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석근 / 시인

 

필자의 말

안녕하세요?
저는 아득히 먼 석기시대의 원시부족사회를 꿈꿉니다.
사람과 사람, 사람과 천지자연이 하나로 어우러지던 눈부시게 아름답던 세상을 꿈꿉니다.
인류는 오랫동안 그런 세상을 살아왔기에
지금의 사람이 사람을 죽이고, 천지자연을 황폐화시키는 세상은 오래 가지 않으리라 믿습니다.
또한 우리에게 지금의 고해(苦海)를 견딜 수 힘이 있으리라고 믿습니다.
저는 그 견디는 힘으로 ‘詩視한 세상’을 보고 싶습니다.
원래 시인인 ‘원시인’의 눈으로 보면 우리는 이 참혹한 세상에서 희망을 볼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먼 길
- 윤석중

아기가 잠드는 걸
보고 가려고
아빠는 머리맡에
앉아 계시고,

아빠가 가시는 걸
보고 자려고
아기는 말똥말똥
잠을 안 자고.

 

말을 잘 안 듣는 아이 둘을 발가벗겨서(교육을 위해) 산 속에 내버렸다는 비정한 어머니의 기사를 읽었다.

그 아이들은 산 속에서 내려오며 온 몸이 피투성이가 되었다고 한다. 간신히 등산객에게 발견되어 무사히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고 한다.

“어찌 엄마라는 사람이 이럴 수가?” 사람들은 경악했다(우리 뇌리에 박힌 엄마는 얼마나 성스러운 존재인가!).

강의 시간에 엄마들의 아이 양육에 대해 솔직한 얘기들을 들어보았다. 다들 “너무나 힘들었다”고 한다. 한 엄마는 아이를 침대에 내던졌다고 한다. 한 엄마는 칭얼거리는 아이 옆에서 울면서 친정어머니에게 도와달라고 전화했다고 한다.

이게 우리의 현실이다. 아이를 부모가 기른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아이는 필연적으로 상처를 크게 받을 수밖에 없다.

누구나 부모에게는 자식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보물인데.

먼 길을 떠나는 아빠는 발걸음이 떼어지지 않는다.

‘아기가 잠드는 걸/보고 가려고/아빠는 머리맡에/앉아 계시고,//아빠가 가시는 걸/보고 자려고/아기는 말똥말똥/잠을 안 자고.’

인류의 이상향 ‘오래된 미래’의 라다크에서는 아이가 태어나면 마을 전체가 아이를 돌본다. 아이는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다. 마을 아이들과 함께 자란다. 형은 아우를 돌보고 아이는 형이 되어 아우를 돌본다. 남을 돕는 마음이 몸에 밴다.

그래서 그들은 마음의 상처가 없다. 서로 사랑을 나누며 살기에 정신 질환이 거의 없다. 삶을 한껏 누리고 천수를 다한다.

부모 둘이서 아이를 기르면 우선 체력적으로 사랑을 듬뿍 주며 기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부모는 부모대로 사는 게 얼마나 고달픈가!

부모는 인생을 먼저 살아보았기에 나름의 교육관이 있다. 그래서 “너는 나처럼 살면 안 돼!” 아이를 닦달한다. 사랑을 가장한 폭력이 난무한다.

그리고 부모는 자신을 아이에게 투사한다. 자신의 약점을 지닌 아이에게 어쩔 수 없이 미움이 간다.

여기 저기 ‘좋은 부모 교육’을 한다. 불가능한 것을 그럴 듯하게 포장하여 (여러 교육 이론을 짜깁기하여) 부모를 현혹한다.

잠시 부모들은 ‘아이를 잘 기르자!’ 결심을 한다. 작심삼일이다. 죄책감만 늘어간다.

정말 좋은 부모가 되려면, 자신을 꾸준히 가꾸어가는 ‘수도자’가 되어야 하는데 현대 무한 경쟁의 신자유주의 사회에서 이런 부모가 과연 가능할까?

이 땅의 미래를 이끌어갈 아이들을 위해서 다시 마을이 있어야 한다. 공동체의 회복, 아이 교육을 위해서는 이 길밖에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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