재판기록을 통해서 본 경성콩그룹의 조직과 활동, 역사비평 제13호, 1991년 여름호(1991.5), 310쪽

26) 최규진, 위의 책, 240〜241쪽

27) 정백, 「8월 15일 조선공산당 조직경과보고서(1945.11)」, 한림대학교 아시아문화연구소 편, 『조선공산당문건자료집(1945〜1946)』, 6쪽; 최규진, 위의 책, 241〜242쪽

28) 김경일, 위의 글, 47〜48쪽

29) 김남식·심지연 편저, 『박헌영 노선 비판』, 세계, 1986, 40쪽

30) 이관술은 1939년 9월에 기관지 『공산주의자』를 월간으로 창간해서 20부를 발간했다. 기관지는 1940년 3월호까지 이관술이 편집했다. 1940년 4월호부터 박헌영이 주관했다. 박헌영은 기관지 이름을 『꼼뮤니스트』로 바꾸었다. 『꼼뮤니스트』는 1940년 11월 ‘러시아 혁명 기념호’까지 매달 거스르지 않고 20〜30부를 냈다. 1940년 12월의 제1차 검거사건으로 기관지를 내지 못했다. 그 뒤 경성콩그룹이 다시 활동하면서 홍인희와 김재병이 주도하여 『선전』이라는 이름으로 1940년 8월에 기관지를 냈다. 그러나 그마저 1940년 9월의 제2차 검거사건으로 중단되었다.

31) 김경일, 위의 글, 49〜58쪽

32) 신주백, 위의 글, 310〜3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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