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서 글쓴이는 ‘김누리 교수의 잘못된 전제’를 통해 그가 주장하는 바가 몇 가지 잘못된 전제에서 출발했다고 한 바 있다.

김누리 교수는 우리나라와 독일이 현대사의 궤적이 유사하다고 전제하고 있다. 이것은 명백한 오류이다. 민주주의에 대한 경험도 천양지차이고, 외세와 관계도 엄청나게 다르다. 독일은 비록 전쟁에서 패하고 분단되었지만, 미국과 서유럽의 막강한 지원 속에서 경제부흥을 이루었다. 독일인의 뛰어난 능력과 피나는 노력도 있었겠지만 우리보다 훨씬 더 산업화가 되어 있었다는 점도 생각해야 하고, 사회주의권에 대응한다는 의미에서 경제부흥의 지원이 미국과 서유럽 등으로부터 있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독일의 나치 청산은 우리가 배워야 할 바이다. 그러나 그들의 나치 청산은 유대인에 대한 사죄의 성격을 지닌 것이었는데, 그들이 북아프리카 등에서 저지른 범죄에 대한 사죄도 제대로 하였는지는 의문이다. 그들의 유대인에 대한 사죄는 승전국인 미국과 서유럽에 대한 사죄의 성격도 지닌다고 보아야 하는데, 제3세계 민중들에 대한 그들의 사죄는 별로 들어보지 못했다. 독일의 과거 청산은 반파시즘에서는 의미가 있는지 몰라도 반제국주의라는 점에서는 덜 철저한 반성이라는 점을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반면에 우리가 친일잔재 청산을 제대로 못했던 것은 우리 스스로의 잘못이 크지만 독일과는 달리 친일 청산을 방해하는 막강한 미국의 힘이 작용했다는 것을 지나쳐서는 안 된다. 그리고 미국의 지원을 받는 독재, 군사독재가 그것을 끊임없이 가로막아 왔던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의 친일 청산은 반독재 민주화를 통해 그 길이 열려 왔다. 민주화의 열기가 뜨거워질수록 친일잔재 청산이 전면에 부각되는 현대사를 보면 알 수 있다.

김누리 교수는 우리의 민주화 투쟁이 갖는 이런 성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그리하여 우리 현대사의 민주주의 역사가 그 이면으로 보면 군사 쿠데타의 역사이기도 하다고 보는 것이다. 김 교수는 4.19혁명, 5.18민주화운동, 6.10민주항쟁으로 이어져 온 한국 민주주의가 위대한 민주주의의 역사라고 하면서도 동시에 군사독재의 야만 속으로 다시 굴러떨어졌다고 한다. 김 교수는 우리 현대사의 민주주의 역사를 추락의 반복으로 보고 있다.

우리의 민주화 투쟁은 제3세계의 나라들에서 흔히 보는 군사독재의 ‘반복’은 아니었다. 그것은 군사독재를 해체시키는 과정이었고, 비록 불철저하고 부족하다 할지라도 우리 사회의 진정한 민주주의를 위한 토대를 만들게 한 것이고, 일본군국주의의 잔재를 청산해 가는 과정이었다.

이러한 잘못된 전제는 잘못된 결론을 이끌어 낸다. 우리의 현재 문제의 근원은 ‘6.8혁명’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김 교수는 ‘한국만 예외적으로 6.8혁명이 없었다’고 한다. 그가 6.8혁명이 어떻게 전개되었는지를 자신의 책에서 언급하고 있지만, 그것은 서구에서 미국, 일본으로 번져 갔고, 동구에 전파되었는지는 몰라도 여타 제3세계에는 전혀 영향을 미치지 못한 것이었다. 한국만 예외적으로 없었다고 하는 것은 김 교수의 서구 중심 세계관을 보여 주는 것이다.

1968년의 한국의 상황은 남북 대결이 고조되고 군사독재가 점점 더 강화되어 가면서 공공연하게 폭력을 행사하여 민주화운동을 탄압하던 시기였다. 김 교수가 말하는 6.8혁명의 문화혁명 등은 꿈도 꿀 수 없는 시기였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가 6.8혁명 같은 문화혁명을 필요로 한다고 말한다면 어느 정도 설득력이 있겠지만 그 당시에 없었기 때문에 우리의 민주화 투쟁이 쉽게 무너졌다는 식의 설명은 잘못된 것이다.

굳이 전제를 따지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이의를 제기하고, 지금의 독일에서 배울 바를 배우면 되지 않느냐는 문제 제기도 있을 수 있다. 물론 우리는 독일에서 배울 바가 많다. 그러나 우리가 역사를 배우고 오늘을 위한 지침으로 삼는 것은 단지 교훈을 얻기 위함만이 아니다. 우리가 과거로부터 물려받은 것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알기 위해서도 역사를 배우는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조건을 아는 것이기 때문이다.

김누리 교수가 이야기하는 독일 사회의 장점은 우리가 충분히 배워야 한다. 독일만이 아니라 스위스, 스웨덴, 스페인 등 유럽 여러 나라에서 우리는 직접민주주의, 복지 제도, 협동조합운동, 인권 의식 등을 배워야 한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부분적인 것이다. 우리가 이 모든 것을 분단 상황에서, 외세의 강력한 영향 속에서도 온전히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커다란 망상이다.

김누리 교수도 우리의 문제를 치유하기 위해서 냉전체제와 그로 인한 분단체제를 극복해야 한다고 말하였다. 글쓴이와 다를 바 없는 생각 같지만 그렇지 않다. 그의 분단체제 극복의 내용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그의 잘못된 전제가 어떻게 잘못된 결론을 이끌어내는지를 알 수 있다.

우선 그는 평화가 시급하다고 하고, 문 대통령이 통일을 안 할 수도 있다는 것을 해방 이후 처음으로 언급한 대통령이라고 하면서 거기에 굉장히 의미를 둔다. 그런데 우리가 왜 분단이 되었는지, 분단 때문에 생기는 폐해가 무엇 인지, 분단을 극복해 가는 과정은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한 이해가 잘못 되었기 때문에 평화와 통일을 분리하는 것이다. 우리의 분단은 그 자체가 평화일 수 없다.

독일처럼 전범 국가도 아닌 나라가 제 힘으로 완전 독립을 이루지 못하여 강대국의 이익에 따라 분단되었고, 세계대전을 방불케 하는 전쟁을 거치면서 그 분단은 공고화되었다. 그러므로 한반도를 둘러싼 강대국들이 우리 민족을 갈라놓고 대립하고 있는 상태가 교정되지 않는 한 평화는 정착되지 않는다. 그들은 전면전이 아니더라도 국지전 등을 통해 분단을 영구하게 할 의사를 전혀 버리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남과 북이 통일의 로드맵을 밟아 나가면서 평화를 구축하려 하지 않는 한 평화는 사상누각에 불과하다. 김누리 교수는 통일은 가능한 한 천천히 해야 하고, 너무 빠른 통일은 모두에게 위험할 수 있다고 한다. 통일이 너무 빠를까 봐 걱정을 하다니. 그는 분단과 평화가 양립할 수 없다는 점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고밖에 볼 수 없다.

김누리 교수는 독일 통일의 주체는 서독 사람들이 아니라, 동독 사람들이었다고 한다. 독일 통일은 담대한 동독 혁명의 결과라는 것이다. 독일의 통일은 서독과 동독이 ‘통일’된 것이 아니라, 동독의 5개 주가 독일 연방에 ‘가입’함으로써 이루어진 것이라고 한다. 그것을 선택한 것은 동독 사람들이었는데, 그 과정에서 서독 중심으로 독일 통일이 해석되었다고 한다.

또한 그는 독일 사람들은 애당초 통일한다는 생각 자체가 없었다고 하는데 과연 그런가? 빌리 브란트는 취약한 정치적 기반에서도 동방정책을 추구해서 독일 통일의 기반을 닦았다. 빌리 브란트가 주변 강대국을 설득해 가면서도 동서독 사이의 문제 해결을 외세의 간섭을 최소화시키면서 과감하게 한 것 등은 우리가 배워야 할 바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독일 통일이 그대로 우리에게 적용되어야 할 것으로 본다면 커다란 낭패를 맞을 것이다.

북한의 권위주의적 사회주의를 민주화하고, 동시에 남한의 약탈적 자본주의를 인간화하는 것이 통일의 사회적 실체가 되어야 한다고 김누리 교수는 주장한다. 북한을 권위주의적 사회주의로 보는 것은 일견 타당한 면이 있다. 북한을 민주화하는 것을 통일로 보는 것은 동독의 민주화로 독일이 통일되었다고 하는 주장과 맥이 닿아 있다. 그러나 북한을 동독과 동일시하는 것은 커다란 오류이다.

북한은 권위주의적 사회주의라는 측면이 없지 않다. 그러나 그 사회를 민주화한다는 것은 서구식 민주주의 관점에서만 보는 것이다. 북한은 인류 역사상 가장 강력한 군사력을 가진 미국을 상대로 70년 넘게 싸우면서도 자기의 정체성을 지킨 나라이다. 소련과 중국이라는 양대 사회주의 강국 앞에서도 어느 한쪽에 치우쳐서 종속되지 않은 나라이다. 분단과 사회주의라는 형식만 보고 동독과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

남한이 약탈적 자본주의의 성격을 갖는 것 역시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남한 역시 이 땅을 강점하고 외세의 뜻을 좇아 잔인한 탄압을 수십 년 동안 서슴지 않는 독재, 군사독재에 대해 끊임없이 투쟁을 하여 여기까지 진전해 온 나라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약탈적 자본주의를 인간화하기 위한 끝없는 노력이 있었다. 그것은 전태일 열사의 분신부터 70년대 민주노조를 거쳐 오늘날 노동운동에 이르기까지 눈물겨운 전진의 과정이었다.

우리의 통일의 과정은 세계 역사상 어디에도 없는 길이 될 것이다. 남과 북의 자주화를 위한 민중의 투쟁을 통해 이룩될 것이다. 북의 자주화를 위한 투쟁의 역사를 남쪽 사람들은 존중해야 한다. 남의 민주화 투쟁의 과정이 자주화를 위한 역량을 키워 왔고, 앞으로도 키워 갈 것이라는 점을 북은 존중해야 한다. 남과 북이 서로 존중하고 연대하여 이 땅에서 외세에 의해 좌지우지되지 않는 날, 통일도 되고 평화도 확고하게 될 것임에 틀림없다.

김누리 교수의 책을 읽을 때 생각해야 할 점을 말하고 싶다. 김누리 교수가 우리 사회에 대해 날선 비판을 하는 것을 새겨 들어라. 독일의 장점을 이야기하는 것을 많이 공부해라. 하지만 그것이 곧 우리의 길이라고 생각하지 마라. 그리고 우리의 역사를 무시하고 비하하는 생각은 버려라.

객관적인 지표가 가리키는 우리의 부정적인 면은 너무나 많다. 그것을 외면하고 우리가 최고라고 하는 식의 우물 안 개구리가 되어서는 안 된다. 하지만 ‘세계에서 모두가 모두를 가장 불신하는 나라’ 따위의 주장에는 절대로 동의해서는 안 된다. 세계에서 가장 서로를 불신하는 나라에서 시민들이 무장한 상태에서도 강도 한 건 없을 수 있으며, 백만 명이 한밤 중에 시위를 하면서 폭행 사건 한 번 없을 수 있는가?

가난하여 별로 남겨 준 것 없는 어머니, 아버지가 역경을 뚫고 여기까지 나를 키워준 것을 감사하고, 그 정신을 이어받아서 그 조건에서부터 더 나은 삶을 추구해 나가는 사람이 되어야지, 자기의 현재 삶과 직접 연관도 없는 부유한 남의 어머니, 아버지만 부러워해서야 되겠는가?

이 세상에 우리의 모델이 되는 나라는 없다. 우리를 모델로 할 나라도 없다. 모든 나라는 각자의 역사 속에서 각자의 길을 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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