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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여덟째 이야기, 야만이 짓밟고 간 자리(3)<정해랑 연재소설> 노동자 신돌석씨의 하루 (42)
정해랑  |  jhr1376@naver.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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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20.09.05  00:1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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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해랑 / 주권자전국회의 공동대표, 21세기 민족주의포럼 대표
 

연재를 다시 시작하며

58년 개띠 노동자 이야기를 다시 하려고 합니다. 잠시 쉰다는 것이 1년을 넘겨 버렸습니다. 그 동안 우리의 주인공 신돌석씨도 많은 일을 겪었습니다. 세상은 많이 변한 것 같은데 어찌 보면 완강하게 버티며 변하지 않는 것 같기도 합니다. 변한 것은 무엇이고, 변하지 않은 것은 무엇인지, 그보다도 변해야 할 것은 무엇이고, 변하지 말아야 할 것은 무엇인지를 소소한 일상을 통해 그려 보고자 합니다. 통일뉴스 독자 여러분들의 많은 응원과 질책을 부탁드립니다. / 필자

 

   
▲ [삽화-백소(白笑)]

박종철 열사가 고문당한 방을 본 뒤 옆방으로 옮겨서 다른 방들을 봤다. 그런데 다른 방에는 제대로 장치들이 남아 있지 않았다. 양숙씨에게 들으니 경찰청 보안분실로 사용할 때 하나 둘 개조했다고 한다. 80년대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것은 509호가 유일하다고 하였다. 그 방이 남아 있을 수 있다는 것은 정말 천운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509호실도 개조하려고 할 때 박종철 열사의 아버님 박정기 선생이 소식을 듣고 부랴부랴 달려오셔서 이 방이라도 원형을 남겨서 인권의 소중함을 생각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해서 이 방만 80년대 원형으로 남았다고 한다.

몇 개 방을 거쳐서 어느 방에 다다른 뒤 양숙씨가 509호 벽이 거무스름한데 김근태 의장이 쓴 ‘남영동’이라는 책에는 벽이 하얗다고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그런데 고문 피해를 증언하면서 자기가 있던 방이 분명히 온통 빨간색이었다고 하는 분들도 있다고 한다. 신돌석씨도 언젠가 그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소설에서도 본 적이 있었다. 그러면 누가 착각을 한 것인가?

양숙씨가 냉난방기 뒤를 보라고 했다. 빨간 부분이 있었다. 바닥을 보니 역시 그렇다. 세면기 부분도 그랬다. 이런 흔적 때문에 여기가 빨간 방이었을 거라고 추정한다고 한다. 파란 방, 노란 방을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아직 근거를 찾을 수는 없다고 한다. 그런 점 때문에라도 경찰청 인권센터로 있던 것을 시민들이 운영하는 곳으로 바꾼 것이 얼마나 잘한 일인가 생각할 수 있었다.

5층에는 모두 16개 방이 있는데 그 중 14개가 동일한 규모이고, 2개는 그 규모가 크다고 한다. 514호, 515호가 그런데 그 중 515호가 그 유명한 김근태 전 민청련 의장이 고문을 받은 곳이었다. 지금은 그 분의 걸어온 길과 고문과 관련된 여러 가지를 비치해 놓았다. 말하자면 작은 기념관과 같이 설치되어 있다. 들어가자마자 시집들이 죽 놓여 있었다. 고문을 당한 뒤 감옥에서 치유 과정으로 그것들을 읽었다고 한다.

김근태 전 의장은 칠성판에서 고문을 받았다. 가죽 끈으로 다섯 군데를 묶고 수건으로 얼굴을 가린 뒤 물고문과 전기고문을 했다고 한다. 그때 얼굴에 덮었던 수건이 거기 전시되어 있었다. 대공분실에서 구치소로 갈 때 사물을 가져갔는데 거기에 수건이 딸려 갔다고 한다. 그 수건에서 특정 비누 냄새가 나는데 온 가족이 그 비누를 쓰지 못했단다. 그리고 김 전 의장은 치과에도 가지 못했다고 한다. 치과 시술대에 앉으면 고문이 연상되어서 그랬단다.

1985년 막 해고되고 복직 투쟁을 할 때 신돌석씨는 김근태 전 의장의 고문 사실을 담은 모두 진술을 접할 수 있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때까지 모두 진술이라는 것은 법률로 보장되어 있는데도 거의 이루어진 적이 없었다고 한다. 김 전 의장이 그것을 활용해서 자신의 고문 사실을 생생하게 폭로하였다. 이전에도 고문은 수도 없이 당했고, 재판정에서 그것을 주장한 사람들은 많았지만 김 전 의장 때처럼 파급력이 있지는 않았다.

신돌석씨는 모두 진술의 마지막에 해당되는 부분이 지금도 가슴 저리게 다가온다. 남영동에서 검찰청으로 송치되고 거기서 우연히 부인을 만났다. 물론 우연이라고만 할 수는 없다. 부인이 아마도 송치시기를 생각하고 만날 만한 곳을 가늠하고 몇날 며칠을 거기서 죽쳤을 것이다. 그래서 고문의 증거가 될 수 있는 떨어져 나간 발뒤꿈치를 건네고 바깥을 보니 공사장에서 인부들이 일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힘을 얻게 되었다.

검찰에 송치되기 전날에 발가벗겨진 상태에서 집중 구타를 당했다고 한다. 다음 날이면 남영동에서 나간다는 것을 알았는데도 결국 버티기 힘들어서 항복을 하고 그들이 쓰라는 대로 썼다고 한다. 엉엉 울면서 살려달라고 하면서 기었다고 하던데 고통도 고통이지만 얼마나 수치스러웠을 것인가? 그래서 결국 버티는 것을 포기했는데 인부들이 노동하는 모습을 보면서 다시 힘을 내고 싸워야겠다는 결의를 다지는 것이다.

그때까지 신돌석씨는 김근태 전 의장을 그저 재야인사의 하나라고만 알았다. 그 당시 신돌석씨에게 영향을 준 사람들은 노동운동이 중심이 되어야 하고, 앞으로 그렇게 될 것이라고 누누이 강조했다. 신돌석씨도 그런 줄로만 알았다. 김근태 전 의장이 오래 전부터 노동운동을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공개운동을 하는 사람으로 언젠가 만들어질 전위조직의 지도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유치하기 짝이 없지만 신돌석씨로서는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모두 진술의 마지막 부분에서 항복을 했지만 다시 일어서게 되는 것을 노동에서 찾았다. 이것보다 더 신돌석씨에게 이 세상의 중심에 노동이 있다는 것을 알려준 것은 없었다. 많은 인텔리 활동가들을 봤지만 이 말처럼 감동적으로 명쾌하게 다가온 적은 없었다. 신돌석씨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고문을 당했지만 그것을 이겨내고 생생하게 폭로할 수 있는 힘이 바로 그의 세계관에서 나오는 것이구나 생각했다.

그에게 가해진 고문은 정말 살인적이었다. 전기고문을 여덟 번 받고, 물고문을 두 번 받았다. 전기고문을 하기 전에 물고문을 한단다. 그래야 전기가 잘 통한단다. 소금물을 먹이고 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 과정을 견뎌냈지만 끝내 굴복하였다. 하지만 다시 일어선 것이다. 더욱이 놀라운 것은 그 모든 과정을 생생히 기억해내고 진술을 했다는 사실이다. 신돌석씨는 겨우 하룻밤 있었는데도 뭐가 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 게 많았다.

   
▲ [삽화-백소(白笑)]

그의 모두 진술에서 우리에게 ‘악의 평범성’을 보여준 내용도 정말 놀라웠다. 고문을 하던 경찰 중 한 명이 자기 아들 체력장 잘 봤는지를 걱정하더라는 내용이다. 체력장은 당시에는 입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컸다. 자기 아들, 딸에게는 좋은 아빠이고, 마누라에게는 다정한 사람이 어떻게 인간을 그렇게 고문을 할 수가 있을까? 그러고도 그들은 자신들이 그런 일을 하니까 사회가 안정된다는 생각을 할 것이다. 나치 치하에서 유태인을 가스실에 넣던 자들의 생각과 다를 바 없다.

신돌석씨를 두들겨 패고 물고문을 하던 자가 오늘 안 들어가면 마누라가 이혼하겠다고 했다면서 분을 내면서 씩씩댔다. 자기 딸 생일이라나. 어제 들어가려고 했는데 이 새끼가 잡혀 와서 못 들어갔다고 하면서 분풀이를 해댔다. 그런 말을 들으면서 그 와중에도 네 딸이 제대로 크겠냐고 생각했다. 아니 그 딸은 어쩌면 자기 아버지가 사회의 안녕을 위해 불철주야 일하는 경찰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지.

어떻게 자기 딸은 애지중지하면서 남의 집 자식을 이렇게 대하나. 그런 말을 해주고 싶었지만 그래봤자 한 대라도 더 맞을 것 같으니 끽소리도 하지 못했다. 자기들끼리 주고받는 대화를 보니 이런 자식이 뭘 알겠냐고 하였다. 이런 피라미들도 다 여기서 하면 자기네가 어떻게 견디겠냐는 불만을 말했다. 물론 CCTV가 있어서 그런지 조그맣게 최대한 돌려서 말하기는 했다. 어쩌면 위에서 들으라는 소리일 것이다.

신돌석씨는 기분이 나빴지만 한편으로는 곧 나갈 수도 있다는 희망을 가졌다. 사실이 신돌석씨는 아는 게 별로 없었다. 물론 있는 대로 다 불면 조직은 상당히 타격을 받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특히 현장 조직은 엄청나게 파괴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만은 지키려고 애를 썼고, 자기들이 귀찮아서 그런지 아니면 진짜 별 볼 일 없이 보는지 추궁을 하다가도 더 이상 나가지 않았다.

취조관이 교체되고 회유를 하는 자가 들어온 뒤 고문은 끝났다. 결국 신돌석씨에 대한 취조는 현장 활동가의 방을 하나 불게 한 것으로 끝났다. 그리고는 앞으로 자기들과 잘 해보자는 말을 들었다. 섬뜩했다. 자신더러 프락치가 되라는 소리인가? 그러겠다고도 아니라고도 못 한 상태로 어정쩡하게 대답했다. 여기서 보고 들은 것은 일절 밖에서 발설하지 말라는 각서를 쓰게 했다. 그리고는 다시 눈을 감긴 채 이번에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왔다. 수사관 둘 사이에 끼어서 내려왔다. 그런 걸 보면 그때 끌려갔던 곳이 여기가 맞는 것 같다.

남민전의 이재문 위원장도 여기서 취조를 당했다고 한다. 들리는 바로는 이 사람한테도 항복을 받기 위해 무조건 패고 고문을 했다고 한다. 이재문 위원장은 밖에서 응원해 주는 조직이 없는 상태에서 아마도 엄청나게 고문을 당했을 것이다. 그것이 화근이 되어 결국 구치소에서 옥사하였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런 인간백정들한테 당해서 목숨을 잃고, 육체적 정신적 불구가 되어야 했을까?

김근태 전 의장의 고문 내용 등은 ‘남영동’이란 책으로 뒤에도 알려졌다. 그리고 영화 ‘남영동 1985’로 제작되었다. 이 영화의 시사회 때 전기고문 기술자 이근안이 초대되었는데 다 본 뒤 새빨간 거짓말이라고 했단다. 어쩌면 그렇게 뻔뻔스러울 수가 있을까? 김근태 전 의장은 이런 자를 용서한다고 하고, 교도소로도 찾아간 적이 있었다. 신돌석씨는 이런 점에 대해서는 사실 못마땅했다. 이런 자를 용서할 권리가 누구에게 있겠는가?

한 층을 내려가서 4층에 있는 박종철 기념 전시실에 갔다. 당시 정세를 알 수 있게 해주는 신문스크랩이나 사진 등이 전시되어 있었다. 1981년 2월 26일에 조선일보에 실린 기사가 있었다.

“새 역사 창조에 신명을 바치신 위대한 영도자의 탄생을 충심으로 경축하며 우리 모두 새 영도자를 중심으로 힘과 슬기를 모아 민주복지국가 건설에 이바지할 것을 다짐합니다.”

전두환의 12대 대통령 당선을 축하한다는 광고를 롯데 그룹에서 낸 것이었다. 지금 이 광고를 다시 보면 조선일보나 롯데는 어떻게 생각할까? 조선일보는 별로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천황폐하 만세’를 공공연히 외치던 자들 아닌가? 롯데는 부끄럽다기보다는 사람들이 많이 보면 자신들 돈벌이에 불리하지 않을까 전전긍긍하겠지.

이때 신돌석씨는 군대에 있을 때다. 날이면 날마다 전두환 대통령 각하의 말씀을 들어야 했던 때였다. 신돌석씨도 전두환을 위대한 영도자라고 생각했나?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안 그랬던 것 같다. 전두환이 나쁜 놈이라는 생각도 안 했지만 위대한 영도자 따위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건 아버지도 그랬다. 수구적인 사람인데도 특별히 정치인을 우상화했던 기억은 나지 않는다. 형도 그랬다. 보수적이지만 박정희나 전두환을 영웅시하지는 않았다.

신문 스크랩을 둘러 보다 1987년 1월 당시의 기사를 보았다. 14일에 박종철 열사가 연행되어 사망했다. 곧바로 화장이 되었다. 다음 날 석간신문에 사망을 보도하는 기사가 실렸다. 당시 중앙대 용산병원의 의사였던 오연상이 물이 흘러 넘쳤다는 것으로 물고문을 암시하는 발언을 했고, 이것을 당시에는 석간신문이었던 중앙일보가 잽싸게 보도하면서 특종이 되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당시 전두환 정권은 안팎으로 위기에 몰렸던 것 같다.

   
▲ [삽화-백소(白笑)]

이 기사를 본 것은 차고처럼 생긴 방에서였다. 지역을 벗어나 서울에 몇 개 자취방을 안가로 쓰던 때였다. 물론 더 있을지도 모른다. 신돌석씨가 몰랐던 것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몇 군데는 알고 있었다. 아마 신돌석씨가 그 전 해에 끌려가서 현장 활동가가 사는 방 하나를 불었다는 것을 조직에서 알았다면 이런 방을 알 수 있는 선에서 배제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날의 일은 아는 사람이 없었다.

면목동이었을 것이다. 차가 다니는 길가에 방이 있었다. 이전에 차고로 쓰였을 것 같았다. 그곳에서 두 명이 살고, 세 명이 드나들었다. 다섯 명이 학습도 하고, 정세 토론도 하였다. 어쩔 수 없는 현실이었다고 해도 당시 토론은 지금 생각해 보면 편향되었고, 획일적이었다. 조직에서 만들어진 문건을 어떻게 이해하는가가 중심이었다. 만약 이의를 제기하면 하방되기가 일쑤였다. 물론 그것을 이유로 하지는 않았지만 결과적으로 그렇게 볼 수 있었다.

신돌석씨는 수많은 노동운동 그룹들이 사라져 버린 것이 안타깝지만 그런 편향성 때문이 아닐까 뒤에 생각해 보았다. 러시아 혁명을 우리나라에 무리하게 도입하는 식의 생각들이 만연해 있었다. 그러다 보니 공개운동조직이나 종교운동조직들이 마치 자신들의 프랙션 대상인 것으로 착각하였다. 물론 정보기관의 엄청난 탄압도 중요한 요인이었다. 하지만 그것만이 아니라 스스로 붕괴하는 요인도 갖고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어느 때는 그런 조직이 그리워질 때도 있었다. 변혁운동에 대한 인식이 너무 무뎌지는 듯하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아무튼 그날 한 사람이 석간신문을 들고 들어오면서 대학생이 조사를 받다 죽었다고 하였다. 처음에는 귀를 의심했다. 데모하는 것도 거의 실리지 않는 신문에 이런 기사가 실릴 수가 있는 것일까? 모여 들어서 그 기사를 읽었고, 한참 동안 먹먹했다. 다음 날, 그 다음 날에 걸쳐서 정보들이 들어왔다. 대학생이 수배 중인 자기 선배를 불지 않으려고 버티다 물고문 때문에 죽었다는 내용이었다.

처음 기사를 접했을 때 먹먹했던 가슴이 하나 둘 사건의 실체가 알려지면서 그 악몽 같은 날이 떠올라 가슴이 답답해졌다. 하지만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 어디 아프냐는 소리를 아내에게 들었다. 같은 조직 동료들에게도 들었다. 그냥 괜찮다고 할 수밖에 없었다. 자꾸 가정을 하게 되었다. 내가 그 상황이었더라면, 그때 조철구나 김배영을 잡겠다고 계속 몰아쳤다면 신돌석씨는 그걸 죽음으로 지켜낼 수 있을 것인가?

아무래도 못할 것 같았다. 그러다가 또 그 상황이면 할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지키려고 하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가 문제 아닐까? 박종철 열사가 지키려고 했던 사람이 이후 수구정당에 갔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 정말 어이가 없었다. 신돌석씨도 같은 조직은 아니었어도 노동운동을 하면서 알게 된 사람 중에 정말 존경했던 사람이 있었다. 그만 만나면 신이 나고, 그를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던 그가 수구정당에 들어갔고, 지금은 수구의 선봉에서 떠들고 있다. 그렇게 보면 사람이 문제인 것도 아니다.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극한 상황에서도 지키고자 하는 것을 지키는 것은 어떤 마음가짐으로 살아가야 가능한 일일까? 솔직하게 말해서 신돌석씨는 운이 좋았다. 그들이 별로 신돌석씨에게서 얻을 게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그 정도에서 멈춘 것이다. 무엇을 캐내려고 하기보다는 위에서 지시하니까 그 분풀이로 마구 패고 물고문을 했다고 보아야 한다.

박종철 열사는 그때 연행되기 전에도 두 번이나 잡혀가서 구류 또는 구속이 되었다. 감옥에서 부모님께 보낸 편지는 정말 결기가 있는 내용이었다. 역시 그런 자세로 살아간 사람이니 자신을 지키기 위해 목숨이 다할 때까지 버틴 것이다. 그렇다. 도망간 선배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그건 바로 자기 자신을 지키는 것이다. 야만적인 무리들의 요구에 따르지 않는 숭고한 정신을 지킨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내려 올 때는 엘리베이터를 탔다. 그런데 4층이었기 때문에 연행자를 태운 좁은 엘리베이터가 아니라 경찰관들이 오르내리던 엘리베이터, 지금은 직원이나 방문객이 타고 오르내리는 엘리베이터였다. 밖에는 아직도 비가 내리고 있었다. 자세한 설명을 해준 양숙씨에게 감사의 인사를 하고 작별을 했다. 밖으로 나오면서 다시 경비실을 들러 노동운동 대선배에게도 인사를 드렸다. 누군가가 말했다. 기분이 더러워서라도 한잔하고 가야겠다고. 여기보다는 동네 가서 한잔하자는 또 다른 누군가의 말에 모두 동의하고 전철역으로 향했다.

평범한 악마들이 살았던 곳에서 야만이 짓밟고 간 자리가 아직도 많은 사람의 가슴과 머리에 남아 있다. 이 모든 것을 치유하는 것은 정녕 진정한 민주화와 해방의 날에만 이루어지리라. 신돌석씨는 전철을 타면서 혼자 속으로 되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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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보기(1)
굽은소나무 (qnseksrmrqhr) 2020-09-05 08:18:54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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