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문화의 수준

북한의 경우 대중문화와 고급문화의 경계가 애매하다. 굳이 구분하자면 못할 것도 없지만 우리와 비교해 그렇다는 것이다. 그에 비해 우리는 고급문화와 대중문화를 쉽게 구분할 수 있다. 일명 `예술과 예술가`라고 하는 고급문화와 대중가수나 연예인, 영화배우 따위의 돈벌이를 목적으로 하는 대중문화가 그것이다.

북한의 경우, 북한 사회에 공헌을 한 배우나 예술가는 모두 `공훈배우`, `인민배우`, `공훈예술가`, `인민예술가` 따위로 구분한다. 북한의 문화는 상업성과 별 관련이 없다. 우리가 말하는 대중문화는 상업성과 분리할 수 없지만 북한의 경우는 모든 문화가 대중문화이며 곧 고급문화이기도 하다.

어떤 의미에서 대중문화의 수준은 그 나라 국민들의 문화적 수준이라고 할 수 있다. 대중문화와 고급문화는 서로 영향을 주고받기에 대중문화의 수준은 곧 고급문화의 수준과도 연관되어 있다. 때문에 프랑스가 자국의 문화를 지키기 위해 미국문화와 힘겨운 싸움을 하는 것이나 북한이 서구 퇴폐문화를 차단하는 것은 결국 같은 이유이다. 자국 문화에 대한 자부심도 있거니와 문화 속에는 용납할 수 없는 경제, 사상적 이데올로기가 숨어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알고있는 대중문화의 수준은 한마디로 `유치하다`고 표현한다. 하지만 그렇게 비판하는 사람들 또한 대중문화에 깊숙이 빠져있는 것도 사실이다. 대중문화의 특징은 많은 사람들을 이해시키고 함께 공유하는 것이다. 소수를 만족시키는 문화는 고급예술이거나 일부 `매니아`들이 추구하는 것이다. 여기에 돈이 끼여들어 대중문화가 상업성을 가지면 `많이 팔리는 것`이 곧 목적이 된다. 구매력을 가진 대상을 찾는 일부터 광고와 판촉행위는 그야말로 `대박`을 터트리기 위해 발버둥을 치는 전쟁터이다. 돈을 벌고 못 벌고는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생존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대중음악은 어느 방송국 PD가 말했듯이 `중학생 2학년` 수준에 걸쳐있다. 토요일이나 일요일 저녁에 방송되는 연예프로그램도 마찬가지이다.

모든 문화가 그렇듯이 대중문화에도 `내용과 형식`이 있다. 대중문화의 내용은 크게 두 가지 정도로 압축할 수 있는데, 바로 `사랑과 휴머니즘`이다. 하지만 대중문화에서 말하는 `사랑`은 대개 남녀의 사랑을 말하고 있다. `사랑`은 크고 넓은 의미로 예수나 석가모니가 말하는 `인류애`로 인식해야 한다. 하지만 `인류애`, `모성이나 부성애`, `우정과 의리`의 사랑은 어렵고 실천하기도 힘들다. 결국 쉽고 누구나 할 수 있는 좁은 개념인 `남녀사랑`을 전면에 내세운다. 10대나 20대들에게 남녀의 사랑은 가장 관심거리이고, 지극히 감성적인 면이기에 행동에 따른 책임이 적다.

이 때문에 `사랑`이란 말은 `용어혼란`을 일으켜 `사랑=남녀사랑`이라고 여기고, 심지어는 `사랑=sex`라고 세뇌 당한 사람도 많이 있다. `휴머니즘`은 인간존중의 사상이다. 하지만 대중문화에서 말하는 휴머니즘은 `내가 당하면 10배로 복수한다`는 이상한 사상이다. 미국의 헐리우드 영화가 대부분 이런 수준의 휴머니즘을 내용으로 깔고 있다. 그 결과는 테러를 없애고 평화를 지킨다는 명분으로 수 천 발의 미사일과 폭탄을 아프가니스탄에 퍼붓는 것으로 드러난다.

대중문화의 형식은 주로 사람의 원초적 감정을 건드리는 방법으로 짜여져 있다. 동물적인 본능을 일깨우는 `폭력성`은 일반적이다. 조지고 부시는 장면이 없으면 양념이 빠진 음식처럼 밋밋하게 느낀다. 예전에는 폭력성은 남성전유물이었는데 요즘은 여성도 좋아한다. 또한 `성적인 자극`이 있어야 한다. 내용 전개상 불필요해도 `베드신`이나 최소한 키스장면 정도는 들어가야 한다. 남녀 각각 3명, 총 6명 정도의 출연진으로 살색 밖에 없는 영화가 하루에도 몇 편씩 만들어지고도 망하지 않는데는 이유가 있다. 이성적인 사고를 원천적으로 차단하는 속도감도 대중문화의 빠지지 않는 형식이다. 여기에 황당하거나 엽기적인 `개그`가 결합하면 완벽한 대중문화 형식이 창조된다.

이렇게 말한다고 내가 대중문화와 전혀 담을 쌓고 산다거나 무조건 비판하자는 것은 아니다. 대중문화도 필요하다. 사람이 살면서 적절히 휴식이 필요하듯이 말이다. 문제는 대중문화를 필요이상으로 끼고 살고, 자신도 모르게 세뇌 당한다는 사실을 망각하기 때문이다. 대중문화도 결국 이데올로기 덩어리다. 싸구려라고 무시하면 안된다.

대중문화에는 등급제한이 있다. 전체 관람가, 중학생이상 관람가, 미성년자 관람불가도 있다. 그렇다면 미술은 어떨까? 사실은 `전체 관람가`이다. 하지만 내용적으로 보면 얘기가 다르다. 정선의 `금강전도`나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를 이해하는 어른이 얼마나 될까? 혹은 백남준의 `비디오아트`나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를, 빈센트의 `해바라기`를 제대로 감상할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정확한 통계는 낼 수 없지만 후한 점수를 주면 `30세 이상 관람가`이고 조금 짜게 보면 `45세 이상 관람가` 정도가 아닐까. 옛날에는 어른 중에도 왕이나 귀족 양반, 선비 정도가 미술을 감상하고 향유할 수 있었다면, 지금은 일반 사람도 향유할 수 있을 정도로 수준이 높아졌다. 아마도 미술작품을 감상할 수 있는 나이가 점점 내려온다면 그만큼 세상이 발전하고 좋아지고 있다는 반증이 아닐까.
 
탄전의 주인들

▶정희진/탄전의 주인들/조선화/110*205/1984


이번에 소개할 작품은 북한화가 정희진이 그린 <탄전의 주인들>이라는 조선화이다. 이 작품은 가로가 2m가 넘는 대작이다. 

이 작품은 탄광노동자를 그린 것이다. 내용을 살펴보면, 새벽까지 탄광에서 일을 하고 나오는 탄광노동자의 밝고 당당한 모습을 표현하였다. 좌측에 윗옷을 벗어 어깨에 맨 노동자의 모습에서 건강함이 느껴지고, 담배를 문 노동자에게서는 고된 일과를 끝낸 여유를 느낄 수 있다. 오른쪽 뒤쪽에 담뱃불을 붙여주는 모습을 통해 동지애를 표현하고자 했으며, 여성노동자로 보이는 사람도 배치하여 여성도 한몫을 하고 있다는 암시를 던진다. 차분한 갈색과 은은한 배경처리가 따뜻하고 고급스런 분위기를 만들어주고 있다.


이 작품은 탄광노동자의 건강하고 밝은 모습을 통해 노동의 신성함과 가치를 표현하였다. 하지만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다. 80년대 `당중앙`이라고 불리던 김정일이 주도한 `사상, 기술, 문화`에서의 새로운 혁명 즉, 오른쪽 갱도 입구에 횃불모습을 한 붉은 선전탑에 쓰여진 `3대혁명만세`라는 구호가 이 작품의 사상적 알맹이다. 
 
북한미술에는 주로 노동자, 군인, 농민, 수령 따위가 가장 많이 등장한다. 초기에는 항일무장투쟁을 하는 유격대원의 활동과 한국전쟁의 인민군들이 자주 등장하였다. 북한정권의 정통성을 알리고 승리한 전쟁이라는 교양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전후 복구시기에는 건설, 공장노동자들이 자주 등장하고, 가뭄이나 식량이 부족하면 농민들이 미술작품의 소재로 등장한다. 특히 미국에 의한 체제위협이나 군사적 위기가 고조되면 군인이 미술작품의 주인공이 되는 경우가 많다. 이것은 당이 요구하는 사상적, 정치적 요구가 미술에 반영되기 때문이다.

특히 제철소나 탄광의 노동자가 미술에 자주 등장하는 것은 제철이 국가의 기간산업이고, 탄광이 석유가 나지 않는 북한의 에너지를 해결하는 중요한 산업 때문이기도 하지만, 가장 고단하고 어려운 육체노동자의 전형을 보여주기 때문이기도 하다.

물론 이런 북한미술의 성격은 특별난 것이 아니다. 세계적인 미술작품의 대부분은 시대의 흐름이나 요구를 반영하고 있다. 북한의 미술은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다. 맑스나 레닌 혹은 마오저뚱의 미학도 나름의 역사성을 배경으로 만들어진 것이니 결국 세계 미술의 한 축이 북한미술에 구현되고 있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

사람들은 현대미술이 너무 복잡하고 난해하다고 불평한다. 그런데 미술이 시대를 반영한다는 원리를 가지고 현대미술을 이런 식으로 보면 어떨까. 현대사회가 너무나 복잡하고 난해하기 때문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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