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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선엽 행적을 둘러싼 국내외의 기이한 행태<연재> 고승우의 ‘국가보안법 연구’ (28)
고승우  |  konews8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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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20.07.31  00: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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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승우 / 언론사회학 박사

 

28. 백선엽 행적을 둘러싼 국내외의 기이한 행태
국내 수구, 미국의 백선엽 찬양은 국보법과 부적절한 한미동맹이 그 배경

백선엽 예비역 육군대장이 ‘전쟁영웅’과 ‘친일파와 민간인 학살자’라는 상반된 평가 속에 15일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됐다. 그는 일제강점기 만주군 소위로 임관돼 독립군을 탄압한 뒤 일본이 패망하면서 군문에 들어온 뒤 6·25전쟁 때 1사단장, 1군단장, 육군참모총장, 휴전회담 한국 대표, 주중한국대사, 교통부 장관 등을 지냈다.

그의 사망과 관련해 국내 보수 언론과 정치권은 그의 친일행적에 대해 왜곡하거나 6.25 전적을 과대포장 하는 태도를 보였는데 이는 국가보안법으로 체질화된 시각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또한 미국은 백악관, 국무부 등을 통해 백선엽을 치켜세우면서 공식 애도를 표했는데 이는 미국이 일본의 한반도 강점에 동의해준 뒤부터 오늘날까지 취해온 국가이기주의적 시각에서 나온 것으로 미국의 추한 실체가 드러났다는 점에서 주목되다. 백선엽 사망을 계기로 국보법과 한미동맹이 뒤얽힌 한국의 이글어진 모습이 또 다시 확인된 것이다.

<국내 수구세력의 태도>

“백선엽은 ‘이순신’의 대한민국 버전이다.” - 조선일보 7월 14일 시론
“호국영웅 백선엽 장군을 떠나보내는 안타까움과 송구한 심정” - 동아일보 7월 16일 사설

표현의 자유는 헌법에 보장된 자유라 해도 그것은 사실관계에 부합해야 하는 등의 요건을 갖춰야 한다. 위의 두 글은 과연 대중매체에 버젓이 실릴만한 내용인지 두고두고 살펴볼 일이다.

이와 관련 한겨레신문은 최근 <조중동의 도 넘은 ‘백선엽 신격화’, 위험하다>는 제목의 사설을 통해 “보수 쪽이 ‘한국전쟁에서 세운 공이 잘못을 덮고도 남는다’고 주장하면서 백선엽의 ‘친일 행적’ 자체를 아예 부인하거나 무시했다”고 썼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 <조선일보>는 백선엽의 친일 행적을 두고 ‘팩트와 다르다’고 주장했다. 백선엽의 만주군 경력에 친일 굴레를 씌운다면 일본 통치하 수도·전기·토목 등에서 일본의 역량을 배워 오늘의 대한민국 정체성을 이룬 대다수 한국인을 모독하는 일이라고 했다. 궤변이 아닐 수 없다. 일제강점기 만주에서 간도특설대 장교로 근무했던 백선엽의 친일 행적은 이명박 정부도 인정한 ‘팩트’다. 이명박 정부 때인 2009년 대통령 직속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에 백선엽이 포함됐다. 그런데도 조선일보는 심지어 ‘백선엽은 이순신의 대한민국 버전’이라고까지 했다. ---세력이 친일파에 대한 비판을 차단하고, 북한과의 화해를 반대하며, 한-미 동맹을 절대화하기 위한 정치적 도구로 ‘백선엽 신격화’를 활용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려스럽다.

과도한 미화는 도리어 고인에게 누가 될 수 있다. 그럴수록 친일 행적, 한국전쟁 전공 독식, 부정부패 의혹 등 그를 둘러싼 논란이 불거진다. 그의 공과 과를 객관적으로 평가하자.---

고인이 된 백선엽에 대해 ‘민족반역자’라는 비판과 ‘전쟁영웅’이라는 찬양이 극과 극으로 갈리면서 국론이 양분된 듯한 모습이 되었는데 박경석(88) 예비역 준장은 여러 자료를 토대로 의 견해는 “백선엽씨는 전쟁영웅이 아니다. 백선엽은 국립묘지에 안장될 자격이 없다. 백선엽 가족은 그의 주검을 가족묘지로 이장해야 한다”고 주장해 이 또한 정확한 검증이 필요한 것으로 밝혀졌다<한겨레 신문 2020년 7월 20일>.

육사생도 2기 출신으로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에서 야전을 두루 거친 노병인 그는 “백선엽은 후퇴를 참 잘하는 사단장이라는 평을 들을 정도여서 ‘내가 등을 보이면 총을 쏘라’며 진두에 서서 전투를 지휘했다는 미담 역시 사실이 아닐 것이다. 백선엽은 미군 군사고문단을 극진히 대접해 맺은 인연을 배경으로 승승장구했다는 게 정설”이라고 말했다.

박경석 예비역 준장은 2010년 이명박 정부가 백선엽을 명예원수(5성 장군)로 추대할 때 자신이 평생 모은 자료를 바탕으로 ‘일제 앞잡이였던 백씨가 한국군 최초의 명예원수가 될 순 없다’고 앞장서 반대했고 채명신, 박정인, 이대용 장군 등 참전 군 원로들도 그의 목소리에 힘을 보태, 결국 무산시켰다는 것이다. 그는 백선엽이 일본군 장교로 간도특설대에 근무하며 항일독립투사를 체포하는 등 친일 반민족 행위를 했고, 여기에 더해 한국 전쟁사를 왜곡해 스스로를 영웅으로 만든 위선자이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백선엽은 전쟁 영웅으로 추앙받지만 그가 저지른 학살의 기록은 외면 받아왔다며 한 언론매체는 아래와 같이 지적했다<한겨레 21 2020년 7월 21일>.

--1950년 9월15일 인천상륙작전이 벌어지자 백선엽의 1사단은 서울로 진격했다. 그 과정에서 한국전쟁 최대 치적 중 하나로 불리는 ‘다부동 전투’를 시작으로 상주를 거쳐 속리산 인근 충북 괴산·보은·청주 일대에서 토벌 작전을 벌였다. 이때 백선엽 부대는 부역자를 색출한다는 명목으로 많은 민간인을 학살했다. -- 이 토벌 작전은 인민군에 점령된 지역에서 인민군에 가담한 부역자를 색출하는 작전이었다. 하지만 그 토벌 과정에서 무고한 민간인들이 학살됐다. 그렇게 주둔한 곳에서 백선엽 부대는 마을 사람들에게 강간과 학살을 범했다. ---

---상주 학살 1년3개월 만인 1951년 12월, 백선엽 부대는 사단에서 군단으로 규모가 커졌다. 12월부터 두 달 동안 백선엽이 이끄는 ‘백선엽 야전 사령부’, 일명 ‘백야사’의 2개 사단은 지리산 일대에서 빨치산 토벌 작전을 벌이는 과정에서 많은 민간인이 희생됐다. 백선엽은 민간인 사살 가능성을 스스로도 인정했다. 그는 자신의 회고록에서 “백야사의 전과가 (사살 5800명, 포로 5700명) 당초 예상했던 빨치산 숫자 4천 명의 무려 3배가 넘었다. 공비들에 포섭된 비무장 입산자도 많았다”고 밝혔다.(<군과 나>)---

한편 국방부가 백선엽 예비역 대장의 현충원 안장한 것과 관련해 노영희 변호사 지난 14일 한 방송에 패널로 나와 백 장군의 현충원 안장에 대해 "6·25 전쟁에서 우리 민족인 북한을 향해 총을 쏘아서 이긴 그 공로가 인정된다고 해서 현충원에 묻히냐"며 "저는 현실적으로 친일파가 더 나쁘다고 생각한다. 대전 현충원에도 묻히면 안 된다고 본다"고 지적한 바 있다<뉴스1 2020년 7월 20일>.

국방부는 백 장군의 현충원 안장을 둘러싼 논란과 관련 "현행 법령(국립묘지의 설치 및 운영에 관한 법률)상 고 백선엽 장군은 국립묘지 안장대상자에 해당한다"고 재차 확인하고 노 변호사는 자신의 발언이 문제가 되어 본인이 진행하는 YTN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하차했다. 백선엽을 둘러싼 논란은 친일파의 보호에 기여한 국보법이 존속하는 한 쉽게 가라앉지 않으면서 제2, 제 3의 비슷한 사례가 발행할 것으로 전망이다.

<미국의 국가이기주의와 백선엽>

미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는 12일 공식 ‘트위터’ 계정을 통해 “백악관은 12일 한국전쟁 영웅인 백선엽 장군의 타계에 애도를 표했다. 1950년대 공산주의 침략자들을 격퇴하기 위해 모든 것을 쏟아부은 백선엽 장군과 모든 영웅들 덕분에 오늘날 한국이 번영하는 민주공화국이 되었다”라고 밝혔다<미국의소리방송 2020년 7월 15일>.

미 국무부모건 오테이거스 대변인은 14일 성명에서 “한국전쟁 영웅 백선엽 장군이 자유와 민주주의 가치를 위해 싸운 점을 강조하며, 그의 죽음에 대해 한국 국민들에게 진심으로 조의를 표한다”면서 “한국 최초의 4성 장군으로서 한국 전쟁 중 조국에 대한 그의 봉사는 오늘날까지 미국과 한국 모두 계속 지키고 있는 자유와 민주주의의 가치를 위한 싸움의 상징이었다. 백 장군은 외교관과 정치인으로 일하면서 그의 나라를 위해 매우 탁월하게 봉사했고, 미국과 한국의 동맹을 구축하는데 일조했다”고 덧붙였다<미국의소리방송 2020년 7월 15일>.

미국이 백선엽을 극찬하는 것은 미국이 일제의 한반도 강점과 한민족의 3.1 독립운동, 북간도 등에서의 항일 투쟁, 일본 항복이후 미군정의 친일파의 등용과 4.3 제주 항쟁 및 6.25 전쟁 당시 민간인 학살 등에 취했던 일관된 태도와 무관치 않다. 미국은 가쓰라-테프트 밀약에 따라 일본의 한반도 강점에 동의한 뒤 한민족의 3.1독립운동은 물론 항일 무장에 대해 일본의 시각에서 부정적으로 평가하고 대처했다.

가쓰라-태프트 밀약은 1905년 7월 29일 당시 일본 총리 가쓰라와 미 육군 장관 태프트가 비밀리에 도쿄에 만나 만든 것으로 미국은 일본의 대한제국 지배권을, 일본은 미국의 하와이, 필리핀 지배권을 각각 인정하는 내용을 담았다. 일본은 같은 해 8월 제2차 영일동맹과 9월 포츠머스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한반도 지배권을 세계열강들로부터 인정받게 되었다. 일본은 그로부터 불과 몇 달 후인 11월 17일 을사늑약을 강요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강탈했으며, 미국의 묵인 아래에 조선반도 식민침략을 본격화했다.

3·1독립운동은 일제 강점기에 한국인들이 일제의 지배에 항거하여 1919년 3월 1일 독립을 선언하고 평화적으로 만세운동을 벌여 전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은 대 사건이다. 3·1독립운동은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이 세계 제 1차 대전이 끝나기 전인 1918년 1월 발표한 비밀외교의 폐지와 민족자결주의가 포함된 '14개조평화원칙'의 영향을 크게 받아 일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윌슨 대통령은 1919년 1월부터 다음해 1월까지 열린 파리강화조약 회의에서 일본 등 강국들의 식민지 지배 문제에 대해 입을 다물었다. 특히 미국은 당시 일본이 전승국의 하나였다는 점 등을 고려해 일본에 강점된 한반도 문제를 거론하는 것은 부적절한 것으로 여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뿐 아니다.

미국무부는 1919년 4월 주일 미 대사에게 보낸 공문에서 '서울의 미국 영사관은 미국이 조선민족주의자들의 독립운동 수행을 지원한다는 믿음이 생기지 않도록 극도로 주의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미국무부는 이어 '서울의 미 영사관은 일본 당국이 미국 정부가 조선의 민족주의 운동에 동정적이라고 의심할만한 어떤 일을 해서도 안 된다'고 밝힌 것이다. <https://en.wikipedia.org/wiki/March_1st_Movement>. 

미국이 미국은 3.1독립운동에 대한 일본의 엄청난 탄압에 침묵하면서 일본의 야만적 탄압을 외면하는 적극적 조치까지 취했다. 더 나아가 미국은 파리강화조약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조선민족의 대표로 선출된 조선인 독립운동가들의 회의 참가에도 대단히 부정적이었다. 당시 미국에 거주하던 한인 독립운동 세력의 하와이 대표로 선출된 이승만, 미 서부 지역 대표 민호찬, 중서부 대표 헨리 한경청 등은 비자 문제와 미국 재입국이 불허될 것이라는 두려움으로 회의에 참석치 못했다. 미 정부 당국이 이들의 출국을 실질적으로 저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독립운동가 김규식 선생은 중국 상하이 임시정부 대표로 파리강화조약 회의에 참석키 위해 파리 회의장까지 갔지만 조선의 정식 대표로 인정받지 못했다. 당시 중국은 미국 외교관들에게 조선 독립 문제를 의제로 삼을 것을 요구했으나 성사되지 못했다. 미국은 조선 대표 등에게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파리강화조약 이후 조선의 독립문제는 2차 대전 종전까지 미국을 포함한 서구 진영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

미국이 3.1독립운동과 한민족의 독립에 대해 부정적인 태도를 취한 것은 일반적인 국제 관행에 비춰 이례적인 것으로 그 배경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즉 미국의 조선 독립에 대한 비상식적 태도는 미국과 일본이 지난 1905년 동경에서일본의 한국 강점, 미국의 필리핀 지배를 인정한 비밀협약으로 알려진 카스라 데프트 협약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비춰진다는 사실이다.

미국이 3·1독립운동 당시 한민족 대신 일본에 기운 태도를 보인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즉 미국은 1915년 일본이 만주와 몽골, 산동반도에서 이익을 추구하도록 동의해 일본이 중국을 침략하는 것에 적극적으로 반대하지 않았다. 당시 영국과 프랑스가 일본 편을 들었기 때문이다. 미국은 1918년 11월 세계 1차 대전이 끝난 뒤 일본이 전승국의 입장에서 독일이 소유하던 중국내 일부 도서와 재산을 차지하도록 1919년 동의하는 등 일본의 이익을 챙겨주는데 적극적이었다. 미국과 일본은 1921년 태평양에서의 해군력 배치 등에 협의하는 등 사이가 좋았지만 일본이 중국 침략을 본격화하면서 관계가 소원해지고 결국 태평양전쟁에서 맞붙게 된다. <https://en.wikipedia.org/wiki/Japan%E2%80%93United_States_relations>.

3·1독립운동 이후인 1920년 6월과 10월 우리 민족이 거둔 봉오동전투와 청산리대첩은 독립운동사에서 가장 자랑스러운 ‘독립전쟁’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러나 당시 미국은 일본군이 중국으로 진입하는 것은 한국 독립군이 방해하고 저지한다며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시대 상황은 1차 대전 전후 처리작업을 놓고 미국과 일본이 동맹국의 입장에서 협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편 태평양 전쟁이 끝난 뒤 미국이 일본 항복 뒤 점령군으로 한반도에 들어온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들은 한반도가 일본에 병합된 것을 인정했던 역사적 사실에 근거해 맥아더는 일본 본토에서와 동일한 정책을 한반도 남쪽에서 집행했다. 이승만은 미국의 그런 정책에 편승해 미군정에 의해 해방정국의 권력집단으로 변신한 친일세력과 손을 잡는 반민족적 선택을 한 것이다.

미국은 1947년 제주 4.3이 발생하자 소련과 중국을 의식해 조기 강경 진압을 주장하는 친일세력의 주장을 받아드려 무자비한 학살이 자행되게 만들었다. 미군정은 제주 4.3이 발생한 직후 조사단을 제주에 파견했는데 당시 미군 보고서는 경찰발포로 도민 반감이 고조된 것을 남로당 제주조직이 선동해 증폭시켰다. 제주도 인구의 70%가 좌익에 동조자’라고 분석했다.

미군정은 제주도에서 5·10선거가 무산된 뒤 미군 제6사단 제20연대 연대장 브라운(Brown) 대령을 제주지구 미군사령관으로 파견해 모든 작전을 지휘·통솔토록 하고 강경 진압 작전을 본격화해 당시 제주도 인구의 1/9인 2만 5천~3만 명의 소중한 인명이 희생되는 대 참극으로 이어졌다<제주4ㆍ3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 자료>. 제주에서 백선엽과 연관된 서북청년단이 벌인 민간인 학살 등의 만행은 자심했다.

미국은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 체결 당시 독도의 영유권을 표기치 않아 오늘날에도 일본이 파렴치한 태도로 영유권을 주장하는 근거를 제시했다. 미국은 당시 일본이 1905년 강탈한 독도 영유권 문제에 대해 언급치 않았는데 이 또한 가쓰라 테프트 협약의 연장선사에 있다 할 것이다. 미국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이후에도 미군사고문단을 남겨 국군을 지원했으며 6.25가 발생해 이승만이 무수한 양민을 학살할 때 미국은 뒷전에서 방관하거나 묵시적 동의를 했다. 광주항쟁 당시 특전사가 휴전선 방어 대신 광주로 이동한 것은 작전지휘권을 지녔던 미국의 동의를 받지 않고는 불가능했다는 점이 지적되고 있다.

미국이 20세기 초부터 취해온 한반도 정책을 반추해 보면 백선엽의 굴곡이 심한 경력에도 불구하고 트럼프 행정부가 백선엽을 극찬하는지 분명해진다. 미국 역대 정부가 취해왔던 한국에 대한 정책 속에서 백선엽의 친일행각이나 한국전쟁 당시 양민 학살은 부정적으로 평가할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백선엽은 1920년 평남 강서에서 출생해 일제강점기 독립군 토벌 전문부대였던 간도특설대에 자원해 근무한 것에 대해 사과하는 등의 언행을 한 적이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1943년 4월 만주국 소위로 임관한 뒤, 항일군 잡는 특수부대로 명성을 날린 간도특설대에서 장교로 활약하다 해방 뒤 잠시 고향에 체류했다. 그리고 남쪽으로 넘어온 뒤 육군 정보국장이 되고, 친일청산과 분단반대를 외친 세력을 좌익으로 몰아 제거하는 숙군 작업을 전개했다.

그는 해방정국 당시 육군 정보국장 시절 극우단체인 서북청년단을 중심으로 창설된 호림부대가 빨치산 토벌을 명분으로 강원도 인제, 경북 영천·청도·경산, 경남 거창 등지에서 민간인들을 학살 약탈하는 것을 방치했다. 한국전쟁 당시 그가 이끄는 특수부대는 빨치산 토벌이라는 미명 하에 지리산 일대에서 민간인 학살을 자행했다.

그는 한국전쟁 중에는 보병 1사단장으로 다부동 전투, 평양탈환작전, 2군단장으로 수도고지/지형능선 전투, 1군단장으로 설악산 부근 전투 등 다수의 전투에 참가하여 전공을 세운 공으로 전쟁영웅으로 불리고 있다.

백선엽은 친일과 양민학살, 전쟁영웅이라는 경력으로 논란을 빚었지만 국내 실정법에 따라 국립묘지에 매장되었다. 하지만 국가유공자 관련법이 친일 경력이 있다 해도 한국전쟁 전공이 인정되면 국가유공자로 지정하게 되어 있어 민족정기 확립에 문제가 있다는 지적을 받고 있고 관련법 개정 움직임도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은 백선엽을 극찬하는 행동을 하고 있는 것은 그 의미가 간단치 않다. 그것은 한반도 비핵화 과정에서 심화되는 남남갈등에 대해 미국의 정책을 지지하는 세력에게 힘을 실어준다는 측면을 계산한 것이란 합리적 추론이 가능한 것이다.

미국은 일제의 한반도 강점을 인정하고 3.1독립운동을 외면한 것이나 해방정국과 제주 4.3 항쟁, 6.25 한국전쟁 당시 발생한 양민학살, 광주항쟁 등에서 보여준 부정적인 역할에 대해 한 번도 공식 인정하거나 사과 등을 한 적이 없다. 그들이 한반도의 비극적 역사에 직간접적으로 개입하고 영향력을 행사한 작태에 대해 국내에서 초보적 연구조차 이뤄지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백선엽에 대해 국내외에서 벌어진 비극적 사태에 대해 소개했다. 이상에서 보듯 6.25한국 전쟁의 공훈으로 친일의 죄악상을 덮어버리는데 기여하는 괴이한 실정법의 개폐가 시급하다. 국보법이 존속하는 한 그런 목표가 달성되는 것이 쉽지 않다는 점이 확인된 것은 서글픈 일이다. 또한 미국이 백선엽을 극찬한 것을 계기로 학계, 정계, 언론계는 미국이 남북평화 공존과 평화통일에 대해 미국의 이기주의를 최우선으로 하는 정책만을 고집하고 있는 이유, 그 역사적 근거 등에 대해 확실히 파악하는 태도를 지녀야 할 것이다. 오늘날 한미상호방위조약에 의해 미국이 한국의 군사적 주권을 제약하고 슈퍼 갑의 태도를 취하는 비정상을 온존시키는 버팀목의 하나가 국보법이라는 것을 모두 확인하는 그 날이 빨리 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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굽은소나무 (qnseksrmrqhr) 2020-07-31 10:47:53
미국은 일제의 한반도 강점을 인정하고 3.1독립운동을 외면한 것이나 해방정국과 제주 4.3 항쟁, 6.25 한국전쟁 당시 발생한 양민학살, 광주항쟁 등에서 보여준 부정적인 역할에 대해 한 번도 공식 인정하거나 사과 등을 한 적이 없다. 그들이 한반도의 비극적 역사에 직간접적으로 개입하고 영향력을 행사한 작태에 대해 국내에서 초보적 연구조차 이뤄지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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