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영태 / 출판기획자 겸 역사교양서 저술가
 

올해 2020년은 광복(또는 해방) 75주년이자 6.25전쟁(한국전쟁) 발발 70주년이 되는 해이다. 우리에겐 해방이 곧 분단이었으니 분단 75주년이기도 하다. 왜 우리는 3/4세기 동안이나 분단된 상태로 살아야 했던가? 왜 우리는 해방과 함께 분단이라는 있을 수 없는 상황을 맞아야 했던가? 우리는 왜 해방 3년 만에 두 개의 정부가 수립되고 마침내 5년 만에 전쟁이라는 참화를 겪어야 했던가? 이러한 물음에 대한 답은 해방 전후사에 들어 있다. 해방 75주년, 한국전쟁 70주년의 해에 해방 전후 역사를 다시 돌아보는 이유다. 이 연재는 매주 월요일에 게재된다. / 필자 주

 

중공당의 신노선-코민테른 제7차 대회와 ‘8.1선언’

1935년 7월 25~8월 20일에 모스크바에서 코민테른 제7차 대회가 열렸다. 이 대회에서는 식민지·반식민지에서 반파쇼인민전선과 함께 소수민족문제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는 방침이 제시되었다. 대회에서 중화소비에트정부와 중공중앙당 명의로 「8.1선언」이 제출되었는데, 전중국의 국방통일정부 구성과 중국 내의 모든 피압박민족의 참가를 호소하는 내용이었다. 8.1선언에서는 중국공산당의 항일노력과 함께 동북의 항일활동에 대해서도 관심을 기울였는데, 항일을 위해서 당파를 초월하여 협력할 것을 호소하면서 중국내의 모든 피압박민족(몽고, 위구르, 조선, 티벳, 묘, 요, 여, 번 등)의 형제들을 그 대상에 포함시켰다.(주1) 중국공산당은 8.1선언을 통해 항일민족통일전선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각 당파와 민족, 모든 계급·계층을 망라한 ‘항일연합군’을 조직할 것을 제기하였다. 이러한 선언에 따라 중국공산당 만주조직은 1936년 1월부터 회의를 소집하고 각 항일부대를 ‘동북항일연군’으로 개편, 확대하기로 결정하였다.(주2)

▲ 모스크바의 조종을 받는 프랑스 좌익을 비판하는 포스트. ‘인민전선’은 프랑스 노동계급이 반파시즘, 반제국주의, 반전주의를 목표로 한 통일전선운동에서 발전한 것이지만, 1935년 7차 코민테른 대회에서 불가리아 공산당 지도자 게오르기 디미트로프가 제창한 후 일반화되었다. 식민지·반식민지에서는 인민전선보다는 반제반봉건통일전선이 더 중요한 개념으로 사용되었다.

 

▲ 코민테른 중공당 대표로 활약하며 만주 항일유격대 운동에도 큰 영향을 미쳤던 왕밍. 중공당의 마오쩌둥에 의해 숙청되지만 만주 조선인공산주의자에게는 양 측면이 있었다.
▲ 노년의 캉성. 캉성은 중국 비밀정보기관의 수장으로서 마오쩌둥의 옌안 정풍운동을 주도하고, 문화대혁명 시기에는 4인방의 배후로 활약했던 인물. 중공당 대표로 모스크바에 파견되어 활동하면서 만주의 민생단 사건을 종결짓는데 도움을 주었으나 김산과 같은 혁명가를 스파이로 몰아 처형한 인물이기도 하다. 

이 대회에는 중공당 대표로 왕밍, 캉성(康生) 등이 참석하였고, 장정 도중이었던 중공당 중앙은 천윈(陣雲) 등을 파견했으나 대회가 폐막된 뒤에야 모스크바에 도착할 수 있었다. 동만특위 서기 웨이쩡민도 민생단 문제에 대한 중앙지도부의 지침을 받기 위해 이 대회에 파견되었으나 대회가 끝난 뒤에야 모스크바에 도착하였다. 길동특위 서기 우핑(양쑹)은 대회가 끝난 뒤인 1935년 9월 하순부터 10월 초순에 걸쳐 모스크바로 가서 코민테른 파견 대표 왕명과 강생, 중공대표로 뒤늦게 모스크바에 도착한 천윈 등과 함께 만주 상황을 논의하였고, 그러한 논의를 바탕으로 1935년 11월 2일자로 코민테른 기관지에 양쑹이 쓴 「동북인민반일통일전선을 논함」을 발표했다. 양쑹은 이 글에서 가능한 모든 반일세력을 집결시켜 반일반만통일전선을 구축하고, 만주에서 조선인의 독자적인 독립투쟁을 인정하는 바탕 위에서 조중 연대를 실현할 것을 제시하였다. 

또한 모스크바 중앙의 지도로 좌익파벌주의의 극복에 진전이 있었다고 확인한 다음, “중공중앙당은 이제 ‘중·한·몽·만 피압박민족의 통일전선’이라는 슬로건을 진행시켜서 ‘중한민족은 굳게 연합하여 일본의 괴뢰만주국통치를 전복하고 간도 한인민족자치구를 건립하자’는 구호를 내걸지 않으면 안된다”라고 하였고, 그런 바탕 위에서 “인민혁명군 제2군과 기타 반일유격대를 ‘중한 반일연합군’으로 개편하여 한국민족의 독립을 위해 싸우게 할 것, 중국공산당 조직의 강화와 아울러 ‘한국민족혁명당’, ‘간도의 반일통일전선의 당’을 결성할 것” 등을 제안하였다. 양쑹의 글은 중공중앙의 신방침인 ‘8.1선언’을 한걸음 더 진전시켜 동북지역에서 반일통일전선과 함께 조중민족의 항일연합군을 조직하고, 조선민족의 통일전선적 당조직을 건설할 것을 제시하였다. 이는 동북지역 항일운동에 대한 중대한 문제제기가 아닐 수 없었는데,(주3) 사실상 지금까지 극좌적으로 진행된 반민생단 투쟁을 끝내고 조선인의 독자적인 항일 활동과 독립투쟁을 인정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사실 우핑은 길동특위 서기로 활동하던 1935년 1월 북만주 영안 동남산 저바오중의 유격근거지에서 10여일 동안 머물면서 김일성으로부터 동만지역 민생단 사건의 실상을 상세히 듣고, 동만특위 책임자 쫑지윈(鐘子雲)의 2차에 걸친 보고서를 검토한 뒤 “쫑지윈의 조선인 7, 8할이 민생단이라는 주장은 지나치다”고 비판하면서 “재만 조선인의 절박한 요구인 간도 조선인의 자치를 전면에 내세워야 한다”는 등 위의 글과 유사한 내용을 담은 ‘동만특위에 보내는 편지’를 보낸 바 있었다. 이는 극좌적으로 진행되고 있던 동만의 민생단 광풍에 제동을 거는 것이었고, 이러한 문제의식을 중공당의 ‘8.1선언’에 맞게 정리하여 코민테른 기관지에 발표하게 되었던 것이다.(주4)

제2군 정치위원 겸 동만특위 서기로 이 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1935년 5월 만주를 떠났던 웨이쩡민은 다른 일들로 인해 그해 12월에야 코민테른 주재 중공대표를 만나 동만의 상황을 보고하였다. 웨이쩡민의 보고 내용에는 1935년 5월까지의 동만 상황이 반영되어 있어서 반민생단 투쟁의 필요성이 제시되었지만, 신노선에 따라 그러한 주장은 비판받지 않을 수 없었다. 이때 코민테른의 중공당 지도부는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내에서 조선인 간부와 대원의 비중이 절대적으로 높다는 사실을 감안하여 조선인부대를 분리시켜 조선인민혁명군을 따로 조직하고 반일대중단체의 경우도 조선인의 독자적인 조직을 만드는 것이 좋다는 결론에 도달했던 것으로 보인다.(주5) 

코민테른 제7차 대회를 계기로 동북항일투쟁의 새로운 방향 전환이 모색되었고,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또한 적극적인 조중연합 활동을 전개하였다. 왕더타이와 리쉐쭝은 제1단과 제2단을 이끌고 남쪽인 안도 방면으로 진출하였고 제1단의 안봉학은 돈화 방면으로 진출하여 조선 회령에서 장춘에 이르는 철도선을 파괴하면서 일본군을 괴롭혔다. 김일성은 제2차 북만원정 때 왕청3단과 훈춘4단의 주력부대와 함께 북쪽인 대전자를 향해 나아갔는데, 노흑산에서 정안군과 싸운 뒤 7월에는 영안에서 저우바오중이 이끄는 제5군과 만났다. 저우바오중의 수녕반일동맹군은 1935년 1월 동북인민혁명군 제5군으로 재편되었고 저우바오중이 군장으로 취임하였다. 8월 2군과 5군의 영도간부연석회의가 열려 양군의 배합작전이 논의되었는데, 5군 부군장 시세영(柴世榮), 5군 1사장 이형박(李荊璞)과 함께 2군 3단 정치위원 김일성이 이를 지휘하였다. 이 연합부대의 병력은 약 200명이었는데, 김일성부대는 6개월 가까이 액목·돈화 일대에서 전투를 계속하였다.(주6)

민생단 투쟁의 종결과 반일통일전선 방침

1935년 하반기에도 동만에서는 반민생단 투쟁이 여전히 강력히 전개되었지만 민생단이 과연 유격대 내부에 존재하는지에 대한 의문과 문제제기가 공개적으로 제기되기 시작하였다. 동만특위는 그때까지도 민생단 문헌을 발견하지 못했고, 심문을 통해 받아낸 자백 가운데 일치하는 것이 하나도 없었으며, 민생단이 그렇게 많았다면 동만지방의 근거지가 남아날 수 있었겠는가 하는 의문에 부닥쳤던 것이다. 1936년 1월 20일 제5군 군장 저우바오중은 왕더타이, 리쉐충 등 제2군 지도자들과의 회의에서 “정확한 근거도 없이 추상적으로” 당과 군 내부에 “60, 70~80, 90%를 민생단이 점거”했다고 주장하는 것을 공개적으로 비판하였다.(주7)

1936년 1월 모스크바에 갔던 웨이쩡민이 만주로 돌아왔고, 2월 5일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반일연합군, 제5군 당위원회 특별회의가 경박호 북쪽 가장자리에서 개최되었다. 이 북호두회의는 동만특위 서기 웨이쩡민과 5군장 저우바오중이 주재했는데 왕더타이, 리쉐쭝 등 2군과 5군의 주요간부들이 참석했으나 왕룬청과 김일성은 참석하지 않았다. 웨이쩡민은 만주 상황과 유격전쟁을 고려하여 만주성위원회(하얼빈)를 없애고 4대 유격구를 중심으로 4개의 새로운 성위원회, 즉 남만, 동만, 길동, 송강 성위원회를 조직하여 각각 유격구와 항일연군을 독립적으로 지도한다는 내용의 상부방침을 전달하였다. 동북인민혁명군을 좀더 광범위한 반일세력을 묶어 동북항일연군으로 개편한다는 방침도 전했다. 

▲ 중국 흑룡강성 영안시에 속한 경박호는 세계에서 가장 큰 언색호로 알려져 있다. 동쪽의 노야령과 서쪽의 장광재령 사이에 화산이 폭발해 만들어진 호수로 지금은 동북지방의 관광지로 각광받고 있다. 항일유격대의 역사가 깃든 회의가 1936년 2월 이 호수 남쪽과 북쪽 가장자리에서 열렸다.(사진=예스24블로그. http://m.blog.yes24.com/amirfirdaus/post/6698967) 

이와 함께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의 경우는 “중조반일연합군으로 개편”하고 “이 군대 중 조선공산주의자들은 ‘조선인민혁명군’을 조직하여 압록강과 두만강변의 중조국경지대에 근거지를 만들고, 적당한 때 조선으로 돌아가 해방투쟁을 전개할 것”, “반민생단 투쟁을 중지하라”는 지시와 함께 “조선인을 분리하여 조선인의 통일전선적 대중조직을 건설한다”는 등의 방침도 전달되었다. 이러한 지침에 따라 그동안 동만 지역의 공작에 대한 비판적 검토가 있었고, 제2군을 민족별로 분리한다는 데에도 의견이 접근했으나 조선인 간부가 없는 상태에서 더 이상의 깊은 논의는 진행되지 않았다.(주8) 

북호두 회의가 있은 얼마 뒤인 1936년 2월 하순경, 경박호 남쪽의 한 마을에서 2군 간부 회의가 개최되었는데, 동만특위 서기 웨이쩡민이 민생단 문제 등 그동안 제기되었던 문제들에 대한 코민테른 중공당 지도부의 방침을 전해주었다. 

동북항일운동에 대한 중공당 중앙(코민테른)의 방침이 2군 지도부에 의해 공식화된 것은 1936년 3월 초순에 열린 화룡현의 ‘미혼진 회의’에서였다. 이 회의에는 웨이쩡민, 왕더타이, 리쉐쭝, 저우슈동, 안봉학, 김일성 등 2군의 주요간부들이 대부분 참석했다. 회의에서는 광범위한 반일세력을 결집하기 위해 동북인민혁명군을 동북항일연군으로 개편하고, 종교, 정치, 성별, 빈부를 가리지 않고 또한 과거 일제의 주구, 간첩이었던 자들까지도 잘못을 뉘우치고 항일의 길에 나선다면 함께 손잡는 반일통일전선 방침을 확인하였다.(주9) 

▲ 1936년 3월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영도간부회의가 열린 안도현 미혼진(사진=류은규, 세계한민족문화대전)

그동안 적색유격대, 공농유격대에서 동북인민혁명군을 거쳐 동북항일연군으로 변환하였는데, 이는 노동계급의 무력에서 전체 인민을 포괄하는 계급의 연합부대로 바뀐 것을 의미했다. 또한 동북항일연군이라고 했을 때에는 중국인민의 연합뿐만 아니라 조선과 중국 민족의 연합이라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었다. 모스크바 코민테른 중공지도부는 제2군에 조선인들이 특히 많은 점을 감안하여 조선인부대를 따로 분리해서 꾸리고 이를 바탕으로 다시 조중(朝中) 연합군을 결성한다는 방침을 마련하였다. 민족간 분리는 제2군이 중심이었지만 제1군과 제7군의 경우에도 따로 편성할 것을 고려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민족간 부대의 분리에 대해 김일성 등 조선인 지도자들은 반대했다. 역량이 미약한 상태에서 민족 간으로 부대를 분리하게 될 경우, 일제의 이간공작에 놀아날 수 있고, 만주 전역으로 볼 때 조선족은 소수에 불과하기 때문에 분리할 경우 조선군대가 단독으로 행동하면 고립되어  제대로 활동하기 힘든 상황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주10)  

그동안 민생단 사건으로 당한 고통을 생각하면 조선인만의 독자적인 조직을 만들어 분리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을 것이다. 하지만 동만지역의 경우는 조선인들이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있지만, 대부분의 만주지역에서 조선은 극히 소수에 불과한 상태에서 무장부대를 따로 조직할 경우 각개격파 당하고 일제의 민족간의 갈등을 심화시켜 부대의 활동에 심각한 장애가 초래될 수 있었다. 이런 점을 파악한 조선인공산주의자들은 민족간 분리를 반대하고 조중연대의 실천을 강하게 주장하였다.  

조선인 중심부대 항일연군 2군 3사의 탄생

중공당의 신노선과 방침에 따라 미혼진 회의에서는 제2군의 재편성 문제를 결정하였는데, 모두 3개의 사단과 1개 독립여단으로 편성하기로 결정했다. 2군 군장에는 왕더타이, 정치위원에 웨이쩡민, 정치부주임에 리쉐쭝(李學忠), 참모장에 류한싱(劉漢興)을 각각 임명했다. 제1사는 연길1단과 일부 반일 산림대를 토대로 편성하였는데 사장에는 안봉학, 정치위원에는 저우슈동, 정치부주임에는 루보치(呂伯岐), 참모장에는 박득범(朴得範)이 임명되었다. 1단 단장에는 최현, 정치위원에 임수산(林水山) 등 조선인이 임명되었다. 2사는 왕청3단과 훈춘4단, 그리고 구국군 시쭝헹(史忠恒) 부대를 바탕으로 조직되었는데, 사장에는 시쭝헹, 정치위원에 왕룬청, 참모장에 첸한쟝(陳翰章)이 각각 임명되었다. 

3사 사장에는 김일성이, 정치위원에는 1935년 3월 다홍왜 회의에서 민생단 문제를 두고 김일성과 격하게 충돌했던 차오야판(曹亞範)이 각각 임명되었다.(주11) 사실상 ‘조선인민혁명군’ 성격을 띠고 활동할 2군 3사 정치위원에 차오야판을 임명한 것은 여전히 중국인들이 김일성을 견제하기 위한 장치를 마련하려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지만, 워낙 조선인 대원들의 감정이 나빠서 차오야판은 실제로 3사의 정치위원으로 활동하지 못했다고 한다. 차오야판이 후에 일본군 토벌대에 살해되었을 때 조선인 대원들이 ‘잘 죽었다’는 식으로 말하자 김일성이 동지의 죽음에 그렇게 말하면 안 된다고 비판했다고 할 정도로, 조선인들의 민생단에 대한 상처는 깊었다.

▲ 왕청현 소왕청 항일유격근거지 옛터(사진=길림신문)

동북항일연군 제2군은 애초 2개 사단으로 편성해 민족별 분리를 추진하려 했으나 그와 달리 3개 사단으로 편성하였고, 3사에 조중 국경지역으로 진출하여 새로운 근거지를 만들고 조선 국내로 진출하는 임무를 부여하였다. 그런데 이 3사 사장은 김일성이었지만 4개단 중 3개 단장이 모두 중국인이었다. 7단 단장 쑨쟝샹(孫長祥)은 김일환이 1934년 가을 처창즈에서 민생단으로 몰려 처형될 때 무장한 부하들을 데리고 가서 석방을 요구했던 구국군 지휘관이었고, 9단장 마더취엔(馬德全)은 김일성과 김일의 초기 활동 때부터 동지였던 김산호가 확보한 반일부대 지휘관으로 1935년 5월말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이 정식으로 성립할 때 편입되어 유격대장이 된 인물이었으며, 10단장 쑤쿠이우(書魁武)는 김일성의 동생 김철주가 파견되어 사업을 한 적이 있는 산림대 지휘관 출신이었다. 8단장 전영림(錢永林)만 조선인이었다.(주12) 이처럼 김일성은 중국인, 그 중에서도 구국군이나 산림대 출신의 부대들을 거느리고 조중 합작사업을 펴는 게 훨씬 편했을 정도로 조선인과 중국인 공산주의자 사이에 벽이 있었다.  

▲ 중국 연변조선족자치주 용정시 마안사. 민생단 혐의자들이 갇혀 있던 곳이다.

그러나 김일성의 2군 3사는 편성은 되었지만 실제 병력이 주어진 것은 아니었다. 그와 오랫동안 함께 손발을 맞추며 활동했던 왕청3단과 훈춘4단은 2군 2사에 편입되어 저우바오중의 5군과 함께 길동지역에서 공동 작전을 펴고 있었고, 3단의 일부는 최용건이 활동하고 있던 7군 요하지역으로, 4단의 일부는 김책이 활동하고 있던 3군의 주하지역으로 파견되었다.(주13) 미혼진 회의가 끝난 뒤 김일성은 오백룡, 김산호, 이동백 등 20여명에 불과한 병력을 이끌고 무송현 마안산으로 향했다. 김일성은 마안산에서 화룡2단의 병력을 인수받을 예정이었으나 실제로 가보니 2단장 장첸위(張泉玉)와 정치위원 차오야판이 부대를 이끌고 교하로 원정을 떠나고 없었다. 김일성은 그곳 감옥에 갇혀 있던 100여명의 민생단 혐의자들의 문서보따리를 불사르고 전투가 가능한 사람들을 모두 대원으로 받아들여 부대를 편성했다. 이때 편입한 이들로 3사의 주력인 7단과 8단이 조직됨으로써 ‘김일성부대의 신화’를 창조할 주력부대가 마련되었다. 이들은 장백현과 국내에 공작원으로 파견되어 조국광복회 결성에 나섰으며, 1937년 6월 초에는 국내진공작전인 보천보 전투의 주역으로 활약했다. 김일성은 평생 잘한 두 가지 결단이 국민부계통의 화성의숙을 그만두고 김림의 육문중학에 입학한 것과 마안산에서 민생단 보따리를 불태운 것이라고 했다는데, 그만큼 민생단 혐의자들을 풀어주고 자신의 부대에 받아들이는 일은 김일성에게도 큰 모험이었고 결단이 필요했던 일이었다. 

백두산 지구로 진출해 조국광복회 결성

1936년 5월 무송현 동강에서 개최된 동북항일연군 제2군 고위간부회의에서 제1사와 3사는 무송, 안도, 장백, 임강현 등 장백산(백두산) 지구로 진출하여 새로운 유격구를 마련하기로 결정했다. 2군의 근거지였던 동만지역은 민생단 사건의 여파로 조직이 파괴된 데다가 일제의 이른바 치안숙정공작으로 활동 근거지를 상실했기 때문에 새로운 활동지역을 개척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장백현은 조선인들이 많은데다가 아직도 일제의 치안력이 취약한 지역이어서 근거지 개척이 용이할 것으로 판단되었고, 더욱이 국경에 접한 이 이 지역은 압록강 상류의 좁은 개울을 건너면 바로 조선 땅이어서 국내로 진출하는데도 유리했다. 김일성이 이끄는 3사에는 중국인 구국군 출신의 마더취엔(馬德全)과 쑤쿠이우(書魁武)가 이끄는 제9단과 제10단을 보충, 편성하여 7·8·9·10단이 편성, 배치되었다. 또한 회의에서는 부대 개편과 더불어 동만지역에서 재만조선인조국광복회를 건설하기로 결정하고 제2군 3사(후에 2군 6사)가 중심이 되어 중국의 장백현과 조선 북부 지방을 중심으로 이 사업을 구체적으로 진행하도록 하였다.(주14) 

▲ 북한에서 말하는 ‘백두산 밀영 고향집’

1936년 6월 말 제2군 정치위원 웨이쩡민은 금천현 하리로 가서 제1군 군장 양징위(杨靖宇) 를 만나 ‘신방침’을 전달하였다. 1905년 하남성 확산현 출신의 양징위는 1931년 9.18사변 후 만주로 파견되었다. 양징위는 중국공산당 하얼빈시위 서기 겸 만주성위 군사위원회 서기를 거쳐 남만 순시원으로 파견되어 이홍광, 양림 등 조선인 공산주의자들과 함께 남만유격대를 조직하고 이를 동북인민혁명군 제1군 독립사로 발전시켰으며, 동북항일연군 제1군 군장 겸 정치위원, 중공남만성 위원회 위원 등을 지내며 남만지역 항일무장투쟁을 총지휘하였다. 양징위는 1940년 2월 배신자의 밀고로 은신처가 드러나 길림성 몽강현(지금의 정우현)의 한 밀림에서 싸우다 전사했는데, 일본군은 양징위의 목을 잘라 시내에 내걸었고 배를 갈라 무엇을 먹고 버티었는지 확인하고자 했다. 그의 배 속에는 나무뿌리와 껍질, 풀뿌리, 솜밖에 안 나왔다고 한다. 엄동설한 속에서 나무뿌리와 입고 있던 옷의 솜을 뜯어 먹으며 버텼던 것이다. 1930년대 후반 양징위와 김일성은 남만과 동만 지역의 대표적인 항일유격대 지휘관이었다. 중국 정부는 양징위의 항일사적을 기리기 위해 그의 순국지에 기념비를 세우고 통화시에는 정우능원을 세웠다.(주15) 

▲ 중국 통화시 정우능원 앞에 있는 항일연군 석상(사진=임영태)

7월 금천현 하리에서는 웨이쩡민의 주재 아래 남만특위와 동만특위 및 제1·2군 영도간부 연석회의가 개최되었다. 하리회의에서는 남만특위와 동만특위를 남만성위원회로 통합하고 서기에 웨이쩡민을 선출했는데, 남만성위 13명의 위원 가운데 제1군 소속의 유좌건(청년부장), 이동광(조직부장), 오성륜(선전부장) 등이 조선인이었다. 또한 회의에서는 제1, 2군을 합쳐서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을 편성했으며, 양징위가 총사령, 왕더타이가 부사령, 웨이쩡민이 정치위원이 되었다. 1군과 2군 사이에 순차적으로 번호를 매겨 제1사부터 제6사까지 하기로 했으며, 김일성의 제2군 3사는 제1로군 6사로 개편되었다. 나아가 회의에서는 「한인 공작의 부활문제」라는 제목의 결의를 통해 항일민족통일전선체로서 ‘조국광복회’를 조직하기로 결정하였다.(주16) 

동강회의와 하리회의 등의 방침에 따라 김일성이 이끄는 동북항일연군 2군 6사는 백두산 주변에 유격근거지를 마련하고, 조선인들을 반일전선에 결집하기 위한 조국광복회 조직 사업을 진행했다. 조국광복회는 1936년 5월부터 중국 장백현과 조선 북부지역을 중심으로 비밀리에 조직되었는데, 1937년 10월부터 1938년 9월까지 일제 경찰의 대대적인 검거로 조직이 와해되면서 그 전모가 드러났다. ‘혜산사건’으로 불리는 이 사건으로 1937년 항일연군 6사 조직과장 권영벽, 이제순, 박금철, 장증렬, 위인찬, 김공수 등의 주요 인물들이 검거되기 시작해 1938년 박달을 비롯하여 김성연, 이용술 등이 검거되는 등 모두 739명의 관련자가 체포되었다. 조국광복회는 두 차례에 걸친 대규모 검거사건으로 1938년 말 사실상 붕괴되었지만, 2년여의 짧은 기간 동안에 이룬 성과는 간단치 않았다.(주17)  

조국광복회는 중국의 장백현 지역과 갑산·혜산 지역을 중심으로 한 조선 북부 지역에서 활발하게 조직되었다. 중국 장백현의 경우, 6사 조직과장 권영벽이 공작원으로 파견되어 이제순을 총책으로 하는 장백현공작위원회를 조직하고, 그 지도 아래 여러 지회, 분회 등이 조직되었다. 국내의 경우에도 6사의 지도 아래 박달·박금철을 중심으로 1937년 2월 갑산공작위원회를 개조한 갑산군 운흥면과 보천면을 중심으로 한인민족해방동맹이 조직되었는데, 산하에 항일청년동맹, 반일그룹, 농민조합, 반일정우회 등 35개 단체가 조직되었다. 그밖에도 갑산군, 혜산읍, 삼수군 등의 백두산 주변 접경 지역과 무산군, 성진군, 길주군 등 함경북도의 조중 국경지역 일대, 함경남도 함주군, 함흥군, 풍산군, 단천군, 나아가 흥남, 원산, 평안북도 명천군, 신의주와 압록강 중류방면의 동흥, 후창 등지에 항일연군의 정치공작원이 파견되어 조직사업을 전개하였다.(주18) 

▲ 조국광복회 조직을 위해 파견되었던 2군 6사 조직과장 권영벽과 밀영 작식대원 장철구
▲ 보천보 전투 상황을 알리는 신문 기사

국내 진공작전 보천보 전투의 성공

동북항일연군 제2군이 백두산 지구로 진출하기 위해서는 그 지역에서 가장 큰 도시인 무송현성을 공격하여 약화시키지 않으면 안 되었다. 1936년 8월 16일 왕더타이를 총지휘로 하는 제2군은 제4사 2단과 제6사, 그리고 만순 등의 산림대를 합쳐 총 1,800명의 병력으로 무송현성을 공격했다. 저녁 제6사 부대의 기습공격으로 시작된 전투는 다음날 17일 새벽까지 전개되었다. 이 전투로 무송현성을 뒤흔들어 놓았지만 2군 정치주임 리쉐쭝이 사망하는 타격도 입었다. 그의 뒤를 이어 전광(오성륜)이 2군 정치주임이 되었다.(주19)

이후 김일성의 6사 주력 부대는 9월에 대덕수 전투와 소덕수 전투를 치르고, 10월에 반절구 전투와 이도강 전투를 치르는 등 계속해서 전투를 벌이면서 장백산 근거지를 개척해 백두산 주변에 4개의 밀영이 만들어졌다. 이에 항일연군에게 타격을 주기 위한 일본군의 토벌작전이 대대적으로 전개되었다. 제1군 2사가 사장 차오궈안(曹國安)의 인솔 아래 임강현으로 이동해서 왕더타이의 제2군과 합류해 11월 홍두산의 만주군 주둔지를 공격했으나 그 달 말 항일연군은 토벌군에게 포위되어 제2군장 왕더타이가 사망하는 피해를 입었다. 이후 2군 4사가 임강현에서 김일성의 6사와 회동, 13도구와 7도구에서 공동작전을 폈다. 그해 12월에는 1군 2사장 차오궈안이 전사하고 6사 정치위원 차오야판이 2사장으로 취임하였다. 

▲ 보천보 전투를 보도한 동아일보 호외(1937.6.5.일자)

김일성의 6사는 백두산 지구에 밀영을 조직하는 한편, 백두산 일대와 조선 북부 국경지대에 조국광복회 조직을 구축해나갔다. 1937년 2월에는 팔도구 상류 이명수 지방에서 4사와 6사가 공동으로 매복공격을 감행하여 큰 전과를 올렸다. 3월에는 서강 양목정자에서 2사장 차오야판과 4사장 저우슈동, 6사장 김일성이 공동작전에 대해 논의하였다. 4사 1단장으로 회의에 참석한 최현의 회상에 따르면, 그동안의 전투 보고에 이어 왕더타이 군장의 전사를 막지 못한 4사의 책임을 묻는 김일성의 강한 비판이 있었다고 한다.(주20)

회의에서는 조선 국내 진공작전에 대해서도 논의하였는데 전투 경험이 풍부하고 장백 근거지 구축하고 있던 김일성이 작전을 주도했다. 6사가 장백현에서 국내로 진공 작전을 펴서 보천보를 공격하고, 4사는 무송, 안도, 화룡을 돌아서 조선의 무산지구를 공격하기로 했다. 2사는 임강 일대에서 장백으로 향하여 간삼봉 근처에서 3개 사가 합류하기로 했다. 

회의가 끝난 뒤 최현의 1단과 경위련, 2단 일부를 데리고 출발한 저우슈동의 4사는 안도현에서 토벌대와 만나 전투가 벌어졌는데 이때 청년 사장 저우슈동이 전사했다. 17세의 소년 장수로 민생단 사건의 마녀사냥에서 한몫했던 이 젊은이는 새로운 방향 전환에 따라 조중연대를 실천하는 과정에서 갓 20세의 삶을 마감했다. 부대는 최현의 지휘로 고전 끝에 악명높은 이도선 부대를 격파하고 가까스로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는데, 이 과정에서 이도선도 전사하였다. 5월 15일 4사는 두만강을 건너 함경북도 무산군의 한 촌락을 공격하여 주재소를 파괴하였는데, 최현 비(匪)의 소행으로 보고되어서 최현의 이름이 일약 유명해졌으며(주21) 동시에 그의 목에는 김일성과 더불어 최고의 현상금이 걸리게 되었다.

한편, 1937년 6월 4일 오전 0시 김일성이 이끄는 90명의 대원들은 뗏목으로 압록강을 건넌 뒤, 쉬면서 습격대, 주재소 진공대, 농사시험장 진공대, 방위대, 물품탈취대, 검열대 등의 6개 대오로 나누었다. 이와 함께 조국광복회 청년 80여명도 산림 속에 집결하여 16개 반으로 나누어 임무를 분담하고 기다렸다. 김일성 부대는 낮에는 조용히 숲속에 숨어 있다가 밤 9시에 가림천을 건너 보전 입구에 접근, 밤 10시 습격을 시작했다. 유격대가 전화선을 절단한 뒤 주재소를 공격하자 경관 5명(그 중 2명은 조선인)은 모두 도망쳐 버렸다. 유격대는 주재소 총기고에서 경기관총과 소총, 권총, 탄약 등 전리품을 획득하였다. 같은 시각 다른 부대가 농사시험장, 삼림보호구, 소방소, 면사무소, 우체국을 습격하여 건물에 불을 지르고 장부와 우편물을 불태웠으며, 보통학교도 불타올랐다. 약국과 요리점, 잡화상 등 10여 군데 점포와 주택에 침입하여 현금과 물자를 탈취하였다. 유격대는 밤 11시 삐라를 뿌리고 철수하였다.(주22)

보천보 전투 소식은 동아일보를 비롯한 국내의 신문에 대대적으로 보도되었다. 이 사건을 통해 김일성은 만주뿐만 아니라 조선 국내에서 유명인물로 떠올랐다. 보천보 전투는 김일성을 전국적 인물로 만들었고, 이후 김일성의 신화가 형성되는 계기로 작용하였다. 

▲ 북한의 보천보 전투 승리기념탑(사진=통일뉴스)

간삼봉 전투와 혜산 사건

보천보 진공작전을 성공적으로 끝낸 김일성 부대는 백두산 밀영으로 철수했다. 그 며칠 뒤에는 참모장 박득범이 인솔하는 4사가 도착했다. 4사는 국경을 넘어 무산지구로 들어가 공격을 편 뒤 화룡현으로 북상했다가 다시 남하해 백두산 동남부 조선 영내 베개봉을 지나 장백지구로 나왔다. 차오야판이 인솔하는 2사도 도착했다. 총병력은 400명〜600명의 연합부대는 6월 24일 밀영을 출발해 29일 간삼봉(주23)에 도착했다. 그동안 항일연군의 조선 진출에 다급해진 일본군은 김인욱(주24) 소좌의 지휘 아래 함흥의 제74연대를 출동시켜 국경일대에 대한 대토벌전을 감행하고자 했다. 김인욱 부대는 주력군이 간삼봉으로 이동했다는 정보를 포착하고 서둘러 그곳으로 나아갔으나 6월 30일 항일연군 2·4·6사의 연합작전에 말려 괴멸적인 타격을 입었다. 지휘관이었던 김인욱도 부상을 입고 퇴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간삼봉 전투 소식도 국내에 크게 보도되었다. 동아일보 1937년 7월 2일자는 ‘함흥 신갈파 대안에 500여명이 내습, 함남군대 출동 격퇴’, ‘교전 3시간 만에 쌍방 사상자 67명, 총기 등 다수 무기 탈수(奪收)’라는 표제로 이 사건을 보도하였다. 기사는 “보천보를 습격한 김일성, 최현 일파가 조국안 일파와 합류한 연합항일군 약 500명이 국경 대안을 습격코저 한다는 정보가 함흥 연대에 들어왔기” 때문에 ‘김소좌’가 부대를 인솔, 출동해서 격퇴했다는 내용으로 보도되었다. 언론보도에서도 알 수 있듯이 보천보 진공작전은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의 조중 연합부대가 이뤄진 가장 성공적인 작전 가운데 하나였다.(주25) 

그런데 이러한 보도는 국내 민중에게 김일성을 ‘전설적인 항일 명장’으로 각인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당시 일본군은 조중 국경을 ‘금성철벽’이라며 자랑했을 뿐만 아니라 일본군은 중국 각지에서 승승장구하며 위세를 떨치고 있었다. 조선 국내에서는 숱한 지도자, 지식인들이 독립운동을 포기하고 친일파로 변절하기 시작했고, 민중은 독립에 대한 희망을 잃어가고 있었다. 그런 때에 철벽이라고 자랑하는 국경을 쥐도 새도 모르게 넘어 들어와 주재소를 부시고 추격하는 일본군마저 섬멸했다는 소식을 들은 조선민중은 김일성에 대해 큰 희망을 갖게 되었던 것이다. 

▲ 간삼봉 전투 소식을 전하는 동아일보 기사(1937.7.2.일자). 교전 3시간만에 쌍방 67 총기 등 다수 무기 탈수. “장백현 팔도구 백암두에서 공비 김일성, 조국안, 최현의 합류부대 6백명과 함흥 혜산 신갈파 수비대 김소좌 이하 OOO명과 교전 3시간에 이르러 공비측은 사자 50명 수비대측은 5명 부상자 12명을 내이고 공비의 총기다수를 탈수하고 30일 오전 7시 조선측으로 돌아왔다”라고 되어 있다. 

김일성의 이름이 국내 신문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대체로 1936년부터였는데, ‘공산군 김일성 일대’라든지 ‘동북인민혁명군 김일성 일대’, ‘김일성 일파 공비’ 등으로 보도되었다. 그런 와중에 보천보 사건이 일어나면서 일약 전국적인 스타로 떠오른 것이다. 보천보 전투는 김일성에게 큰 자신감을 심어주었으나 규모 면에서는 대단한 것이 아니었다. 이 보다 훨씬 규모가 큰 전공이 많지만 그 어떤 전투보다 김일성에게는 가장 중요한 사건이었다. 이 전투는 무엇보다도 사전 준비를 철저히 한 가운데 김일성부대 등 항일연군이 완벽한 승리를 거두었다는 점에서 가장 중요한 의미기 있다. 

보천보 전투 직후인 1937년 7월 7일 일본군은 루거우차오 사건을 일으켜 중일전쟁을 시작했다. 김일성은 일본이 중국 본토에 대한 침략을 벌이게 되면 필연적으로 전선이 확대될 수밖에 없고 그렇게 되면 더 이상 버틸 수 없을 것이며, 따라서 머지않은 장래에 조선의 해방과 혁명의 기회도 찾아올 것이라고 보았다. 김일성은 박금철과 만나 공산당과 조국광복회 국내 조직을 적극적으로 확대해 결정적인 시기를 위한 준비를 지시하였다.

그러나 일제는 보천보 습격 사건 이후 국내 조직망을 캐내기 위해 필사적으로 수사를 진행하였고, 1937년 9월부터 10월 사이에 보천보 전투에 참가했다가 재차 지령을 받고 혜산읍에 잠입한 항일연군 공작원 3명이 체포되면서 조국광복회 조직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10월 10일 항일연군에서 파견되어 국내에 들어와 있던 권영벽 등 8명이 체포되었고, 11월 중순까지 조선에서 162명, 만주 장백현에서 59명이 검거되었다. 수사는 1938년에도 계속되었고, 9월 박달 등이 체포되면서 사실상 검거 사건은 종결되었다. 조국광복회와 관련하여 총 739명이 검거되어 188명이 기소되었고, 그 중 권영벽, 이제순(이동석), 지태환, 서인홍, 이동걸, 박달(박문상) 등 6명이 사형을(주26), 박금철, 이용술(이경봉), 김성연(김철억), 이주홍 등 4명이 무기징역을, 그리고 이송운, 이호철, 김왈룡 등 38명이 10~15년의 중형을 언도받는 등 최종적으로 167명이 실형을 선고받았다.(주27) 사형을 선고받은 박달은 병으로 사형집행이 연기되었다가 1945년 8월 15일 광복으로 살아남을 수 있었다. 

▲ 1938년 9월 혜산사건으로 체포된 박달(중앙 포승 묶이고 수갑찬 사람)과 사건 검거에 공이 많다고 일본경찰 최고훈장인 경찰공로기장을 받은 경찰 최연(박달 오른쪽 안경 쓰고 나무지팡이 짚고 있는 자)

이와 함께 김일성의 신원도 명확하게 드러나게 되었다. 『사상휘보』 제20호(1939년 9월)에 실린 ‘혜산 사건’의 보고에 김일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김일성의 신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는데 본명 김성주(金成柱). 당 29세이며 평안남도 대동군 고평면 남리 출신으로 어렸을 때 친부모를 따라 간도 방면으로 이주하여 이 지방에서 성인이 되어 비적에 투신한 조선인이라는 것이 가장 확실하며, 현재 그 어머니는 살아 있다는 소식이다.”(주28) 이 중 어머니가 생존해 있다는 것 외에는 모두 정확한 내용을 담고 있다. 

보천보 작전 뒤 혜산 사건을 통해 조국광복회 조직은 사실상 궤멸상태에 빠졌고, 일제는 함경도 국경지역에 대한 대대적인 정화공작과 더불어 방공단 조직 등을 활용하여 유격대와 주민에 대한 감시망을 더욱 강화하였다. 이처럼 보천보 전투 후 항일조직이 파괴되고 치안공작이 더욱 강화되어 이 지역 민중의 고통이 심해졌지만, 보천보 습격 사건은 조선민족에게 새로운 희망과 좌표를 심어주었다는 점에서 항일투쟁의 역사에서 가장 빛나는 사건 가운데 하나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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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1) 와다 하루끼,  『김일성과 만주항일전쟁』, 창작과비평사, 128~129쪽

2) 장세윤, 『1930년대 만주지역 항일무장투쟁』, 독립기념관, 2009, 260〜261쪽

3) 와다 하루끼, 위의 책, 129~130쪽

4) 한홍구, 만주의 한국민족해방운동과 중국공산당-민생단 사건을 중심으로-, 한국민족운동사연구 27, 2001, 266〜273쪽

5) 와다 하루끼, 위의 책, 131~132쪽

6) 김일성, 세기와 더불어 4, 149~178쪽

7) 신주백, 『만주지역 한인의 민족운동사(1920~45)』, 396쪽

8) 와다 하루끼, 위의 책, 132~133쪽 

9) 신주백, 위의 책, 440〜442쪽

10) 김일성, 세기와 더불어 4, 248쪽

11) 와다 하루끼, 위의 책, 134〜135쪽

12) 김일성, 세기와 더불어 2, 434〜435쪽; 세기와 더불어 6, 26, 261〜264쪽 참조

13) 김일성, 세기와 더불어 4, 270〜283쪽

14) 와다 하루끼, 『김일성과 만주항일전쟁』, 창작과비평사, 1992, 141쪽; 신주백, 『만주지역 한인의 민족운동사(1920~45)』, 아세아문화사, 1999, 450쪽; 이재화, 『한국근현대민족해방운동사-항일무장투쟁사 편-』, 256~319쪽

15) 임영태, “중국 땅에서 우리역사를 배워야 하는 현실이 안타깝다”, 『통일뉴스』, 2014. 10. 25

16) 신주백, 위의 책, 451쪽

17) 이종석, 「북한 지도집단과 항일무장투쟁」, 『해방전후사의 인식 5』, 116쪽

18) 이종석, 위의 글, 117~120쪽

19) 와다 하루끼, 위의 책, 149~150쪽

20) 와다 하루끼, 위의 책, 156쪽

21) 와다 하루끼, 위의 책, 157쪽

22) 와다 하루끼, 위의 책, 159쪽

23) 간삼봉은 국경에서 가까운 장백현 13도구에 위치한 봉우리로서 “바다같이 무연한 숲이 깔려 있는 가운데 섬처럼 도드라져 나온 해발 1,200미터 가량 되는 세 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져 있다”고 하는 곳이다.

24) 북한 자료에서는 이때의 일본군 지휘관이 김석원이라고 했으나 이는 착오다. 이때 일본군을 지휘한 인물은 김석원의 일본육사 동기인 김인욱 소좌였다.(이종석, 앞의 글, 88쪽; 와다 하루끼, 위의 책, 162쪽)

25) 와다 하루끼, 위의 책, 162쪽

26) 이들은 1945년 3월 10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사형이 집행되었는데, 박달은 신병으로 형집행이 정지된 상태에서 해방을 맞아 풀려날 수 있었다. 또한 마동희, 박녹금, 황금옥 등은 재판 전 옥사했다. 

27) 조우찬, 1930년대 중반 한인민족해방동맹의 항일투쟁의 특징과 역사적 재평가, 『동북아역사논총』 54호(2016), 197〜198쪽; 이종석, 위의 글, 120쪽 참조. 

28) 와다 하루끼, 위의 책, 16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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