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영태 / 출판기획자 겸 역사교양서 저술가

 

올해 2020년은 광복(또는 해방) 75주년이자 6.25전쟁(한국전쟁) 발발 70주년이 되는 해이다. 우리에겐 해방이 곧 분단이었으니 분단 75주년이기도 하다. 왜 우리는 3/4세기 동안이나 분단된 상태로 살아야 했던가? 왜 우리는 해방과 함께 분단이라는 있을 수 없는 상황을 맞아야 했던가? 우리는 왜 해방 3년 만에 두 개의 정부가 수립되고 마침내 5년 만에 전쟁이라는 참화를 겪어야 했던가? 이러한 물음에 대한 답은 해방 전후사에 들어 있다. 해방 75주년, 한국전쟁 70주년의 해에 해방 전후 역사를 다시 돌아보는 이유다. 이 연재는 매주 월요일에 게재된다. / 필자 주

 

조선의용대의 화북 진출과 팔로군 지역으로 이동

우한에서 조선의용대가 결성된 1938년 10월 10일에는 일본군이 우한을 향해 물밀 듯 몰려들고 있었다. 조선의용대는 창설 직후부터 우한의 방위를 호소하는 선전사업과 우한 점령 후에 대비하여 일본군의 침략전쟁에 반대하라는 각종 선전 문구들을 건물이나 땅에 쓰는 활동을 벌였다. 우한이 함락되기 직전 제1지대는 후난성의 제9전구로 이동했고, 제2지대는 대홍산을 넘어 후베이성의 제5전구로 들어갔다. 총대는 광시성 구이린(桂林)으로 가서 의용대 활동을 지도하였다.(주1)

우한 함락 직후 일본의 고노에(近衛) 내각은 국민정부에 대한 공세를 늦추고 타협 방안을 모색하였는데, 중국 내부 분열을 유도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에 따라 중국 해안지방의 대지주, 대자산가 계급은 동요하기 시작했고, 1938년 12월에는 왕징웨이(汪兆銘)(주2)가 충칭을 탈출해 일본군 점령지역으로 도망갔다. 장제스 정부는 별다른 저항도 하지 않은 채 오지에 근거해 버티는 작전으로 나오자 일본군과 국민당정부군 사이에는 소강상태가 유지되었다. 반면에 일본군은 국공합작을 파괴하기 위해 공산당 팔로군 지역에 대한 공세를 강화하였다. 중국 공산당군과 일본군의 대결은 1940년 이후 대규모로 전개되었다. 팔로군은 총역량을 투입해 일본군을 공격하며 항일전쟁을 치렀고, 우한 함락 이후 주요 전장은 화북지역으로 옮아갔다.

이에 남방지역에서 활동하던 의용대원들 사이에 점차 북상해서 일본군과 싸워야 한다는 여론이 높아졌다. 일제가 화북지역을 점령한 이후 조선인들이 일본군을 따라 베이징, 텐진, 타이위안 등지로 생업 활동을 위해 몰려들었는데 그 숫자가 20만여명에 이르렀다. 의용대의 조직 역량을 확대하기 위해서는 이곳에서 조선인들을 상대로 활동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이런 가운데 의용대 제1지대 및 제2대 일부 대원들이 화북 진출의 입구인 뤄양으로 이동해 제1지대를 편성하였다. 이와 함께 후난지역에서 활동하던 구제1지대는 제3지대로 개칭하였다.(주3)

의용대의 화북 진출 분위기가 무르익고 있는 가운데 의용대 내부에서 분파 갈등이 깊어졌다. 김원봉의 민족혁명당 계열에서 김구 등 우익민족주의세력과 연합하려는 움직임이 일자 전위동맹 측에서 반발한 것이다. 민족혁명당 당수이자 의용대 대장인 김원봉과 임시정부의 영수 김구는 1939년 5월 치장(綦江)에서 「동지와 동포에게 보내는 공개서한」을 공동으로 발표하고 독립운동진영의 대동단결을 호소하였다.

민족혁명당의 이같은 움직임에 반발한 전위동맹측은 중국공산당과 긴밀히 연대하며 중국 관내 조선인 사회주의자들의 통합 방안을 모색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1939년 초부터 중국 국민당 내에서 반공운동이 전개되었고, 이는 통일전선을 옹호하던 많은 사회주의자들을 자극하였다. 이같은 중국 국민당의 반공운동에 위협을 느낀 한빈 계열의 조서경, 김학철 등 사회주의자 5,6명이 북상하여 라오허커우로 들어갔다.

조선의용대원들이 뤄양에 집결, 북상을 준비하고 있을 무렵인 1941년 1월 10일 화북 태항산 팔로군 근거지에서 화북조선청년연합회(화청련)이 결성되었다. 여기에는 국민당과 연대하여 싸우는 것에 회의를 품고 옌안으로 들어간 최창익, 이유민, 진광화, 허정숙 등 18명을 비롯하여 우한 함락 직후 라오허커우로 가던 제2지대원 가운데 최창익의 지시에 따라 1939년 봄 옌안으로 들어간 이상조, 노민 등 20여명 등이 참여하였다. 중국 공산당의 대장정을 끝까지 완수하고 팔로군 포병학교 교장에 재직 중이던 무정도 포함되었다. 화청련은 중국 공산당이 1940년 10월경 조선인 민족운동단체를 팔로군 근거지 안에서 결성하기로 결정한 방침에 따라 조직되었다. 화청련이 이처럼 급속하게 조직된 것은 뤄양에 모여들고 있던 조선의용대원들을 팔로군 근거지로 조직적으로 이동하기 위해서였다.(주4)

▲ 조선의용대 결성, 이동, 항일전 활동 상황.

1941년 봄 조선의용대원들은 중국군사위원회의 도하 승인을 받아 황허강을 건너 화북 국민당군 지역으로 들어갔다. 이들의 공식 이동 목적지는 린현(임현)이었다. 린현은 국민당군, 팔로군, 일본군, 왕징웨이군 등이 뒤섞여 있었고, 목적지로 가기 위해서는 일본군의 봉쇄선을 넘어야 했다. 의용대는 3개 부대로 나뉘어 이동했는데, 처음 두 부대는 무사히 도착했으나 세 번째 부대(책임자 왕자인)는 길을 잘못 들어 헤매다가 팔로군에 우호적인 국민당군 ‘돌격대’의 도움으로 팔로군 근거지로 바로 들어갔다. 이 소식을 들은 국민당측에서는 의용대 책임자 박효삼을 처형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1941년 6월 이 사실을 먼저 알게 된 팔로군측에서 사람을 보내어 야밤에 모두 근거지로 데려가 처형은 이뤄지지 않았다.

이처럼 수차에 걸쳐 조선의용대의 화북 이동이 이뤄졌다.(아래 <표> 참조) 조선의용대의 화북지역 이동은 국민당 내의 반공운동, 국공합작의 이완, 조선의용대 내부의 이념 갈등, 주요 전장인 화북에서의 활동 필요성 등 여러 요인들이 겹쳐 이뤄진 것이었다. 조선의용대 주력부대가 화북으로 이동함에 따라 조선의용대에 대한 김원봉의 지도력은 현저히 약화되었고, 궁극적으로는 그 연계가 끊어지게 되었다. 그에 따라 김원봉은 충칭에 남은 대본부 요원들과 함께 임시정부 광복군에 편입되었고,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는 중국공산당과 중공당원 출신의 무정 등에 의해 장악되었다.

<표> 조선의용대의 화북 이동 시기와 경로(주5)

이동 시기

이동 경로

1938년 말

최창익을 비롯한 18명 연안으로 이동

1939년 초

조선의용대 제2지대 20여명 연안으로 이동

1939년

호남성에 있던 한빈 계열의 제1지대원 김학철, 조소경 등 5, 6명 호북성 노하구로 이동하여 제2지대에 합류

1940년

조선의용대 제2지대 일부와 제1지대 낙양에 집결. 두 지대를 합쳐 새로 제1지대 결성, 호남성에 있던 제1지대는 제3지대로 개편

1940년 11월

중경에 있던 제3지대 낙양으로 이동 결정

1941년 말

개편된 조선의용대 제1·3지대 화북(팔로군 근거지로 이동으로 이동

조중 연대를 실천한 조선의용대

조선의용대가 화북으로 이동하고 있던 시기 중국 공산군인 팔로군과 일본군은 대격전을 치러고 있었다. 특히 1941년 1월 일본군은 모든 수단을 동원해 중국 점령지구에서 ‘치안’을 확보한다는 계획을 세웠으며, 2월에는 일본 화북방면군 사령관 오카무라 야스지(岡村寧次)가 “4개월 안에 화북경내의 공산당과 팔로군을 철저히 소멸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일본군과 황협군(일본의 괴뢰중국인군대)은 1941년부터 1942년까지 화북근거지를 반복적으로 ‘소탕’작전을 벌였는데, 한번에 1천명〜1만명까지 병력을 동원한 것이 132차례, 1만〜7만명을 동원한 것이 27차례나 되었다. 어떤 지구에서는 3〜4개월 동안 반복적으로 ‘소탕’작전을 펴기도 했다. 이에 맞서 팔로군은 ‘반소탕전’(反掃蕩戰)을 전개했다.(주6)

이처럼 긴박한 상황에서 팔로군 근거지로 이동한 의용대는 조선의용대 화북지대(지대장 박효삼)로 개편하고 훈련반을 설치, 신입대원들에게 정치·군사훈련을 실시하는 등을 통해 체제를 정비하였다. 훈련이 끝나자 부대를 제1대, 제2대로 나누어 무장선전 활동에 투입하였다. 제1대는 진기예 변구에서 활동하고 제2대는 북상하여 진찰기변구로 들어갔는데 20여명은 김세광이 대장이 되어 하북성 석좌장(石家莊) 남쪽 원씨현(源氏縣)까지 진출하였다.

▲ 조선의용대(군) 활동 지역(염인호, 특별연구 조선의용군, 172쪽)

1941년 12월 12일 원씨현 호가장(胡家莊)에서 유숙하던 중 일본군의 불의의 습격을 받아 박철동, 손일봉, 왕현순 등 4명이 전사하고 김세광은 중상, 김학철은 중상을 입은 후 포로가 되는 큰 손실을 입었다. 다리에 총상을 입은 김학철은 일본으로 압송되어 10년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 나가사키 형무소에서 해방을 맞았다.

일본군은 1942년 2월부터 3월말까지 4만여 병력을 동원해 소탕전을 폈으며, 5월부터는 본격적으로 20개 사단 약 40만 명을 동원했는데 비행기와 전차까지 동원하였다. 일본군의 소탕전이 강화되면서 5월 하순경에는 팔로군 총사령부와 조선의용대 지대본부가 있던 마전(馬田)까지 일본군의 공세가 펼쳐졌고 펑더화이(팽덕회), 덩샤오핑(등소평) 등 팔로군 최고 지휘부와 의용군 최고위급 간부들이 모두 포위되는 위기를 맞았다. 이에 조선의용대 지대장 박효삼의 지휘 아래 일본군과 치열한 접전 끝에 두 고지를 점령하였고, 팔로군 사령부는 그때 두 고지 사이를 통해 탈출에 성공했다. 이 과정에서 팔로군 총사령부 참모장 좌권 장군과 조선의용대 지휘부의 진광화·윤세주가 전사했다.

박효삼 지대장이 이끄는 전투부대가 전투에 참여하는 동안 윤세주, 진광화, 최채 등의 정치사업 일꾼들은 여성대원, 후방사업 일꾼 등 비전투원을 이끌었다. 연로한 김두봉과 여성대원들이 많았던 대오를 이끌던 윤세주, 진광화 등이 일본군의 분산을 유도하기 위해 각기 다른 방향으로 뛰던 중 윤세주와 진광화가 총을 맞았다. 1942년 5월 28일 진광화는 절벽에 떨어져 바로 전사했고, 윤세주는 다리에 총을 맞고 사투를 벌이다가 5월 31일 사망했다. 윤세주는 움집에서 임종을 지켜보는 이도 없는 가운데, 유언도 남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최채와 하진동은 “열손가락에 피가 흐르는 것도 모르고 돌덩이같이 굳은 땅을 파헤치고” 윤세주를 묻고 그 위에 흙과 돌로 덮어주었다.(주7)

▲ 1942년 10월 10일 태항산 반소탕전에서 희생된 팔로군 부총참모장 좌권 장군, 조선의용군 지도자 진광화 윤세주 열사 추도대회 장면(사진=길림신문)
▲ 반소탕전 때 희생된 조선인 지도자 진광화, 윤세주. 두 사람의 묘소는 중국 허베이성 한단시에 있는 ‘진기로예열사능원’에 중국인 좌권 장군과 함께 마련되어 있다.

윤세주, 진광화 등은 피로써 목숨을 바쳐 조중 연대를 실천하였다. 조선의용대원들의 목숨을 건 투쟁의 결과 팔로군 총사령부는 그곳을 탈출할 수 있었고, 중국에서도 이들의 영웅적인 투쟁을 잊을 수 없었다. 1942년 10월 10일 당시 어수선한 정세에서도 중국 공산당은 놀랄 정도의 웅장한 ‘조선혁명 열사 석정 동지의 묘’를 조성하고 장례식을 치른 뒤, “열사전을 편찬하고 각급학교의 교과서로 사용하며 각 기관의 전통적 교육재료로 삼을 것을 결정”하였다. 그 후 중국에서는 1942년 5월 “2만명의 일본군이 팔로군 총사령부를 포위했을 때 조선의용군 30여명이 팽덕회와 유관인원의 철퇴를 엄호하였고, 조선동지 진광화·석정 등이 영용하게 희생되었다”고 기록했다.

조선의용대는 1942년 5월에 전개된 반소탕전(反掃蕩戰)에서 또 다시 큰 손실을 입었지만, 중국 공산당은 조선의용대를 새롭게 보는 계기가 되었다. 일본군의 소탕에 맞선 팔로군의 반소탕전에 참가한 조선의용대원들은 최일선에서 싸우며 돌파구를 열어 일본군에 포위된 팔로군 총사령부의 탈출을 가능케 했다. 이 과정에서 의용대 지도자 석정 윤세주와 화청련 지도자 진광화가 전사하였으나 조선의용대원들은 중국공산당과 그 지도자들에게 자신들의 투지와 열정, 능력을 확실히 각인시켜 주었다.

소탕과 반소탕전의 화약 냄새가 채 가시기도 전 1942년 7월 14일 태항산에서 화청련 제2차 대회가 개최되었다. 이 대회에서 화북조선청년연합회(화청련)를 화북조선독립동맹(독립동맹)으로 개편하고, 총서기 최창익, 조직부장 이유민, 선전부장 김학무, 군사부장 박효삼, 경제위원회 김창만, 적구공작위원회 무정 등의 책임자를 결정하였다. 이 대회 직후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는 조선의용군 화북지대로 개편되었고 대장에는 박효삼이 선출되었다. 팔로군 근거지로 이동한 의용대원들은 모두 독립동맹에 가입하고 의용군으로 재편되었다. 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은 태항산 근거지에서 1942년 11월부터 조선혁명간부군정학교를 개설하여 신입대원에게는 초보적인 훈련을 실시하고, 고참대원에게는 더 높은 정치교육을 실시하였다. 독립동맹 총부와 군정학교가 옌안으로 이동하는 1943년 말까지 태항산은 조선의용군과 독립동맹의 중심지가 되었다.(주8)

김원봉 대신 무정·김두봉을 선택한 중국공산당

조선의용대 주력부대들이 팔로군 근거지로 넘어가면서 충칭에 남은 김원봉은 중국 국민당의 요구대로 임시정부와 연합하는 길을 선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김원봉의 조선의용대 총대는 광복군 제1지대로 편입되었고, 김원봉은 광복군 제1지대장 겸 부사령관이 되었다. 임시정부를 좌우합작 형태로 개편하면서 민족혁명당에서도 임시의정원에 참여하였고, 김원봉은 임시정부 군무부장이 되었다. 그러나 김원봉은 임시정부 내에서도 끊임없이 견제 받는 위치에 있었고 김원봉의 광복군 제1지대는 미국 OSS의 ‘독수리 작전’에서도 배제되었다.

당시의 상황을 두고 볼 때, 김원봉은 충칭이 아니라 옌안에 있어야 마땅했을지 모를 일이다. 김원봉이 팔로군 지역으로 갔다면 그의 활동 경력을 감안할 때 조선의용대(군)와 조선독립동맹의 지도자가 되는 것은 기정사실이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랬다면, 향후 김원봉의 행로는 달라졌을 것이고 해방 후 그의 정치적 위상도 달랐을 것이다. 독립운동사에서 특출한 존재의 한 명이었지만 해방 직전 자신의 조직된 세력을 갖지 못했던 김원봉은 해방 후 남한에서 두드러진 활약을 펴지 못했다. 그는 인민공화당(조선민족혁명당의 후신) 당수 및 민주주의민족전선(민전) 공동의장을 지내며 좌익진영 지도자 중 한명으로 활동했지만, 인민공화당은 사실상 군소정당으로서 큰 영향력을 갖지 못했고, 공동의장으로 있었던 민전 내에서도 지도력을 행사하지 못했다. 박헌영의 조선공산당(남로당)이 주도권을 장악한 상태에서 통일전선조직이었던 민전조직은 그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남로당의 외곽단체로 전락하고 말았던 것이다. 해방 후 조선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의 주요 인물들은 대부분 북으로 갔고, 독립동맹은 신민당으로 개편해 북조선공산당과 통합해 북로당이 되었다. 독립동맹 지도자였던 김두봉은 후에 숙청당하기는 하지만 해방 후 북한에서 최고 지도자의 반열에서 활동했다. 김원봉이 옌안으로 갔다면 김두봉이 맡았던 역할을 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 조선의용군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는 타이항산. 지금은 한국인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중국 유명 관광지가 되었으나 독립투사들의 피와 영혼이 베여 있는 곳이다.(사진=중앙일보)

김원봉이 이런 점을 모를 수 없었다. 김원봉도 옌안으로 가서 조선의용대를 지휘할 의사가 있었고, 그런 의견을 전했으나 중국 공산당 측에서 반대하였다. 김원봉의 개인비서와 기관지 『조선의용대통신』 중국어판 편집주임으로 활동했던 사마로(司馬璐)의 기록에 따르면, 김원봉의 화북행 의사를 전해들은 충칭의 충칭변사처(주9) 책임자 저우언라이(周恩來)는 “김선생이 계속 중경에 머물러야 이런 공작이 과거보다 더욱 중요해진다는 것입니다. 혁명공작은 어디서나 모두 같은 것입니다”라면서 정식으로 거절했다고 한다. 사마로가 “김약산이 화북에 도착하지만 한다면 지도자의 권한은 자연히 김약산에게 떨어질 것이고, 중국공산당은 직접 통제하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라고 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주10) 중국공산당은 통제가 쉽지 않은 김원봉의 옌안행을 원치 않았던 것이다.(주11)

중국 공산당은 리커농(李克農)을 비밀리에 충칭에 파견하여 김원봉 대신 김두봉의 화북행을 추진하였다. 리커농은 항일투쟁 시기 중국공산당 지하공작의 베테랑이자 ‘정보전의 귀재’로 평가받은 인물인데 저우언라이와 함께 시안사건에 관여하였고, 한국 전쟁 때는 휴전협상에서 마오쩌둥의 지시를 판문점의 대표단에 전하며 중국측 배후로 활약하였다. 중국 외교부 상무부부장 겸 군사위원회 정보부장으로 재직 중 1962년 병사했는데, 사후 그를 두고 문혁 당시 홍위병이 그에 대해 비판하자 저우언라이가 “리커농이 없었더라면 지금 나는 너희들 앞에 있을 수도 없다”라고 말했으며, 마오쩌둥도 홍위병 대표를 만난 자리에서 “당에 불멸의 공을 세웠다. 그가 없었으면 상하이의 당 중앙과 수많은 간부가 살아남을 수 없었다. 저우언라이도 일찍 염라대왕 앞에 갈 뻔했다. 2년간 개성과 판문점에서 열린 항미원조 정전 담판도 지휘한다. 청년들은 잘 모른다. 너희들이 일러줘라”라고 말했다고 한다.(주12)

▲ 주시경의 제자로 유명한 한글학자이자 독립운동가였던 김두봉의 젊은 시절 모습. 중국공산당은 김원봉 대신 그를 선택해 독립동맹의 지도자로 영입하였다.

이와 같이 중국 공산당이 ‘정보계의 전설’, ‘비밀공작의 달인’이었던 역량있는 인물을 동원해 김두봉의 화북행을 추진한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1942년 4월 말 김두봉이 태항산에 도착했는데, 이는 충칭에 있는 김원봉의 리더십을 차단하고 한인독립운동의 대표성을 과시할 수 있는 대안으로 선택된 것이었다. 김두봉은 김원봉과 친밀하면서도 중국국민당이나 한국독립당과의 관계는 상대적으로 미약하고, 정치적 주관과 파벌성의 면에서도 무난했으며 한글학자로서의 명성이 높았기 때문에 중국 공산당이 좋아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중국 공산당이 한국 독립운동계에서 상당한 비중과 명성을 지닌 김두봉을 데려간 것은 화북조선독립동맹을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비견할 정도의 조선인정치단체로 키워보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경남 기장군(현재 부산시 기장군) 출신의 김두봉이 경남 밀양 출신의 김원봉과 어떤 족친 관계에 있는지는 알 수 없으나(주13 중국에서 두 사람은 매우 가까운 사이였다. 김두봉은 김원봉이 이끄는 민족혁명당의 주요간부로 참여하였고, 상하이 임시정부에도 관여하는 등 우익진영과도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결국 중국공산당은 김원봉과 밀접한 관계에 있는 김두봉을 내세움으로써 김원봉과의 연계는 단절하지 않은 채, 그의 영향력은 배제시킨 새로운 조선인 독립운동단체를 조직해내고자 했던 것이었다.(주14)

중국공산당의 통제 아래 놓인 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

중국 공산당이 화북조선독립동맹이라는 정치조직의 지도자로 김두봉을 선택했다면 조선의용대를 개편한 조선의용군의 지도자로는 무정을 선택했다. 무정은 당시 중국공산당 지역 내에 있었던 조선인 중에서는 가장 경력이 화려한 공산주의자, 혁명가였다. 아마도 양림(김훈)이 살아 있었다면 무정보다 더 정치적 군사적 비중이 높았을 것이지만 애석하게도 그는 중국공산당의 장정이 끝난 후인 1936년 2월 황허 도하작전 중 사망한 상태여서 조선의용대가 북상해 팔로군 근거지로 들어왔을 때에는 없는 상태였다. 양림과 무정은 모두 중국 공산당의 대장정에 처음부터 끝까지 참여했고 중국 홍군 내에서 장성급 인물로 조선인으로서는 최고위급 인사였다. 특히 양림의 경우 린뱌오(임표)가 지휘한 사단 참모장으로서 3인자였는데, 그 후 중국 군사지도자 중 주더, 펑더화이와 더불어 최고위급이었던 린뱌오의 위치를 감안하면 양림의 위상은 대단했다.(주15)

무정 또한 중국공산당의 대장정에 홍군 포병장교로 참여해 포병연대장을 거쳐 팔로군 포병사령관까지 지냈다. 그는 팔로군의 백단대전에 포병부대를 이끌고 참전하였고, 조선의용대가 화북으로 이동할 당시에는 화북조선청년연합(화청련)의 결성을 사실상 이끌었다. 무정의 군사 경력이나 당시 중국공산당 지도부와의 관계 등을 고려할 때 조선의용군 내에서 그에 대적할만한 인물은 없었다. 지대장이었던 박효삼이나 후에 군사·정치적으로 부상하는 박일우도 당시 상황에서는 무정과 견주기 어려웠다. 그러나 김원봉이 팔로군 지역으로 넘어오게 되면 무장부대인 조선의용대의 지도권 또한 그에게 넘어갈 것은 불문가지였다. 이런 상황에서 중국 공산당으로서는 김원봉의 이동을 막는 대신, 정치조직의 지도자로는 김두봉을, 군사조직의 지도자로는 무정을 선택하는 것이 가장 손쉽게 통제할 수 있는 길이었다.

중국공산당의 조선의용군 장악은 이처럼 자신들이 통제할 수 있는 인물을 지도자로 세우는 것뿐만 아니라 조직 내부에서 사상투쟁을 전개함으로써 확고하게 만들었다. 조선의용군과 독립동맹의 사상개조 작업은 중국공산당 수도였던 옌안에서 1940년내에 전개되었던 이른바 ‘정풍운동’과 맞물려 진행되었다.

1942년 2월부터 중국 공산당의 수도 옌안에서 정풍운동이 시작되었는데, 정풍운동의 거센 바람은 중국공산당을 넘어 조선의용군 내에까지 몰아쳤다. 이 정풍운동을 주도한 것은 1942년 11월 설립된 타이항산(태항산)의 조선혁명군정학교 교장 무정이었다. 1943년 초 타이항산에서는 무정의 주도하에 국민당지구에서 올라온 조선의용군과 독립동맹 간부들의 입장, 관점, 방법을 공개적으로 비판하는 방식으로 정풍운동이 진행되었다. 무정은 의용군 속에 있는 협애한 민족주의 사상, 종파주의, 교조주의 등과 정치적 중요성을 보지 못하는 군사중심주의와 동북으로 가야 혁명을 잘 할 수 있다는 동북노선을 중점적으로 비판했다. 정풍운동은 타이항산 뿐만 아니라 옌안과 각 지역에 흩어져 활동하고 있던 조선의용군에서도 진행되었다.(주16)

▲ 조선의용군의 주요 지도자들. 왼쪽부터, 무정 장군, 지대장 박효삼, 정치지도원 김학무, 이철중, 이익성, 이춘암(사진=길림신문)
▲ 조선의용군 사령관 무정 장군(사진=세계한민족문화대전). 그는 김원봉 대신 군사조직의 지도자로 선택되었다.

정풍운동을 통해 화북 이동과 동북노선을 주도했던 최창익의 지위가 약화되고 무정의 지위가 확고해졌다. 동시에 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 내에 존재하던 국민당 군대나 일본군식 작풍이 대부분 사라졌으며, 협애한 민족주의가 비판되면서 조선혁명은 중국혁명과 함께 풀어야 된다는 ‘국제주의’로 무장되었다. 또한 중국 공산당 지도자 마오쩌둥의 저작들, 신민주주의론이나 지구전론, 모순론 등을 학습하고, ‘마오쩌둥 사상’을 준거로 삼아 혁명을 바라보아야 한다는 사상개조가 진행되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조선의용군 대원들은 중국공산당은 중국혁명뿐만 아니라 조선과 일본 등 아시아 혁명운동의 운명을 짊어진 존재이며, 중국공산당의 노선은 조선혁명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는 믿음을 갖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조선독립동맹은 사실상 중국 공산당의 지도를 받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고, 조선의용군의 지휘권 또한 팔로군 총사령관 주더 아래 놓이게 되었다.(주17)

1942년 4월 12일자 중공 문서에서는 화청련과 조선의용대 화북지대원들을 ‘팔로군 정규 부대 편제로 끌어들일 것’을 지시하고 있는데 이는 조선의용대가 독자적인 독립부대로 존재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같은 해 9월까지도 조선의용군은 자주적 독립운동단체인 조선독립동맹의 지휘를 받았다. 그러나 1943년 부대 내에서 정풍운동이 거세게 전개되면서 중국공산당은 조선의용군을 완전히 장악할 수 있었고, 충칭 대본부의 영향력은 사실상 완전히 소멸되었다.(주18) 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이 중국공산당의 지도가 관철되는 조선인 정치단체, 무장단체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 김원봉과 박차정 부부(사진=여성가족부). 김원봉은 조선의용대 주력부대의 화북이동으로 독립운동진영 내에서 정치적 영향력이 크게 축소되었고, 해방 후 정치적 지위로 약화될 수밖에 없었다. 박차정은 해방 1년 전 1944년 5월 부상 후유증으로 충칭에서 병사하였다.

해방 전후 조선의용군의 동향

1943년 이후 조선의용군은 군정학교 학생과 교관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팔로군에 배속되었다. 조선의용군 대원들은 대부분 팔로군 정치부 산하 대적공작과(적공과)에 소속되어 활동했다. 의용군 대원들은 일본말을 잘하고 일본군의 속성을 잘 알고 있었으며 일본군 내의 조선인 사병들을 이끌어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팔로군 각 사단에 소속된 대원들은 일본군과 일본군 내의 조선인에 대한 선전, 일본군과 일본군적 조선인 포로에 대한 교육 등을 담당했다. 의용군 대원들은 팔로군의 일원이면서 독립동맹의 맹원이었다.(주19)

▲ 조선학도병들의 탈영을 유도하기 위한 구호. 허베이성 운두저촌 건물벽에 조선의용대가 적어놓은 한글 선전판 모습.
▲ “한국인과 중국인이 연합해 일본을 타도하자”, 중국 태항산 지구에서 구호를 쓰는 조선의용군 대원.

1944년 이후 팔로군이 적극적인 대일 공세를 펼치자 조선의용군 대원들은 적점령지(적구) 깊숙이 들어가 선전·조직 활동을 폈다. 1943년부터 태평양 전쟁에서 수세로 몰리기 시작한 일본군은 그해 말부터 중국에 주둔하고 있던 정예부대를 중국 남방과 태평양 방면으로 차출하고 나이 많은 군인과 낡은 장비로 보충하였다. 이렇게 되자 화북의 팔로군에 대한 일본군의 압박은 그만큼 약화되었고 팔로군의 활동력은 크게 확대되었다. 중국공산당의 군대는 1944년 무렵에는 정규군 47만명, 민병 200만명에 달하는 대군으로 성장하였고, 일본군에 대한 팔로군의 공세도 강화되었다.

이와 함께 조선의용군의 활동도 활발하게 전개되었고 병력도 크게 늘어났다. 처음 화북으로 이동했을 때 100여명 수준이었던 조선의용군의 숫자는 해방 당시에는 대략 700〜1,000여명에 이르렀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규모가 커지고 일제의 패망이 가까워오면서 조선의용군은 점차 정규군으로 편성되어 갔다. 1945년 4월 18일자 중공당 문서에서는 각처에 흩어져 활동하고 있는 독립동맹·조선의용군 성원들을 팔로군 내로 끌어들여 ‘정규 편제’할 것을 지시하였다. 이에 따라 조선의용군은 무정을 사령관, 박일우를 정치위원 겸 부사령관, 박효삼을 참모장 겸 부사령관으로 하는 조선의용군 사령부를 구성하였다. 염인호 교수는 조선의용군이 처음 조직될 때 무정이 사령관을 맡았다는 주장이 있지만 이는 잘못이라고 보고 있다.(주20)

▲ 조선혁명군정학교에 집결한 조선의용군. 1945년 9월 출발 직전에 찍은 사진(사진=중앙시사매거진, 2017년 8월호)

1945년 8월 초 일제의 저항은 막바지에 이르고 있었다. 8월 6일 히로시마에, 8월 9일 나가사키에 미국 B-29가 원폭을 투하했다. 8월 8일 대일선전포고를 한 소련군이 8월 9일부터 중국과 한국 국경을 향해 공격을 개시했다. 소련군의 공격에 일본 관동군은 맥없이 무너져 내렸다. 8월 20일을 전후하여 소련군이 펑텐(선양), 창춘, 하얼빈 등 만주의 주요 도시에 진주해 관동군과 만주국군을 무장해제하고 교통·통신기관을 접수했다. 소련군은 1946년 4월 말 철병할 때까지 8개월간 만주의 주요 도시에 진주하여 상황을 장악하였다.

소련군이 작전을 개시한 직후인 8월 11일 12시를 기해 팔로군 총사령관 주더는 조선의용군 사령원 무정, 부사령 박효삼·박일우에게 즉시 소속부대를 통솔하여 팔로군 및 원동북군 부대와 함께 동북으로 출병, 적과 괴뢰군을 소멸하고 동북의 조선인민을 조직하여 조선 해방의 임무를 완수할 것을 명령했다. 중국 관내의 조선의용군 부대가 만주로 가기 전 선양에서 한청에 의해 의용군 부대가 먼저 건립되었다. 한청은 1944년 4월부터 동북지역에 파견되어 팔로군 기열료군구(주21)의 지도하에 청더(승덕)·선양(심양) 일대에서 지하공작활동을 전개했다. 일제의 패망 직후 선양의 서탑 조선족소학교 강당에서 개최된 항일전쟁 승리 경축대회에서 조선의용군을 선전했는데 3일도 안되어 100여명의 청년들이 모였다. 한청은 8월 18일 조선의용군 독립지대를 건립, 지대장에 취임하였다.(주22)

한편, 기열료변구에서 활동하던 주연이 이끄는 100여명의 조선의용군 부대는 팔로군 기열료부대를 따라 9월 중순 선양에 도착하였는데, 도중에 400여명으로 늘어났다. 한청의 독립지대와 주연의 선견대는 합병하여 조선의용군 선견종대로 개편하였고, 지대장 한청, 정치부 주임 주연이 취임했다. 선견종대는 1,400여명의 무장대로서 12개 중대를 편성하고 있었다. 선양을 떠난 의용군 선견종대는 행진을 해 안동(단둥)에 도착했고, 소련의 요청으로 압록강 다리를 건너 군악대를 앞세우고 신의주로 들어갔다. 그러나 소련군 상부에서는 국제간의 약속(포츠담 선언)을 이유로 부대의 철퇴를 명령했다. 한청이 평양에 들어가 김일성과 회담하는 등 국내에 남기 위해 노력하였으나 소련군측의 거부가 완강하여 선양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소련군은 국제간의 약속을 철퇴의 명분으로 삼았으나 진정한 이유는 대규모 부대가 국내에 들어와 정국 주도권을 장악할 것을 우려한 때문이었다.(주23)

옌안 항일군정대학에 집결했던 의용군들은 1945년 9월에야 출발해 10월 말 진저우(금주)를 거쳐 선양에 도착하였다. 타이항산 군정학교에 소속되어 있던 의용군부대들도 비슷한 시기에 선양에 도착했다. 산동과 화중의 의용군 및 옌안의 2진 부대들은 이보다 늦게 동북지역에 도착했다. 의용군은 선양 시내에 들어오지 못하고 서쪽 교외 고력툰 일대의 조선족 마을에 나누어 주둔했다. 11월 중순 고력툰의 조선인소학교에서 조선의용군 전체대회가 개최되었다. 이때 조선의용군 총사령 무정은 조국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국제정세를 설명하고 동북지역 조선인들이 어려운 처지에 있으니 일부 먼저 조선으로 가는 이들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이곳에서 활동해 달라고 호소하였다. 남는 사람들은 3개 지대를 조직해서 남만, 동만, 북만 지역으로 파견하기로 했다.

동북조선의용군 제1지대는 남만에서 활동하고 지대장 김웅, 정치위원 방호산, 참모장 안빈, 정치주임 주연 등이었고, 제3지대는 하얼빈을 중심으로 북만에서 활동하고 지대장 이상조, 정치위원 주덕해, 부지대장 이석산, 참모장 김연, 정치주임 이근산 등이었으며, 제5지대는 연길을 중심으로 활동하며 지대장 이익성, 정치위원 박훈일, 참모장 조열광, 정치주임 전우 등이었다. 조선의용군 부사령관 박일우와 박효삼도 동북지역에 남아서 부대를 지휘하였다. 동북지역에 남은 조선의용군 부대들은 중국 국공내전에 참가하여 큰 공을 세웠고 이는 중국 최초로 소수민족자치구역인 옌벤조선족자치주가 성립되는데 중요하게 작용하였다.

동북지역에 남은 이들 외에 김두봉, 무정, 최창익, 한빈, 허정숙 등 소수의 고위간부들은 기차를 타고 12월 평양으로 들어왔지만 개인자격이었다. 독립동맹 지도자들은 해외 독립운동가들 중 가장 늦게 귀국한 것이다. 동북에 남게 된 의용군 사이에서는 실망이 컸고 일부는 개인적으로 이탈해 조선으로 들어가기도 했다. 그러나 대부분은 일정기간 지난 후에 돌아간다는 마음을 갖고 조직의 결정을 따랐다.(주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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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1) 염인호, “특별연구 조선의용군”, 역사비평, 1994. 8, 174쪽

2) 본명은 왕조오밍(汪兆銘)이다. 쑨원의 측근으로 신해혁명에 참여하였고, 쑨원 사후 국민당 좌파를 대표하며 장제스와 대립, 라이벌 관계를 형성했다. 1930년대 국민당 외교부장으로 있었고, 중일 전쟁 발발 뒤 일본과의 평화조약 체결을 주장하다가 충칭을 탈출해 상하이로 가서 친일 괴뢰정권을 세웠다. 1944년 11월 일본 나고야에서 사망한 뒤 중국 난징에 묻혔으나 일제 패배 후 묘가 폭파되어 유해는 강가에 버려졌다.

3) 염인호, 위의 글, 175쪽

4) 염인호, 위의 글, 178〜179쪽

5) 임준제, 조선의용대 화북지대의 결성 경과, 건국대 석사학위논문, 2005, 23쪽 참조해서 일부 내용 수정 작성.

6) 임영태, 태항산 전설이 된 조선의용대 최고 지휘관 윤세주, 매일노동뉴스, 2019.12.16

7) 임영태, 위의 글, 매일노동뉴스, 2019.12.16

8) 염인호, 위의 글, 179〜181쪽

9) 국공합작이 성립되면서 중국공산당은 남방국과 팔로군변사처를 전시수도였던 충칭에 설치해 국민당과의 정치적 조정 및 공산당·팔로군 활동에 대한 지도를 담당했는데 그 책임자가 저우언라이였다.

10) 심지연, 『조선신민당연구』, 동녘, 1988, 223쪽

11) 한상도, 화북조선독립동맹과 중국공산당, 『역사학보』 174, 2002.6, 130〜131쪽

12) 저우언라이 “지하공작자 출신 리커농, 미국과 담판에 적격”, 중앙선데이, 651호, 2010.8.31

13) 조선의용대 여성대원으로 김원봉의 부인이 되는 박차정(1910〜1944)의 외당숙이라고 알려졌지만(“들꽃이 되어 불꽃처럼 살다간 망각의 독립운동가, 조선의용대 항일여전사 박차정”, 오마이뉴스, 2018.10.1.), 두 사람이 직접적인 친족 관계는 아닌 듯하다.

14) 한상도, 위의 글, 131쪽

15) 임영태, 항일무장투쟁의 기틀을 세운 양림, 매일노동뉴스, 2020. 3. 16

16) 염인호, “특별연구 조선의용군”, 190〜191쪽

17) 염인호, 위의 글, 191쪽

18) 염인호, 『조선의용대·조선의용군』, 165〜167쪽

19) 염인호, 위의 책, 181쪽

20) 염인호, 위의 책, 184〜187쪽

21) 기열료변구는 중국 베이징, 텐진 동쪽 동북지역에 가까운 곳에 형성된 팔로군 근거지이다.

22) 염인호, 위의 책, 194〜195쪽

23) 염인호, 위의 책, 195〜196쪽

24) 염인호, 위의 책, 19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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