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원순 전 서울시장의 갑작스런 죽음 앞에 아직 시신의 체온이 식기도 전에 입에 담지 못할 말들이 오가고 있다. 정말 이 나라 이러다 끝나고 마는 것이 아닌가? 전장에서도 적장의 죽음 앞에 선 최소한의 예의를 지킬 줄 알아야 하는 것이 도리이다. “너희는 망한다. 반드시 망한다. 망하면 우린 다시 온다.” 이 말은 일제 마지막 총리대신이 우리에게 남기고 간 말이다. 

인간사는 세상 기본과 상식이 다 무너진 듯하다. 앞으로 로봇과 인간이 다른 점은 상식이라고 하다. 로봇이 아무리 지능이 인간보다 뛰어 난다 해도 상식이 없는 것이 인간과 다른 점이라고 한다. 우리나라가 4차 산업에 앞서 가느라고 이렇게 상식 없는 사회가 되어 가고 있는가? 로봇이 상식을 인간보다 결여돼 있다는 것은 로봇이 결코 인간을 이기지 못할 것이란 것을 의미한다.

이 글에서는 박 시장의 죽음을 두고 시시비비를 말하고 싶지 않다. 다만 글을 통해 여야를 막론하고 사물을 볼 줄 아는 최소한의 상식과 철학적 소양만은 있어야 함을 강조하려 한다. 글이 또 하나의 시시비비가 되지 않기 바란다. 

산타 마리아 텔레 그라치아 성당의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의 진상이 뒤집히고 있다. 최근의 대대적인 검증을 거친 결과 예수의 겉옷이 암적색으로 보였던 것도 사실은 ‘매연과 먼지’ 때문인 것으로 밝혀졌다. 다시 말해서 원래의 색은 선명한 오렌지색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런데 그 동안 미술 평론가들은 ‘빛바랜 암적색’을 두고 “예수와 유다의 암담한 긴장관계를 상징한다”고 했다. 그러면 가짜 색인 암적색을 두고 이렇게 평해 온 미술 평론은 어떻게 된 것인가? 가짜를 두고 진짜인 줄로 알고 저명한 미술 평론가들이 이구동성으로 평해 왔으니 말이다. 

그러면 지금까지의 허위사실을 두고 평해온 미술평론을 모두 허위라고 할 것인가 그렇지 않다고 할 것인가? 사실 이 문제는 현대 철학이 경쟁적으로 다투어 쟁점으로 다루는 문제이다. 즉, 러셀, 마이농, 라일, 퍼슨스, 플라팅아. 크립키 등 저명 철학자들이 앞 다투어 경쟁적으로 다루는 쟁점 가운데 쟁점이다. 바로 이런 문제를 주제로 다룬 한 권의 책을 소개하면 미우라 도시히코의 『허구세계의 존재론』(그린비, 2013)을 손꼽을 수 있을 것이다. 

전 박원순 서울시장의 실종을 두고 아직 시신이 발견되기도 전에 언론은 앞 다투어 죽음의 원인이 전 여 비서의 고소 사건 때문이라고 하는 둥, 더 나아가 ‘사망’이라고 까지 오보를 내 보냈다. 물론 죽음으로 돌아 왔다. 그러나 자살을 했다면 그 자살의 원인이 무엇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물론 그 여 비서의 고소사건이 원인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열어 놓고 판단을 해야 할 것이다. 고소의 대상이 사라졌으니 사실상 고소는 취하되고 말았고 이 사건은 영구 미제로 남을 수  밖에 없게 되었다. 

아무리 심증이 간다고 해도 법정에서 마지막 판결이 나오기 전까지는 심정에 호소에 판단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 사건은 ‘공소권 없음’으로 종결될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지금 한국 사회는 아예 ‘여 비서 사건’으로 단정으로 해 놓고 한 나라의 야당 지도자들은 조문 자체를 가지 않겠다고 한다. 라캉의 말에 의하면 ‘애도’를 표한다는 것은 살아있는 자들의 마음속에서 망자를 잊는다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세월호의 경우 애도로 끝맺음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전 새누리당의 발목을 잡아 지금까지 세월호에 목매어 있지 않은가? 

야당 지도자들이 박원순 시장의 마지막 가는 길에 애도를 표하지 않겠다는 것은 앞으로 이것이 이들의 아킬레스건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김종인 나이 값을 못하고 있다. 이 마당에 내년 보궐선거를 운운하고 있다니 나이 헛먹었다고 할 수밖에 없다. 

마치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에 대한 평론가들의 평이 이제 와서 한갓 웃음거리가 되어버리듯이 될 것은 명약관화하다. 지금도 옥포에 가면 일본인들이 와서 이순신 장군을 추모하는 방문객들이 있다고 한다. 앞으로 일본과 한국과의 경쟁에서 누가 이길 것은 정해져 있지 않는가? 전쟁은 무기로 이기는 것이 아니고 상식과 철학으로 이긴다.   

적어도 위에 소개한 미우라 도시히코의 『허구세계의 존재론』을 한 번 읽어 보는 것이 필요하다. 책과 그 안에 나와 있는 철학자들의 이론들을 들어 보면 박 시장의 죽음을 두고 그렇게 간단하게 쉽게 단정적으로 판단하기가 어려운 점이 많다는 사실을 실감할 것이다. 여기서는 그 이론들을 다 소개할 수는 없다. 러셀과 실증주의자들은 실증되거나 검증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말하지 말라 할 것이다. 반면 마이농 같은 사람은 양태론리학을 통해 가상의 허구 세계도 실제와 같이 거론될 수 있다고 할 것이다. 이 두 설을 종합해 놓고 보면 ‘비결정성’과 ‘불확실성’에 도달하고 말 것이다. 

도시히토의 책을 보면 허구 세계가 실제적인 것으로 만들어지는 이유가 논리학 가운데 배중률 때문이라고 한다. “A와 A 아닌 것 사이에 가운데는 없다”는 것을 두고 배중률이라고 한다. ‘A이든지 A아니든지’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A이든지 A아니든지’라는 말은 참이다”라는 것이 참으로 성립하는 것이 배중률의 성격이다. ‘문장 자체가 참이다’를 성립시키는 배중율의 성격 때문에 허위 사실을 유포하는 자는 항상 배중율을 구사한다. 

조문을 간 빈소에서 기자가 이해찬 민주당 당대표에게 여 비서 사건이 참이냐 거짓이냐와 같은 배중율을 구사하는 질문을 던졌다. 여기서 이해찬 대표가 배중율의 쌍가닥 가운데 어느 하나 즉, ‘이다’이든 ‘아니다’이든 간에 어느 한 가닥이라고 언급하는 순간 허위가 만들어지기 시작한다. 

예수 역시 간음한 여인을 끌고 온 군중들로부터 돌을 “던져야 하느냐 말아야 하느냐”의 배중율에 해당하는 질문을 받았다. 예수는 이 쌍가닥 질문 가운데 어느 하나를 선택해도 거기서부터 허위적인 진실이 만들어진다는 사실을 알고 현명한 대답을 하였다. 

예수의 대답인즉 “너희 가운데 죄없는 자가 먼저 돌을 던지라”고 했다. 돌을 던지란 말인가 말란 말인가? 한마디로 말해서 예수의 결정은 ‘비결정’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예수의 이 말을 들은 군중들은 하나 둘 손에 쥔 돌을 놓고 사라지고 말았고 광장에는 여인과 예수밖에 남는 사람을 없었다. 예수는 여인을 향해 다시는 같은 일을 반복하지 말라하고 하며 돌려보냈다. 이 경우는 여인의 간음 행위가 명명백백하고 여인 자신도 그 사건 자체만은 인정하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성서는 그 여인이 간음 현장에서 잡혀 왔다고 한다. 

그러나 박원순 시장의 경우는 대한민국 법정에서 시비가 가려지지 않은 사건이다. 무슨 현장에서 잡힌 것도 아니지 않는가? 여 비서의 고소고발의 고소 내용이 아직 법적으로 밝혀지지도 않았고 떠도는 고소 내용이 여 비서의 일방적인 주장일 수도, 아니 어떤 정치적 배경이 있는 음모일 수도 있다(필자는 이에 대해서는 아직 정확한 정보가 없다). 그런데 언론과 여론은 허구사실의 존재론에 대한 검토 없이 마구잡이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있다. 

서울 한 복판에 그것도 한 도시에 시장이라는 사람이 시신이 돼서 그리고 시장을 고발한 여 비서도 동시에 끌려 나왔다. 페미들과 여성해방 운동가들은 손에 돌멩이를 들고 박 시장의 시신을 향해 돌을 던지고, 다른 한 편에서는 여 비서에게 돌을 던지라고 한다. 여기에 예수가 나타난다면 어떤 선택을 하고 어떤 말을 할 것인가? 예수 당시에는 남녀가 동시에 간음을 했을 때에 여자만 처벌하도록 했기 때문에 예수의 판단도 비교적 쉬웠을 것이다. 그리고 위해서 말한 대로 여인의 현장에서 잡혀왔기 때문에 다른 물증이 필요조차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예나 지금이나 피의자가 둘이든 하나이든 예수는 돌을 던지려던 군중들을 향해 있었던 것이다. 너희 가운데 똑같은 잘못이 없는 자가 먼저 돌을 던지라고 한 점에서는 같다. 박 시장에게 돌을 던지든 여 비서에게 돌을 던지든 손에 돌을 들고 있는 군중들을 향해 너희 가운데 죄없는 자가 먼저 돌을 던지라고 한 점에서는 같다.

아마도 예수가 광화문 현장에 서 있다면 박 시장이든 여 비서이든 이들을 다 살리려 할 것이다. 그 대신 손에 돌을 든 자들을 향해 같은 말을 할 것이다. 예수는 그 모인 모든 군중들이 다 간음한 자들이라는 사실을 간파하고 있었다. 그래서 예수가 선택한 비결정적 선택이란 모든 인간들은 죄 앞에 평등하다는 선택일 것이다. 예수는 프로이트 이전에 성적 욕망은 가장 큰 욕망으로서 누구나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간파하고 있었다. 모든 욕망과는 달리 성욕은 안으로부터 나오는 것으로 다른 것과 다르다고 했다. 프로이트도 예수 앞에 무릎을 꿇을 것이다. 그래서 성문제에 있어서 만은 너희 가운데 누구든 자유로울 수 있는 자는 한 번 나와 보라 한 것이다. 

그러나 서울의 군중들은 일루의 자기성찰이나 가책이 없이 서슴없이 그 여인을 향해 돌을 던질 것이다. 한국 기자들이 그  군중들이었다면 말이다. 이것이 대한민국의 국민의 현주소라고 본다. 그리고 이러 선택을 한 예수를 두고 한국 언론들은 ‘간음 방조죄’로 다음 날 대서특필 할 것이다. 그래서 예수는 체포되었고 드디어 처형되고 말 것이다. 그러면서 언론은 예수가 성경험을 하지 않고는 할 수 없는 말이라고 추측성 보도도 서슴없이 할 것이다. 그래서, 나아가 예수가 그 여인과 어떤 특별 관계였을지도 모른다고 할 것이다. 소설 등에서는 그 여인이 바로 막달라 마리아였고, 그 사이에 예수가 자식까지 두고 있었다고 쓰고 있다. 허위사실은 이렇게 만들어진다. 결국 21세기 간음 현장에서 “저희는 돌을 던졌다.”

군중들은 손에 든 돌은 놓았지만 예수를 향해 두고 보자 하고 돌아섰다. 통합당과 한국 보수들이 만약에 여 비서 사건으로 몰아가고 애도까지 표하지 않는다면 다시 말해서 박 시장의 죽음을 여 비서와의 성추행 문제로 끌고 간다면 큰 난관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렇게 심각하게 문제를 삼는다면 박근혜 탄핵에 대해서 더 이상 말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서 박근혜의 최순실과의 국정농단과 박원순 시장의 사생활 가운데 어느 것이 법적으로 비중이 더 큰 지를 이 차제에 곰곰이 비교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예수의 ‘너희 가운데 죄없는 자’란 말에는 박근혜도 넣어 생각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해찬 당대표는 "피해호소 여성의 아픔 위로"라 했고, 13일 피해 여성 측도 마치 박 시장의 죽음을 여 비서의 관계인 것처럼 기정사실화 해 놓고 기자회견을 했다. 그러나 이 둘다 잘 못이다. 그런 의미에서 진성준 의원이 "박원순 가해 기정 사실화는 명예훼손이다"란 말은 반반 옳고 그르다. 왜냐하면 이 사건은 결정될 수 없음으로 끝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 외의 그 어느 주장도 허위사실 가능성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추가: 오후 9시 2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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