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해랑 / 주권자전국회의 공동대표, 21세기 민족주의포럼 대표
 

연재를 다시 시작하며

58년 개띠 노동자 이야기를 다시 하려고 합니다. 잠시 쉰다는 것이 1년을 넘겨 버렸습니다. 그 동안 우리의 주인공 신돌석씨도 많은 일을 겪었습니다. 세상은 많이 변한 것 같은데 어찌 보면 완강하게 버티며 변하지 않는 것 같기도 합니다. 변한 것은 무엇이고, 변하지 않은 것은 무엇인지, 그보다도 변해야 할 것은 무엇이고, 변하지 말아야 할 것은 무엇인지를 소소한 일상을 통해 그려 보고자 합니다. 통일뉴스 독자 여러분들의 많은 응원과 질책을 부탁드립니다. / 필자

 

▲ [삽화-백소(白笑)]

남영동 민주인권기념관에 도착한 것은 오후 2시50분경이었다. 일행 네 명이 남영역에서 2시40분에 만나서 민주인권기념관까지 걸어갔다. 비가 조금씩 내리고 있었다. 미리 전화를 해 놓아서 양숙씨가 정문 앞에 나와 있었다. 정문에 있는 경비실에서 QR코드로 인증을 했다. 카톡을 통해서 이름과 전화번호를 적고, 방문번호를 받았다. 33번부터 36번까지 번호를 받았다. 경비실에 세 명이 있었는데, 그 중 한 분이 노동운동의 대선배였다. 신돌석씨는 오래 전부터 알고 있어서 인사를 했는데, 그 분이 신돌석씨를 아는지는 모르겠으나 반갑게 맞아주었다.

양숙씨가 먼저 약간 떨어져서 본관 건물을 볼 수 있는 곳으로 안내했다. 이 건물은 1976년에 당시 내무장관 김치열이 발주해서 치안본부 치안과 대공분실로 세워졌다고 한다. 설계는 천재 건축가로 알려진 김수근이 했다고 한다. 처음에는 5층이었는데 1983년에 6, 7층을 증축했다고 한다. 양숙씨 설명을 들으며 쳐다보니 5층만 유리창이 좁게 되어 있었다. 거기가 바로 취조를 하면서 고문하던 곳이란다. 다른 곳은 사무실 등의 기능으로 쓰였는지 유리창이 넓었다.

7층에 이곳 책임자였던 박처원 치안감의 사무실이 있었다고 한다. 영화 1987에서도 나왔지만 박종철 열사 고문 은폐 조작이 세상에 알려졌을 때도 많은 이야기가 나왔던 사람이다. 신돌석씨는 외가가 월남한 집안이고, 아버지도 우익청년단 활동을 한 것으로 알고 있기 때문에 유달리 관심이 많아서 신문에 나온 이야기들을 샅샅이 읽었었다. 그는 부하들에게 자신들이 전쟁을 하고 있다고 강조하곤 했단다. 그래서 멀쩡한 사람들을 죽도록 고문했나?

아버지나 외삼촌이 경찰에 들어갔으면 그런 사람이 됐을까? 외삼촌은 군인이 되어서 월남에 가서 전사했다. 아버지는 거기서마저도 무슨 이유에선지 밀려나서 주정뱅이 구두장이로 살다가 저 세상으로 갔다. 그들도 자기들 나름대로 의리가 있어서 뭉쳐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신돌석씨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이익을 보장해 주지 않는 한 서로 물어뜯는 짐승과 같은 자들이라는 것이 신돌석씨가 그들에 대해 갖고 있는 인상이다.

5층이 고문실이라고 했다. 다른 곳은 대체로 지하실에서 고문을 했다고 한다. 지상에서 그것도 5층씩이나 되는 곳에서 고문을 하는 것은 좀 특이한 경우였다. 7층 본관 옆으로 별관이 있다. 그리고 별관 옆으로 2층 건물이 있는데 1층은 기계실로 지금도 사용되고, 2층은 이전에 직원 식당으로 사용되었다. 그 옆에 널찍한 터가 있는데 거기에 테니스장이 있었다. 과거 대공경찰들이 체력 단련을 하면서 테니스를 쳤다고 한다. 본관 건물과 마주보고 있었다.

테니스장 뒤쪽 남영역 벽쪽으로 2층 가건물이 있었는데 홍제동팀이라고 불리는 대공2과가 거기 있었다고 한다. 이들은 거기서 취조를 하고, 고문은 본관 5층에서 했다고 한다. 박종철 열사를 살해한 팀이 바로 그 팀이라고 한다.

테니스장은 신돌석씨도 익숙한 곳이었다. 거기서 작년에 6월민주항쟁 32주년 기념식을 하였다. 땅이 질퍽질퍽해서 걸어가기가 쉽지 않았다. 행사가 끝나고 본관 안을 둘러보는 시간이 있었다. 신돌석씨는 들어가지 않았다. 왠지 기분이 안 좋았다. 여기 끌려와서 고문을 당했는지 확실하지 않았다. 하지만 악마의 기운이 여전히 그곳에 감도는 것 같았고, 자신을 향해 비웃음을 던지는 것 같았다. 그래서 그냥 밖으로 나왔다.

작년 가을에는 민주주의축제라는 것도 했다. 부스를 설치해서 여러 단체가 각자의 활동을 소개하였다. 신돌석씨 지역의 단체가 부스를 설치해서 왔는데, 오는 김에 여러 단체가 있어서 차례로 방문하였다. 마침 김장 행사도 있어서 김치 한 쪽 얻어먹고 막걸리도 한 잔 마셨다. 영화 1987에서 박처원 역을 한 김윤석이 고문이 한창인 때 여기서 테니스를 치면서 본관을 바라보던데 과연 무슨 생각을 했을까?

남영동 민주인권기념관은 정말 소중한 곳이다. 고문실은 이곳 말고도 남산의 중앙정보부 분실이 있고, 서빙고의 보안사 분실이 있는데, 중앙정보부 분실은 지금 유스호스텔로 변경되어 사용되고 있다고 한다. 서빙고 보안사 분실은 완전히 헐리고 군인아파트가 되었단다. 남영동은 치안본부가 관할했고, 서울시경이 관할하는 대공분실이 신길동, 옥인동, 장안동 등에 있었다고 한다. 보안사도 알려진 곳으로 장지동에 분실이 있었다. 어찌 보면 남영동만 고문의 흔적을 남겨 놓고 있는 곳이다.

이곳도 사라질 뻔했다. 1991년에 경찰청 보안분실이 되고, 2005년에 보안분실이 완전히 홍제동으로 이전했다. 그리고는 경찰청 인권센터로 운영되었다. 5층은 2000년에 경찰청 보안분실로 사용될 때 개조하여서 원래의 모습이 많이 사라졌다. 그러자 많은 시민운동단체와 박종철 열사의 아버지 박정기 선생께서 ‘시민의 품으로 돌려달라’고 청원을 하고, 그 청원이 받아들여져서, 2018년 6월 10일 6월민주항쟁 31주년 기념식을 기해서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와 남영동대공분실 인권기념관 추진위원회가 함께 운영하고 있다고 한다.

▲ [삽화-백소(白笑)]

다시 정문 앞으로 갔다. 정문을 바라보고 오른쪽에 작은 철문이 있다. 보안분실로 사용될 때는 정문도 이 작은 철문처럼 철문이었다고 한다. 작은 문에는 밖을 볼 수 있는 2-3센티 정도의 감시창이 있었다. 가까이 가서 보니 밖이 잘 보였다. 이전에는 지금과 달리 철문이 굳게 닫혀 있고 밖에서 안에 알리면 이 틈새를 통해서 누군지 확인했다고 한다. 거대한 철문은 지금도 옆에 있다. 그 철문을 여닫은 스위치 흔적도 여전히 있다. 여기 연행되었던 사람들은 들어올 때 그 철문이 열리는 소리가 마치 탱크 지나가는 소리 같았다고 한다. 옆으로 가서 보니 거대한 철문 안은 텅 비어 있었다. 초등학생과 중고등학생들이 견학을 오면 막 들어 가려곤 한다고 한다.

철문이 열리면 연행자를 태운 차가 들어온다. 연행된 사람은 눈이 감겨 있다. 차는 들어와서 우회전을 하고 좌회전을 한다. 그러면 바로 5층으로 올라갈 수 있는 문이 나온다. 정문에서 바로 보이는 건물 왼편에는 담쟁이넝쿨이 벽을 타고 오르고 있고, 건물이 들어가고 나오고 하는 요철이 두드러지게 되어 있다. 김수근 건축의 특징이라고 한다. 김수근은 천재 건축가라고 하던데 이런 건물을 지으면서 과연 이곳이 사람을 죽이고, 불구가 되게 만드는 곳이라는 것을 몰랐을까? 모를 리가 없었으리라. 예술을 한다는 자가 아무리 천재면 뭐하나?

다시 건물 앞으로 나와서 별관 뒤쪽으로 갔다. 별관 뒤편과 본관 왼쪽에는 창문이 없었다. 그쪽에는 남영역이 있는데, 밖에서 쳐다볼 수 없고, 건물 안에서도 내다볼 수 없게 만든 것 같았다. 거기가 바로 영화 1987에서 하정우가 역할한 최환 검사와 김윤석이 역할한 박처원이 실랑이를 벌이던 곳이라고 한다. 건물 전체 대지에 철조망이 둘러쳐져 있었다. 신돌석씨 기억에 남영역에서 검은 건물이 보였었다. 정확히는 모르겠는데 1986년 혹은 1987년 즈음해서 대공분실 이야기가 자꾸 나오자 커다란 간판으로 가로막았다. 그리고 그때 농심라면 광고판이 설치돼 있었다.

건물 뒤편에는 철봉과 평행봉이 있었고, 소각장도 있었다. 본관과 별관 사이에 공간이 있었는데 서늘한 바람이 불었다. 바람길이라고 해서 조사관들의 휴식 공간이었다고 한다. 건물에서 나올 수 있는 비상 출구도 있었다. 바로 거기에 정초석이 하나 있었다. 1976년 10월 2일 내무부 장관 김치열이라고 씌어 있었다. 이 자나 김수근이란 자나 이곳이 잔인하게 사람을 고문하여 죽게 만든 곳으로 인권교육을 받는 곳이 될 걸 알았을까? 아마도 그들은 박정희나 전두환 정권이 영원하리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일제 말기 친일파들이 일제 지배가 영원할 것으로 생각했듯이.

앞마당 쪽으로 나오면서 양숙씨가 말했다. 여기는 조사관들과 직원들이 다니는 곳이다. 연행된 사람들은 이곳을 지나다니지 못하는 것뿐만 아니라 볼 수도 없다. 연행자를 데리고 올라갈 뒤편으로 갔다. 모든 층에 창문이 앞편 5층처럼 작다. 바로 뒤에 건물이 있는데 대공분실을 짓기 전부터 있었던 롯데 제과 본사였다고 한다. 그래서 이쪽을 못 보게 모든 창문을 작게 만들었다고 한다. 지금도 롯데그룹이 건물로 쓰고 있다.

작은 문을 들어서면 엘리베이터와 계단이 나온다. 엘리베이터는 세 명 정도가 꽉 찰 정도로 공간이 좁다. 1층과 5층만 운행하고, 층수 표시가 없다. 계단은 철제 나선형으로 되어 있다. 이것 역시 바로 5층으로만 올라가게 되어 있다. 자신이 어디 있는지 연행자가 느끼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 신돌석씨는 그 문을 들어서며 잠시 어지럼증을 느꼈다. ‘계단이다’라고 하는 낮고 굵은 목소리가 들렸다.

일행이 양숙씨 포함해서 다섯 명이므로 모두 엘리베이터를 이용할 수는 없고, 나선형 계단을 통해 올라가야 했다. 일행 중 나이가 많은 두 명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나머지 두 명과 양숙씨가 계단으로 오르기로 했다. 5층까지 올라가므로 만만치 않을 거라는 양숙씨의 경고를 들으며 한 발 한 발 올라갔다. 나선형 계단을 올라가며 어지럽고 숨이 차서 몸이 기울어지면 여지없이 뒤통수를 후려치던 주먹이 있었다.

앞에서 양숙씨의 설명에 따르면 여기를 제외하면 다른 고문실은 모두 지하실이었다고 했다. 물론 지금까지 알려진 바라는 단서가 붙기는 했다. 만약 그 말이 사실이라면 신돌석씨가 연행되어 왔던 곳은 바로 여기라는 이야기가 된다. 갑자기 숨이 거칠어진다. 계단이 힘들어서는 아니리라. 돌아서서 뛰어 내려가고 싶다. 멈추지는 않았지만 몸놀림이 확연히 둔해졌다. 각오를 하고 왔는데도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힘드세요. 좀 쉬었다 갈까요?”

신돌석씨가 숨을 가쁘게 몰아쉬자 양숙씨가 말했다. 신돌석씨가 괜찮다고 했다. 철제계단이라 그런지 쿵쿵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서늘한 기운이 감돌았다. 이 소리도 어쩐지 익숙하다. 무엇을 지켜야 하고, 어떤 말을 해야 하는지를 생각하다가도 이런 곳에 와야만 하는 처지가 괜히 서글퍼지기도 했었다. 과연 내가 살아서 다시 나갈 수 있을지를 생각하게 만드는 소리였다. 나선형 계단은 유럽의 중세 건물에 많은데 회전이 되기 때문에 공간 감각을 상실하게 만든다고 하였다.

계단을 다 오르자 5층 복도 양 옆으로 방들이 죽 있었다. 엘리베이터로 먼저 오른 두 사람이 여기저기 보다가 계단으로 올라온 사람들이 나타나자 계단 입구로 왔다. 척 보면 무엇이 연상되느냐는 양숙씨의 물음에 교도소, 정신병원, 기숙사 등의 답이 나왔다. 신돌석씨는 정신병원이나 기숙사에는 가본 적이 없고, 교도소는 가본 적이 있으므로 정말 그렇다는 생각을 했다. 감시 시설의 특징을 갖고 있다는 것이 양숙씨의 설명이었다. 양쪽에 방이 있고 문들이 있는데 서로 어긋나게 되어 있단다.

양숙씨의 안내에 따라 박종철 열사가 숨진 509호로 갔다. 문에서 바로 보이는 건너편 벽에 창문이 양쪽으로 좁고 길쭉하게 나 있었다. 투신을 못하게 하려고 그렇게 만들었다고 한다. 왼쪽에 욕조가 있다. 물고문을 하는 곳이다. 그 옆에 세면대가 있다. 그 위로 영정이 놓여 있었다. 오른쪽에 변기가 있고, 그 위에 책이 있었다. 오른쪽에 꽃이 있고, 맨 오른쪽에 냉난방기가 있다. 욕조 앞으로 책상과 의자가 있는데 바닥에 고정시켜 놓았단다. 들어서 던지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란다. 오른쪽 문가로 길게 침대가 놓여 있다.

방에 있는 모든 것들이 고문을 위해 치밀하게 준비된 것이었다. 욕조는 잘 알려졌다시피 물고문을 하기 위한 것이었다. 실제로 거기서 물고문을 했다. 그런데도 그들은 뻔뻔스럽게도 박종철 열사가 숨진 한참 뒤에도 샤워를 할 수 있게 만든 시설이었다고 주장했다. 침대도 잠자게 하려는 것보다 침대 옆에서 잠을 안 재워서 심리적 고통을 더욱 심하게 하기 위한 장치였다. 전등에도 망이 쳐 있었다. 책상 의자와 마찬가지로 들고 던지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문은 안에서도 밖에서도 열 수 없었다. 취조하는 자들만 열쇠로 열고 잠그고 하였다. 조사실 문에 외시경이 있는데 밖에서 안을 들여다볼 수 있는 것이었다. 안에서는 밖이 보이지 않았다. 문 안쪽 천장에 무언가 있었는데 CCTV라고 하였다. 그것을 통해 연행자도 감시하고, 그를 취조하는 자들 역시 감시를 당하는 것이었다. 70년대 후반에는 최첨단 시설이었을 것이다. 방 안에 변기가 있는데 변을 보는 모습이 다 보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CCTV가 있었다는 말을 듣자 신돌석씨는 자신을 회유하던 사람이 떠올랐다. 결국 그는 상부의 지시를 받고 그렇게 나온 것이었으리라. 그 다음 조직사건 때 들어갔을 때도 비슷한 경험이 있었다. 그들의 채찍과 당근일까? 그때 조금 더 고문을 당했다면 다 불어버리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다가도 뒤에 들어온 사람의 회유에도 넘어가지 않았다면 아무 이야기도 하지 않았을 텐데 하는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그것이 얼마나 오랜 시간 자신을 괴롭혔던가.

▲ [삽화-백소(白笑)]

신돌석씨가 불어버린 방은 학생 출신 여자 활동가가 살던 방이었다. 당시에 현장에 취업해 있었다. 왜 그 사람의 방을 불었는지는 나중에 스스로 생각해도 모를 일이었다. 그런데 그 일로 그 사람은 아무 일도 당하지 않았다. 몇 달 뒤에 남의 주민등록으로 입사한 것이 들통 나서 해고되고, 사문서 위조 및 동행사라는 죄로 구속되었다. 그것은 다른 사람이 불어서 생긴 일이었다. 그러므로 신돌석씨 책임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신돌석씨는 괴로웠다.

그 여자의 이름은 미숙이었다. 본명은 몰랐다. 현장에서 쓰는 이름도 몰랐다. 미숙의 현장 활동 지도를 하는 학생 출신 활동가가 현장 사정을 너무 모른다고 해서 신돌석씨가 소모임에 참석하기로 했다. 현장에 있는 여자 세 명과 지도하는 여자 한 명, 모두 네 명의 여자 속에 끼어들어서 모임을 했다. 모임은 주로 1주일에 한 번 정기적으로 했고, 그 외 수시로 했다. 정기모임에는 학습을 먼저 했고, 그때는 신돌석씨가 참석하지 않았다.

당시 현장 활동가들의 소모임에서는 학습을 주로 조직 내에서 작성한 팜플렛으로 했다. 책은 개인이 알아서 읽어야 했는데 현장에 있으니 책을 읽을 시간이 충분하지 않았다. 팜플렛을 통해 정세를 이해하고, 운동 이론을 습득하는 것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편향된 내용이 많았다. 하지만 E.H.카아의 ‘역사란 무엇인가’도 공산주의서적이라고 하는 무식한 정권하에서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하였다.

85년 말 혹은 86년 초였다. 모임을 하다가 지도선을 포함한 나머지가 모두 갔다. 신돌석씨도 일어나 가려는데 미숙이 좀 더 이야기를 하다가 가란다. 안 그럴 이유도 없어서 앉아서 이야기를 했다. 맥주도 한 잔씩 했다. 현장 생활에서 느끼는 어려움 등을 미숙이 털어 놓았다. 미숙은 세 살 아래 주민등록증을 갖고 들어갔다. 그래서 동생 같은 애들과 트고 지내야 했다. 그런데 미숙이 그렇게 어리게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 문제였다. 그러다 보니 아주 친해진 애 몇을 빼면 왠지 서먹해졌다. 중간 관리자들도 뭔가 불편해 하는 것 같았다.

그날은 그렇게 하고 갔다. 그런 일이 모임 때마다 반복되었다. 어느 날 12시가 넘었는데도 정신없이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나가려는데 문이 잘 열리지 않았다. 희한한 일이었다. 한밤중이라 시끄럽게 문을 고치기도 어려웠다. 일단 그냥 주저앉았다. 왠지 분위기가 어색해졌다. 그러다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 안았다. 입맞춤도 했다. 신돌석씨의 손이 미숙을 어루만졌다. 정말 예상하지 않았던 일이었다.

한참 그러고 난 뒤 서로 떨어졌을 때 신돌석씨가 머쓱해져서 한마디 했다. 어떡하지? 미숙이가 날카롭게 받았다. 형과 나와 둘이만 아는 일이에요. 뭐를 어떡해요? 당시에는 나이 적은 여자가 나이 많은 남자에게 형이라고 했다. 오빠라는 말은 왠지 오글거리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일까? 신돌석씨는 뭔가 야릇하면서도 크게 잘못한 느낌을 가진 채 일어섰다. 이상하게도 이번에는 문이 제대로 열렸다.

몇 차례 더 모임을 했는데 미숙의 분위기는 냉랭했다. 그리고는 조직에서 더 이상 그 모임에 참석하지 말라는 통고를 받았다. 그 일 때문인지 아닌지는 지금까지도 모르는 일이다. 괜히 마음이 두근거리면서도 괴로웠다. 술 한 잔 하고 미숙의 집 근처에 가기도 했다. 하지만 찾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때는 지금의 아내와 사귈지 말지를 놓고 밀당 하던 시기였다. 그랬던 사람의 방을 가장 힘들 때 불다니 무슨 심사였을까?

냉랭한 것에 대한 보복 심리였을까? 아니면 찾아가고 싶은 마음이었을까? 그도 아니면 불어도 괜찮을 것 같은 믿음이 있어서였을까? 어느 것도 분명하지 않다. 신돌석씨는 대충 그 근처를 이야기했기 때문에 그 집을 못 찾았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아예 찾을 생각도 없었을지도 모른다. 이때만 해도 신돌석씨가 보기에도 정보경찰은 엄청나게 바빴고, 신돌석씨 같은 경우에 그들은 귀찮게 잡혀 왔다고 보기도 했던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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