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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일곱째 이야기, 우리 동네 아는 형님(1)<정해랑 연재소설> 노동자 신돌석씨의 하루 (37)
정해랑  |  jhr1376@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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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20.08.01  09:2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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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해랑 / 주권자전국회의 공동대표, 21세기 민족주의포럼 대표
 

연재를 다시 시작하며

58년 개띠 노동자 이야기를 다시 하려고 합니다. 잠시 쉰다는 것이 1년을 넘겨 버렸습니다. 그 동안 우리의 주인공 신돌석씨도 많은 일을 겪었습니다. 세상은 많이 변한 것 같은데 어찌 보면 완강하게 버티며 변하지 않는 것 같기도 합니다. 변한 것은 무엇이고, 변하지 않은 것은 무엇인지, 그보다도 변해야 할 것은 무엇이고, 변하지 말아야 할 것은 무엇인지를 소소한 일상을 통해 그려 보고자 합니다. 통일뉴스 독자 여러분들의 많은 응원과 질책을 부탁드립니다. / 필자

 

   
▲ [삽화-백소(白笑)]

사람의 인연이란 것은 참으로 알 수 없다. 옷깃을 스쳐도 인연이라고 하는데 수십 년 전 한 동네 살았던 사람을 다시 만나고, 그 사람이 지금 한 동네서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희한하게 느껴지는 일이었다. 이 정도 되면 전생에 뭔가 떼려야 뗄 수 없는 인연이 있었다는 말일 텐데 신돌석씨가 오늘 경수형을 만난 일도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 일이었으리라.

신돌석씨는 경수형을 국회 앞에서 만났을 때 처음에는 긴가 민가 했고, 조금 있다가는 눈을 의심했다. 그가 국회 앞에서 피켓을 들고 1인 시위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월남참전개혁연대라는 이름으로 피켓을 들고 땡볕 앞에 서 있는 사람은 틀림없이 경수형이었다. 세월이 흘러서 이제는 70을 훌쩍 넘긴 나이고, 8월의 땡볕 아래라서 모자와 마스크를 쓰고 있었지만 얼굴을 쉽게 알아 볼 수 있었다.

지금은 경수형이라고 부르지만 사실 처음 봤을 때는 경수 아저씨였다. 신돌석씨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성남 은행동 부근에 살면서 작은 공장에 다니다 말다 할 때 앞집에 살던 사람이었다. 그때 바구니를 만드는 일을 해서 ‘바구니 아저씨’라고 불렀다. 본인이 없을 때는 그냥 ‘바구니’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는 술을 좋아했고, 입담이 좋아서 술좌석을 온통 휘어잡는 사람이었다. 어느 날 술을 마시다 그가 별안간 형이라고 부르라고 했다. 술김에 그러마고 했는데 그 뒤 아저씨가 형이 되어 버렸다.

경수형이 월남 갔다 온 것은 확실했다. 그때 술만 마시면 베트콩과 싸우던 이야기를 했었다. 하지만 개혁연대라는 이름의 단체에서, 그것도 1인 시위를 한다는 것이 왠지 그와 어울리지 않게 느껴졌다. 그는 70대의 우리 나이 남자들이 보통 그렇듯이 가부장적이고, 국가에 충성한다는 것을 반공 이념으로 알고 살아온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어떻게 이 땡볕에서 1인 시위를 하고 있는 것일까?

“돌석이, 오랜만이네. 이게 얼마 만이냐? 40년도 넘었제. 아니 그 사이 한두 번 보기는 했구나.”

그도 신돌석씨를 대번에 알아보았다. 신돌석씨가 다가가자 모자와 마스크를 벗으며 자신을 알리려고 했다. 처음에는 좀 쑥스러운 듯하던 그가 잘 지내냐고 하더니 자기가 왜 이걸 하는지 열심히 설명을 했다. 이전에 들은 적이 있기는 하지만 잘 모르는 내용이었다. 참전군인들에게 전투수당을 주지 않았다고 하고, 이른바 브라운 각서라는 데 따라 미국으로부터 받은 돈이 다 어디로 갔단다. 이런 것들에 대해 법을 제정해서 처리할 것을 요구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신돌석씨에게는 무엇 때문에 여기 왔냐고 물었다. 하긴 그가 보기에도 고등학교 졸업하고 공장을 들락날락 하던 녀석이 국회 앞에는 무엇 때문에 왔을까 의아하기는 했을 것이다. 오늘 신돌석씨는 국회 앞에서 농성과 1인 시위를 하는 사업장을 응원하러 왔다. 한국노총 산하 사업장이라서 금속노조 차원에서 지지하는 것은 아니었다. 코로나19를 핑계로 대량해고를 하더니 그에 항의하는 파업을 하니까 회사 문을 닫겠다고 한 중소기업이었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1인 시위를 해서 그런지 경수형은 이 회사 사람들과 잘 아는 듯하였다. 거기 사무장이 신돌석씨와 한 공장에 다니던 사람이었다. 그가 농성과 1인 시위를 한다는 소식을 같은 공장에 다니던 사람들한테 듣고는 한번 시간을 내서 가겠다고 하고 온 것이었다. 사무장을 가리키면서 경수형은 젊은 사람들이 고생이 많다고 하였다. 이제는 노조의 투쟁도 좋게만 보이는 모양이었다.

   
▲ [삽화-백소(白笑)]

40년 하고도 3년이 더 지난 것 같다. 신돌석씨가 고교를 졸업하고 백수로 지낼 때였다. 그보다 2년 전에 신돌석씨는 서울 망태산 동네에서 철거당하고 받은 딱지를 팔아서 성남으로 이사 왔다. 이때 이미 어머니, 아버지 다 돌아가시고, 형과 선옥이와 셋이 살았다. 처음에는 단대동에 살았다. 먼 데로 이사 가니 집을 살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부족해서 전셋집을 하나 얻었다. 형은 성남 상대원에 있는 공단에서 취직을 하였고, 신돌석씨와 선옥이는 학교를 다녔다.

지금은 성남을 못 사는 사람이 사는 곳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때만 해도 안 그랬다. 일단 수도가 제대로 보급되지 않았다. 망태산 산동네에도 수도는 들어왔었다. 물이 잘 안 나올 때는 아래 동네로 내려가서 공동수도를 사용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 처음 이사 간 단대동에는 펌프가 마당 한 가운데 있었다. 망태산에 살 때 아주 어렸을 적에 보고는 못 본 것이었다. 겨울에는 얼지 않게 물을 빼야 하고, 마중물을 넣어서 물을 끌어올리는 것도 그때 알았다.

그렇게 열악한 곳인데도 서울에서 철거당하거나 싼 집을 찾는 사람들이 성남으로 몰려들더니 전세비가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래서 다시 이사 간 곳이 은행동, 남한산성 바로 밑이었다. 거기서는 빈대를 만났다. 빈대는 신돌석씨 세대는 거의 겪어 보지 못한 것이었다. 시골에서는 몰라도 서울에서는 아무리 산동네라도 빈대는 없었다. 50년대까지 들끓던 빈대가 사라진 것은 연탄을 때기 시작한 때부터라고 한다. 연탄가스가 얼마나 치명적인 것인지 알 수 있다.

빈대에 대한 경험은 정말 끔찍했다. 이사 가고 첫날밤에 자고 있는데 간지러워서 도저히 잘 수가 없었다. 일어나서 불을 켰는데 아무 이상이 없었다. 그것이 바로 빈대 때문이라는 것을 이야기해 준 사람이 바로 경수형이었다. 경수형 말로는 그럴 때 베개를 들춰 보라고 하였다. 그러면 그 밑에 빈대가 있을 거란다. 그 말을 들은 날 그렇게 해보니 역시 빈대가 우글우글 하였다. 어찌나 재빠른지 한두 마리밖에 잡을 수가 없었다.

빈대가 사는 곳은 천장과 벽 틈새였다. 밤중에 가만히 있으면 벽을 타고 내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어느 정도 내려오면 점프를 해서 방바닥으로 떨어진단다. 경수형은 빈대를 탱크부대였다가 공수부대가 되는 놈들이라고 하였다. 유격전에 능해서 순식간에 사라진다나. 뭐든지 군대 이야기로 하는 버릇이 있는 경수형다운 설명이었는데 이해가 잘 되기는 하였다. 빈대를 잡을 때 피가 팍 번지면서 고약한 냄새가 났던 기억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밤이면 밤마다 형과 둘이서 빈대잡기를 했다. 신돌석씨가 베개를 들어올리면 형이 치는 그런 식이었다. 그러다 약을 쳤는데, 빈대가 얼마나 독한지 사람이 함께 죽는다고 하여 며칠 나가서 자야 할 판이었다. 빈대 죽이려다 초가삼간 태운다는 말이 실감이 갔다. 그밖에는 특별히 서울 변두리와 다른 것은 없었는데 서울 사람들은 성남 살면 무지하게 험한 데 사는 듯이 대했다. 신돌석씨가 이사 가기 몇 년 전에 광주대단지 사건도 있고 하여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굳어진 듯하였다.

고2 때였던 것 같다. 국어 선생님이 어디 사냐고 물어서 성남 산다고 했더니 니네 동네도 애들이 콘돔 갖고 노냐고 하였다.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었다. 그때만 해도 신돌석씨는 콘돔이 무엇인지도 몰랐고, 그것이 윤흥길의 소설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나이’에 나오는 내용이라는 것도 몰랐다. 애들이 와르르 웃었고, 뒤에 앉은 좀 껄렁한 녀석들은 콘돔이란 소리에 킥킥 대고 자기들끼리 수군댔다. 기분 더럽게 나쁜 날이었다.

집에서 학교까지 한 시간 좀 넘게 걸렸다. 그때 버스는 정말 말 그대로 만원이었다. 그래도 신돌석씨는 은행동에 살아서 앉아서 갈 수 있었다. 남한산성 밑이 종점이었는데 신돌석씨 집에서 한 정거장이었다. 걸어 올라가서 종점에서 탔다. 출근 시간에는 그마저도 길게 늘어선 줄을 기다려서 타야 했다. 그래도 앉아서 갈 수 있다는 것이 다행이었다. 단대동, 구 종점, 종합시장, 시청 앞 등에서 친구들이 한 사람씩 탔다. 물론 그 친구들은 모두 서서 가야 했다.

서울에서 성남에 들어오려면 고개를 둘 넘어야 했다. 하나는 수진리 고개이고, 또 하나가 시청 앞에서 종합시장으로 넘어오는 고개였다. 한번은 종합시장 지나 시청 앞 내리막길에서 사람을 태우고 좌회전을 하는데 갑자기 ‘아’하는 짧지만 강렬한 비명소리가 났다. 승객을 태운 뒤 한 손으로 바를 잡고 다른 한 손으로 문을 닫으려고 하던 안내양이 그만 바를 놓치고 떨어진 것이었다. 놀란 기사가 차를 세웠는데 차 뒷바퀴에 머리가 치여서 그만 목숨을 잃었다.

기사가 다음 차를 타라고 해서 모두 내려야만 했다. 궁금해서 다가가 보니 머리가 터져 있었다. 그날 학교에 가서 종일 그 장면이 머리에서 떠나지를 않았다. 다음 차에 간신히 탔는데 그 차의 안내양이 엉엉 소리 내서 울었다. 기사가 손님들 계시니 그만 울라고 해도 멈추지를 않았다. 같이 일하는 동료의 죽음이니 슬펐겠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런 식으로 죽을 수도 있는 자기 신세를 생각하니 눈물이 났을 것도 같다.

아침에 같이 차를 타고 갔던 친구들끼리 쉬는 시간에 모여 그 이야기를 해봤다. 우리와는 아무 관계가 없는 것 같지만 어찌 보면 이 많은 학생들 중에 우리는 왜 그런 꽉 찬 만원 버스를 오랜 시간 타야만 할까? 이런 비애감이 생겼다. 성남 사는 친구들 중에서도 일찍 집을 사서 들어온 집은 그런대로 나았다. 그런데 성남에서도 산동네인 달나라, 별나라 등에 사는 친구도 있었다. 신돌석씨는 그래도 전셋집에 사니 중간은 되었다.

   
▲ [삽화-백소(白笑)]

그 동네에서 경수형을 만났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백수 신세가 된 신돌석씨와 경수형은 곧잘 어울렸다. 지금 생각해 보면 형은 경수형을 별로 안 좋아했던 것 같다. 형과는 살아가는 방식이 전혀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고등학교 중퇴하고 공사판 다니다가 군대 가서 월남에 지원해서 갔고, 그 뒤 이런저런 막노동을 하며 살았다. 그때는 가내공장을 만들어서 바구니 만드는 일을 하고 있었다.

함께 어울리던 사람은 넷이었다. 신돌석씨와 경수형, 그리고 동네 반장이 있었다. 이 사람은 특전사 하사관 출신이었다. 또 한 사람은 서울에 있는 회사 다니던 사람이었는데 무슨 회사인지 어떤 일을 하는지는 알지 못했다. 회사원인 사람은 직장을 가야 하니 주말이나 저녁에 어울렸고, 경수형, 반장, 신돌석씨는 낮에 장기를 두고, 막걸리를 마시면서 어울리는 일이 많았다.

형은 신돌석씨가 대학에 가기를 원했다. 하지만 당시 신돌석씨네 형편으로 대학에 간다는 것은 어림없는 일이었다. 신돌석씨네서 돈을 버는 사람은 형이 유일하였다. 형은 금형기술이 있어서 취직은 잘 되는 편이었지만 뛰어난 기술은 아니었다. 그러므로 그저 박봉을 받는 정도였다. 그런 생각을 하면 형이 아무리 원한다고 해도 신돌석씨가 대학에 간다고 주장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아니 어쩌면 그건 핑계일 수도 있었다. 신돌석씨는 원체 공부에 흥미가 없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중3 올라가던 해 2월에 고교 평준화가 되었다. 신돌석씨는 공고를 지원했다. 당시는 1차에서 실업계를 뽑았다. 공고에 우수한 인력을 가게 하겠다는 박정희식 교육 정책이었다. 실제로 반에서 5등 이내인 친구들 중에도 공고나 상고에 많이 갔다. 그런 친구들이 나중에 대공장에 들어가서 노조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들도 있다고 들었다. 신돌석씨 동기 중에도 그런 친구들이 있었다. 물론 그 수는 손꼽을 정도이기는 했다.

1차에 지원하지 않거나 떨어진 사람이 2차를 지원해서 인문계를 가는 식이었다. 신돌석씨는 공고 시험에서 떨어지고, 2차 인문계에는 간신히 합격했다. 나중에는 고등학교가 늘면서 변한 것 같은데 당시에는 연합고사에 붙어서 1차 실업계나 2차 인문계에 가는 것이 쉽지는 않았다. 신돌석씨가 다니던 중학교에서 한 반에 절반 좀 넘게 합격하였다. 신돌석씨는 공고에 못 간 것이 얼마간 서운했지만, 형은 잘된 일이라고 하면서 고등학교 들어가면 공부 열심히 해서 대학에 들어가라고 했다.

하지만 고교 3년을 놀면서 보내고 결국 예비고사에 떨어졌다. 당시는 예비고사에서 두 지역에 응시하게 되어 있었다. 신돌석씨는 서울과 지방 어딘가를 지원했는데 지금은 어딘지도 잊어버렸다. 서울은 떨어지고 지방은 붙었다. 하지만 지방에 있는 대학을 갈 수도 없었다. 예비고사에 붙었다 해도 신돌석씨 실력으로는 등록금이 싼 국립대학은 어림도 없었다. 등록금도 문제지만 묵고 지낼 곳도 마땅치 않았다.

형은 재수를 해보라고 했지만 신돌석씨는 마음에 없었다. 빈둥대다가 전봇대에 붙어 있는 모집 공고를 봤다. 가방공장이었다. 거기 가서 시다 생활을 했다. 가내공장이었다. 1층에 공장이 있고, 2층에 사장 집과 노동자들이 묵는 방이 있었다. 기숙사라면 기숙사였다. 형한테 가방공장에 가겠다고 하자 한사코 말렸다. 서로 말이 안 되자 짐 싸 들고 가방공장 기숙사로 들어와 버렸다.

가방공장은 격주로 놀았다. 월급은 지금 기억으로 6만 원이었던 것 같다. 야근 수당도 없었다. 공장장이 야근이 필요하다고 하면 무조건 하는 것이었다. 아침 8시부터 일을 시작해서 저녁 6시에 끝나는데 5시쯤에 공장장이 사장 집으로 올라가면 야근하는 날이었다. 밥을 하라고 사장 마누라한테 이야기하러 가는 것이었다. 그러면 6시부터 밥을 먹고 7시부터 10시까지 야근을 하였다.

6만 원을 기억하는 것은 신돌석씨가 머리털 나고 처음 받는 월급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도 지금까지 잊어버리지 않은 것은 박정희가 죽었을 때 청와대 비밀금고에서 나온 돈이 9억 원인데 그 중 전두환이 3억 원을 먹고 박근혜에게 준 돈이 6억 원이란 말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 말을 들었을 때 자기가 받은 첫 봉급을 한 푼도 쓰지 않고 만 달을 모아야 그 돈이 되는구나 생각했었다. 만 달이면 833년이 넘는 기간이다.

이 사실은 2012년 대선 TV토론 때 통합진보당 이정희 후보가 말해서 널리 알려진 것이지만 그 전 2007년 한나라당 경선 때 이미 많이 나왔고, 김영삼이 대통령이 된 뒤 코리아게이트 등의 드라마를 통해서도 알려진 것이었다. 신돌석씨는 노동운동을 하게 된 이후에 그런 드라마만 있으면 유심히 봤다. 지금이야 유튜브 등을 통해 뉴스가 홍수이다 못해 가짜 뉴스까지 넘쳐나는 판이지만 그 당시에는 열심히 찾아봐도 정보가 부족한 상황이었다.

이런 생각을 할 때마다 신돌석씨는 흥분을 참기 어려웠다. 그런데도 박정희를 존경한다는 인간들이 그렇게 많으니 어느 때는 정말 환멸이 생기기도 했다. 박근혜가 대통령에 당선되었을 때는 정말이지 갈 수만 있다면 이민이라도 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런데 세월호 참사가 터지고 이어서 민중대회를 비롯한 각종 집회 시위가 벌어지고 마침내 촛불시위가 불붙어서 박근혜를 끌어내릴 때는 정말 감동이었다.

그런데 비록 보잘것없는 돈이지만 그나마도 초임으로는 거기서는 괜찮게 받은 편이었다. 가방공장의 노동자는 미싱사와 재단사로 크게 나뉠 수 있었다. 미싱사는 다시 오야미싱, 중미싱, 시다미싱으로 나뉘고, 재단사는 그냥 재단사와 재단보조 정도로 나누었다. 그리고 시다라고 해서 온갖 잡일과 심부름을 하는 사람이 있었다. 신돌석씨는 아무 기술도 없으므로 당연히 시다로 일했다. 

 

필자 정해랑(鄭海郞)

서울에서 태어나 여의도 고등학교와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였다. 노동정책연구소 정책실장, 경희총민주동문회 회장, 이수병선생기념사업회장을 역임하였고, 현재는 주권자전국회의 공동대표, 21세기 민족주의포럼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재생의 담론 21세기 민족주의>(2010년, 공저), <공주와 도둑들>(2017)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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굽은소나무 (qnseksrmrqhr) 2020-08-02 07:34:11
소식 감사드리며 늘 건강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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