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영태 / 출판기획자 겸 역사교양서 저술가
 

올해 2020년은 광복(또는 해방) 75주년이자 6.25전쟁(한국전쟁) 발발 70주년이 되는 해이다. 우리에겐 해방이 곧 분단이었으니 분단 75주년이기도 하다. 왜 우리는 3/4세기 동안이나 분단된 상태로 살아야 했던가? 왜 우리는 해방과 함께 분단이라는 있을 수 없는 상황을 맞아야 했던가? 우리는 왜 해방 3년 만에 두 개의 정부가 수립되고 마침내 5년 만에 전쟁이라는 참화를 겪어야 했던가? 이러한 물음에 대한 답은 해방 전후사에 들어 있다. 해방 75주년, 한국전쟁 70주년의 해에 해방 전후 역사를 다시 돌아보는 이유다. 이 연재는 매주 월요일에 게재된다. / 필자 주

 

국내 민족운동-건국동맹과 공산당 재건운동, 소규모 비밀결사

해외운동의 경우, 미주지역을 제외하고 중국, 특히 만주에서는 매우 열악한 상황에서 항상 목숨을 내걸고 투쟁했지만 국내라고 해서 안전했던 것은 아니다. 일제 고등경찰의 촘촘한 감시망과 헌병, 군대, 관료조직, 그리고 친일파와 일제의 첩자들이 활약하고 있는 조건에서 언제든지 감옥에 갈 수 있었다.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감옥에서 해방을 맞았고, 많은 독립투사들이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사형당하거나 고문과 그 후유증으로 사망했다. 많은 명망가들과 지식인들이 전향해 일제의 앞잡이가 되었지만 또 많은 투사들이 지하에서 활동하며 끝까지 독립과 해방, 혁명을 위해 싸웠다.

해방 직전 국외에는 중국 충칭의 대한민국임시정부·광복군, 연안의 독립동맹·조선의용군, 만주·연해주의 동북항일연군(88독립여단) 등 3대 무장독립운동세력이 있었다면, 국내에는 여운형의 건국동맹과 공산당 재건운동이 대표적이었다.

먼저, 여운형의 건국동맹에 대해서 살펴보자. 건국동맹은 해방 1년 전인 1944년 8월에 결성되었으나 그 출발은 1940년대 초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여운형이 건국동맹을 구체적으로 구상한 것은 1942년 겨울 두 번째 투옥된 서대문형무소에서였다. 그가 건국동맹을 구상하고 결성하게 된 것은 일제의 패망 후 건국 사업을 준비하기 위해서였다. 여운형은 1931년 만주사변이 발발했을 때 이미 일제의 패망을 예견했고, 1937년 중일전쟁으로 확산되었을 때에도 동일한 입장을 표명했다.

▲ 상해 교민단장 시절에 찍은 것으로 보이는 사진.

1937년 9월 8일 루거우차오 사건이 터지자 여운형은 미국유학생 몇 명과 시국 이야기를 나누면서 “이 사변은 일본이 스스로 묘혈을 파는 것이다. 그 이유는 일·영·미가 중국에서 장거리 경주를 하는데 제1차 전쟁 전까지는 영국이 패권을 잡았고, 전쟁 후에는 미국이 패권을 잡아 미국의 차관이 단연 증가하니 일본은 자기가 독점하지 못하는 데 분개하여 노구교사변을 일으킨 것이다. ... 영·미는 반드시 중국의 운동을 밀어가지고 일본과 싸울 것이다. 미국 일국으로도 일본을 대항하기에 넉넉할 터인데 하물며 2국이리오. 그러므로 일본은 자멸하고 조선은 해방될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주1)

▲ 동경유학생들과 함께 한 여운형(1936.5.18.)

여운형이 결정적으로 일제의 패망을 확신한 것은 1941년 태평양 전쟁 발발 때부터였다. 그는 이때부터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정보를 수집하기 시작했으며 정세를 파악하는 데 주력했다. 여운형은 1942년 4월 동경을 방문했을 때 미군기의 최초 동경공습을 직접 목격했다. 그는 1942년 6월 동경에서 귀국한 뒤 친구인 오건영 목사에게 “지난 4월 18일 미국비행기의 동경공습을 직접 목격했는데 미국기의 성능은 일본기 성능보다 우수해 일본기가 미국기를 추적하지 못했다. 동경에서 미국방송을 들으니 미국도 전쟁준비에 광분해 최후의 승리는 미영에 있게 될 것이며, 미영이 승리하면 조선독립이 확실히 가능하고 전쟁이 끝나면 미국에 거주하고 있는 조선인은 독립운동을 하게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주2)

여운형은 1936년 8월 손기정의 마라톤 우승 후 가슴의 일장기를 지운 사진을 게재한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조선중앙일보 사장에서 물러난 뒤 본격적인 사회활동을 하지 않고 있었다. 일장기 말소 사건은 여운형이 사장으로 있던 조선중앙일보가 1936년 8월 13일자에 처음 실었고, 이어서 동아일보가 8월 25일자에 실었다. 이 사건으로 동아일보는 8월 29일자부터 무기정간 처분을 당했고, 조선중앙일보는 9월 4일자부터 휴간을 했으나 끝내 복간하지 못했다.

여운형은 1940년 봄부터 1942년 여름 사이에 일본을 여러 차례 방문하였으며 동경과 서울에서 일본 정계·군부 고관들과 접촉하며 촉각을 곤두세우고 정세의 흐름을 면밀히 파악하고자 했다. 그는 동경과 국내에서 일본 고관들만 만난 것이 아니라 청년과 노동자들도 열성적으로 만났으며 그때마다 일본의 식민정책과 친일파의 개량노선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그의 이러한 발언은 청년과 유학생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동경 게이오(慶應義塾) 대학 유학생으로 학병에 끌려갔다가 일본군 부대를 탈출해 임시정부를 찾아가 광복군이 되는 김준엽도 여운형과의 대화에서 독립운동에 참여해야겠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주3)

여운형은 국내와 일본 상황뿐만 아니라 중국과 미주 상황까지 파악하려 노력했다. 그는 연안과 북경, 만주에서 활동하고 있던 동지 이영선과 최근우를 통해 비밀리에 연락을 주고받으며 중국 상황을 면밀히 살폈다. 이영선은 연희전문 축구선수 출신으로 조선중앙일보 특파원을 지냈는데 1940년 이래 북경에서 국내운동세력과 화북조선독립동맹을 연계해 주는 연락원 역할을 하고 있었다.(주4)

1940년대 국내에서는 여러 가지 경로를 통해 ‘미국의 소리(Voice of America)’를 비롯한 충칭임시정부의 한국어방송(중국라디오) 등 단파방송을 청취하며 정보를 접하고 있었는데 여운형도 그 내용을 접하고 있었다. 여운형은 1942년에 들어와서 미군기의 동경공습 목격, 연안·북경으로부터 오는 정보, 단파방송 등을 통한 미국과 중국 상황 파악 등을 통해 일제의 패망이 목전에 다가오고 있음을 확신하게 되었다.(주5)

국내외 정세 파악을 통해 일제의 패망을 확신한 여운형

1942년 12월, 여운형은 치안유지법, 육해군 형법, 조선임시보안령 등의 위반혐의로 일본헌병대에 연행, 구속되었는데, 6월과 8월 동경에서 귀국한 후 친구인 목사 오건영, 이재형, 광산업자 홍증식 등에게 그해 4월 18일의 미군기 동경 공습을 이야기하면서 일본기의 낙후함, 기술의 저열함과 물자의 부족 등과 함께 조선독립의 필연성을 역설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여운형은 1943년 7월 2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고 석방되었으나 일제의 끈질긴 전향강요와 회유에 직면해야 했다. 그는 서대문형무소에 있는 동안 비밀항일조직에 대한 구상을 본격적으로 다졌다. 전황이 일제에 비세로 기울고 있는 상황에서 확실한 비합법조직을 통해 독립과 건국을 위한 준비에 착수해야 한다고 마음을 굳혔고 그렇게 해서 건국동맹이 탄생하게 되었던 것이다.

일제말기 일제의 패망과 조선독립이 가시화되고 있었지만 국내에서는 민족의식을 가진 청년학생들이 항일운동가의 조직적 지도를 받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이들은 자발적으로 소규모 비밀결사나 독서모임 등을 꾸려 반일활동을 모색하게 되었다. 이들 중에 일부는 개별적으로 또는 집단적으로 과거의 명망운동가들을 찾아다니면서 지도를 받고자 했다. 국내에서는 주로 여운형, 안창호, 이광수 등이 그 대상이었다. 물론 해외까지 포함하면 만주의 김일성을 찾아가서 항일무장투쟁에 가담하겠다고 하는 경우가 가장 많았고, 충칭임시정부의 김구를 찾아가겠다는 이들도 종종 있었다. 김원봉이나 이승만이 거론되기도 했으나 널리 알려지지는 않았다. 국내에서 민중계몽운동을 하고자 한 청년들은 이광수의 소설에서 많은 영향을 받고 그를 직접 방문했다가 실망하고 돌아서는 경우가 많았고, 안창호를 비밀리에 방문하는 경우도 있었다.

▲ 1935년경 안창호(중앙), 조만식(우)과 함께 한 몽양(좌)(사진=한국일보 자료사진)

하지만 안창호는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체포되어 고문을 받은 후유증으로 1938년 3월 10일 경성제국대학 부속병원에서 사망했고, 이후 이광수는 변절해 노골적인 친일행위에 앞장섰다. 이렇게 되면서 1940년대 국내에서는 청년학생들 사이에 여운형에 대한 인지도가 높아졌고, 독립 후 지도자로 적합하다는 인식이 확산되었다. 1944년 10월 노동자 전규홍은 “독립이 되면 우리의 지도자는 여운형이 가장 적격자”라는 발언을 했다가 검거되었는데, 이런 예들이 적지 않았다. 당시 국내에 있던 인사들 중에서 가장 존경받는 인물은 여운형이었다는 증거가 상당히 많이 여러 곳에서 드러나고 있다.(주6)

1940년 3월 한 모임에서 조세경(22세, 농업)과 송정섭(24)이라는 청년 사이에 논쟁이 벌어졌다. 조세경이 “현재 조선에는 독립운동의 선두에 일어나 대중을 지도할 수 있는 인물이 부족하다”라고 하자 송정섭이 이렇게 반박했다.

“아니다. 현재 일본 관헌의 탄압으로 표면에 나서지 못해도 경성의 여운형을 비롯해 쟁쟁한 민족주의자가 있고, 또 국외에는 상해에 한국임시정부가 활동하고 게다가 만주에는 김일성 등이 조선독립의 기회를 엿보고 있고, 조선 내에도 이를 바라는 동지가 다수 있어서 기회만 도래하면 내외가 서로 호응하여 봉기할 것이다.”(주7)

1940년대 여운형은 조선국내의 청년들로부터 깊은 존경과 기대를 받고 있었고, 대중적으로도 가장 널리 알려진 인물이었다. 그가 대중적으로 알려지게 되는 것은 조선중앙일보 사장, 조선체육회 이사 등 여러 가지 합법적인 사회 활동을 전개한 것과도 무관하지 않았다. 그는 사회적 활동과 함께 수차례의 기고를 통해 총독부당국의 식민정책을 비판했으며, 언론활동뿐만 아니라 수많은 스포츠 활동과 강연, 결혼주례 등을 통해 대중과의 접촉면을 넓혔다. 이런 과정을 통해 그는 독립운동가로서 뿐만 아니라 대중정치가로서의 이미지도 높여갈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1940년대에는 ‘중국통’이라는 일제당국의 평가로 인해 여러 차례 군부·정계 등 도쿄의 유력자들과 만남을 가질 수 있었고, 장제스·왕징웨이 등과의 대중 화평교섭에 나서줄 것을 제안받기도 했다. 그는 이러한 제안들을 모두 거부했지만 이 과정에서 전쟁 상황 및 정치 정세를 상세히 알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그 때문에 그는 언론이 통제되고 언로가 막혀 있던 전시군국주의 체제 아래서도 해외 독립운동가 못지않은 정세파악 능력과 식견을 가질 수 있었다.(주8)

▲ 조선중앙일보 사장 시절의 여운형(1934년경)(사진=위키백과)

조선민족해방연맹으로 건국동맹의 기초를 다지다

여운형은 이러한 과정을 통해 일제의 패망이 목전에 닥쳐왔다고 판단하고 해방에 대비한 비밀결사조직을 준비하였다. 1943년 8월 10일 경성요양원에서 몽양과 뜻을 같이하는 일단의 애국자들이 모였다. 상해시절부터 혁명운동의 죽마고우였던 노회한 공산주의자 조동호, 부산인근에서 명망이 높았던 이상도, 와세다 대학 농구선수 출신으로 일본체육회의 첫 조선인 이사였던 이상백, 공산주의자 최흥국·구소현, 그리고 몽양의 열렬한 추종자로 해방 후 청년운동 지도자가 되는 전사옥 등이 포함되었다. 이들은 일제의 패망과 조선 해방이 예견되는 정세에 따라 조선민족해방운동의 새로운 조직체를 결성하기로 하고, 이를 통해 건국을 준비해나가자고 결의했다. 이를 위해 ‘조선민족해방연맹’을 즉각 조직하기로 했으며 이는 1944년 8월에 결성된 ‘조선건국동맹’의 출발점이 되었다.(주9)

조선민족해방연맹은 1943년 8월 10일 결성하기로 결의했지만 이때 조직이 만들어진 것은 아니었다. 조선민족해방연맹은 조직체계가 세워지고 실체가 만들어진 것은 아니었고, 조선건국동맹이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기 위한 준비 과정에서 있었던 선언적 과도조직이었던 것이다. 조직 작업은 두 가지 방향에 중점을 두어 진행했다. 하나는 먼저 상부조직을 꾸리고 국내의 하부조직을 구축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해외의 독립운동단체, 항일투쟁단체들과 연계해 전민족적 연합전선을 꾀하는 것이었다.

▲ 해방을 앞둔 1944년 서울 운니동에서 동지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여운형(사진=한국일보 자료사진)

그러나 비밀결사 조직 작업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일제의 감시망이 심해 이를 피하기도 어려웠을 뿐만 아니라 일제의 사상범 통제정책으로 전향이나 변절하지 않은 독립운동가를 찾아내기가 쉽지 않았다.

1936년 12월 12일 조선사상범보호관찰령이 공포, 시행되면서 사상범에 대해 거주와 취직, 여행의 자유가 제한되었고, 다른 사람과의 접촉과 편지로 통신하는 것까지도 제한을 받았다. 치안유지법 위반자 중 집행유예나 형기가 만료되어 출소한 경우 보호관찰처분을 내릴 수 있었고, 그들을 감시하기 위해 경성부, 대구, 광주, 평양, 신의주, 함흥, 청주에 사상범보호관찰소가 세워졌다. 1938년 7월에는 사상범을 조직적으로 감시, 통제하기 위해 사상전향자들을 모아 ‘시국대응전선(全鮮)사상보국연맹’을 결성했다. 1941년 1월에는 사상범을 보다 체계적으로 통제하기 위해 사상보국연맹을 대화숙(大和塾)으로 개편했다. 1943년 10월 대화숙은 91개 지부로 확대되었고, 조직 가담자도 5,400여명으로 늘어났다.

1941년 2월부터 일제는 ‘조선사상범예방구금령’을 시행했다. “전향 가능성이 없거나 보호관찰이 불가능한 사람을 2년간 예방구금소에 수용할 수 있으며 그 기간은 재판소의 결정에 따라 연장할 수 있다”는 내용으로 되어 있었다. 이로써 일제는 언제든지 사상범에 대해 재범이나 도주의 우려를 이유로 예방구금소나 감옥에 수용할 수 있게 되었으며 그 기간도 얼마든지 연장할 수 있었다. 만일 전쟁이 일찍 끝나지 않고 오랫동안 지속되었다면 일제가 이들 사상범들을 그냥 두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았는데, 결국 이같은 악랄한 일제의 통제방식은 해방 후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국민보도연맹 결성과 6.25전쟁 직후 대량학살로 이어졌다. 대한민국 정부 아래서 국민보도연맹을 결성하고 운영한 이들은 바로 이 시기 일제경찰과 검찰에서 활동하고 있던 인물들이었다.(주10)(아래 <표> 참고)

<표> 보도연맹 최고지도위원의 해방 전후 경력(주11)

이름

출생ㆍ학력

일제강점기 경력

전쟁 전후 경력

출전

이태희

출생(1912.11.8, 평남 강동)

일본 동북제국대학 법과 졸업(1938)

일본 고등문관시험 사법과 합격(1939)

대검찰청 검사(1948)

법무부 법무국장(1949)

서울지방검찰청 검사장(1949)

부산지방검찰청 검사장(1950)

변호사 개업(1951)

이화여대 법정대학장(1951)

예일대 법과대학원 수료(1953)

검찰총장(1960)

법률실무연구회, 󰡔法曹人士實典󰡕, 법조문화사, 1977, 357쪽.

장재갑

출생(1911.2.9, 평북 용천)

일본 고등문관시험 사법과 합격(1941)

대구지법 사법관 시보(1942), 경성지법 검사(1944)

광주지법 검사(1945)

미군정청 사법부행형과 사무관(1946)

미군정청 사법부 감찰국 검찰관(1946)

서울지검 부장검사(1948)

서울지검 차장검사(1949)

변호사 개업(1951)

서울지검 검사장(1955)

변호사 개업(1958)

법률평론사편찬위원회, 󰡔法曹名鑑󰡕, 법률평론사, 1963, 106쪽;

법률실무연구회, 󰡔法曹人士實典󰡕, 법조문화사, 1977, 381쪽.

오제도

출생(1917.11.15, 평남 안주)

일본 와세다대학 법률과 졸업

신의주지방법원 검사국 판임관 견습(1940)

미군정 사법부 총무국 인사과장(1946)

서울지방검찰청 검사(1946), 서울지방검찰청 부장검사(1950.1)

군검경합동수사본부 지휘관(1950.10)

체포령으로 지하생활 10개월(1952)

국립공무원연수원 강사(1955)

서울고등검찰청 검사(1956)

대검찰청 검사(1957)

변호사 개업(1960)

대한민국건국십년지간행회, 󰡔대한민국건국10년지󰡕, 건국기념사업회출판부, 1956, 1043쪽;

조선총독부, 󰡔조선총독부 및 소속기관 직원록(1940)󰡕;

오제도, 󰡔공산주의ABC󰡕, 삼훈출판사, 1984.

선우종원

출생(1918.2.17, 서울)

평양고보 졸업(1936)

경성제대 법문학부 졸업(1942)

일본 고등문관시험 사법과 합격(1943)

경성제국대학 대학원 수료(1944)

평양지법 검사국 서기과 직원(1944)

서울지검 검사(1946)

법무부 검찰국 검찰과장(1948)

내무부 치안국 정보수사과장(1950)

국무총리 비서실장(1951)

한국조폐공사 사장(1960)

법률실무연구회, 󰡔法曹人士實典󰡕, 법조문화사, 1977, 226쪽;

김태청, 󰡔법복과 군복의 사이󰡕, 원경, 2001, 130쪽.

김태선

(金泰善)

출생(1903.5.18, 함남 원산)

평양숭실중학 졸업

교육계에 종사

도미 유학

(1926.8.11)

미국 시카고 서북대학 영문과 수료

미국 일리노이 웨슬리안대학 범죄학ㆍ사회학 BA학위 수여

보스턴대학 종교사회학 학위 수여

귀국(1937.9.21)

미군정 경무부 수사국장(1946)

수도경찰청장(1948)

서울시경찰국장(1949)

치안국장(1950)

서울시장(1951)

내무부장관(1952)

서울시장(1952)

강진화, 󰡔대한민국인사록󰡕, 내외홍보사, 1950, 45쪽;

동아일보, 1926.8.18;

신한민보, 1937.6.17;

동아일보, 1937.9.22;

서울신문, 1946.12.8;

동아일보ㆍ서울신문, 1948. 9. 4;

독립신문, 1949.1.19;

연합신문, 1950.4.25;

조선일보, 1951.10.13;

조선일보, 1952.7.26;

민주신보, 1952.8.31.

최운하

출생(서울)

총독부 경무국 보안과 촉탁(1937~1939)

경무국 보안과 통역생(1940)

경무국 보안과 고등경찰(1941~1945)

종로경찰서 고등계 주임(1945)

서대문경찰서장(1945)

경기도 경찰부 사찰과장(1946)

수도경찰청 사찰과장(1947)

수도경찰청 감찰과장(1948)

서울경찰청 사찰과장(1949)

서울경찰국 경무국장(1950)

납북(1950)

조선총독부, 󰡔조선총독부 및 소속기관 직원록󰡕, 1937ㆍ1938ㆍ1939, 반민족문제연구소, 󰡔청산하지못한 역사󰡕3, 청년사, 1994, 126~139쪽;

동아일보, 1947.12.11;

국제신문, 1948.11.10;

아일보, 1949.6.8;

조선일보, 1950.11.10

1940년 초반 일제가 작성한 ‘요시찰요주의’ 인물명부에 따르면 7,600여명의 요시찰인물 중 1,280명이 전향했고, 중일전쟁이 일어난 직후 2년 동안 1,796명이 전향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 중에는 위장전향자도 있었겠지만 민족적 지조를 지키는 애국자가 점점 줄어들고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주12) 이런 상황에서 진정한 애국자를 찾아내어 비밀항일결사 조직에 묶어세우는 작업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처럼 위험하고 힘든 상황을 ‘건국동맹’의 한 관련인사는 이렇게 언급했다.

“먼저 국내에서 동지들을 규합하는 게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당시 웬만한 사람들은 다 형무소에 들어가 있거나 예방구금에 걸려들었고 나와 있던 사람들이라도 산골에 깊숙이 처박혀 오소리처럼 숨어 지냈지요.

합법적으로 활동한 사람들은 ‘대화숙’에 가담해 식량영단이요, 포목조합이요, 무슨 조합이요, 농촌진흥회요, 경방단이요, 협의회요 하는 친일관변단체에 참가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때문에 동지들을 규합한다는 게 보통일이 아니었습니다. 누가 진짜 변절했는지 일제의 주구인지, 누가 가짜로 변절했는지 알 수 없었지요.

국내의 흩어져 있던 동지들, 반일운동가들, 애국자들이 누군가를 알아보고, 그들이 어디에 있는가를 찾아내어 연결해야 했는데 일제의 감시가 워낙 심한 탓에 행동이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습니다. 합법적 운동시기라면 기차타고 찾아가 만날 수도 있겠지만 당시는 엄혹한 비합법 운동시기였던 겁니다.”(주13)

건국동맹의 조직 작업에서 활약했던 인물들

여운형이 구상한 비밀결사체의 조직 작업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한 것은 조동호와 이림수였다.

1892년생인 조동호는 몽양보다 6살 아래였지만, 10대 때부터 여운형과 사귀기 시작해 평생을 함께한 동지이자 죽마고우였다. 그는 상해로 망명한 뒤 동제사, 신한청년당, 상해 임시정부, 이르쿠츠크 고려공산당, 한인노병회 등의 활동을 여운형과 함께했다. 1923년 국내로 돌아온 조동호는 조선공산당(1차) 창당 작업에 관여했다가 1928년에 체포되어 4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했다. 1933년 중앙일보를 인수, 조선중앙일보로 개칭하고 편집고문이 되어 여운형을 사장으로 영입해 전국적인 신문으로 키웠다. 1933년 11월 청년들을 중국으로 보내 독립운동에 가담시키려던 사건이 발각되어 일제경찰에 체포되어 신의주형무소에서 2년5개월간 복역했으며, 출소 후 요시찰인으로 지정되어 경북 봉화에서 은둔, 칩거하며 지냈다. 그러다가 1943년부터 여운형과 함께 건국동맹을 조직하는 작업의 최일선에서 활동하던 중 1945년 8월 4일 부민관 폭파 사건으로 일제 경기도 경찰부에 체포되어 수감되었다가 1945년 8월 16일 출옥했다.

이림수는 춘천에서 관동병원을 경영하던 의사로 몽양에게 인간적으로 매료되어 열렬한 추종자가 된 인물이다. 이림수의 아들 이란(李欄) 역시 애국소년으로 몽양의 영향 아래서 당시 춘천중학교에서 독서서클을 만들어 활동하다가 1941년 3월 검거, 투옥되었다. 이림수는 한국전쟁 와중에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하였다.(주14)

이들은 조직사업에 나서면서 보통 무명을 파는 보따리 장사로 위장하고 다녔다. 전라도로 갈 때는 무명을 사러가는 것으로, 함경도로 갈 때는 무명을 팔러가는 것으로 여행허가를 받았다. 때로는 약장사로 위장하기도 했다. 이처럼 다양한 방법으로 1년 동안 노력을 기울여 조직을 해나갔다. 1944년 4월에는 많은 사람들을 모으기 위해 몽양의 환갑잔치까지 조작했다. 몽양은 1886년생으로 1946년이 환갑이었고 실제로 그때 환갑잔치를 제대로 하게 된다. 하지만 몽양은 1944년에 2살 나이를 속여 잔치를 벌였던 것이다.(주15)

해외는 더욱 어려웠다. 합법적인 명칭을 내걸지 않고는 만주 같은 곳에 갈 수가 없었다. 표면적으로 일제를 등에 업고 내용적으로 반일운동을 위해 갔던 것이다. 만주에서는 최근우가 관변단체인 협화회에 들어가 있어서 그를 통해 조직결성 작업을 진행했다. 북경과 내륙지방에서는 이상백이 맡아서 작업을 진행했다. 연안의 경우는 이영선이 주로 활약했다.

▲ 여운형의 오랜 동지였던 조동호. 건국동맹의 핵심 조직가였다.(사진=한국학중앙연구원)

최근우는 임시정부에도 관여하였고, 일제시기부터 해방 후까지 시종일관 몽양의 노선을 추종했다. 그는 만주협회 이사로 있었던 탓에 친일파 혐의를 받기도 했으나 독립운동을 위한 위장이었다. 그는 몽양 암살 후 이승만 정권 아래서 회유도 여러 차례 받았으나 응하지 않아서 고초를 겪었고 4.19 이후 혁신세력을 결집하기 위해 사회당을 창당했으나 5.16쿠데타 후 체포, 수감되었다가 1961년 8월 옥사했다.

와세다 대학 농구선수 출신의 이상백은 1939년 6월부터 와세다 대학 해외 파견 연락원 자격으로 북경·만주·연안 등지로 왕래하며 여운형의 연락원 역할을 했다. 그는 한국 사회학계의 창시자이자 IOC 위원으로 활동했다. 5.16 후 혁명검찰부 부장을 지낸 박창암이 그의 조카사위이기도 하다. 이영선은 연희전문 운동선수 출신으로 육척거구였다. 그는 조선중앙일보 특파원을 거쳐 당시 북경에서 주로 국내운동세력과 화북조선독립동맹을 연계해주는 연락원 역할을 했다. 소설가 김사량이 그의 도움으로 북경을 거쳐 팔로군 해방구로 화북조선독립동맹을 찾아갈 수 있었다.(주16)

만주 봉천군관학교(7기) 출신의 만주군 항공 조종사 박승환도 몽양이 조직한 건국동맹의 비밀조직원으로 활동했다. 여운형의 영향으로 봉천군관학교에 입학했다는 설이 있고, 졸업 후 독자적으로 여운형을 찾아왔다는 설도 있다. 건국동맹 군사조직을 담당하면서 신병 치료를 위해 연안·북경·서울을 수차례 왕래했다. 1944년 1월 국내에 잠입해 그해 여름 팔당에서 건국동맹원들과 군사조직 문제를 논의했다. 1944년 11월 만주에서 만군 관계자들과 군사행동을 결의했고, 1945년 2월 재차 국내에 잠입했다. 1945년 2월〜7월 연안에 체류했으며 해방 후 일본군용기를 타고 귀국했다고 한다.(주17)

▲ 와세다 대학 농구 선수 출신으로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을 지낸 사회학자 이상백은 여운형의 건국동맹 조직원이었다.(사진=한국일보)

건국준비위원회의 기반이 된 통일전선조직

건국동맹은 1944년 8월에 조직되어 1945년 8.15 해방 때까지 약 1년 정도 존속하며 활동했다. 건국동맹이라는 명칭을 붙인 것은 일제의 패망이 기정사실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반일투쟁이나 해방투쟁에 중점을 두기보다는 해방 후 건국 사업을 위한 준비에 초점을 맞추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해방동맹, 해방연맹, 독립동맹 등의 반일투쟁에 중점을 둔 조직 명칭도 검토되었으나 건국동맹으로 한 것은 앞날을 내다본 몽양의 선견이라고 할 수 있다.

▲ 일제 주요감시대상 인물카드 여운형 전후면(1930서대문 형무소에서 작성)(사진=국사편찬위원회)

건국동맹의 목적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패망을 앞둔 일제에 결정적 타격을 가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다가올 해방정국을 보다 주체적이고 주동적으로 맞이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광범위한 민족세력을 결집하는 것이 필요하고, 이를 위해서는 민족통일전선의 입장에서 조직을 해야 했다. 1944년 10월 건국동맹은 이같은 목적을 위해 다음과 같은 세 가지의 강령을 채택했다.

1) 각인각파를 대동단결하여 거국일치로 일본제국주의 제 세력을 구축하고 조선민족의 자유와 독립을 회복할 일.
2) 반추축 제국과 협력하여 대일연합전선을 형성하고 조선의 완전한 독립을 저해하는 일체 반동세력을 박멸할 일.
3) 건설 부면(部面)에 있어서 일체 시위를(施爲)를 민주주의적 원칙에 의거하고 특히 노농대중의 해방에 치중할 일.(주18)

여기서 알 수 있듯이 건국동맹은 개인과 당파에 관계없이 각계각층을 망라, 민족적 대동단결을 이루어 일본제국주의를 몰아내고 민족의 자주독립을 달성하는 것을 가장 중요한 목표로 삼았다. 이러한 내용은 해방 후 결성되는 건국준비위원회와도 같은 것이었다.

▲ 배화여고 교무주임 시절의 이만규(1929). 유명한 교육운동가이자 교육자였던 이만규는 친이승만 조직이었던 ‘흥업구락부’ 부원이었는데 일제 말기 여운형이 조직한 건국동맹의 핵심 조직원이었다.(사진=박용규/한국교육신문 2019.5.22)

건국동맹은 1년여의 기간 동안 중앙조직과 지방조직을 꾸리고, 각계각층을 망라하기 위한 부문별 조직을 마련했으며, 해외혁명단체들과 연락·연대를 위한 활동을 진행했다. 큰 틀의 조직체계는 만들었지만 강력한 하부조직 역량을 마련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각 계급·계층별 조직을 구축하기 위한 다양한 노력과 함께 해외독립운동단체들과의 연대사업에서 일정한 성과를 거둠으로써 민족통일전선체로서의 성격에 어울리는 모습과 행동을 실천했다. 이러한 활동 경험과 조직적 기초가 있었기에 해방 후 몽양을 중심으로 빠른 시일내에 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해내고 대중단체들을 이끌어낼 수 있었다.(주19)

▲ 오랜 친구이자 동지이자 사돈이었던 이만규가 쓴 『여운형선생투쟁사』(1946, 민주문화사)

건국동맹에는 농민, 노동자, 청년, 학생, 교사, 군인, 회사원, 학병·징용·징병 거부자, 의사, 한의사, 화가, 작가, 기자 등 다양한 계급과 계층의 인물들이 두루 망라되었다. 이념적으로 공산주의자에서부터 민족주의자에 이르기까지 스펙트럼이 넓었으나 공통점은 민족해방의 대의에 공감하는 사람들이었다. 혁명가들이 모인 전위조직은 아니었으나 그 분야에서는 민족적 양심을 지키고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해낼 수 있는 역량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중앙부서(위원장, 내무부, 외무부, 재무부)와 지방조직(충청남북도, 경상남도, 경상북도, 강원도, 전라남북도, 황해도, 평안남도, 평안북도, 함경남도, 함경북도), 계급·계층별 조직(농민동맹, 학병·징병·징용거부자조직, 청년·학생조직, 군사조직, 노동자·부녀자·사무원조직)을 구성하고, 해외독립운동단체와의 연락·연대 활동을 폈으나 조직기반이 튼튼했다거나 해외연대 활동에서 획기적인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그러나 이러한 조직 준비 및 다양한 활동 경험은 해방 후 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하고 여운형이 최고의 대중지도자로 부각되는데서 중요한 밑바탕이 된 것은 분명하다.(주20) 국내에서는 유일하게 준비된 혁명가, 민족운동 지도자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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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1) 변은진, 1932〜1945년 여운형의 국내활동과 건국준비, 한국인물사연구 제21호, 2014.3, 491〜492쪽

2) 정병준, 조선건국동맹의 조직과 활동, 한국사연구 80, 1993년 3월, 94쪽

3) 김준엽, 『장정 1』, 나남, 1987, 49쪽

4) 정병준, 위의 글, 93〜94쪽

5) 정병준, 위의 글, 94〜96쪽

6) 변은진, 위의 글, 495〜497쪽

7) 변은진, 『파시즘적 근대체험과 조선민중의 현실인식』, 선인, 2013, 477쪽 재인용

8) 변은진, 위의 글, 500쪽

9) 정병준, 『몽양 여운형 평전』, 한울, 1995, 75〜76쪽

10) 임영태, 『한국에서의 학살』, 통일뉴스, 2017, 199〜203쪽

11) 진실화해위원회, 「국민보도연맹」, 『2009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7』, 2020, 339~340쪽

12) 정병준, 위의 책, 77쪽

13) 정병준, 위의 책, 76〜77쪽 재인용

14) 정병준, 위의 책, 78쪽

15) 정병준, 위의 책, 78쪽

16) 정병준, 위의 책, 79쪽; 김사량/ 책임편집 이상경, 『노마만리』, 동광출판사, 1989, 259〜277쪽

17) 정병준, 조선건국동맹의 조직과 활동, 한국사연구 80, 1993년 3월, 107〜108쪽

18) 이만규, 『여운형투쟁사』, 민주문화사, 1946, 170쪽; 정병준, 위의 글, 103쪽 재인용

19) 정병준, 위의 글, 105쪽

20) 건국동맹의 조직 상황에 대해서는 정병준, 위의 글, 105〜133쪽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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